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나

마도카의 손님맞이

요괴나나 미즈치+마도카

DANE by D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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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 미즈마도 있음

* 도중에 놀러온 미즈치 소소하게 대접하는 마도카 (차 마시고… 카드게임 하고… 수다 떨고…)

모든 사건이 끝나고 대기소에 돌아온 마도카가 두 번째로 한 일은 시말서 작성이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이제는 ‘전’이 된 2번대 대장을 잔뜩 원망하는 것이다.) 마도카는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빈 종이 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해서 한 일도 아닌 사건에 대한 보고와 그닥 내키지 않는 반성, 관심도 없는 미래 계획을 트집 잡히지 않을 정도의 정돈된 문장으로 쓰려니 벌써 진이 빠졌다. 차라리 호소문이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건만. 하나부사 대장도 카사네 대장-이 아니라 그냥 카사네 씨?-에게 억울하게 이용당한 동지로서 좀 봐주면 어디 덧나나. 그러나 융통성 없고 무정하기로 유명한 하나부사는 부당하게 갑질당한 마도카를 가엾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카사네의 만행조차 본인의 실책이라 생각하고 있으므로 자비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도 마도카와 마찬가지로 시말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일개 대원에 불과한 마도카가 도망칠 구석이라곤 없다는 말이다.

옆 부대 대장이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로 거침없이 종이 위에 사건을 보고하는 동안, 마도카는 턱을 괴고 구부정하게 앉아 사건 경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인식과 달리 무작위로 저지른 범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가 베어넘긴 요괴들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하여간 의욕이 없으니 자꾸 오자가 생겼다. 카마이타치의 이름만 해도 벌써 세 번이나 고쳐썼다. 노트북만 있으면 수정도 금방인데. 요즘 시대에 누가 종이에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냐고. 연습용 종이에 비스듬한 글자들이 띄엄띄엄 채워진다. 범행 시각, 밤. 범행 장소, 등영가 여기저기. 몰라, 기억 안 나. 마도카는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보고를 위해 모은 증언과 청취 기록은 찾아보면 나올 테지만 지금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요괴들은 사건 따위 승부에 정신이 팔려 까먹었던 주제에 마도카가 사죄 및 경위 조사를 위해 방문하자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굴었다. 마도카는 내내 주위에서 날아드는 살기에 짓눌린 채 등영가를 걸어야 했다. 도중이 이겼으니 없던 일로 해주겠다더니? 하지만 무책임한 요괴는 범인의 죄를 흔쾌히 사해줬듯 범인에 대한 사적 제재도 딱히 막지 않을 것이다. 아아, 한동안 순찰 빼달라고 할까.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솔직히 간절했다.

종이 구석에 우습게 생긴 낫족제비 낙서가 생길 때쯤, 결국 마도카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안 되겠다.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아침에도 오판 승부에 대한 보고서를 정리하느라 제대로 못 쉬었는데, 자발적으로 생각의 방에 갇혀 자기 죄와 대면하고 있자니 기가 다 빨렸다. 좋아, 오늘 일은 여기까지만 하자. 원래 도중은 그렇게 부지런한 자리가 아니다. 지금이 약간, 아니 몹시 이례적인 상황일 뿐.

대기소 복도는 생각보다 고요했다. 마도카는 기억을 더듬어 오늘 도중의 근무 일정을 떠올렸다. 1번대는 사건 수습을 위해 등영가. 2번대는 사건 정리 및 통상 임무를 위해 대기소. 다만 카사네는 감시를 겸해 한동안 1번대와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으니 지금 대기소에는 없을 터다. 그리고 신참 모미지는, 뭐야, 외출 중? 어디 갔는지는…… 안 찾아봐도 알겠다. 마도카는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경계하는 모미지의 식신을 손짓으로 물리며 한숨 쉬었다. 결국 다들 등영가라는 거잖아. 누구는 산더미 같은 보고서에 깔려서 질식 직전인데. 그나저나 방에 주인 있는지 물었을 뿐인데 거 되게 사납네……. 정도를 모르는 게 주인을 꼭 닮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농땡이 친다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겠다, 마도카는 한적한 대기소를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원래라면 카사네는 물론이고 마도카도 최소 근신 처분을 받아야 마땅한 사건인데 이렇게 자유롭다니. 이 무른 처분에는 도중이 소수 집단인 것, 그리고 도중 규율 개선으로 급증한 업무량이 한몫했다. 문제가 발생해도 내부의 합의로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하고,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신참까지 포함해 일손이 하나도 아닌 셋이나 제외되면, 남은 1부대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노동과 교환한 자유인 셈인데……. 이런 걸 자유라고 할 수 있나? 마도카는 갑자기 방에 쌓인 서류를 떠올리고 우울해졌다. 기분 전환 삼아 뛰쳐나왔는데도 영 쉬는 게 쉬는 것 같지 않다.

