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진담

순정철학논고 한지혜+서인식

백업 by 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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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배우는 것이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인문학도들이 알고 있을 테다. 허나 그러한 사실이 저명해진다 한들 철학과에 지원하는 학생 수를 늘리는 데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또한, 그거야말로 인문학도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현대인들은 복잡한 생각보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을 선호하며 최우선의 가치를, 혹은 그것을 이루는 절대가치를 돈으로 여긴다. 일례로, 어느 철학과 4학년의 여대생 한지혜 또한 취업 걱정에 한참 시달리던 평범한 학생이었으니.

"18시 27분 49초 귀환 확인. 수고하셨습니다."

연구원 서인식은 늘 그랬듯 현실 세계로 돌아온 한지혜를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맞이했다. 곧이어 키보드 소리가 서인식의 손에 의해 일정한 박자를 만들어내었다.

한지혜와 서인식의 관계는 애매했다. 한지혜는 직업병-전공을 직업이라 하기에는 애매했으나-마냥 그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하려 애썼으나 늘 실패하곤 했다. 고용주라기엔 그의 직책이 신경쓰였으며, 직장 상사라기에는 그와 자신이 말하는 것에 선이나 벽이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서로 막말을 깠단 소리다. 그렇다고 직장 동료라기엔 또 모순적으로 둘 사이의 미묘한 수직적 관계가 정의를 방해했다. 애초에 이름을 안다고 한들 늘 연구원님, 연구원님 하고 불렀으니... 한지혜는 이렇게까지 쓸데없는 일로 골머리를 앓아본 적은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 인 미만 사업장이라고 했었지. 진짜 직원이 저 사람 하나랑, 말랑이라고 불리는 이 정체불명의 생물들밖엔 없는 걸까... 한지혜는 늘 그랬던 것처럼 흐트러진 옷을 대충 툭툭 쳐서 정리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지대한 공간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큰 회사인데, 설마. 루틴마냥 발걸음을 가볍게 돌려 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예정이었으나, 한지혜는 생각을 바꿨다. 아니, 어쩌면 오늘은 이렇게 생각하게 될 거라고 예정되어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저기, 이제 뭐 하실 예정이에요?"

"예?"

늘 짐을 챙겨 간단한 인사 후 나가 버리던 한지혜의 예상치 못했던 말에 서인식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어두운 눈동자에 옅은 빛이 일었다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금방 꺼졌다.

"아뇨, 그냥... 늘 제가 먼저 나가잖아요. 설마 새벽 늦게까지 여기서 일만 하시는 건 아닐 테고."

"설마요. 저도 할 일은 얼마 없어서 곧 퇴근합니다. 집에 가서... 뭐, 쉬다 자겠죠."

"그럼 따로 일정은 없으신 거네요?"

"예, 그렇습니다만."

"잘됐네요. 그럼 저랑 잠깐 어디 좀 가실래요?"

한지혜는 술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서인식이 그것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다 그녀는 제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금방 깨닫고 횡설수설 변명했다. 아뇨, 그게... 직장... 같이 다니잖아요? 말하자면 회식? 친목 도모? 본인이 해 놓고도 이상한 말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서인식은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모니터 쪽으로 향했다. 그것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인 한지혜는 짐을 챙기던 손을 재촉했으나, 곧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뗀 서인식이 내뱉은 것은 뜻밖의 말이다.

"그러죠."

"......네?"

"방금 다 끝났습니다, 업무."

한지혜는 연구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은 채 거리를 걷는 서인식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한지혜의 안에서 서인식이라는 사람은 흰 가운을 입고 특유의 무감정한 눈과 낮게 묶은 머리를 한 이미지로 정의되었으니 밖에서도 크게 다를 것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를 티나지 않게 관찰하려 했으나 서인식은 주변에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금방 한지혜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조차도 어느 정도. 그가 저도 사회생활 정도는 하는 인간입니다, 하고 짧고 굵게 말한 탓에 한지혜는 괜히 마른침만 삼키며 시선을 거두고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제 결정을 아주 잠깐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가게는 그날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여기예요."

"그런가요? 전 처음 와 보는데요."

"잘됐네요. 저는 자주 오거든요. 교수 짜증날 때나..."

"항상 온다는 뜻입니까."

"하하, 농담도 참...... 어떻게 아셨지."

문을 열고 들어간 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한지혜는 두 번쯤 비운 잔을 툭툭 쳤다. 잔을 이루는 유리가 손톱과 닿자 청아한 소리가 섞여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때늦은 에어컨 바람이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식혔다. 고개를 드니 여전한 무표정의 서인식이 있었다.

