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魂

긴히지, Horizon

2015.11.21.

UND by 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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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아리도록 새파란 하늘이 있었다. 몸이 마비되기라도 한 건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사카타 긴토키는 전장 한가운데 주저앉아 망연히 고개를 올렸다. 불길하게 심장이 쿵쿵 울렸다. 눈앞에는 피투성이가 된 녀석의 등이 있다. 적과 자신의 피로 흠뻑 젖어 위태롭게 곧다. 상처 입은 오른팔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던 그가 천천히 팔을 늘어뜨렸다. 직감적으로 그가 무엇을 선택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긴토키는 어깨를 뒤틀며 발버둥 쳤다.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신체는 움직이지 않고, 그가 천천히 저를 돌아보았다. 핏빛이 번진 잔잔한 눈동자가 짐짓 미안한 듯이 가늘어졌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명만이 따갑도록 고막을 찢었다.

  일광 아래에 네 얼굴이 하얗게 타오르고, 저를 향해 엷은 미소를 그린다. 이윽고 새파란 하늘이 히지카타 토시로의 뒷모습을 집어삼켰다.



  사카타 긴토키는 눈을 떴다.

  한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할 수 없었다. 그는 이불 속에 파묻힌 채 한참을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눈꺼풀에 어룽지는 빛무리에 눈이 따가울 즈음에 이르자 비로소 아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결사 사무소, 제 방 이불 속이다. 긴토키가 부스스 상반신을 일으켰다. 등이 축축하게 땀에 절어 있었다. …지독한 꿈을 꾼 것 같았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꿈. 제어할 수도 없는 주제에 감각만이 선연하여, 마치 그쪽이 현실인 양 아직도 불안감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위태롭게 심장을 두드리는 감각에 긴토키는 작게 몸서리쳤다. 제멋대로 피가 달아오르고 전신의 감각이 예리하게 날이 서 있다. 꼭 전장에 섰을 때와 같았다. 마치 직전에 싸움터에서 날뛰고 있었던 것처럼.

  애당초 그것은 정말 꿈이기는 한가? 도통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긴토키는 천천히 돌아서던 히지카타 토시로의 등을 기억한다. 아무리 발악해도 손을 뻗을 수 없던 무력함을 기억한다. 시퍼렇게 작렬하던 태양의 열기를 기억한다. 비강에 차오르던 피비린내와 손에 익은 목도의 투박한 촉감을, 맞닿은 등의 미더움을, 작별을 고하듯이 뒤돌아서던 잔인함을 알고 있다. 끔찍하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을 예비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엄숙함이다. 그가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의 둔탁한 통증은 꿈속에서와 다를 바 없었다. 긴토키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신센구미 둔영까지 달음박질친 것은 가히 본능적인 것인지라, 긴토키는 제가 어느덧 익숙한 대문 앞에 당도하였음을 인지하고 조금 당황하였다. 그 당혹감은 보초를 서던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경계심을 세울 필요도 없는 익숙한 면상이었기에 그들은 곧 긴장을 풀고 허물없는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해결사네 형씨 아닙니까. 그게 무슨 꼴이에요?”

  그제야 긴토키는 제가 허리띠도 없이 키나가시만 어설프게 걸치고 있음을 알았다. 녀석들의 말대로, 무턱대고 뛰쳐나왔더니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세수는 물론 머리조차 감지 않아 가뜩이나 곱슬거리는 백발이 더더욱 엉망이었다. 그나마 잠옷차림이 아닌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긴토키가 휑하니 벌어진 키나가시를 여미며 헛기침을 뱉었다.

  “이미지 체인지다, 인마. 너희 부장은?”
  “백수에서 거지로요? 어차피 종이 한 장 차이였다지만 드디어 나락까지 떨어졌네요. 우리 부장이야 집무 중인데, 무슨 일이십니까? 해결사 망해서 서류 파쇄 알바라도 받으러 왔습니까?”
  “하겠냐, 그딴 거! 해결사 아직 안 망했어. 신센구미 담벼락에 오줌 싸지르고 가기 전까지는 망해도 안 망해. ……그 녀석한테 용무가 있으니 들어간다.”
  “형씨가 왔으니 오늘도 시끌벅적하겠네요. 뭐, 들어가십쇼.”

  가볍게 목례하고는 길을 열어주는 대원들을 지나치며 긴토키가 길게 한숨을 불어냈다. 부장실을 향한 걸음이 조금씩 더뎌졌다. 꿈자리가 영 뒤숭숭해서 무심코 와버리긴 했지만, 둔영을 걷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역시 그가 히지카타를 찾아와야만 할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악몽을 꿨다고 순순히 토로하기에는 조금 그거하니까 뭐라도 핑계를 대야 할 텐데. 마당을 지나던 보폭이 재차 멈칫거리며 좁혀졌다.

  아까 전의 대원들에게 히지카타의 무사를 확인한 이상, 구태여 긴토키가 히지카타를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고작 악몽 때문에 20분이나 걸리는 신센구미 둔영까지 달려온 것도 비웃길 일이다. 어디까지나 이성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히지카타의 안위를 육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할 것만 같았다. 평소대로 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그 녀석을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불안정하게 떠도는 현실감이 비로소 제 손아귀에 쥐어질 거라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채광이 좋은 내부가 한눈에 들이차며 시야가 환하게 밝아져왔다. 잔뜩 인상을 쓰고 펜을 쥐고 있던 히지카타가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히지카타 토시로였다.

  “누가 노크도 없이……, 해결사?”

  제 얼굴을 비출 만한 무언가가 일절 없었기 때문에, 사카타 긴토키는 제가 그 순간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껏 예민해져 있던 히지카타가 저를 올려보고 찰나 그 기세를 잃었다는 것만이 어렴풋이나마 유추에 힘을 실었다. 히지카타가 조금 놀란 듯이 눈동자를 키웠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긴토키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동안 저를 응시하고만 있는 긴토키에게, 결국 히지카타가 펜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뗐다.

  “……들어와라.”

  머뭇거리던 긴토키가 천천히 발을 들였다. 문턱을 넘는 순간이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 같았다.