정처 없이 걸었는데 어느새 눈앞에 대기소 문이 있었다. 한 발만 내딛어도 바로 등영가지만, 마도카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대기 인원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제가 나가기 싫다. 괜히 문 앞에 어슬렁거리다가 복귀하던 일행-특히 1부대와 마주치기도 싫고. 그래도 마도카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 날씨 좋다. 해도 따뜻하고, 나른하네. 좋아, 역시 남은 시간은 낮잠으로 때울까……. 그런 일이라면 의욕을 낼 수 있다.

그렇게 칼에 손을 얹은 채 설렁설렁 대기소로 돌아가는데, 문득 등영가 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마도카의 등을 제법 세게 떠밀었다. 이크, 그새 누가 왔나? 문은 열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돌린 마도카는 이어서 갑자기 앞마당에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느새 드리운 먹구름에 사위가 어둑해지고, 목에 두른 천이 사정없이 펄럭이며 팔에 휘감긴다. 뭐, 뭐야?! 마도카는 피어오르는 모래 먼지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흐릿한 시야로 우뚝 선, 뭔가 커다란 실루엣, 사람, 아니, 요괴……? 썩어도 군인이라고, 마도카는 반사적으로 칼집에 손을 얹으며 물러났다. 침입자?!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보다 지금 나밖에 없는데?! 짜증과 당황을 반씩 삼키며 한껏 경계하던 마도카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코 끝으로 문득 스치는 물 냄새를 맡는다. 마치 비 오기 직전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청량한 냄새. 바람이 걷히고, 바다처럼 깊은 푸른빛 천이 무겁게 떨어진다. 어느새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햇살이 비쳐 일렁이는 푸른 뿔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그의 앞에는 수신(水神)이 있었다.

칼을 든 채 어안이 벙벙해져 굳어버린 마도카를 향해, 미즈치는 붙임성 있게 웃었다. 그가 든 무기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양, 이웃집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가벼운 태도로. 그 순간 마도카는 제가 든 칼 따위 그의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 터무니없는 무력감이 마도카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다. 마도카는 저를 흘긋 바라보는 미즈치의 노란 눈동자부터 그가 말을 꺼내기 위해 천천히 벌리는 입까지, 작은 동작 하나 놓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 순간에는 제가 이 자리에 없을 것만 같았다.

미즈치가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고작 그뿐인데도 긴장감에 짓눌릴 것 같았다. 감히 미동도 못한 채 서 있는 마도카를 향해 미즈치는 말했다.

“하나부사 여기 있어? 떡 나눠줄 겸 얼굴 보러 왔는데.”

“…하?”

“아, 괜찮다면 너희도 같이 먹어. 넉넉히 가져왔으니까.”

떡? 마도카는 그제야 미즈치 손에 들린 떡 보자기를 보고, 주춤주춤 고개를 들어 미즈치를 보았다가, 그대로 한숨과 함께 하늘을 우러렀다. 다시 앞을 향했을 때는 잔뜩 힘이 들어갔던 파란 눈에 원래의 무기력만 남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미즈치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맥 빠진 마도카의 입 밖으로 생각보다 훨씬 한심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손님? 응. 허어. 초대한 적도 없고 바란 적도 없는데, 손님. 마도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미즈치를 지나쳐 대기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리고 미즈치가 따라올 수 있도록 살짝 몸을 틀고서 안내했다. 뭐, 일단은 들어오세요. 진심을 말하자면 솔직히 성가시지만, 아무튼 환영한다며.

