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열의 절대성
83년 가을
“오늘은 또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실까.”
아침부터 부엉이를 보내 난리 난리를 치면서 펍으로 가자고 하는 것부터 이상하더니, 눈앞의 스물세 살짜리는 평소의 그와 상당히 다른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흑맥주를 앞에 두고도 그랬다.
오레스테는 뭐든 쉽게 결정하고 쉽게 해결했다.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은 아예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무언가를 길게 곱씹고 있었다.
렉스는 펍의 테이블을 툭 쳤다.
“도련님, 간밤에 데이트 신청했다가 차였어?”
“이마에 총구멍 나기 싫으면 입 닫지?”
농담인 걸 아는데 받아줄 기분이 아니라서 딱 자르는 투였다.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농담이 통하질 않으니 렉스로서도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레스테는 눈앞에서 변죽을 올리는 렉스를 진심으로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눈치였지만 막상 실행하기는 귀찮은지 시선만 아래로 떨어뜨렸다. 무언가 꾹 참고 삭이는 듯이 미간이 자꾸만 움찔거리는 게 여러 의미로 평소답지 않았다.
“사람을 펍으로 데려왔으면 입 닫고 있지 말고 말해 봐. 뭔데.”
“내가 꿈을 하나 꿨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렉스의 흥미가 식었다. 별것도 아닌 걸 괜히 물어봤군. 오레스테는 제 굳은 입가를 매만졌다.
“누가 나를 구하려다가 죽었어.”
“아, 그러세요? 누가 그랬을까요, 살다 보니 참 별일이 다 있네요.”
“그런데 그게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꿈속에선 분명히 얼굴을 봤는데.”
“제대로 떠올려 봐. 머리 한 대 쳐 줘?”
렉스는 약 삼 초간 눈으로 모욕당하는 기분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분위기 풀어 주려다가 민망해지기만 했다. 괜히 농담도 못 받아칠 정도로 상태 별로인 사람을 들쑤신 듯해 영 찜찜하기도 했다.
렉스는 흑맥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예지몽 아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니, 그럴 수 있지. 가끔 그런 거 꾸는 사람들 있잖아.”
“…….”
“그냥 개꿈 꿨나 보다 하고 털면 되지, 뭘 또 이렇게 꽁해 계시나.”
오레스테는 한참 눈썹만 달싹이다가 흑맥주를 쭉 들이켰다. 대체 언제 배운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술을 상당히 좋아했다. 취기가 빨리 오르기는 했지만 아무리 취해도 제정신을 놓지는 않았다. 늦게 취하기는 해도 제정신을 쉽게 놓는 렉스와 정반대였다.
“나 때문에 죽는다니 얼마나 의미 없는 짓이야.”
“음?”
“기왕 나 때문에라는 말이 붙을 거면, 나 때문에 살아야지.”
렉스는 오레스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들으며 별일이라고 생각했다. 저놈이 웬일로 저런… 자의식 비대한 생각을 하지? 그 순간의 오레스테는 과거를 더듬고 있었고, 그 부분은 렉스가 까맣게 모르는 바였다.
“네가 뭔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그 정도로 희생정신 넘치는 사람은 없어. 누구 때문에 죽는다, 그런 건 다 책 속에서나 나오는 얘기라고.”
“역시 그렇겠지?”
“그래. 정작 죽을 위기 돼 봐. 그런 성인군자들의 전유물 같은 얘긴 죄다 허상이라는 걸 몸으로 알게 될 거다.”
“그래….”
오레스테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였다면 참 단순하다고 속으로 조롱했겠지만, 렉스는 이상하게 지금만큼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여튼 넌 진짜 이상한 놈이라니까. 지 죽는 건 안중에도 없는데 남 죽는 건 신경 쓰고. 자기 가족은 내버렸는데 남의 가족들한테는 살뜰하고.”
“난 별로 안 죽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는 놈이 트럭이 뻔히 달려오고 있는데 차도로 뛰어들어서 액션 영화를 찍어?”
“그건 어쩔 수 없었던 거고.”
“그것도 그렇고, 그렇게 말하는 놈이 나한테 ■■하는 걸 도와 달라고 해?”
오레스테가 맥주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건 경우가 다르지.”
“차도에 뛰어드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뒤지려고 환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거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못 죽어. 안 죽을 거고.”
“참….”
