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84년

Anchor Point by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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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와 조율에 기반한 가스라이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레스테는 제집 문을 열자마자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비어 있어야 할 방에 웬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현관을 바라보는 인영은, 뜻밖에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레스테.”

라이너는 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오레스테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더니 사고 회로가 그대로 정지했다. 그동안 아무리 많은 것을 대비했다고 해도 이런 상황까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너 뭐야.”

“오랜만에 하는 인사가 그거니.”

“누가 멋대로 내 집에 들어오래? 당장 내 집에서 꺼져!”

“그러게 답장을 했어야지, 버르장머리 없이 형을 기다리게 만들어.”

오레스테에게 편지가 도착한 건 오늘 아침이었다. 라이너가 제 거처를 파악했으리라는 사실쯤은 예상했지만, 설마 편지를 보낸 당일에 직접 집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사람은 그간 보아 온 경향을 기반으로 행동을 예측하는 법이었다. 저 고리타분하고 격식 차리는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 남의 집 안에 뻔히 자리잡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당장 안 꺼져?”

오레스테는 품속에 숨겨 두었던 지팡이를 더듬어 쥐려고 했다. 막 움켜쥐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지팡이가 튕겨 나갔다. 라이너의 손 또한 마찬가지로 품속에 가 있었다. 형제는 나이가 들수록 서로를 닮아 갔다.

“고상한 대화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네 목숨 하나 꺾는 건 일도 아니란다.”

오레스테는 제 형이 훌륭한 마법사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주제 파악은 쉬웠다. 오레스테는 두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아, 그래. 기왕 얼굴 봤으니 물어나 보자. 내 주소는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네가 전방위로 난장을 치는데 마법부가 전혀 의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순진함이 지나치구나. 너는 늘 내 비호 아래에 있었단다.”

오레스테의 판단은 빨랐다. 라이너는 오레스테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브라이튼에서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그리고 등록되지 않은 지팡이로 종종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 또한. 그 마법부 기준의 불법을 들먹이면서 사람을 몰아 세우고 조력하라고 협박할 것이다.

“네가 디아파나에 머물면서 내 이야기를 전할 때엔 드디어 마음을 제대로 고쳐먹나 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라이너는 오레스테의 가장 깊이 묵은 죄책감을 정면으로 찔렀다.

“그런데 디아파나의 믿음을 정면으로 배반한 것도 모자라, 꼴사납게 작별 인사도 없이 잠적이나 하다니 얼마나 상심했을지, 그 마음을 단 한 번이라도 헤아린 적이 있니? 내가 그분들을 볼 면이 서지 않았던 건 내 선에서 용서해줄 수 있지만, 과연 그분들은 너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

“네가 도망쳐서 간 곳도 참 우스웠지. 달리에와의 여행이 그렇게나 즐거웠던 모양이지? 네가 하필이면 세븐 시스터즈 근처로 가 주는 바람에 너를 찾는 데에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어서 참 고마웠단다. 네가 읽기 쉽게 행동하는 점이, 내가 네게서 가장 고마워하는 점이야.”

“…….”

“너는 리스테어가 참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더구나. 그렇게 꼬박꼬박 만나 주는 덕분에 네가… 내가 아는 정 많은 어린애의 모습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 앞으로도 영영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그럼에도 넌 일 년에 한 번 따위의 제약을 걸면서 그의 곁에 있어 주지 않았지.”

“아는 척 떠들지 마. 나는….”

“블레어의 핑계를 댈 생각이라면 넣어 두렴. 넌 단순히 네게 소중한 사람이 생길까 봐 두려운 거야. 너 스스로 제대로 지켜 낸 관계가 하나도 없는데 헤어지기는 무서우니까 먼저 끊어 버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거지. 증명해 볼까?”

라이너가 오레스테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중간에 가로채기라도 한 모양인지 복제된 편지였다. 오레스테는 편지 속 필체가 자신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블레어에게 그동안 외면해 왔던 이 세계 이야길 전해 듣고 그제야 상황이 심상찮다는 걸 깨달았겠지. 네가 그다음에 한 짓은 우습지도 않았다. 네가 정 붙일까 봐 일부러 피했던 그 혼혈에게 손을 내미는 멍청한 짓이나 했지.”

순간 오레스테의 눈가가 노기를 띠었다.

“네가 뭔데 걔를 그딴 식으로 불러?”

“네가 그 혼혈에게 마음 쓰는 건 전해 들었다마는, 이번에도 도와 주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그랬더니 이미 늦지 않았니? 로어슬로터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오길 바란 건 너 따위가 아니었다는 걸 정말로 느끼지 못했단 말이야?”

“…….”

“그렇게까지 친하게 어울렸던 베리 양은 왜 네게서 멀어졌을까? 생각해 본 적 있어? 네가 모르는 듯하니 친절하게 알려 주마. 네가 먼저 베리 양을 떠났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 또한 멀어지게 마련이라… 네가 베리 양의 미래에 더는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란다.”

바닥으로 떨어지려던 편지가 불타 사라졌다. 한동안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명이나 이름이나 하나하나 들먹인 것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강조하며 압박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네가 죽도록 싫어하는 블레어 말고 지금 네 곁에 누가 있니? 마음 터놓은 사람은, 있긴 해?”

“…….”

“넌 앞으로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놓치게 될 거야. 그리고 그 이유는 아주 명확해.”

라이너는 지팡이로 어느새 자기보다 더 키가 커진 오레스테의 턱을 겨누었다. 지팡이 끝이 턱밑을 파고들었으나 오레스테는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너 자신만 생각하는 비겁자야. 네 모든 행보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인간은 상처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고 했던가. 오레스테는 그제야 그 말을 이해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이 형제의 입에서 하나하나 파헤쳐지는 느낌은… 대단히 역겹고 기분 나빴다. 오레스테는 훅 치고 올라오는 분노를 꽉 눌러 삼키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서, 사람 붙잡고 비난이나 하시려고 찾아오셨다?”

“비난으로 들렸다면 유감이구나. 단순히 네가 한 일을 나열했을 뿐인데.”

라이너는 지팡이를 유려하게 거두어들이더니, 오레스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넌 순수한 피를 타고났고 다른 이도 아닌 내 형제로 태어나는 운이 따랐으니, 내가 힘을 써 주기만 하면 네가 저지른 모든 것을 눈감아 줄 수 있단다. 네 머리통에 들어 있는 그 알량한 생각까지도, 깨끗하게 없었던 것으로 취급해줄 수 있지.”

“…….”

“아직 늦지 않았어. 너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기만 하면 돼. 이제라도 우리가 누려야 마땅할 영예를 함께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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