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귀고리가 제법 무겁습니다.

도원괴이담1

사랑하는 어머니께

잘 지내시는지요? 그곳은 따뜻한지 추운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아리지만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무엇이든지요. 이곳에는 서리가 물러가고 새순 돋는 봄이 찾아왔습니다. 농민은 씨를 뿌리며 한 해를 준비하고 겨우내 척박한 땅을 떠돈 상인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을 테지요. 어딘가의 이웃집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 따라 천씨가문 사람들마저 봄날 흩날리는 꽃잎처럼 반응하곤 합니다. 이렇듯 세상이 마음의 빗장을 모두 풀어내리는 가운데 저는 아직 차운 겨울이 그립습니다. 언젠가 하룻밤에 세어버린 하얀 머리칼을 보며 눈송이를 떠올려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드는 싸리눈도 함박눈도 모두 원망스러웠으나 이제는 고맙기만 합니다.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이제 전처럼 목구멍까지 치미는 간절함에 온통 섧기만 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그립지만 하냥 섭섭해 울지도 않습니다. 벌써 다섯번이나 혼자 봄을 맞이했으니까요. 지켜보고 계신다면 이제 한시름 놓으시겠지요? 서운타하지 않으실 것 압니다. 기특하다 쓰담아주실 것도 압니다. 하나 서운하지 않으셨으면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마 제가 섭섭하기 때문이겠지요. 이제 듬직한 모습 보여드리고 싶은데 여전히 어렵습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소식도 가져왔습니다. 저 도술학당에 입학해요. 가주께서 제 능력을 알게 된 이후,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다보니 아흐레도 지나지 않아 결정된 일입니다. 이에 대해 제 생각을 물으신다면 저는 이 상황이 기껍다 답하겠습니다. 막막하던 독립의 첫 발판이 되어줄 천운이니 어찌 기껍지 않을까요. 아직 자유롭게 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와닿지 않아도, 천씨가문에 계속 몸담고 있으면 안되리라는 사실은 압니다. 그러니 어머니도 마음껏 기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이들을 만날지, 어떤 벗을 사귈지. 티는 내지 않으나 내심 두근거리고 떨립니다. 가서도 자주 편지하겠습니다. 이곳에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해도 섭하기는 커녕 시원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눈에 밟히는 것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꼈던 물건들과 제 눈을 긁어놓은 녀석의 동산도 그렇고. 얼굴 몇 번 보지 못한 동생이나, 앞마당 동백나무와, 방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짐작컨대 제법 그리울 겝니다. 아참, 향이도 잘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편지를 읽었다면 저를 구박하다 못해 역정을 내는 모습이 불보듯 뻔합니다. 모른 척한 개구멍으로 드나들던 고양이가 살림을 차릴 줄이야 누가 알았던가요. 나이들고 비루먹은 채로 와선 삼년이나 우리와 함께했으니 딴에야 열심히 연명하였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옆에 있다면 조금만 더 힘내지 그랬냐고 말해주세요. 화가 나서 이쪽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요.

추억이 담긴 장소를 남겨둔 채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이 무섭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이 그대로 있을지도 모르겠으니 말이지요. 제가 가져갈 수 있는 건 어머니의 보석함 정도입니다. 펼쳐보니 너무 많고 무거워 하나만 가져갈까 합니다. 그중에서도 어머니께서 아꼈던 푸른 귀고리는 이제 제 귀에서 동당거립니다. 선물한 이가 다시 선물을 하고있는 모습이 퍽 우습긴 하지만요. 그래도 편지를 마지막으로 미련을 정리할까 합니다. 제 남은 마음을 이 편지에 담아 보내겠사오니 동봉한 동백꽃을 저라 생각하여 아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봄날의 시작에서 천도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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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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