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83년 중

Anchor Point by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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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 있는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람 시 유의 바랍니다.

오레스테는 격언을 떠올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그리고,

“어, 어어, 이 미친놈들이 사람 죽인다! 사람 죽어요!”

“다리 잡아! 뭔 놈의 힘이 이렇게 세?”

“팔 부러져요! 살려 주세요! 씨발, 이거 안 놔!”

원수 새끼 모가지는 언젠가 떠내려오게 되어 있다.

술 한잔 제대로 걸친 모양인지 목뒤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였고 제대로 깎지도 못한 수염이 듬성듬성 났지만 오레스테는 그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오레스테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빠!”

삼 초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놀란 건 주취자의 사지를 몸으로 내리눌러 제압하고 있던 경찰들이었다. 오레스테는 지을 수 있는 가장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아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또 술 마시고 나오면 어떡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따지자면 둘은 한 살 차이였다. 그러나 고작 스물세 살 먹은 오레스테는 대단히 제 나이다워 보였고, 오레스테에게 대뜸 머리째로 안긴 남자는 삼사십 대쯤 되어 보인다는 점에서 ‘아빠’라는 호칭이 사람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애를 좀 일찍 봤나 보네.”

“아빠라는 게 대낮에 주사나 부리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아들은 좀 밝게 큰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아니, 아빠라고?”

오레스테는 경찰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수신호를 보냈다. 주변의 경찰들은 수갑을 하나둘씩 집어넣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안긴 사람은 여전히 얼떨떨한 낯이었다.

“으엉?”

“아빠,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오레스테는 바닥에 볼품없이 엎어져 있던 주취자를 안아 일으켰다. 술에 꼴은 건지 연신 떨리는 눈동자가 오레스테를 향했으나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어어, 나 이렇게 큰 애 없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집에 가자.”

남자는 술기운에 의아해하면서도 오레스테를 순순히 따라왔다. 관광 도시로 유명한 브라이튼에서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주택가로 남자를 끌고 온 오레스테는, 제집 문을 열고 남자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오레스테가 현관 걸쇠를 걸어 잠글 때였다. 두 사람의 눈이 그제야 정면으로 마주쳤다. 남자의 갈색 눈이 일순 흔들렸다.

“…어?”

흐려져 있던 눈이 순간 이채를 띠었다. 풀어져 있던 낯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레스테는 그 눈에서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읽었다.

덩치나 키나 그때보다 커지는 바람에 한 번에 못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얼굴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레스테는 무척 다정하게 웃었다.

“잘 지냈어?”

렉스의 턱뼈를 향해 주먹이 날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 * *

“아, 따가워! 좀 제대로 발라, 미친놈이.”

“입에 수건 쑤셔 박히기 싫으면 조용히 해.”

용감했던 그리핀도르의 렉스 블레어는 소독약 하나에도 엄살을 부리는 쫄보가 되어 있었다. 렉스는 오레스테의 주먹질에 입이 찢어졌고, 그 바람에 머리가 책상에 부딪혔다. 오레스테는… 따지자면 자기가 낸 흠집을 자가 수리하고 있었다.

“병 주고 약 주고 지랄을 해라, 아주.”

“그 좆같은 입 좀 다물 수 없어?”

“조, 뭐? 이것 봐라? 대가리 다 컸다고 선배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선배 타령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렉스는 조용해졌다. 목숨 아까운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렉스의 눈이 오레스테의 얼굴을 훑었다.

“어릴 땐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반갑다는 말을 주먹질로 하는 깡패 새끼가 다 됐네.”

“네가 나한테 혼혈들 동정하는 맛에 사는 새끼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짓 안 했어.”

“하,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나 같은 놈들한테 친절하게 굴면서 관심 적선하는 재미, 분명히 있었잖아? 그러지 않고서야 너랑 관련도 없는 놈들 토 쏠릴 정도로 동정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지.”

예전에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오레스테의 얼굴에 동요가 고스란히 보였다. 렉스는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오레스테가 상처를 받는 게 보이면 상당한 희열을 느꼈다.

지금은 눈썹 한쪽만 올릴 뿐이었다.

“더 해 봐.”

“그래도 너 같은 애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런 소리 들으면서 네 특별함을 확인받고 싶었던 거잖아? 난 네 그런 점이 참 역겨웠어. 결국에는 네 자존감을 채우고 싶었던 만큼 친절함을 가장했을 뿐이면서….”

“죽어라, 그냥.”

렉스는 자기 머리통을 후려치려는 주먹을 겨우 피했다.

“미친놈이 자기 집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하네?”

“시체 치우기 귀찮아. 뒤지려면 나가서 객사해.”

“아, 그래. 그래서 저주라도 걸어 보시겠다?”

둘은 서로를 한참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굳은 만큼, 이 논쟁이 얼마나 소모적인지를 둘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 내 자존감 채울 말이 필요했을 뿐이면 그런 광대짓 못 해.”

그건 렉스도 알고 있었다. 오레스테에게 역겨운 점은 분명 있었지만,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도 나서서 어른들 보기에 미운 소리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장 사귀기 시작했을 때도, 어땠던가? ‘늘 시비에 휘말리는 렉스가 조금 더 편하게 학교 생활을 하면 좋겠다’, 그 말에 렉스가 ‘가끔 학교 생활하기 버거울 때가 있는데 마음 놓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둘은 서로와 함께 있을 때 연애질을 한 게 아니라 서로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공유한 게 고작이었다. 오레스테는 한때 렉스의 도피처였다. 그 시간을 선뜻 내어준 데에는 순수한 선의가 분명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게 렉스의 콤플렉스를 역으로 건드렸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그럼, 진심이었는데 지금 이런 꼴로 도망쳐 사냐?”

“…….”

“너, 다른 애들도 나 같은 생각 할까 봐 무섭구나?”

순간 오레스테의 미간이 확 구겨지더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음 순간 집에 있던 집기들이 날아왔다. 그 순간 렉스는 자기가 오레스테의 정곡을 찔렀다고 확신했다.

“흐하하학….”

“너 때문이잖아, 개새끼야.”

“아… 진짜 웃기네. 세상에, 씨발, 지금 나이가 몇인데 내가 한 말 하나 때문에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믿고, 멍청하게….”

“…….”

“그렇게까지 나한테 진심인 줄 알았으면 뭐라도 좀 빨아 줄 걸 그랬지.”

“그래, 유언 잘 들었다.”

렉스는 기어이 지팡이를 뽑아 든 오레스테에게 살려 달라고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면서도 킬킬거렸다. 오레스테의 표정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렉스는 오레스테가 고작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렉스는 곁눈으로 오레스테의 옆얼굴을 보았다. 그는 슬슬 렉스와 이야기랄 것을 시도한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정확히는, 후회한다기보다 자기 선택에 단단히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아무튼 도련님, 사고를 참 크게 치셨어. 네가 네 부모 물 먹인 거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니까.”

“너한테 더 궁금한 거 없으니까 이제 꺼져.”

“정말로 안 궁금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꺼지라고 했다.”

“네 형 얘기.”

오레스테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무리 멀리 외면해 봤자, 눈앞에 호기심 덩어리를 들이밀면 붙잡아 파헤치고 싶은 충동이 아른거리는 법이다. 예상대로 그가 렉스를 돌아보았다. 렉스는 그 시선을 마주하다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건. 안 궁금해?”

하여간 지극히 단순하고, 알기 쉽고, 휘두르기도 쉽고… 멍청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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