애 같다고 해야 하는지, 겁대가리를 상실했다고 해야 하는지. 렉스는 자기가 한 번 배신한 친구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입으로는 죽는 게 싫다면서 외면하면 될 일에 그렇게까지 매달리는 것도, 다른 건 전부 쉽게 넘기면서도 오로지 ■■ 문제에 있어서는 제 목숨 따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취급하는 것도.
렉스의 직감은 날카로운 편이었고, 오레스테에 관해서는 학창 시절부터 느끼던 것이 있었다. 오레스테의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분명히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든, 오레스테가 오늘 꿨다는 개꿈처럼 주변인을 죽음으로 끌어당기든.
“그래도 인간이 발전이란 걸 하는구나. 예전엔 이 세계 이야기 들으면 표정부터 안 좋아지더니.”
“그땐 그 이야기 듣기만 해도 숨 막혔고, 지금은 좀 살만하거든.”
나이를 먹으며 다른 단점들은 곱씹고 반성하는 여유라도 생겼지만, 그는 이 치명적인 단점에 관해서는 대단히 완고했고 변할 의지 또한 없었다. 꼭 그 감정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정의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이 기어이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네가 뭔 짓을 하든 간에 나야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렉스는 그답지 않게 참견했다.
“자꾸 그렇게 똥폼 잡는 소리 할 거면 사람을 믿어라, 좀.”
“…….”
“남의 진심 하나 못 믿어서 염병하지 말고. 알아들었어?”
집념을 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람을 믿으라는 말은, 그에게 있어 불가능하지도 않았고 못 할 주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렉스가 오레스테에게 한 유일하게 악의 없고 쓸모 있는 조언이었다.
“…해서 신변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라이너는 벽난로에 편지를 넣었다.
영양가라곤 하나도 없는 정보들 중에 유일하게 건질 만한 것은 뜻밖에도 동생이 여기저기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였다. 한참을 조용히 지내던 동생이, 기어이 가문 이름에 먹칠을 하려는 것이다.
“그애 이름이 모친 살해자의 이름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필이면 고맥락 비유를 즐기는 상사의 돈을 받고 심부름을 하게 된 죄로 수수께끼 같은 대답을 해석해서 맞장구를 쳐야 하는 연구원은 라이너의 눈치만 살폈다. 상사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은 탓이었다.
“잡종들과 섞여 지내는 것도 그렇지만 어찌나 정결치 못한 짓만 골라 하는지, 제가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께서 천한 것과 교배를 해서 낳아 온 아이인지 가끔 여쭈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아, 어어, 그, 음….”
“이제 농담에 웃는 법을 익힐 때가 안 됐습니까?”
연구원은 라이너가 상냥하게 웃는 걸 보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애당초 상사가 자기 어머니를 두고 하는 저속한 발언에 누가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곱씹을수록 경악할 일들뿐이었다. 나란히 놓고 보면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게 생긴 동생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평생을 비교열위에 놓여 있던 사람은 영영 숭고한 사명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넓은 세상을 앞에 두고도 더 고결한 목표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오로지 열등감을 부채질하는 대상만을 향해 시야가 좁아지는 거죠.”
“저, 선임님. 정말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그애 그릇의 한계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의 동생은 뜻밖에도 주제 파악이 잘되어 있어서, 부모님이 제 행적을 알면서도 일부러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라이너가 유일하게 동생을 고평가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주제 파악’이 요즈음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악과 깡만 있던 후배, 그리핀도르의 블레어가 자꾸만 헛된 입김을 불어 넣는 탓이었다.
라이너는 아직도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하는 눈치인 연구원을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그애는 저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제 관심과 사랑과 인정을 원하는 겁니다.”
“…아아.”
“고생했다, 미안했다, 사랑한다고만 하면 제 품으로 돌아올 테죠. 그 말을… 스물네 해 동안 기다렸을 텐데, 슬슬 그애의 인내가 한계에 달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 말을 하실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편지를 보낼 겁니다.”
연구원은 드디어 이 민간인 사찰이라는 중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라이너는 빳빳한 양피지 하나를 책상 위에 놓고 깃펜을 들었다.
“대뜸 집으로 찾아와서 건물을 부수든, 어머니를 죽이려고 지팡이를 들이밀어 이름값을 하든…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편지의 서두가 완성되었다. 사랑하는 오레스테.
“변수는 최소한으로 두는 편이 옳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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