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종말담

순정철학논고 벤소피

백업 by 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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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넌...

염천炎天에 흡사 찜기가 되었던 교실은 해가 산중턱을 넘어감에 따라 언제 그랬냐는 듯 점점 식어 갔고, 만들어진 공기는 소피아가 평소에 쉽사리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의자에 반대로 걸터앉아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소년이 어째서인지 교과서와 전공책에서만 봤던 선학의 이름을 하고 있고, 홍색의 노을이 들어서는 교실에는 그와 그녀 단 둘만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라는 기묘한 상황에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다는 거다. 따라서 철학도의 정신을 가진 회색의 눈동자가 데구루 굴러 소년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사소하디 사소한 궁금증에 대한 답이다. 소피아는 어쩌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는가를 잠깐 생각해 보기로 했다.

대학생이 되어 겪는 문제들은 대체로 수면 부족을 원인 삼아 그녀의 일상생활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이 부정적이라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결국 학교에서 일과 내내 잠만 잤다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현실의 대학에서도, 쌍둥이 지구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깜박 잊었다는 핑계를 대며 피로회복제를 사지 않았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그걸 마셨다고 해서 몸 상태가 좋아질 거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게 점심식사마저 거르고 잠 못 자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듯 하루종일 눈을 감고 있다가 겨우 깬 것이 몇 분 전의 일. 소피아가 아직은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여대자 눈앞에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벤 스피노자였다.

"아, 일어났네."

"뭐야, 이게 뭔……"

"너무 피곤해 보여서 못 깨웠어. 아침 시간부터 계속 자더라. 공부하느라 밤이라도 샜어? 음, 음수 점수 받은 충격은 이해하는데 점수에 그렇게 신경쓰진 마, 소피."

소피.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소피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내 차가워진 머리로 이곳이 아직 쌍둥이 지구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아주 세상모르고 푹 잤단 뜻이렷다.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이건 제 과실이라 연장근무로도 안 쳐 줄 것 같았다. 어디선가 당연한 소리를, 하고 딱 잘라 말하는 서인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오십칠 분. 석식 먹을 거야?"

"먹어도 돼? 나 통학하는데."

"안 될 건 없지. 근데 오늘 급식 맛없더라. 아, 소피, 혹시 유당불내증 있어?"

"아니. 아마도."

소피아의 말을 듣자마자 스피노자는 알겠어, 라 짧게 대답하곤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졸지에 혼자 남은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다 핸드폰이나 확인해 보기로 했다. 시계는 어느덧 여섯 시, 산과 산 사이 타오르는 태양이 얼굴을 점점 감췄고, 소피아는 멍하니 창 밖에 시선을 뒀다. 기다려야 하는 걸까. 그런 고민이 들었을 때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는 소피아가 그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눈을 약 두 번 정도 더 깜박였을 때쯤 교실의 문이 열리고 스피노자가 들어왔다. 스피노자는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체육을 했던 그녀는 미세하게 지친 그의 숨소리를 포착할 수 있었다. 청각이 결론을 내리자 그제야 시각은 정신을 찾는다. 시야에 들어온 장면이라 하면 간단명료하면서도 놀라운 것이다. 스피노자는 양 손에 빵 봉지와 우유를 들고 있었다.

"그건 뭐야?"

"저녁이지."

즉각 돌아온 답변 탓에, 소피아는 뭐라 반박조차 못하고 스피노자가 건네는 크림빵과 락토프리 우유를 받아들었다. 아니, 락토프리가 맞나? 소거가 잘되는 우유는 뭔 우유인데? 잡생각을 떨치고 빵을 베어 물자 과하지 않은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오, 이거 맛있네...... 잠깐만 기다려 봐, 지갑 금방 꺼낼게."

"돈 갚으려고? 안 갚아도 되는데. 애초에 내가 멋대로 사 온 거고."

"그건 그렇지만…"

안 받는다면 뭐. 소피아는 계속해서 빵을 먹었고 스피노자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이 무언가를 먹는 소리로만 가득 찬 교실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소피아다.

"넌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기숙사 안 가고."

"누가 혼자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데 걱정돼서 어떻게 가? 할 일도 없겠다, 그냥 여기에 있었지."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장난스러운 대꾸와는 반대로 그런 말을 들어 버린 탓에 소피아는 지금 바로 집에 가 보겠다, 따위의 무책임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벤 스피노자가 이를 노린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는 부정이겠으나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대답은 감사 인사 후에 너도 이만 들어가 봐라 따위의 말을 남기고 하교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교실의 온도 탓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분위기 탓이었을까. 이성적인 판단을 거의 할 수가 없게 된 소피아의 손에 들린 빵과 우유는 착실히 부피를 줄여 갔다.