*

아무리 한가한 도중이라지만 응접실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품은 갖춰 놓았다. 등영가에서 헤매던 저쪽 세계의 미아를 안내해야 할 때도 있고, 정말 가끔이지만 중앙에서 사람이 내려오기도 해서다. 하지만 그것들은 1년에 10번도 안 되는 극히 드문 확률로 일어나는 레어 이벤트에 가깝고, 따라서 남은 350일 도중의 응접실과 집무실은 거진 휴게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응접실에 어울리지 않는 트럼프니 화투니 바둑알이 굴러다니는 이유다. 마도카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가 무심코 혀를 차며 발로 바둑판을 쓱 밀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이제 정리해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규울 강화 기간인데, 하나부사 대장 눈에 띄면 잔소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도카는 초조한 마음에 식신이 움직이길 기다리지 못하고 제가 직접 움직여 다과상을 준비했다. 본 목적인 하나부사 대장은 지금 안 계시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님, 그것도 요괴 중에 제일 강하다는 미즈치인데 그대로 돌아가게 둘 수는 없었다. 우리 (전) 대장이 저지른 일도 있고……. 진짜, 사실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얼굴에 철판 깔고 그냥 돌려보냈을 텐데. 느낄 필요도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눈앞의 요괴가 천벌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인가. 혹은 자신이 온전히 깨끗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가. 마도카는 한숨을 삼키며 차를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신속하게 대접하고 돌려보내겠다. 다행히 스피드에는 자신이 있었다. 별로 소용은 없다는 거, 알지만.

“…드시죠.”

“아, 고마워.”

2부대의 응접실을 느긋하게 훑어보던 미즈치가 생긋 미소 지으며 차를 받았다. 풍채 좋은 요괴는 방석 위로 편히 책상다리를 하고 당당히 앉아 있었다. 오히려 대접하는 마도카가 더 불편해 보일 지경이다. 왜 그래? 편하게 앉아. 미즈치는 아까부터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청년을 걱정스레 들여다 보았다. 시선을 맞추려 해도 비스듬히 고개를 틀 뿐 이쪽을 잘 보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니 최근 그의 앞에서 당돌한 인간들을 봐서 잠시 잊었지만, 미즈치를 마주한 보통 인간의 태도란 대개 이랬다. 오히려 이쪽이 당연하지. 긴장한 걸까. 그럴 필요 없는데. 미즈치는 약간 씁쓸하게 웃으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부드러운 향이 찻김과 함께 어렴풋이 피어올랐다. 미즈치가 잔을 들자 그제야 조심스레 차에 손을 가져가는 마도카가 보였다. 미즈치는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최대한 관대하게 웃었다.

“하나부사는 많이 바쁜가 보구나. 도중, 요즘 등영가에서도 자주 보인다고 들었어. 뭔가 이것저것 하고 다닌다고.”

“…네.” 순간 상하관계를 가늠하느라 말에 공백이 생겼다. 짧게 고민했지만 요괴의 대장급이라는 것 같고, 하나부사 대장과도 친분이 있으니 역시 공손하게 나가는 게 맞겠지. 무엇보다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 마도카는 일단 그를 ‘미즈치 씨’로 부르기로 했다.

“뭐, 그렇죠. 이번 기회에 도중을 뿌리부터 뜯어고치겠다느니, 등영가에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느니, 하나부사 대장 엄청 의욕적이라. 아주 물 만난 고기. 본인은 몰라도 따라가는 저희는 이러다 과로사하겠어요. 아아, 그동안 할 일 없이 뒹굴뒹굴 편하고 좋았는데…….”

“그, 그렇구나…….”

“…뭐, 나도 카사네 씨 말에 넘어가서 일을 벌렸으니, 결국엔 자업자득인가.”

마도카는 입을 비죽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그가 실행범이라고 했던가. 울분에 찬 카마이타치가 식식거리며 입에 담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미즈치는 불쑥 물었다.

“너는… 마도카라고 했던가.”

“…그런데요.”

“카사네의 동료?”

“하? …동료?”

“아니야? 카사네와 같은 부대라고 들었는데.”

“아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동료라고 하기도 좀…….”

