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에 남은 것은

트위터 '글러가 실력을 숨김'의 매짧글 #삶의_마지막은_어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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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허망함을 믿던 때가 있다. 죽음이 남기는 것은 오직 삶의 허망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그렇지 않은가. 죽음 이후 대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 수 있단 말인가. 혹자는 내세가 있으리라 믿지만, 그런 것이 있다면 현세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세를 위한 현세라면 죽음뿐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허망해지는 것 아닌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이기에 이리도 허망할까.

 

하여 염원했다. 나의 삶과 죽음이 허망하게 스러진다면,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희망이라도 살릴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 그 모든 것이 허망하지 않다 믿는 이들이라도 지키길 바랐다. 그들을 위해 내 삶과 죽음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내가 혁명을 다짐한 이유이다.

 

세상엔 참 많은 사람이 있다. 끝없이 높은 탑을 쌓아 세상을 발아래 두고 싶어 하는 자도 있고, 끝없는 어둠 속에 묻혀 빛조차 바라볼 수 없는 자도 있다. 그들은 각자가 빛과 어둠을 맡은 듯 서로 섞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양지의 사람과 교류했다. 그들은 현세 이후 낙원에 가리라 믿으며, 자신의 현세를 더 아름답게 꾸미는 데 집중했다. 더 많은 부귀 아래 행복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 아래에도 사람이 있었다. 음지의 사람은 낙원을 믿지 않았다. 현세가 고통스러워 눈 돌릴 만도 한데, 그 누구도 현세를 부정하지 않았다.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만이 그들의 낙이었다.

 

내세에서 답을 찾는 이들과 현세에서 답을 찾는 이들. 나는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음지의 사람에게서 뜻을 느꼈다. 어두운 곳에도 삶은 있다며 부득불 살아남는 그들이, 삶이 허망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죽음이 허망할지언정 삶만큼은 허망하지 않으리라 말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았다.

 

양지의 사람은 내가 찾은 의미를 부정했다. 미천한 이들의 삶엔 뜻이 없으니 너의 뜻은 어둠에 홀릴 결과일 뿐이라며,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진실로 그러한가? 미천한 이들이 어두운 곳에서 산다고 하여 그들의 삶마저 어두운 것인가? 그들의 삶에 대한 열정은 어둠을 위한 것인가?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가 양극에 있는 듯했다. 그래, 마치 양지와 음지의 사람처럼 말이다.

 

이후, 나는 음지의 삶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음지의 사람은 어떻게 삶을 이어가는지, 어떠한 이유에서 희망을 노래하는지 궁금했다. 그들의 삶을 관찰하며, 허망하지 않은 삶과 죽음이란 게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구름이 하늘을 덮어 빛이 내려오지 않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긴 듯한 날. 골목길 끝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발견했다. 그는 고귀한 눈으로 불행을 이야기했다. 추수의 기쁨을 담은 머리칼은 짓밟힌 땅의 것이었고, 생을 담아야 할 낯빛은 땅에 묻힌 자의 것이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숨이 스러지기만을 기다리는 자는 나를 보며 울었다. 삶의 끝에 찾아온 불청객을 반기며, 죽음을 내쫓고 삶을 이으려 했다. 그자의 육신에 색이 입혀지고, 끝내 행복을 이야기하니, 나는 그를 멀리할 수 없었다.

 

그는 알에서 이제 막 깨어난 병아리처럼 굴었다. 나를 쫓아다니며 미숙한 삶을 온전히 만들려 했고, 나의 삶이 곧 그의 삶이라 여겼다. 나의 모든 것을 배워 흡수하려는 듯,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둔 채 따라 했다.

 

그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양지에도 음지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삶을 살던 내가 어찌 삶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이제야 살기로 마음먹은 자에게 내가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죽음의 허망만을 아는 내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에게 허망만을 알려줄까 두려웠다. 그의 삶을 부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할까 두려웠다. 그러나 그를 멀리할 순 없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듯 구는 이를, 내가 자신의 세상인 듯 숨 쉬는 이를 어떻게 멀리하겠는가. 내가 살린 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옳았다.

 

그렇게 수년이 지났다. 그에게 나의 삶이 아닌, 다른 이들의 삶을 알려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도 잘 어울리는 듯 보였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듯 보였다. 때문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내가 스러져도 그의 삶이 스러지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병아리가 닭이 되어 아침을 알리고, 어둠 속 생명이 깨어나 태양을 맞이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혁명의 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생을 불태웠다. 흐리고 어두운 하늘 아래, 모두가 하나 되어 붉음을 외쳤다. 재가 되어 아스러질지언정, 바람을 타고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그 누구도 빛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빛이 스러지고 불씨가 꺼져가는 중에도, 그들은 허망하지 않은 삶과 죽음을 위해 걸었다.

 

그 안에 내가 있었다. 사는 동안 의미를 찾지 못하여 떠다니던 영혼에도 뜻이 스며들었다. 희망을 품은 이들이 나를 살렸고, 나를 죽였다. 그러니 이 어찌 허망하다 하겠는가. 나의 삶도 죽음도 그들을 위한 것이었고, 어둠에 묻힌 자들이 빛을 논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 나의 그 무엇도 허망하지 않았다. 삶의 끝에서야 찾은 기쁨이었다.

 

닭이 된 병아리는 또다시 울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새로이 태어나던 날 흘린 눈물과 이 눈물이 같음을 알았다. 절망이 희망이 되고, 희망이 현실이 됨을 알았다. 그는 나의 기쁨을 이어갈 존재였다. 하여 그에게 말했다. 푸른 하늘 아래 당당히 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아달라고. 내가 보지 못한, 보지 않은 기쁨을 찾아 행복해지라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당신의 기쁨을 이어받겠노라고. 내세를 부정하고 현세를 부정하던 나는 비로소 현세를 인정하고 내세를 말했다. 이것만큼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대의를 위해 나를 찾던 이들이 아닌, 오직 나의 영혼만을 바라보던 이를 위한 염원이었다.

 

그러니 울지 말아요. 나는 기꺼이 떠나니, 당신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살아줘요. 세상의 많은 기쁨을 경험하고, 나를 다시 만나는 날 전해주세요. 나의 삶이 당신의 삶이었다면, 이젠 당신의 삶을 나의 삶이라 여길 테니. 당신이 나 대신 살아주세요. 알았죠? 약속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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