"너 우리 반 애들한테 아직 정 없지."

"컥, 콜록."

우유의 마지막 한 방울을 빨대로 마시던 소피아는 갑작스레 날아온 돌직구에 당황해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 행동에는 질문을 얼버무리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스피노자의 확신이 담긴 눈빛에 소피아는 결국 제 진심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 같아. 너희한테 별 생각이 안 들어. 아, 막 선 긋는 건 아니고 아직 좀 낯설어서…"

"왜? 예전 학교 친구들이 그리운 거야?"

"그…렇다고 봐야 하나. 뭐, 그렇지."

핑곗거리를 생각하기도 귀찮았던 탓에 소피아는 별 생각 없이 해당 질문에 긍정했고, 스피노자도 더 이상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충은 짐작했어. 음, 네가 잠든 사이에 생각을 좀 했는데 난 너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러니까,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너를 보면서, 계속 너에 대한 생각을 했어. 머릿속에 네 생각이 들어차서 떠날 줄을 모르더라... 스피노자는 그 말을 삼키고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응, 그러니까 좀 알려 줄래?"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이 세계의 나에 대해선 나 자신도 아직 잘 알지 못하는데. 여차하면 기억상실이라고 얼버무릴까.'

"궁금한 건 많지. 생일이라던가,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솔직히 예전 학교에서 어땠는지도 물어보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네가 예전 학교 애들 생각하느라 우리한테 더 거리감을 느낄 것 같아서 묻어 두려고. 공부는 뭐, 잘했겠지. 이번 시험은 우리 학교 방식에 안 익숙해서 뭔가 실수라도 했다고 생각 중이야."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그냥 내 실력 부족인데."

"겸손이 심한데. 그게 진짜라면 우리 학교에 입학이 가능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네 실력이 여기까지일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말하자면… 기대하고 있어."

"너는 내 어디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드디어 나에 대해서 질문을 하네. 처음 아냐?"

농담이야. 덧붙이는 스피노자의 얼굴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음, 왜일까. 널 보면 어쩐지 뭐든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유 없이 말이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단순히 이유가 없는 건지, 나조차 이유를 모르는 건지."

스피노자 철학이 어땠더라. 그녀는 답 비슷한 것이라도 찾고자 제 전공책의 내용을 생각했다. 그러다 드는 궁금증은 철학과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내가 살던 곳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말이 있어."

둘뿐인 교실을 채우던 서로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고 이어져 마침내 도달한 것은 우습고도 실없는 것이었다.

"있잖아, 넌… 저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네 최대한의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뭐 그런 은유였다고 소피아는 기억한다. 저 말은 어째서인지 스피노자가 한 말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며,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궁금해졌다. 그라면, 저 격언이 내포하는 의미 따위야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멋진 말인데."

짤막한 감상은 확실히 기대와는 다른 말이다. 소피아는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게 필연적이라면 순응하면서 평소처럼 열심히 살아가야지.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무턱대고 부정하고 싶지도 않네."

"그럼, 거의 동의한다는 뜻 아니야?"

"그렇게 되나. 아,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한 게 생겼어."

"또? 뭔데?"

"소피, 넌 바로 내일 이 세상이 무너진다면 어떨 것 같아?"

가혹한 질문이 내리꽂혔고,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소피아의 말문을 순간 막아 버렸다. 그녀는 사실상 이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한들 한낱 이방인인 그녀에게는 단순한 구운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고민하는가? 그 이유야 뻔했다. 소피아는 벤 스피노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감정이 단순히 호감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기만일지, 혹은 일말의 진심이 섞인 기만일지는 그녀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난, 그러게."

이방인의 혀는 몇 번이고 머리에서 신중하게 검토된 단어만을 그 위에 싣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지금 내가 깎아지른 절벽 사이 연결된 밧줄의 곡예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라고 하면, 너는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소피?"

나에게 있어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내 세계도 아닌걸.

그렇지만 리케이온의 '벤 스피노자'라는 존재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냐고 한다면……

"......역시 이건 나중에 대답할래. 나중에 확신이 들면."

"무슨 확신?"

"그런 게 있어."

"뭐? 결국 질문에 전부 대답한 건 나밖에 없네. 어쩐지 손해 보는 기분인데... 그래, 이렇게 하자. 나중에 그 확신이라는 게 들면 꼭 나한테 말해야 돼. 무르기 없기다."

스피노자는 손가락을 걸어 왔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학생 같아서, 소피아는 제 손가락을 마주 걸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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