  긴토키의 진중한 안색에 중대한 사태라도 벌어진 거라고 오해했는지, 히지카타는 손님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다른 대원을 시켜 차를 내오게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녹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긴토키는 침묵을 지켰다. 한 번 잃었던 현실감이 되돌아오자 뒤늦게야 제가 얼마나 치기 어린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제 앞에 주저앉는 히지카타의 진지한 면면이 그렇게나 머쓱할 수가 없었다. 남몰래 안절부절 못하던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호명에 화들짝 놀라 손이 미끄러졌다. 하마터면 녹차를 엎을 뻔했다.

  “이봐.”
  “엉?! 어어.”
  “뭐야, 뭘 그리 놀라. 그래서 무슨 일이지?”

  역시 쪽팔린다. 입이 찢어져도 솔직히는 말할 수 없었다.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던 긴토키는 결국 되는 대로 지껄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꿈의 여파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지라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끄응, 잠시간 목을 울리던 긴토키가 이내 뒷머리를 긁으며 성의 없이 말을 뱉었다.

  “뭐, 대충 서류 파쇄 알바 자리 구하러 왔다고 치자.”
  “…치자? 치자는 뭔데?”
  “그런 거 안 구해? 나, 힘이라면 넘쳐나니까 기밀문서 같은 거 있는 힘껏 찢어발겨줄 수 있는데. 형체도 안 남게 난도질해줄 수 있어.”
  “무슨 헛소리야? 아무리 우리 쪽에 들어오는 예산이 짜다지만 파쇄기쯤은 있다고! 애당초 네놈한테 기밀문서를 맡길 수 있겠냐,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겨도 이보다는 덜 불안하겠네.”

  어처구니없는 기색이 다분했다. 긴토키가 끝까지 뻔뻔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자 히지카타는 영 수상쩍다는 얼굴로 제 몫의 찻잔을 집었다. 아직도 뜨끈뜨끈한 녹차를 터프하게도 단번에 들이키고는 그가 매섭게 추궁을 시도했다. “뭐냐고, 네 녀석. 그 넘쳐난다는 힘으로 여기까지 산책이나 하러 온 건 아닐 거잖아? 무슨 용건이야. 순순히 불어, 짜샤.”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본새에도 긴토키는 그저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일관하였다. 이 와중에도 신경질을 내는 히지카타의 모습에 내심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정말로, 꿈이 지독하긴 했던 모양이다.

  긴토키가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자, 별 수 없이 히지카타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원체 고집이 센 녀석이다. 한 번 입을 열지 않기로 다짐했다면 설령 고문실로 끌려가더라도 끝끝내 열지 않을 것이다. 히지카타가 길게 불어내는 한숨에 불편한 심기가 한가득 묻어났다. “야.” 신경질적인 호명이 떨어졌다. 잠시간 역시 화내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네놈한테 줄 일자리 따위는 없지만, 차 정도라면 내줄 수 있으니까 적당히 마시다가 돌아가.”

  하지만 이건 예상 밖이다. 긴토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멋대로 남의 얼굴 보고 안도하기나 하고는……. 이쪽도 한가하지 않단 말이다. 가뜩이나 시말서 쓰느라 열 받아 죽겠는데 네놈은 노크도 없이 쳐들어와서 속 편하게 녹차나 들이키고 있고. 어이, 미리 말해두지만 세 잔 이상부터는 돈 받을 거다.”

  술렁이던 가슴이 차차 고요하게 가라앉던,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다. 깡패 못지않은 살벌한 인상의 히지카타를 눈에 담은 순간이었다. 예쁘지도 않은, 그 잔뜩 찌푸린 면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현실적이라……. 아, 그것이 안도감이었던가. 스스로도 규정짓지 못하던 감정에 명확한 이름이 붙자 정말로 어린애라도 된 것 같았다.

  분명히 고작 꿈이었을 터였다. 그냥 조금 많이 사실적인, 이따금 꿀 수도 있는 그런 평범한 꿈. 그럼에도 뒤돌아서는 녀석의 미소를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리도록 괴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나 머쓱해질 걸 알면서도 구태여 히지카타를 찾아와야만 했을 만큼. 아침 내내 뒤숭숭했던 기분은 그의 퉁명스러운 배려에야 비로소 풀어졌다. 긴토키는 제 겸연쩍음을 표면에 드러내는 대신, 슬그머니 화두를 돌려 평상시의 모습대로 힐난을 던져주었다.

  “거 녹차 하나갖고 되게 짜게 구네. 그거 다 내가 낸 세금이거든요? 녹차에 금이라도 뿌렸습니까? 유세를 떨고 싶다면 딸기우유나 가져와, 세금 도둑놈.”
  “뭘 편의점마냥 뻔뻔하게 주문하고 앉았어?! 그딴 난잡한 게 둔영에 있을까보냐!!”

  히지카타 토시로와의 일상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그래, 그랬다. 망각된 것을 도로 휘어잡듯이 긴토키는 새삼스레 실감하였다.

  녹차를 다섯 잔이나 알차게 들이키고는―그것도 우려먹으면 맛이 없다는 핑계로 매번 새 티백을 뜯게 했다― 긴토키는 물로 잔뜩 부른 배를 안고 설렁설렁 되돌아갔다. 출렁이는 포만감은 전혀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되었지만, 신센구미의 재정에 손톱만한 구멍을 뚫었다는 점에서는 소박하게 만족스러웠다. 비록 그 대가로 몇 번이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수분을 배출해야 했지만 말이다. 물갈이되어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긴토키는 잠자리에 들었다. 카페인을 그렇게나 들이켰으니 잠이 제대로 오기는 할까 싶었지만, 놀랍게도 베개를 이자마자 그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이곳이다. 분명 사무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을 터인데 어느덧 전장이었다. 등 뒤에는 히지카타 토시로가 있다. 급작스럽게 뒤바뀐 풍경에 긴토키는 아연히 넋을 놓았다. 꿈속의 인물로서 자각을 품기까지는 한 발짝 늦어서,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어깨에 쏘아진 따끔한 감촉에 휘청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취독이다. 신체가 빠르게 굳어져갔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간신히 검자루에 걸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움켜쥘 수도 휘두를 수도 없이 그저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적들이 넓게 저희들을 에워쌌다.