마도카는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동료라니. 작게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불평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니 그야 같은 부대 소속이라는 점에서 동료는 맞지만. 그치만 부하 직원한테 갑질해서 귀찮은 계획에 끌어들이는 사람을, 동료라고 할 수 있나? 차라리 웬수에 가깝지 않나? 내가 진짜 카사네, 그 인간만 생각하면 아직도 열불이……. 미즈치는 눈을 껌뻑이며 마도카를 쳐다봤다. 가볍게 물어봤을 뿐인데 기다렸다는 양 속사포처럼 투덜거린다. 소극적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만도 않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마도카는 다시 입을 딱 다물고 차를 마셨다. 뭐, 같은 도중이긴 하지……. 불평 끝에 조그맣게 내놓은 답은 더없이 무난한데도 왠지 웃음이 났다.

“…제가 이상한 말이라도?”

“아니. …오히려 반대일까. 너는 동료가 아니라고 했지만…….”

미즈치는 카사네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하나부사의 동료냐는 물음에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던 남자. 죄는 어디까지나 인식의 차이라며 죄책감을 비웃던 인간. 희박한 연대, 개인주의와 보신주의, 솔직한 욕망. 눈앞의 청년은 그와 닮은 말을 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부사와 함께 카사네의 죄를 책망했다. 그런 양면적인 점이 정말로 인간다워서 미즈치는 약간 안심했다. 그가 돌보았던 인간계는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리 변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어리석고, 여전히 약하다. 그래서 마음대로 아끼고 싶어진다.

뒷말을 기다리던 마도카는 이내 상관 없다고 생각했는지 무심히 어깨를 으쓱였다. 참으로 무기력한 남자다.

떠드는 동안 긴장이 좀 풀렸는지, 내내 차만 홀짝이던 마도카가 다과로 손을 뻗었다. 미즈치가 사온 떡 하나를 집어 화풀이 삼아 씹는가 싶더니, 점차 푸른 눈동자가 둥글어진다. 그 솔직한 표정 변화에 미즈치는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말했다. 맛있지? 시장에서 받았어. 헤에, 이런 데도 있었구나. 마도카는 순순히 놀라며 제법 입맛에 맞는 당분을 즐겼다. 꽉 들어찬 앙금이 적당히 달짝지근해서 깔끔한 맛의 차와 잘 어울렸다. 에라, 모르겠다. 마도카는 그때까지 불편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본격적으로 바로잡았다. 대접하는 입장에서 뻔뻔할지도 모르지만 저쪽이 멋대로 온 거고.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 맛있는 음식도 못 즐기면 전적으로 손해다. 그래도 차마 눈앞의 요괴를 마주볼 용기는 나지 않아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했다. 덕분에 마도카는 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미즈치의 눈은 알아채지 못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다과와 시답잖은 수다를 나눴다. 미즈치는 마도카를 더없이 평범한 인간이라 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툭툭 내뱉는 마도카의 말들은 미즈치를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도카는 지극히 ‘현대인’이므로, 미즈치가 기억하는 시대의 인간과 가치관도 사고방식도 다른 것이다. 마도카의 말은 늘 경쾌하고 빨랐으며 예의상 존댓말을 쓰고는 있으나 때때로 무척 격식 없어졌다. 미즈치가 모르는 현대의 유행어와 줄임말도 잔뜩 썼다. 예스러운 분위기의 건물이나 의복과 기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화려한 외모, 가벼운 말투. 미즈치는 마도카가 떡을 집어먹으며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을 신기한 기분으로 관찰했다. 가느다랗게 뜬 뱀의 눈에 금실 같은 머리칼이 비쳤다.

미즈치는 마도카에게-카사네가 늘 ‘최신 기종’으로 갖춘다던-‘스마트폰’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스마트폰이란 ‘아무튼 갖고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 기계 상자’인 모양이다. 다만 ‘전파’란 것이 없으면 쓸 수 있는 기능이 크게 줄어서 여기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그럼에도 마도카는 그 스마트폰이란 것을 몹시 그리워했다. “요즘 시대에 전자기기 반입 금지가 말이 되냐”며 투덜댔다. 뭔진 몰라도 인간에게는 정말 소중한 물건인가 보다, 하며 미즈치는 마도카를 위로했다. 가치를 모르는 위로가 그의 마음에 얼마나 닿았을지는 모르나.

인간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인간 세계를 체험하자 미즈치는 왠지 즐거워져서, 내친 김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미즈치는 주위를 휘 둘러보고는, 응접실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면 저건 뭐지?”

