Syncopation¹

Antonio Salieri, 1750.08.18. - 1825.05.07. / 낭독뮤지컬 살리에르

underwater by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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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중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서, 악장은 마지막으로 크라바트를 단단히 동여맨다. 손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자꾸만 어그러지는 매듭을 온전하게 되도록 몇 번이나 고쳐 묶은 뒤에야 그는 거울 앞에서 물러난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듯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비록 육신은 이미 늙어버렸을지언정 삶의 마지막 날을 추레한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아직 찾아올 손님이 남아 있었으므로.

옷깃 아래에 가려진 오래된 상흔이 불현듯 간지럽다. 깃펜의 촉은 사람의 피부를 꿰뚫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그 날, 눅눅한 병상에서 홀로 눈뜬 뒤로 악장은 그의 질투를 마주친 적 없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젊었던 시절 악장의 기행은 모두 한때의 광증으로 치부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간신히 안위를 보전할 수 있었으나, 그러한 사실은 악장에게 조금의 위안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차라리 그 때에 이미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평생 그토록 지리멸렬하게 그러나 그가 매일 밤 기도하며 소원했던 것과 같이, 악장은 도구로써 소용되리라. 과연 그러한 예견대로 악장은 마지막 호흡이 흩어지게 될 오늘까지 황제와 신의 영광을 위하여 힘껏 봉헌했으며 또한 그의 소명을 승계할 제자를 여럿 두었다.

하지만 그렇게 껍데기뿐인 권위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악장은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잠가 놓은 방문을 멀거니 응시한다. 더 이상은 어떤 방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오늘 아침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생을 신에게 헌납하였음에도 최후의 날 방종하다면 죽음 이후 악장은 어디로 향하게 되는지.

그곳이 결코 천국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러하였듯 죽어서도 허락되지 않으리라. 악장은 스스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결국 하나의 보잘것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실의 인정은 악장이 내도록 미루어 왔던 과업이기도 하다. 그의 탁한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 창가를 향한다. 늦은 밤중이라 캄캄하지만, 바깥이 더없이 쾌청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끝을 내기에 알맞은 날씨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올까.

한때는 더할 나위 없는 악몽이었으되, 어느 순간에는 유일한 위로요 안식이었던 이율배반. 죽어서라도 외면하고 싶었으나 끝내 떨쳐내지 못한 족쇄 같은 그림자. 악장은 그가 아직 어딘가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어쩌면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 모른다. 선택은 오로지 그, 질투의 몫이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불가피했다.

 

모든 것이 그의 끔찍한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면서도, 악장은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 지겹도록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서는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지만. 당시에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는 없었을까. 악장은 그렇게 생각하기를 그만두지 못하고 습관처럼 뇌까린다. 만인의 주께서…… 부덕한 저를 사하여 주시기를 감히 바라나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익숙한 조소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하다.

악장은 문득, 질투의 티없이 무구하던 낯이 그립다.

그는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 녹슬지 않는 은검, 이미 오랜 친구, 영원한 소년.

 

악장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는다. 주름진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나온다.

심정이 어떻든, 그 때의 그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그가 잘 알고 있듯이.

그러니 이제 와 질투가 악장을 위로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리라.

 

오랜만에 마주하는 소년의 얼굴은 조금도 달라진 구석이 없다. 여름밤 어스름을 물들여 놓은 듯한 머리칼하며, 창백하리만치 말간 낯빛 그리고 은폐된 숲의 녹음처럼 짙푸른 초록빛 눈동자까지. 그의 모습은 악장이 기억하는 그대로다. 그가 무엇을 기대하고 찾아왔는지에 대해 골똘해지려다가도 악장은 곧 생각의 방향을 바꾼다. 악장은 스스로 질투에게 무엇을 더 내어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의 무감한 낯이, 악장 앞에 흔들림 없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비탄에 빠지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더 이상 애원하지 않는다.

악장이 그러하듯 질투 또한 알고 있다. 이 밤이 그들을 위한 마지막 장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인사는 필요 없을 것이다.

질투를 바라보며, 악장은 힘을 다해 미소짓는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 그가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의 질투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이미 늦었다는 듯이, 이제는 그와 함께할 수 없음을 공고히 하듯이. 그렇게 지금껏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질투의 의지가 최초이자 최후의 기회를 얻어 작동하는 순간.

 

악장이 기침과 함께 토혈한다. 그가 제자리에 무너진다. 눈앞이 안개 낀 듯 희부연 빛으로 멀어 가고, 불규칙하게 튀어오르던 호흡도 차츰 꺼져 가기 시작한다. 끝내는 것까지도 나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구나. 하지만 늘 이런 식이었지. 코끝에 비린 혈향이 물씬 풍긴다. 피로 젖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물어져, 악장은 그를 이 순간까지 살게 한 신을 비로소 원망할 수 있다.

질투는 여전히 그의 앞에 두 발을 온전히 딛고 서 있다.

내리깔린 눈동자가 악장을 담는다. 기억하려고, 혹은.

 

확인하려고.

 

정해진 종장에 죽어 사라지지 못한 존재는 이후 어디로 가는가.

 

멀리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질투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소름 끼칠 정도로 환한 달빛이 지척에 내리쬐고 있다. 마침내 자유해졌으나 근원을 잃은 채, 지금껏 소원하던 대로 오롯한 혼자가 되어. 질투는 그의 양손을 내려다본다. 그것은 희고, 분명히 깨끗하다.

 

다시 시작하는 삶.

원하지 않아도 계속된다.


¹ 싱커페이션

선율의 진행 중에 같은 높이의 센박과 여린박의 셈여림 위치가 바뀌는 일.

센박에 쉼표가 붙었을 때, 또는 여린박에 악센트가 붙었을 때 등에 생기며

같은 마디 안에서는 하나의 음표로 적거나 붙임줄로 연결해서 나타낸다.

(두산백과, 클래식음악용어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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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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