  히지카타가 더 이상 싸우지 못하는 긴토키를 살피더니 난감하게 미간을 구겼다. 이내 그가 저를 내던지듯이 밀쳐냈다. 딱딱해진 몸이 데굴데굴 굴러 저만치 구석으로 처박혔다. 적들의 눈길이 닿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 재차 몰려드는 적들을 바라보며 히지카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이윽고 스스로의 피로 푹 젖어 있는 팔을 늘어뜨렸다. 새빨갛게 얼룩진 검신이 핏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을 향했다. 다음부터는 긴토키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하얗게 타오르는 녀석의 얼굴, 엷게 번지는 미소. 다만 날카롭게 찢어지던 이명이 명확한 음성으로 되감겼다. ‘미안하다.’ 시야가 새파랗게 번졌다.

  그저 꿈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긴토키는 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히지카타는 헉헉거리며 둔영까지 달려온 그를 비뚜름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또냐?”

  그 여상한 어투가 또 다시 저를 현실로 잡아끄는 것이다. 그는 때마침 순찰 담당 대원들에게 국중법도를 읊어주기 위해 밖으로 나와 있었다. 혈색 하나 없는 파리한 낯빛이 똑바르게 히지카타와 마주했다. 이번에도 마냥 경황없이 달려왔던 긴토키는 이 추운 날에 목도리 하나 두르지 않은 채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히지카타가 제 코트를 긴토키에게 던져주고는 마저 절차를 마쳤다. 까만 제복들이 우르르 뛰어나가고, 히지카타가 그에게 손짓했다. 부장실로 이끄는 발걸음을 긴토키는 얌전히 뒤따랐다.

  “이번에도 끝까지 다물고 있을 심산은 아니겠지.”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되먹지 못한 핑계를 대기에는 아무리 저로서도 면목이 없었다. 히지카타가 건네는 따뜻한 찻잔을 가만히 쥐고 있자 쿵쿵 울리던 심장이 조금씩 침착해졌다. 긴토키는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망설였지만, 이내 순순히 실상을 토로하였다.

  “사실… 요즘 꿈을 꾸는데.”
  “꿈?”
  “어엉. 그냥, 악몽을 조금…….”
  “그런 애새끼 같은 이유로 여기까지 질주했다고?”

  찰나 히지카타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짓자, 긴토키가 억울한 듯이 항변하였다.

  “꿈이라고 무시하지 마, 요 녀석아. 네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리얼한 꿈이었단 말이다. 눈을 뜨니 한순간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을 정도야.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게 되어버렸어. 완전히 공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장자겠지, 멍청아.”

  아마 호접지몽을 얘기하려던 것 같았지만 어설픈 지식만 탄로 났다. 가볍게 질타를 던지며 히지카타는 남모르게 골몰에 잠겨들었다. 아무리 무서운 악몽이라 해도, 다 큰 성인이 이렇게까지 혼비백산하여 20분 거리를 주파할 정도가 되면 제법 심각한 사건의 초석일지도 몰랐다. 보통 찬바람을 맞으며 5분쯤 달리다 보면 알아서 머리가 식곤 하니까. 특수경찰이라는 직업 특성상 히지카타는 자연히 범죄의 가능성을 연상하였다. 범죄란 언제 어떤 곳에서부터 실마리가 잡힐지 알 수 없었고 특히 천인들의 범죄쯤 되면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언제나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에도를 엉망진창으로 휘젓곤 하니까. 히지카타는 이 악몽이 혹여나 천인들의 범죄와 연루되어 있지 않을까 가정하며 진지하게 질문을 올렸다.

  “무언가 원인으로 짐작 가는 구석은 없나?”

  곰곰이 제 턱을 문지르던 긴토키가 문득 입을 열었다.

  “혹시 루시드 드림이라고 알아? 실은 얼마 전에 내가 그걸 좀 해보려고 했는데, 번번이 실패했거든.”
  “자각몽인가…. 방식은 누가 유포했지?”
  “유포? 그런 건 없는데. 그냥 내가 알아봤어.”

  히지카타의 눈길이 순간 미심쩍은 빛을 품었다. 천인들의 술수가 얽혀 있었다면 필시 어떤 경로로든 유행을 타게끔 만들었을 터. 특수경찰의 첨예한 의심은 불특정의 범죄자로부터 눈앞의 사카타 긴토키로 화살표를 돌렸다.

  “……왜 그딴 걸 시도했냐?”

  긴토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실토했다.

  “그야 히지카타 군이 도무지 간호사복을 입어 줄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까 꿈에서라도 만족하려고 했지. 벗기는 것까진 어찌어찌 했는데 역시 입게 하는 건 어렵더라.”
  “그럼 그렇지, 네놈의 팝콘 같은 대가리는 범죄는커녕 동네 개한테도 못 갖다 쓸 거다.”

  히지카타는 괜히 쓸데없는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려 했던 스스로에게 깊은 회의를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기실, 한 달쯤 전부터 긴토키는 꾸준히 AV에나 나올 법한 짧은 간호사복을 들이대며 제게 입어달라고 사정사정을 해댔던 것이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조용하기에 드디어 포기했나 싶었더니, 설마 꿈에서 시도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상한 곳에서 집착적인 녀석이었다. 히지카타의 떨떠름한 낯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토키는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네가 내 고간에 무릎차기를 날린 그 순간부터 꿈이 제어가 안 돼. 배경이나 전개 같은 것도 뒤죽박죽이고… 무엇 하나 종잡을 수가 없어.”

  물끄러미 긴토키를 흘겨보던 히지카타가 퉁명스레 대꾸하였다.

  “벌 받은 거겠지, 밥통아. 정성을 다해 할복하면 뭔지 모를 그 괴상한 꿈도 끝이 날 거다.”
  “그야 그렇겠지. 영원히 꿈꿀 수 없게 되니까, 밥통아!”

  이어지는 것은 결국 평상시와 같은 말다툼이었다. 서로를 향해 갖은 밥통 소리를 쏟아내며 삿대질을 하다 보니 어느덧 긴토키가 막 둔영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의 위태로운 분위기는 형체도 없이 부스러져 있었다. 히지카타는 자신과 똑같이 버럭버럭 언성을 높이면서도 이따금씩 가슴이 저미도록 안심에 젖어드는 붉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장난스럽게 얼버무리긴 하였으나, 그토록 필사적으로 저를 찾아 내달렸던 사카타 긴토키는 분명 거짓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두려워하며, 제 안위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긴토키는 오늘도 신센구미의 녹차 티백을 왕창 소모하고는 둔영을 떠났다. 무려 열 잔의 녹차를 연속으로 넘겨버리는 작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저희들을 엿 먹이려는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불안의 원인이 꿈이라는 걸 알고부터 히지카타는 긴토키가 내심 잠들기를 꺼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시간 눈에 담다가 히지카타는 이내 둔영으로 몸을 들였다. 사카타 긴토키라는 사람은 설명이 부족했다. 언제나 그랬다.