“…뭐가요?”

“저기, 작고 네모난 종이더미. 이상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부적인가?”

“부적……?”

미즈치의 시선을 따라 의아하게 고개를 돌린 마도카는 아,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하나부사에게 들키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건 까맣게 잊은 모양새였다.

“저거 트럼프요.”

“트럼프……?”

“카드 게임할 때 쓰는……. 라고 말해도 모르려나. 일종의 놀이 도구인데.”

“헤에, 그렇구나. 무슨 놀이?”

“무슨 놀이? 그냥 이것저것……. 도둑잡기도 하고, 블랙잭도 하고, 원카드도 하고.”

“브, 블랙……?”

마도카는 서툴게 제 말을 따라하는 미즈치를 곁눈질했다. 마음을 꿰뚫어볼 듯 깊고 무겁던 시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눈에는 요괴다운 호기심과 장난기가 듬뿍 어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괴는 장난이나 승부를 좋아하지……. 마도카는 머리를 긁적이며 천장을 비스듬히 올려다봤다. 등영가를 순찰하러 간 하나부사 대장은 늦어도 저녁 전에는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고, 정확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를 사람을 내내 기다리게 하느니 이쯤에서 돌려보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마도카는 귀차니즘의 저울에 손님과 자신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버릇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순찰을 마친 하나부사가 귀빈을 맞이하기 위해 들어간 응접실에는 말도 안 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 하나부사! 돌아왔구나. 다행이다, 얼굴 봐서. 수고 많았어.”

“헉, 하나부사 대장……! 왜 벌써……?!”

“…….”

하나부사는 상반되는 반응을 차가운 눈으로 번갈아 내려다 보았다. 시선이 닿자 미즈치는 마냥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고, 마도카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마도카의 손에서 미즈치가 카드를 쓱 뽑아갔다. 그리고 익숙하게 들고 있는 패를 섞기 시작한다. 자, 마도카. 네 차례야! 뭐가 내 차례라는 걸까. 다음 좌천? 마도카는 그야말로 조커를 뽑는 심정으로 하나부사를 슬쩍 올려다 봤다. 눈이 마주치자 매서운 눈길이 기다렸다는 듯 내리꽂혔다. 무언으로 설명을 요구받은 마도카는 특유의 불만스러운 태도로 꿍얼꿍얼 대답했다.

“…저는 그냥 손님 맞이한 거거든요. 하나부사 대장 앞으로 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순 없잖아요.”

“이 판은?”

“손님맞이의 일환이랄까.”

“내 눈에는 도둑잡기처럼 보인다만.”

“그야 뭐, 미즈치 씨가 트럼프 해보고 싶다고 하시니까…….”

손님이 원했으니까 대접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마도카는 어깨를 으쓱였다가 이내 기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저 스스로도 당치 않음을 아는 사람의 자세였다. 하나부사는 무심코 새려는 한숨을 삼켰다.

마도카는 일처리가 깔끔하고 눈치가 빠르며 영리한 대원이었다. 군인 명가 출신인 만큼 전투 실력도 나쁘지 않은데, 그 모든 능력치가 무기력에 가려졌다. 윗사람에게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권력에 비굴했고, 기본적으로 의욕도 비전도 없이 일신의 안락만을 꾀했다. 언제나 적당히, 이득은 덜 봐도 되니 피해만 최소로. 그런 주제에 아무리 부당하고 내키지 않아도 위에서 내려온 일이라면 따르고, 중요한 결정에 상하관계를 우선하는 면이 어쩔 수 없이 군인다웠다. 마음 안 맞는 동료, 성가신 일들, 전부 귀찮아 죽겠지만 일단 돈 받고 하는 일이겠다,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어서 매일 출근하는 게 용했다. 카사네와는 또 다르게 속물적인 인간. 하나부사는 그를 그렇게 평했다.

