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e Blue Dot.
창백한 푸른 점
시노하라 세이토 篠原星斗
별로 결이 좋아 보이지 않는 검은 단발이 밤바람에 흔들린다. 꾹 다문 입술과 조금 찌푸린 눈썹,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안경알 너머 은색 눈 가운데 자리한 새빨간 동공은 거친 말 한 번 내뱉지 않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흉흉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한 분위기에 일조하는 오른쪽 눈 아래의 그인 상처는 분명 만들어진 지 시일이 꽤 흐른 듯 하나 아직도 얼핏 건드리면 피가 흐를 것 같이 붉은 기가 가시지 않았다. 교복 자켓과 와이셔츠 단추는 반듯이 채워 입은 주제에 리본은 웬일로 빠뜨린 것인지, 일부러 매지 않은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교복 아래에는 빠짐없이 검은 이너가 자리해 도통 손과 얼굴을 제외하고는 맨 살갗을 볼 수가 없다. 조명이라곤 이상하게 뜬 달 밖에 없는 이 시간에 비추어지는 피부는 창백하고, 오래되어 흐리고 작은 흉터들이 산재한 손은 얇다. 그 모든 것들은 어디선가 본 듯 하기도 하고 그저 처음 만나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던 것.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 곳에서, 계속.
17세, 월광관 학원 고등부 2학년…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영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외 낮의 미나토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예외라면 밤. 그 중에서도 하늘도 달도 이상하게 변하고,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는 시간에서만 문라이트 브릿지 위에 있다. 그 시간이 지나고 평범한 밤으로 돌아오면 불이 들어온 가로등과 자동차 경적 소리를 눈치챈 사이에 어느새 사라져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기억하고 있어.
처음으로 만났던 학교. 교토로 갔던 수학여행. 문라이트 브릿지에서의 밤. 크리스마스. 새해 전야의 네 인사.
그것들은 이제는 없겠지만, 나는 아직 여기에 있어.
이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명이야.
어떤 세계에 단 한 번 있었던 페르소나3의 등장인물. 몇 번을 리플레이하더라도 다시는 없을 스토리라인. 엔딩 이후 등장인물로서의 위치를 포기하고 이야기에서 탈거해 우주에서 다시 한 번 잠든 모치즈키 료지의 곁에 있다. 한때는 분명히 이야기에 속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료지의 곁에 있을 뿐인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언젠가 료지가 다시 눈을 뜨면 정말로 영원히 사라진다. 그래도 괜찮으니 네 옆에 있고 싶었다. 나는 너에게 하나도 특별하지 않았지만, 특별할 수 없었지만, 나의 생애를 포기하고 여기에 있음으로써, 누구도 아닌 네가 있었기에 의미가 있는 삶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마. 평온한 삶을 위해 너를 죽이면 된다고 하지 마.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더라도 누구도 아닌 너를 만나 의미가 있는 내가 있으니까.
이야기 속에 있을 때에는,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웠던 인물. 정신과 육체가, 타인이 보는 자신과 자신이 보는 타인이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증명할 수 없었다. 끊이지 않는 충동 사이에서, 위안이 되었던 것은 우주가 실은 죽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종이 그렇게나 열망하는 멸망으로의 기원은 사실 별들과 같은 상태로 머무르고자 하는, 우주에 속한 이들의 본능이었던 것이다. 태어나 주어진 것 무엇 하나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었지만 제 이름만큼은 그리 주어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장배경, 가족, 이전의 친구 등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고 말하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증언만이 계속되어, 그에게 있어 진정으로 사실된 것이라곤 2009년의 4월에서 시작하는 일 년 간 뿐이다.
11월, 섀도 타임의 모치즈키 료지와 처음으로 마주친다. 낮에는 일절 아는 척 하지 않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시간 안에서라면 그에게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었다. 특별해진 것 같았다. 그의 옆에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꿈으로부터 깨면 그런 것은 한낱 환상이 되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네가 보여주었던 표정이 실은 나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란 걸 인지하고 싶지 않아서. 꿈의 계속에 남고 싶어서. 12월, 죽음의 선고자가 모든 고해를 내뱉을 때, 다른 이가 아닌 제 손으로 그를 죽이겠다며 날뛰다 제압된다. 그 순간 그를 사랑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기어코 ‘너희’를 위해서라는 같잖은 이유로 죽음을 원한다면 차라리 나에게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멸망하는 이 세상이 나를 사랑해서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는 특별할 수 없었다. 나는 10년 전에 없었다. 나의 이름도 삶도 무엇 하나 운명 따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의지로 너의 곁에 있기로 했다. 나는 다시는 지상에 오르지 않는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야마기시 후카의 모치즈키 료지에 대한 추측은 두 가지 다 맞아떨어졌다. 너는 울기도 했고, 여자와 함께 있기도 했으니까.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