  신센구미에서 마셔댄 녹차 열 잔이 무색하게도, 긴토키는 어김없이 악몽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날은 꿈에서 벗어나고도 곧바로 신센구미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가위에 눌려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꿈에서 맞은 마취독이 현실까지 따라붙은 것처럼 몸이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긴토키는 한참 동안 시트를 식은땀으로 적시며 온 마음으로 버둥거렸고, 간신히 가위에서 풀려난 직후에도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 오래토록 헤매야만 했다. 현실로 되돌아온 사카타 긴토키는 차차 패닉에 빠져들었다. 전장에 있어야 할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히지카타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돌아서는 그 녀석의 뒷모습에서부터 기억이 완전히 끊겨 있었다.

  한동안 그는 은신처에 숨어든 듯이 기척을 죽여 초조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당혹스럽게도, 사무실 벽면에 걸린 [당분] 액자를 보는 순간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스러졌다. 특별한 의미도 없는 단어일 텐데 왜 하필 그것이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짜’ 꿈에서 깨어난 순간을 기점으로 긴토키는 이전까지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몇 시간간의 괴로움이 굉장히 한심해져서 긴토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공을 향해 한참 기싸움을 했더니 기력이 쭈욱 빠졌다. 그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누르던 긴토키는 문득 허망해진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로, 바보 같았다.

  어느 정도는 여유가 있던 전날과는 달리 그날은 바짝 갈아둔 검처럼 신경이 예민했다. 이런 날선 몰골로 히지카타를 찾아갈 수는 없다. 긴토키는 혼란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무실 내부를 하릴없이 배회하며 오후를 보냈다. 아무도 없는 정적 속에 우두커니 있자니 제가 꿈에서 깨어난 게 맞기는 한지조차 도통 확신이 서지 않았다. 초조하게 다리를 떨던 긴토키가 이내 벌떡 일어났다. 냉장고에 아껴둔 푸딩을 꺼내 기계적으로 입에 밀어 넣으며 그는 푸딩 특유의 달달함이나 말캉한 촉감 따위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구태여 애쓸 필요도 없이 푸딩은 매우 맛있었다. 텅 빈 플라스틱 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긴토키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소파 위에 엎어졌다.

  밤이 찾아왔으나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잠이 들면 또 다시 현실감을 잃을까봐 불안했다. 긴토키는 아예 이불을 벽장에 처넣어놓고는 밤새 조깅을 뛰었다. 마을을 60바퀴쯤 돌자 거리가 주홍빛으로 물들며 날이 밝았다. 어쩌면 힘들어서 눈앞이 노래진 걸지도 모르겠다. 긴토키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듯이 사무소로 되돌아왔다. 몸은 고되었고 마음은 스스로를 향한 한심함으로 가득했으나 꿈에 시달리지 않은 정신만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그러나 밤을 꼬박 새고 체력을 축낸 여파는 배로 되돌아왔다. 잠깐 소파에 주저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하려 했을 뿐인데, 눈을 감았더니 어언 꿈속이었다.

  긴토키는 꼬박 한나절을 잠들었고 그만큼 꿈이 길었다. 꿈은 미세하게 테이프를 앞으로 당기고는 도로 되감겼다. 일전에는 보지 못했던 전개가 펼쳐지며 그곳에서부터 꿈이 이어졌다. 이번 꿈에서 긴토키는 심지를 잃고 와해되어가는 신센구미와, 그런 그들을 아등바등 끌어안고 지키려 드는 히지카타 토시로를 볼 수 있었다. 적은 거대한 양이파 일당, 양동에 걸려 분산된 신센구미 대원들이 제각각 다른 곳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자신과 함께 적의 포진 최심부에 동떨어져 있다. 파도처럼 적들이 밀려들었다. 덤벼드는 이들을 차근차근 처리해가며 긴토키와 히지카타는 차츰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따끔하게 어깨를 찌르는 독의 감각. 긴토키는 망연해진다. 저를 저만치 밀쳐내고는 또 다시 히지카타가 뒤돌아섰다. 그 몸으로, 그 많은 자들을 상대로, 혼자서 싸울 생각이다. 빌어먹을. 빳빳하게 굳은 혀는 욕설조차 제대로 뱉어내지 못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꿈결을 헤치고 기어나오면 그곳은 해결사 사무소이다. 제정신을 차리자마자,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찾아 내달렸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대원들을 쏜살같이 지나치고는 부장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즉각 노크 안 하냐는 험악한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여기에 있었다. 꿈이 아닌, 현실의 히지카타 토시로였다.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발을 들였다.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긴토키가 무너지듯이 히지카타를 끌어안았다. 당혹한 그가 반사적으로 저를 밀쳐내려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감싼 팔에 으스러져라 힘을 더했다. 히지카타가 낮게 신음하며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윽. 이거 안 놔? 히지카타가 버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그 미미한 저항마저 한가득 품에 안으며 히지카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긴토키가 벅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히지카타…….”

  이유 모를 회한이 한가득 쏟아져 히지카타를 붙들었다. 긴토키의 품에 갇힌 신체가 찰나 동작을 멈추었다. 긴토키는 한참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히지카타의 이름만을 되뇌었다. 살아있는 자 특유의 체온이 엉망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단지 그 온도와 좀 더 닿고 싶다는 일념으로, 긴토키는 끌어안고 있는 신체에 한층 더 밀착하였다. 히지카타. 히지카타, 히지카타, 히지카타… 히지카타……. 엷게 떨리던 목에 힘을 주어 긴토키가 한숨처럼 재차 그를 불렀다. ……히지카타.

  그제야, 히지카타의 손길이 어설프게 등에 오르는 것이다. 조금은 낯부끄러운 듯 그는 긴토키의 등을 찬찬히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일단 진정해.” 나직한 한 마디뿐이었으나, 마법 같이 평상심이 되돌아왔다. 전신에 파고들던 긴장감이 느슨해졌음에도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구태여 그를 밀어내지 않고 오래토록 긴토키에게 제 몸을 허용해주었다. 그 서투른 위로야말로 실재하는 히지카타 토시로를 역설하는 것이다. 며칠째 잃고 있던 현실감이 생경하게 손끝에 잡혔다.