미즈치가 원한다면 마도카는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인간의 기준에서는 버릇 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요괴의 사고가 얼마나 상식을 초월하는 것인지는 최근 깨달은 바 있다. 실제로 미즈치는 그리 불쾌해 보이지 않고-심지어 이 놀이를 진심으로 즐기기까지 한 듯 보였다. 미즈치는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관대하며 진중한 눈빛을 올곧게 던졌다. 감히 걸어온 승부에 가슴 뛰며 호전적으로 미소 짓는 요괴들의 대장. 하나부사도 같이 할래? 나 제법 강해. 호오, 그런가? 하나부사는 입꼬리를 약간 심술궂게 올렸다. 응, 지금까지 3승1패로 내가 이기는 중이야. 하는 말에는 조금 놀랐으나. 그러니까 이 당돌한 대원은 신을 상대로도 한 판은 이겨버린 모양이다. 돌아본 마도카는 약간 멋쩍은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좋아, 그럼 나도 한 판 어울려 줄까.”

“…네?! 하나부사 대장이? 트럼프를? …왜요?!”

“불만인가? 내가 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말투다만.”

“하나부사가 끼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하나부사 대장, 트럼프 할 줄은 아십니까?”

“마도카. 지금 발언은 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하자! 사람이 많을수록 더 재밌다고 마도카가 그랬어. 맞지?”

“그건 장소와 사람에 따라…….”

“마도카, 군말 말고 패를 섞도록.”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역시 분수에도 안 맞는 손님 대접따위 때려치고, 수신님이고 요괴고 자시고 후딱 집에 돌려보낼 걸 그랬다. 아니, 그냥 처음부터 방에 틀어박혀 얌전히 시말서나 마저 쓸 걸……. 마도카는 이 상황에서 저를 구해줄 만한 도중 대원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다가 한숨만 푹푹 쉬었다. 도움을 기대할 만한 사람이 이렇게 없어서야. 남말할 입장은 못 되지만 역시 도중에서 ‘동료’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아직 먼 듯했다. 카드 섞는 손놀림이 수상할 정도로 노련하다고 하나부사에게 혼난 것은 덤이다.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라 정작 본 목적이었던 하나부사와는 도둑잡기 3판만에 헤어졌다. (참고로 마도카가 3판 모두 빛의 속도로 탈락하고 거의 미즈치와 하나부사의 불 튀기는 눈싸움이 되었다.) 미즈치가 트럼프에 흥미를 보인 데다 친구에게도 새로운 놀이를 소개하고 싶다고 해서, 마도카는 순순히 카드 한 세트를 미즈치에게 내주었다. 정말 괜찮아? 도중의 물건이잖아. 아아, 괜찮아요. 제 방이든 카사네 씨 방이든 우타 방이든 뒤지면 한 세트쯤 금방 채워지니까. 조만간 방 검사도 한번 해야겠군……. 하나부사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마도카를 흘끗 보고, 뜻밖의 선물에 싱글벙글한 미즈치를 배웅했다.

“오늘은 즐거웠어. 다음에는 하나부사가 여유로울 때 올게. 언제가 괜찮을까?”

“한동안은 바쁠 예정이다만, 귀공의 방문은 언제든 환영이다.”

“그렇구나……. 그럼 1년 뒤는 어때? 그때는 좀 안정됐겠지.”

“우와. 누가 요괴 아니랄까 봐 시간 관념이 에바…….”

중얼거리는 마도카에게 다시금 날카로운 시선과 흥미 어린 시선이 나란히 꽂혔다. 규율에 엄한 하나부사가 곁에 있어선지 마도카의 자세는 무너진 데 없이 반듯했으나, 표정에는 감추지 못한 피로가 가득했다. 그 가여운 모습을 보며, 미즈치는 오늘 저를 즐겁게 해주고자 애쓴 인간 청년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어졌다. 이건 역시 인간계에서 신이라 불린 시절의 버릇이 남은 걸까. 미즈치는 한 발, 마도카를 향해 다가갔다.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자 마도카는 슬그머니 들었던 고개를 잽싸게 도로 내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순간, ‘이 요괴는 또 왜 이래?’ 하는 황당함이 스쳤다.

그 명백한 거부에도 자애로운 수신이자 강대한 요괴, 미즈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턱을 약간 들면서, 마치 자비를 내리는 신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라, 마도카.”

“……?”

“뭘, 그저 감사 인사를 하려는 것뿐이야. 그치만 너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으니까……. 마지막에는 얼굴을 좀 봐두고 싶어서.”

