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chor Point

도망가지 않는 법

그렇다면, 그 기다림은 무엇 때문일까.

Anchor Point by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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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돌릴 곳이 필요하면 천문탑으로 와.」

라이너 같은 사람이 저애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관심의 계기가 거기서 비롯되었음은 부정하지 않겠다.

무엇보다 친구가 혼자 덩그러니 남아 속앓이하고 있을 것이 신경 쓰였고, 자꾸 까끌까끌한 무언가가 목구멍을 꽉 막는 듯한 기분에 이름도 적지 않고 죄책감을 털어 내듯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언제부턴가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약속한 듯이 천문탑으로 올라갔다. 함께 별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고, 그 잠깐의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와 나 사이의 접점은 고작 그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내게 있어 아무 의미 없이 버리는 시간이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겨우 잠깐의 변덕만으로는 사람 하나 만나자고 수백 번이고 같은 곳만을 향할 수는 없다.

네가 나를 기다릴 수도 있겠다. 그건 꽤 큰 동기였다. 천문탑에 가면 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런 확신을 주고 싶었고, 정말로 그랬을지는 알 수 없지만 곱씹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 또한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기다림은 무엇 때문일까.

별 속에 파묻힌 시간은 서로의 존재를 분명히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 선임님.”

연구원은 라이너의 행색을 살폈다. 그는 동생과의 대담에서 피를 볼지도 모른다는 상사의 말에 사후 처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머글 세계에서 살해 후처리란 주문 두 개로 끝날 만큼 쉬웠으니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는 피를 묻히지도, 딱히 몸싸움을 벌인 것 같지도 않았다. 라이너는 외투 옷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더군요.”

“아, 그럼 선임님이 예정하신 대로 프로페타의 전투 팀에….”

“그렇게나 오래 지켜봐 놓고 아직도 모르십니까? 그애에게 알량한 말로 하는 약속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마 해 놓고 반드시 도망칠 겁니다.”

연구원의 눈이 살짝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면 동생이 페레그린에 합류할 것을 뻔히 알고도 그냥 나왔다는 의미였다.

“그럼 왜 끝을 보시지 않고요.”

“반항이라도 해 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애가 제 말에 반항하지 않았으니 제게는 죽일 명분이 없습니다. 차라리 마음대로 설치다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낫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항하지 않는 형제를 죽일 이유가 없기는 했다. 오플린 내외는 아들 때문에 속이 썩을 대로 썩었기는 해도 결국 아들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부모 말 잘 듣는 라이너 오플린이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는 없었을 터다.

“마음대로 하게 두십시오. 어차피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을 텐데.”

그러나 그 또한 찜찜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안의 망나니는 이제 철모르는 십 대가 아니었다. 무모하게 굴지언정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노련해지고 차분해졌다. 제 자신을 간수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

현명한 일일까. 그러나 세상에는 결말을 알고서도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나저나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연구원은 되묻는 대신 눈을 크게 뜨고 제 상사를 쳐다보았다.

“혹시나 해서 ‘그 혼혈’이라고 불러 봤더니, 제게 화를 내더군요. 그 호칭이 뭐라고 그리 길길이 날뛰는 것인지.”

“워낙에 순수하지 않은 혈통들과 잘 어울려 다니니 화가 난 것 아니겠습니까? 페레그린 측에 접촉하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아니오. 그애는 지금껏 저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제가 하는 건 다 반대로 해야 하고, 저를 이겨 먹어야 하고, 제게 인정받으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치기만 하지 그밖에는 관심이 없었죠. 그애 앞에서 혼혈들을 그런 식으로 부른 게 처음도 아닌데….”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굳게 닫힌 창문을 향했다.

“제게 진심으로 화를 내더군요?”

연구원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상사의 눈치만 살폈다. 라이너는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묶으며 모자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무리 저 좋을 대로 군다고는 해도, 그애에게도 진심은 있을 겁니다. 오히려 그것을 직면하질 못하는 걸 보면 남들보다 더 섬세하다고 봐야겠죠. 애당초 그 보잘것없는 마음 하나 지키고자 뛰쳐나간 것이니, 그 부분을 찌르면 자연스럽게 어린애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겁니다.”

라이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참… 민망할 정도로 알기 쉬워요.”


받아도 되나?

그 물건의 연유를 알지 못했지만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는 건 묻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아주 잠시였다. 오레스테는 목걸이를 가볍게 쥐고 제 목에 걸었다.

이것은 일종의 미래를 기약하는 물건이다. 오레스테는 눈앞의 순례자에게 자신 또한 무언가 내주어야 할 것 같다는 강한 직감을 느끼면서도, 새삼스레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걸 만한 것이라곤 고작 몸뚱이뿐이라, 물건으로는 무엇을 맡겨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었고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 내 쪽에서 줄 수 있는 증표는.”

오레스테는 왼손으로 제 미래를 걸고자 하는 자의 손을 잡고 제 목 아래로 가져갔다. 다른 사람의 맥박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목덜미에 손끝이 닿도록 손등 위에 제 손을 느슨히 겹쳤다.

“이걸로 하자. 어때?”

오른손으로는, 외투에 비껴 꽂혀 있던 지팡이를 빼든 채 제 왼팔뚝을 겨누었다.

“맹세해 본 적 없지? 네 목걸이 돌려줄 때 하자고 할 거야.”

물건으로 무언가를 증명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으로 증명하면 그만이었다. 오레스테는 그중에서도 가장 흔쾌히 걸 수 있는 것을 걸었다.

“선택권은 너한테도 있어야지. 네가 싫다고 하면 무르자고 할 테니까, 너도 그동안 잘 생각해.”

이제 같은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면 오로지 외길뿐이다. 오레스테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걸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두려움 따위는 애당초 그라는 인간과 거리가 멀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동기는 그때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으니까, 요한 웨이페러라는 인간이 개척하는 길을 따라가고 싶어서. 그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가끔 네게 사람이 필요할 때 찾을 만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네가 또다시 너를 잃을 때쯤 너라는 인간이 누구였는지 끊임없이 말해 줄 사람이 되려고, 너를 한 번 더 살려 보고 싶어서, 적어도 혼자 외롭지 말라고. 또다시 손을 내밀었다.

거기에 동정은 없었다. 오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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