  “네가… 내 앞에서 몇 번이고 죽어. 나는 그걸 끝끝내 붙잡지 못했어.”

  한참 뒤에야 히지카타를 놓아주고, 긴토키가 마침내 꿈의 내용을 토로하고야 만다. 여느 때처럼 녹차 두 잔을 사이에 둔 채로 그는 괴롭게 중얼거렸다.

  “이건 악몽이라고, 눈을 뜨면 넌 언제나 그랬듯이 멀쩡한 얼굴로 이곳에 있을 거라고. 머리로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도 매번 휘말리고야 말아. 끔찍하게 허무한 기분이야.”

  금일 아침은 한 시간을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반나절을 현실을 상기하는 데에 소비했던 일전보다는 양반이라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질이 나빴다. 지독한 무력감에 잠식되어 그는 한참을 넋이 나가 있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피에 젖은 목도가 아니라 폭신한 이불이라는 게, 눈꺼풀 위에 얹히는 것이 한낮의 쨍한 햇빛이 아닌 아침의 보드라운 햇살이라는 게, 귀에 닿는 것이 소란스러운 전장의 비명이 아닌 적요한 방 안이라는 게 그토록 낯설 수가 없었다. 아침의 혼잡한 사고는 맥락 없이 꿈과 현실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어느 순간 불현듯 꿈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해버린 긴토키가 마른침을 넘겼다.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오직 단 하나, 히지카타 토시로의 실존만은 현실이기를 바랐다.

  히지카타는 긴토키를 비웃지 않았다. 일전에 들었던 어린애 같다는 힐책조차 없었다. 다만 가라앉은 눈동자로 긴토키의 어깨에 손을 얹을 뿐이었다. 찻잔의 열기와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어깨에 머물렀다.

  “해결사. 꿈은 꿈일 뿐이다. 잊어버려.”

  술에 만취한 취객마저도 제정신을 차릴 듯한 확고함이었다. 악몽 따위는 대번에 날아갈 만큼 단호한 현실을 원했기에, 사카타 긴토키는 비로소 안정하였다. 어중간하게 허공을 떠돌던 발이 단단한 대지에 안착한 것 같다. 긴토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보일 듯 말 듯 눈모를 휘며 히지카타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천천히, 히지카타의 손을 밀어냈다. 쓰디쓴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시답잖은 일로 또 찾아와서 미안.”

  히지카타가 긴토키로부터 듣고 싶었던 것은 이런 사과 따위가 아니었지만, 구태여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는 대신 돌아갈 채비를 갖추는 녀석에게 약병 하나를 던져주었다. 얼결에 날아오는 약병을 움켜쥐고 긴토키가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수면제다. 그거 한 알이면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다더군. 약효 센 거니까 깊이 잠들겠답시고 왕창 집어먹지는 마라. 영면하는 수가 있으니까.”

  긴토키는 가만히 약병을 내려다본다. 손바닥 안에서 잘그락 소리를 내며 약병이 굴렀다. 놀란 듯이 한동안 그것을 내려다보던 긴토키가 빙긋 웃었다.

  “……고마워, 히지카타 군.”

  이 역시 그다지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사카타 긴토키는 알지 못할 것이다.

  바라건 바라지 않건 밤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긴토키는 수면제 한 알을 물과 함께 넘기고는 가슴께까지 단단하게 이불을 덮었다. 효력이 센 약이라더니 과연 얼마 못 가 졸음기가 쏟아졌다. 긴토키는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잠기운에 이끌렸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히지카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는데, 왜냐하면 긴토키는 오늘도 예의 꿈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작점은 신센구미의 전력을 산개시키려 들던 바로 그 지점이다. 이것은 적의 양동이라고, 이래서는 적들의 술수에 말려들어 난전이 될 거라고, 꿈속의 사카타 긴토키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몰랐다. 한 사람에 인격이 둘인 것처럼 사고가 제각각으로 떠돌았다. 긴토키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고 했으나, 끝끝내 꿈속의 자신은 묵언을 지켜냈다. 그리하여 오늘도 변함없이 익히 알고 있는 전개로 내달리고야 만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꿈은 재방송 드라마처럼 뻔했지만 끔찍하게 선명했다. 오늘도 손을 뻗지 못한 긴토키는 시퍼런 무력감에 가라앉았다.

  또 다시 아침이었다. 아직도 몽중을 헤매는 양 몽롱했으나 긴토키는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가히 무의식적인 행위였다. 사고가 온통 백짓장이었으나 긴토키는 자연스럽게 신센구미를 향해 걷고 있었다. 비틀비틀 둔영을 향해 발을 들이자,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히지카타가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색으로 긴토키는 희미하게 웃는다. 히지카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팼다. 여느 때보다도 더욱 안색이 나쁜 긴토키를 보며 퍽 난처해하는 듯했다. 이윽고 긴토키가 느릿느릿 히지카타의 앞에 멈추어 섰다. 마냥 안도한 듯이 미소하던 긴토키였으나, 히지카타의 오른팔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 돌연 당황한 낯으로 헛숨을 들이켰다.

  “너, 팔의 상처는 괜찮은 거야?”
  “……뭐?”

  당황해야 할 건 오히려 히지카타 쪽이었다. 히지카타가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새도 없이, 긴토키는 정말로 병자를 대하는 양 신중하게 히지카타의 팔뚝을 감쌌다.

  “그때 꽤 심하게 베인 것 같던데… 붕대도 안 감았잖아.”
  “잠깐…….”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 하는 것을 그가 억지로 붙들었다.

  “너 말이야, 검에 베이는 게 익숙하다고 해서 그냥 넘기고 다니면 안 된다. 파상풍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한 번 앓으면 얼마나 무서운데.”
  “무슨 말을, …해결사.”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 귀찮더라도 제대로 병원에 가서…….”
  “해결사!!”

  히지카타의 대성에 팔을 쓸어내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긴토키의 호흡이 미미하게 흐트러진다. 아……. 작게 탄식하며 긴토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체 같은 텅 빈 눈동자가 잘게 부스러졌다.