어리둥절한 채 엉거주춤 고개를 들자 호선을 그리는 미즈치의 입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도카는 원래 윗사람과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은 최대한 위쪽 눈에 띄지 않고 적당한 안락을 추구하는 마도카의 삶의 모토에서 비롯된 버릇으로, 쉽게 말해 ‘발표할 사람을 찾는 교사와 눈 마주치기 싫은 학생’의 태도에 가깝다. 하나부사와 동급으로 올라간 미즈치에게도 같은 거리감을 두었을 뿐인데, 도리어 그 소극적인 회피가 눈에 띄었나? 마도카는 약간 낭패감을 느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미즈치는 끈질기게 제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옆에서는 하나부사도-고작 이런 걸로 시간을 잡아먹느냐는-무언의 재촉을 보냈다. 여전히 도망칠 구멍은 없다. 마치 방에서 얌전히 저를 기다리고 있을 시말서처럼. 마도카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고작 카드 게임을 할 때조차 제대로 맞지 않던 두 쌍의 눈이 비로소 똑바로 마주친다.

아, 이제야 보이는구나.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내던 미즈치의 가느다란 눈이 문득 빛을 품고 둥글어졌다. 그리고 피할 틈도 없이 손을 뻗어 마도카의 머리칼을 살며시 넘기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 바다의 눈을 갖고 있구나.”

“…….”

“아까운 짓을 했네…….”

미즈치의 커다란 손은 마도카의 이마에 약간의 서늘함을 남기고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리고 그 손길만큼 부드러운 눈으로, 그는 말했다. 마도카, 너를 용서하마. 하? 반사적으로 황당한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미즈치는 그저 웃었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아득해질 정도로 아름답고 두려운 자애다.

“너는 솔직한 아이다. 네가 나를 마주한 내내 일말의 죄책감에 짓눌려 있는 게 느껴졌어. 네 상사이기도 했던 카사네가 내게 저지른 일, 혹은 너 자신이 등영가에서 저지른 일, 혹은 압도적인 존재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부끄러워하는 일……. 혹은 전부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 미즈치는 그 모두를 지금, 이 자리에서 용서하겠다.”

마도카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 나 그렇게 양심적인 사람 아니고. 당신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내가 그렇게 기특한 사람이었으면 도중같은 데서 부질없이 시간만 보내지 않았을 걸. 당장 옆에서 황당해하는 하나부사 대장 표정 좀 봐라. …저렇게까지 황당해하니 좀 억울하긴 한데……. 하는,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어째선지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마도카의 마음까지 전부 꿰뚫어본 것처럼, 이 요괴는 내내 마도카를 친근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니, 어디까지나 덧없고 가여운 생명을 아끼는 것인가? 미즈치가 마도카의 머리 위로 무거운 손을 얹었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트럼프 카드, 빌려줘서 고마워. 다음에 놀러오면 또 새로운 놀이를 가르쳐줘. 그렇지, 체스랬나? 장기와 비슷한 놀이라지.”

“…….”

“그때는 내 얼굴을 똑바로 봐주면 좋겠구나. 그 눈으로.”

오늘은 즐거웠어. 잘 있어, 하나부사. 마도카. 미즈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회오리를 이끌며 훌쩍 사라져 버렸다. 하나부사와 마도카는 나란히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하고 붉어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대기소로 들어갔다.

마도카는 내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틈을 봐서 그럼 전 이만, 하고 제 방으로 쏙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역시나 예리한 하나부사는 마도카를 그냥 놔주지 않았다. 귀신 대장이 그의 눈매만큼 날카롭게 묻는다. 마도카, 시말서는 어떻게 됐지? 마도카는 발을 멈추고 버릇처럼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방금 전 미즈치의 ‘용서’에 힘입어.

“뜻밖의 손님맞이 때문에 미처 다 못 썼네요.”

라고, 감히 신님을 한낱 인간의 변명으로 써버리는 것이다. 건방진 말이었지만 하나부사는 웬일로 잔소리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혼자 남은 마도카는 뜻밖의 관용에 슬쩍 미소 지었다. 아, 이거 편리하잖아. 성가신 줄 알았더니 땡큐네, 미즈치 씨. 늘 무기력하게 가라앉던 푸른 눈동자가 어느 이무기신을 떠올리는 아주 잠깐, 생기를 띠고 빛났다. 그 순간만큼은 미즈치의 말대로, 바다로 비유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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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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