"안 마셔요? 제가 사는 건 아니지만..."

"데려온다는 곳이 이렇게 본격적인 술집이었을 줄이야. 그건 그렇고, 저도 마시긴 마셨습니다."

"겨우 한 잔?"

확실히 머리에 알코올이 들어가니 평소엔 눈치 보여서 못 했던 소리가 잘만 나왔다. 그렇다고 해도 오래 이어지는 대화거리를 찾는 건 역시 어려웠다. 절망적이게도, 한지혜와 서인식의 교집합은 업무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거의 동시에 깨달았다.

"그곳에서의 학교생활은 적응되고 있습니까?"

"와, 이런 데서도 일 얘기예요?"

"이게 아니면 딱히 할 대화도 없지 않나요."

"그건 그렇네요...... 뭐, 네. 수업시간엔 졸리지만. 교수들이 이름값을 못해요."

농담 섞어 그리 말하니 어색하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이걸 의도한 걸까. 한지혜는 손에 집히는 버터오징어를 잡고 작게 베어 물었다. 생각보다는 딱딱하지 않았다... 어라, 방금의 생각은 무엇을, 아니, 누구를 보고서 든 생각이었지? 알코올 때문인지 자꾸 쓸데없이 타오르는 사고는 명백하게도 이성을 살라 먹는다.

"대학교 애들이랑 처음 만났을 때 무슨 얘길 했더라. 아, 제 첫인상 어땠어요?"

"얼빠진 게 믿음이 영 안 갔죠. 일단 철학과에서 삼 년 넘게 굴렀다고 하시니 채용은 했지만. 선택과목으로도 윤리를 배우셨을 테니 따지자면 더 오랜 시간인가요. 아, 그러고 보니 어쩌다 철학과에 가신 건가요? 취업 안 되는 건 익히 아셨을 텐데."

"이과의 잔혹한 질문이란... 뭐어, 그 정도는 알았죠. 대학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도 있으니, 너무 이상만 좇으면서 과를 결정하면 안 된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분명히. 그런데 어쩌다 철학과를 써넣은 거지.

"솔직히 말하면 충동이었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터무니없지. 만약 그 충동을 부추긴 게 싱거운 이유였다면 굳이 이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냥,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만큼의 생각이 있는 거잖아요. 아, 이건 제 동기가 해 준 말이에요. 되게 좋은 말이죠... 아무튼, 저나 제 동기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이 세상 사람들이 무슨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뭐, 이렇게 말해도 지금은 현실적인 문제, 그러니까 졸업 논문이랑 취업 탓에 생고생하고 있지만요."

"결론은 이상주의인가요."

"그럴 리가요. 왜, 당장에 과학사나 역사, 정치 소개하는 글 몇 개만 펼쳐 봐도 철학자들 이름이 줄줄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들은 말이죠, 늘 궁금해했고, 또 가설을 세웠고, 세상의 이치를 알아보려고 노력했어요. 그 노력이 이어진 끝에... 이런 사회가 만들어진 거 아니겠어요? 아,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이상주의 같네. 물론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말이 너무 많아졌다. 그렇게 생각한 한지혜는 헛기침 몇 번 하고 다시 잔을 들었다. 예의상 해 준 질문이었을 텐데, 신나서 주절주절 떠들었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 행동도 역시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제 본성일까. 어느 쪽이든 별로 달갑진 않았다.

"......바꿀 수 있을 겁니다."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졸업 논문 무사히 쓰시라고요. 인용만 무더기로 넣어 놓은 콜라주 같은 논문 만들지 마시고. 아, 콜라주가 아니라 조각보라고 하나요?"

"이 사람이 또 시비네. 어째 좋게 넘어가는 일이 없어. 그렇게 말 안 하셔도 알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다음부턴 이런 약속은 사전에 조율하세요. 지금 조금 후회할 것 같으니까."

"본인이 따라와 놓고 그게 뭔 소리세요?"

후회라니, 뜬금없이 무슨 소리람. 잔을 비운 한지혜가 불만의 뜻을 담은 표정으로 서인식을 다시금 응시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서인식 그대로인 채로 맞은편에 앉은 채 잔에 든 액체를 홀짝이고 있었다. 다만, 입에서 나온 말과는 반대로 서인식의 얼굴은 아까의 무표정보다는 확연히 나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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