  “그렇지. 네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히지카타 토시로는, 이런 때에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있지도 않은 상처를 염려하는 긴토키의 태도는 제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자의 그것이라, 히지카타는 일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 며칠간 긴토키는 줄곧 혼란스러워했고, 현실을 붙잡기 위해 몇 번이고 히지카타를 찾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꿈에 덧씌워져 헛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안개처럼 흐트러지는 현실과, 자기가 자신이 아니게 되는 감각. 히지카타가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요도 무라마샤에게 먹혔을 때의 자신 역시 그러했으니까. 그렇다면 제가 아는 사카타 긴토키의 의식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곳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히지카타는 더럭 겁에 질렸다.

  황망히 입술만 달싹이던 히지카타의 눈앞에, 어느덧 긴토키가 작게 실소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허망하게 입술을 뒤틀며 시선을 돌렸다.

  “……미안, 히지카타. 꿈이랑 헷갈렸어.”

  사카타 긴토키의 밤을 집어삼킨 악몽은 조금씩 현실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몇 시간씩 현실감을 잡기 위해 방황하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본의 아니게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그것을 확인하게 된 히지카타가 착잡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긴토키가 그의 배는 더 착잡한 얼굴이 되어 괴로이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출석하듯이 둔영으로 밀고 들어갈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바였으나, 기어이 히지카타에게 걱정을 끼쳐버렸다. 이래서 어제를 마지막으로 더는 오지 않으려 했었는데……. 현실을 갈구하는 긴토키의 무의식은 제멋대로 그를 찾아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다. 긴토키가 서둘러 변명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네가 준 수면제 말인데, 성인은 정량 두 알인 것 같더라. 뒷면에 그렇게 쓰여 있던데 너 영어라서 못 읽었지? 내일부터는 두 알로 먹을 테니 이제…….”
  “닥쳐, 설마 네놈보다 못 읽을까보냐. 이제 이럴 일은 없을 거라느니 뭐니 지껄여만 봐. 당장에 멱을 따버리겠어.”
  “……살벌하기는.”

  긴토키가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히지카타가 혀를 찼다. 일순 드러났던 망연한 표정은 금세 사라지고, 히지카타는 평소의 사나운 인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깡패 경찰이라는 악명에 걸맞은 험악한 분위기로 그가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히지카타는 두어 번 연기를 불어낸 후에야 입을 열었는데, 단정한 입술로 뱉어내는 말은 다소, 아니, 굉장히 일방적인 통보였다.

  “한동안 여기서 묵어라. 매일같이 들르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필요한 모양인데, 번거롭게 매번 오가는 것보다는 아예 여기서 머무는 편이 좋겠지.”
  “어이. 대체 어디 사는 높으신 분이십니까?”
  “그러면?”

  이대로 괜찮다고? 히지카타가 지그시 저를 주시한다. 긴토키의 항변은 거기까지였다. 짤막한 되물음이었음에도 긴토키는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긴토키를 신센구미에 머물게 해주는 것은 전적으로 그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긴토키는 더는 제 불안정한 심신을 히지카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 때문에 히지카타의 배려를 아예 내쳐버릴 만큼 눈이 멀지는 않았다. 며칠간의 수면 부족과 희미해진 자아감으로 긴토키는 무척이나 위태로운 상태였다. 또한 새로이 엿보인 가능성 역시 발목을 잡았다. 히지카타가 지척에 있다면 어쩌면 이 악몽도 마침내 떨쳐질지도 모른다. 지난 일주일간 긴토키는 늘 히지카타와 대면하여 말을 섞어야만 비로소 이곳이 현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곁에 머무른다면, 꿈의 현실성이 진짜 현실에 눌려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방 하나 비워두마. 가져올 짐 같은 건 어차피 없지?”

  긴토키는 아직 수락도 거부도 말하지 않았으나,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면면만을 보고는 제멋대로 제안을 확정지어버렸다. 아마 긴토키가 거절했어도 막무가내로 둔영에 처넣을 태세였다.

  그만큼 히지카타 토시로가 아까 전의 사태를 불안해했고, 그만큼 사카타 긴토키를 염려하고 있던 것이리라. 실로 서투른 상냥함이었다. 긴토키는 어쩔 수 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를 감싸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그 막무가내에도 기꺼이 넘어가줄 수밖에 없었다.



  사카타 긴토키의 악몽은 멈추지 않는다. 도리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요란하게 내달렸다. 같은 둔영에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되나 싶어 방을 합쳐보기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히지카타와 나란히 취침하고 있음에도 꿈은 나날이 깊어졌다. 그의 악몽이 잔가지를 더하며 뼈대를 단단히 세워갈수록 그것은 또 다른 현실처럼 사실적인 색채를 띠었다. 가뜩이나 옅었던 현실감이 미세한 모래알처럼 빠르게 손아귀로부터 흘러내렸다. 긴토키는 몽유병 환자처럼 현실을 부유했다. 반복되는 무력감과 혼란스러움에 질식할 듯이 숨이 막혔다. 긴토키는 어쩌면 제가 미쳐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기실,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라면 객관적인 기준에서의 정신병자가 맞았다.

  긴토키는 가능한 한 규칙적으로 잠들었으나 늘 불규칙하게 깨어났다. 꿈이 길어지는 만큼 수면시간도 길어졌기에 그의 기상시간은 나날이 늦춰지고 있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는 만큼 긴토키는 눈에 띄게 기운을 잃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나 히지카타를 붙잡고 진정하는 데에도 버거웠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히지카타는 잘게 경련하는 긴토키의 등을 쓸어내리며 이곳이 현실이라고 속삭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꿈을 꾸지 않으려면 무의식이 활성화되지 않을 만큼 깊게 잠드는 수밖에 없다는 것뿐이다. 히지카타를 비롯한 다른 대원들도 향초를 사오거나 양파를 머리맡에 놓아주는 둥 나름대로 지식을 총동원하였으나 특별하게 효력을 본 적은 없었다. 꿈은 여전히 폭주하고 있었고, 긴토키는 그 경계선에서 헤매고 있었다.

  긴토키는 더 이상 히지카타와 소통해도 쉽사리 깨어나지 못했다. 며칠 전까지는 직접적인 접촉이 있으면 비교적 빠르게 현실을 인지하였는데, 최근에는 뺨을 후려쳐도 여전히 몽중을 더듬고 있는 것이었다. 긴토키의 상태가 나날이 악화일로를 걷자 이번에는 곤도 이사오가 직접 그를 찾아왔다. 이전에도 몇 번 찾아왔을지도 모르겠으나, 최소한 긴토키가 이곳이 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때에 그와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긴토키는 몸은 좀 어떠냐며 안부를 묻는 곤도의 무거운 낯빛을 농으로 흘려 넘겼다.

  “이거야 원, 고릴라한테까지 걱정을 받다니 말세로군.”
  “판다 같은 낯짝을 한 녀석한테 고릴라 운운할 자격은 없어.”

  곤도는 쓴웃음과 함께 그리 대꾸하였다. 오래간만에 거울을 보니 확실히 눈두덩이 퀭한 것이, 판다라는 단어를 차마 부정할 수가 없다. 시체처럼 온종일 잠만 자는데도 어째서 전혀 못 자는 사람처럼 피로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긴토키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새벽까지 서성이다가 오늘도 수마에 취했다.

  꿈의 진입은 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어느 틈엔가 긴토키는 신센구미 둔영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귓전이 따가울 정도의 통곡들이 윙윙거리며 귓전을 울렸다. 숙연하게 젖어든 공기가 허파를 짓눌렀다. 긴토키가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히지카타 토시로가 울고 있었다.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숨이 멎을 듯이 허덕이며 절규 같은 오열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의 팔에는 곤도 이사오가 안겨 있다. 히지카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자 했던 사람의, 시체가. 오키타 소고는 곤도의 손을 꽉 움켜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소년은 새빨개진 자위로 흉흉한 살의를 불태우며 끝까지 눈물을 삼켰다. 까만 제복들이 하나둘씩 국장의 주검을 둘러싸고 무릎을 꿇었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그가 오래도록 시달려온 악몽의 시발점임을 알았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것처럼 속속들이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달리던 꿈이 박차를 더했다.

  밤 순찰을 나섰던 신센구미의 국장 곤도 이사오가 의문의 습격에 살해당했다. 대원들은 비통함에 젖어 범인의 흔적을 수색하였다. 이윽고 조사를 마친 야마자키 사가루가 여태 없이 새파랗게 굳은 낯으로 보고했다. 국장의 살해는 어느 양이파의 소행으로, 현재 외진 곳에서 널따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무기를 점검하고 즉각 모든 대원들이 출격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일망소탕을 위해 전력을 분산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산개된 신센구미는 예상보다 거대한 규모의 양동으로 인해 되레 덮쳐지고 만다. 대원 중 몇이 인질로 붙들렸다. 1번대 돌격대장 오키타 소고가 전황을 휘젓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히지카타가 저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너와 내가, 히지카타가.

  긴토키는 뻣뻣한 몸으로 황망히 히지카타를 올려보았다. 적진의 최심부였다. 고작 독 따위에 무력해져서는, 생각대로 따라주지도 않는 이 쓸모없는 몸뚱이란! 어디까지나 신센구미의 일이라며 억지로 돌려보내려던 것을 기어이 뒤쫓아온 건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왜. 쉽사리 적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그를 밀쳐내고 히지카타가 뒤돌아섰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웃었다. 신센구미를 지키기 위해, 곤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불살라 영혼을 지키기 위해. 나는 그런 너를 지켜주고 싶었는데. 아무리 해도 손이 닿지를 않았다. 끔찍하도록 푸른 하늘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처음으로 제 꿈의 모든 전말을 보고 깨어났을 때, 긴토키는 히지카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이번에는 잠들어 있는 내내 접촉을 시도해보자고 녀석과 얘기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다 차차 가라앉았다. 새파랗게 메워졌던 시야가 이번에는 히지카타로 가득했다. 제 탓에 덩달아 잠을 이루지 못한 히지카타는 저 못지않게 초췌한 낯을 하고 있었다. 이곳의 히지카타는 전장에 서 있지 않다. 피에 절어 있지 않다. 오른팔의 상처도 없다. 제게 등을 돌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긴토키가 탄식하듯이 떨리는 숨을 불어냈다. 간신히 끄집어낸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거 알아?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더라고.”

  만일 그것이 제 무의식이 빚어낸 심상세계의 풍경이라면.

  “나는… 내가 널 지킬 수 없다고, 무의식중에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걸까.”

  한 번 무언가를 잃어본 자이기에 그 빈자리의 공허함을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다. 소중히 품에 보듬던 것이 무너질 때의 상흔이 너무나도 아파, 한 번은 아예 아무것도 품에 보듬지 않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끌어안아버렸다. 끝까지 안고 가기로 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지 않기로, 지켜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이 품어버린 것들이 더없이 소중하여 절대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들과 함께 여러 가지 것들을 지켜왔을 터였다.

  그러나 만일, 스스로도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서부터 내심,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하고 있었다면. 이전이라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의 소중한 자들부터가 저를 뻥뻥 걷어차며 무슨 헛소리냐며 큰소리쳤을 테니까. 그러나 꿈속의 사카타 긴토키가 일순 절망을 맛보았기에, 꿈과 현실이 뒤섞인 지금은 그것이 꿈결의 감정인지 스스로의 본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혼동이 잦아들었다. 꿈의 감정이 아득하게 저를 집어삼켰다. 그러나 긴토키가 거듭 현실을 잃기 직전, 히지카타의 사나운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웃기지 마. 네가 왜 날 지켜.”

  히지카타 토시로는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부담이 되는 거다. 너는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아도 돼.”

  아마도, 히지카타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비호에 대한 강박은 통상 압박으로 작용할 터이니, 조금 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으라는 그 정도의 의미였을 터였다. 그런 히지카타의 마음씀씀이는 무척이나 고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 그런가.” 긴토키가 한쪽 팔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미안.”

  제가 듣기에도 상당히 불안정한 목소리였지만, 새까맣게 덧씌워진 시야는 히지카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무언가를 되묻거나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새로운 향초를 켰다. 라벤더의 은은한 향내가 아침공기와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푸석해진 백발을 쓰다듬는 손길을 묵묵히 받아내며 긴토키는 다시 혼곤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변함없이 꿈은 되풀이된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망가진 LP반처럼. 실로 멍청하게도 사카타 긴토키는 독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속수무책으로 침을 맞았고, 히지카타 토시로는 엷게 웃으며 상처투성이 등을 보였다. 벌써 몇 번이나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그 미소를 볼 때면 가슴께 깊은 곳이 저미도록 아팠다. 숨이 막히도록 괴로웠다. 긴토키가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단단하게 굳어진 몸뚱이가 초라하게 미동하였다. 저를 옥죄는 마비와 전력으로 맞서며 그는 포효하듯이 몸부림쳤다. 애매하게 검을 움켜쥔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꿈이라면 움직여. 그가 절실히 속삭인다.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아직 지킬 수 있을 터였다. 붙잡는 쪽이든 놓는 쪽이든 어느 쪽도 괴롭다면, 모든 것을 전부 짊어지고 괴로워하고 싶었다. 등을 짓누르는 무게에 휘청거리면서도 끝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긴토키가 길게 목을 빼고 전신을 뒤흔들었다. 마치 가위에서 풀려나는 것처럼, 일순에 몸이 자유로워졌다. 목도를 고쳐 쥐고 긴토키가 무릎을 폈다. 삐걱거리는 다리가 온전히 지면에 섰다. 하늘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가 땅을 박차올랐다. 히지카타가 다시금 저를 돌아본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로 새하얀 얼굴이 놀라 이지러졌다. 손을 뻗었다. 마침내 뻗을 수 있었다.

  그러나 히지카타에게 닿으려던 찰나 그 빛깔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히지카타의 가슴을 꿰뚫으며 터져 나오는 붉은 핏줄기가 대신 손아귀에 잡혔다.

  이 감정은 누구의 것일까.

  “………!!!”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내던지듯이 이불을 걷어내자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절어 축축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긴토키가 시선을 돌렸다. 히지카타가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새벽이었다. 밝은 달빛 아래는 그저 투명하리만치 푸르렀다. 그 어디에도 붉은빛은 없다. 전장의 소요가 이명처럼 멀어지자 남은 것은 달밤의 고요한 정적뿐이다. 하아, 하. 산발적인 호흡이 터졌다. 긴토키는 무릎걸음으로 히지카타에게 다가갔다.

  한낮이든 밤이든, 전장이든 둔영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긴토키가 처연히 그를 올려보며 미소 지었다. 눈앞에 히지카타 토시로가 있었다.

  “보고 싶었어, 정말로… 보고 싶었어. 히지카타.”

  설령 이쪽이 꿈이라도 상관없었다. 이제는 어느 쪽도 같았다. 히지카타의 손을 붙잡아 가슴께로 잡아끌었다. 미지근한 체온이 심장에 닿아 어지러이 날뛰었다. 질척하게 젖어들던 손바닥의 감촉을 잊고 싶어, 긴토키는 붙잡은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늘을 뒤집은 결과는 두 번째의 파국이었다. 지키기 위해 뻗은 손은 끝내 소중한 것을 망가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 또 다시 눈앞에서 스러졌다. 찰나 느꼈던 그 절망감은, 아마 현재의 자신과 꿈속의 자신 모두의 것일 터였다. 그것은 정말 끔찍하게 괴로운 감정이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그렇기에 한 번 더 도약한다. 회전판의 궤도를 억지로 비틀어 새로운 결말을 추구할 것이다. 만일 제가 다시 잠에 들고, 같은 꿈이 또 반복된다면, 이번에는 다른 선택지를 고를지도 모른다. 히지카타를 직접 붙잡으려 들지 않고 그저 소리만 칠 수도 있고, 주변의 적들부터 정리한 뒤에 주의를 끌 수도 있다. 무엇이던 간에 그는 멈추지 않는다. 또 한 번 절망하더라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더라도, 사카타 긴토키는 결코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히지카타의 종말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경계선 따위는 몇 번이고 지워버릴 수 있었다.

  “네가 내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강하다는 건 알고 있어. 그래도… 히지카타.”

  꿈속의 히지카타라면 아마 그런 결말에 만족했겠지. 그는 곤도 이사오의 유지를 지키고, 붙들려 있던 대원들을 지키고,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기 위해 뒤돌아선 사람이었다. 히지카타는 이미 죽음을 불사하였다.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길목에 사카타 긴토키의 존재는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긴토키는 히지카타를 지키고 싶었다. 지키고자 하였다.

  “내가 널 지키게 해줘.”

  부스러질 듯한 유약함뿐이더라도, 지킬 것이다.

  시선이 맞부딪히며 한 덩어리로 엉켰다. 맞닿은 손에서부터 심장이 규칙적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서 히지카타의 손이 움찔 미동하더니, 이윽고 그는 꽉 붙들려 있던 손을 조심스레 빼내었다. 긴토키가 꿈에 취한 듯 몽롱하게 그를 본다. 그 눈동자에 시무룩함이 얹히기 전, 히지카타가 긴토키를 끌어안았다. 어깨를 살짝 감싸며 히지카타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체온이 얽히고, 맞닿은 고동이 엇박자로 울렸다. 온전히 제 몸을 내어준 채 히지카타가 속삭였다.

  “성가신 녀석. 넌 네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아둬야 해.”

  귓전에 닿는 나직한 저음은 어디까지나 평이했다.

  “무엇이든 자기 손이 닿는 곳에 두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디질 못하지.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니면서 팔 안에 끌어들이고 나야만 직성이 풀려. ……그래. 이미 여기까지 날 끌어들인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둘러 안은 팔을 풀고 히지카타가 살며시 물러났다. 짐짓 화가 난 것 같았던 어조와는 딴판으로 놀랄 만큼 온화한 표정이었다. 저를 놀리려 들었음을 알았지만 화를 낼 기력이 없었다. 기실 그다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꿈결처럼 온 세상이 황홀하게 부유했다. 그가 제게 손을 뻗는다. 저를 이끄는 손길을 따라 순순히 이부자리에 누웠다. 밤하늘을 등진 히지카타가 살풋 눈모를 접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그의 전신을 태웠다.

  “너는 이미 몇 번이고 나를 지켰잖아.”

  눈이 시리도록 푸른 달이 있었다. 월광 아래에 네 얼굴이 하얗게 타오르고, 저를 향해 엷은 미소를 그린다. 그렇게나 간절히 그리워했던 살아 있는 너의 모습이다. 잠든 동안은 내가 널 지킬게. 히지카타가 속삭였다. 새파란 밤하늘이 눈꺼풀을 덮었다.

  그제야 사카타 긴토키는 안도한 듯이 잔잔하게 웃으며, 눈을 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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