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순철논 합작 : 리케이온 독서 연구회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 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나희덕, 「땅끝」
“한지혜 씨가 이성적인 면이 있긴 해도 역시 문과생이네요.”
말랑이들이 쌍둥이지구로의 전송을 준비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한지혜는 가방에서 얼굴의 절반만 한 시집을 꺼내 읽었다. 할 것도 없겠다, 한지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서인식에게 책을 펼친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페이지가 넘어간 적이 없다는 것은 너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 페이지에 좋아하는 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좋아한다기보다는…….”
말랑이 하나가 믹스커피 두 잔을 서인식에게 들고왔다. 하나를 아슬아슬하게 입에 문 서인식이 나머지 하나를 한지혜 옆의 테이블 위에 놓았다.
마시세요.
아, 감사합니다.
약간 누런 빛이 도는 종이 위에 검은 활자를 길게 뻗은 손가락이 훑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뒷걸음질’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멈추고, 끝가지 갔다가 다시 또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냥, 남들이랑 똑같은 이유죠. 내 생각이 나서.”
스무 해 조금 넘는 인생이라도 굴곡은 제법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학창시절에도, 그보다 더 어렸을 적에도, 그리고 지금도. 뒷걸음질 치는 순간은 언제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성적이 원했던 만큼 안 나오면 그것만큼 서러운 게 없었고, 여동생 가출했다 소리 들었을 때도요. 철학과 가겠다는 말에 꿈도 꾸지 말라고 소리치시던 아버지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해요.”
어쩌면 집안내력일지도 모른다. 현실과 동떨어져서,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사는 건. 조금 사차원 기질이 보이는 남동생이나 예술을 하는 여동생, 철학을 했던 자신을 보면 한지혜는 그 무섭던 부모님도 비슷한 과거를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모든 시작은 철없던 시절, 머리가, 가슴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것을 따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이 한 말이 무어가 좋아서 그리도 가슴이 뛰었던지, 졸업을 앞둔 지금 생각해보자니 한지혜는 고등학생 시절의 꿈도 열정도 잃어버린 후였다.
“이제는 그닥 좋아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실 그때도 좋아서 간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가려는 대학 성적 맞추다보니 철학과였던 것도 있고, 그때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겉멋들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죠.”
입시라는 거대한 산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저 황금과 산호의 빛깔을 띄는 노을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하지만 끝내 현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평선이 그것을 삼켜버리고,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한지혜는 바다와 땅이 만나는 경계에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살려면, 먹고 살려면 거기서 되돌아가는 게 맞았을 텐데……. 이상하게 그러기가 싫더라고요.”
“이해가 안 되네요.”
서인식은 한지혜에게서 등 돌리고 앉아 자판을 치고 있었다. 막 일을 시작할 때에는 그 화면에 뜨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 적도 있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분야여서 궁금해하지 않은 지 오래다.
“저도 이해가 안 돼요. 다른 동기들이 하나둘 떠나는 중에도 뭐가 좋다고 그 취업도 안 되는 과에 남았는지, 참…….”
“예전에 무슨 계기가 있었을 수도 있죠. 교수나 선배가 무슨 말을 했다거나, 그런 거 말입니다.”
“아, 그런 건 있어요.”
1학년이었던 겨울날, ‘문과 대학 통폐합 반대’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던 그날, 한지혜는 아직도 바로 옆에 있던 선배가 해준 말을 기억한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 생각이 있는데 그걸 다루는 걸 가르치지 않으면 어쩌느냐 하고, 한지혜의 귀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걸었지. 직후에 선배는 바로 옆의 또다른 선배와 시시한 농담을 나눴지만 한지혜는 ‘사람 수만큼의 생각’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우리 과 폐지된다고 했을 때에는 진짜 망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 아버지 말씀 들을 걸 후회도 엄청 했어요. 열정이 다 닳아버리니까 번아웃 비슷한 것도 왔고 졸업해서 취업할 때 되니까 저한테는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거 있죠?”
전동 베드 위에 걸터앉은 한지혜의 발은 땅을 딛고 서기에는 너무 높이 있었다. 받쳐줄 것 없는 발이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몇 번인가 엑스자로 교차한 베드 다리에 발을 얹었다가도 곧 힘없이 미끄러졌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생이 끝나라는 법은 없더라고요.”
“마침 그때 제가 연락을 드린 모양이네요.”
“거의 다 그게 시작이긴 해요.”
이상은 밤하늘의 별처럼 높고 지는 해처럼 아름다운 것이다. 있는 줄도 몰랐던 한지혜의 이상은 너무 멀었고, 그래서 위태로웠다. 그리고 한지혜는 초연한 사람이다. 회피의 결과인 그것도 초연함이라 부를 수 있다면.
“사실 처음에는 계약 기간 끝나면 관둘 생각만 있었거든요.”
“사기꾼인 줄 아셨습니까?”
“모에화 같은 단어 선택을 들으면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할 걸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그저 묵묵히 걸었다. 아무 일도 없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그 앞이 천 길 낭떠러지든, 불타는 갈대밭이든 신경쓰지 않는 사람처럼. 처음 걷기 시작할 때에는 열 명 정도가 더 있었는데 누구는 뒤쳐지고, 중간에 지나친 사람도 있고, 그러다보니 결승선 바로 앞에 서서 돌아보자 한지혜는 혼자였다.
“고등학교라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일단 대학은 안 그랬죠. 처음부터 전과할 생각으로 온 사람도 있었고, 그게 아니어도 하나둘 떠나가고, 결국에 끝까지 남는 사람은 얼마 안 돼요.”
“…….”
“그러다보니 저도 거기 휩쓸려서 닳아갔던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다 하는 대로만.”
초연함을 달리 말해 무심함이라고도 하고, 무심함을 또 달리 말하면 생각이 없다는 의미도 되고, 생각이 없단 말을 또 달리 하면 수동적이라는 말도 된다. 한지혜는 초연하게, 무심하게,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철학과라는 도박을 한 주제에 안정을 바란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적어도 남들 하는 만큼만 하면 평타는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이었어요. 정말로 순수하게, 철학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붙들고 늘어지는 분위기. 잔뜩 반박이나 당할 걸 알면서도 눈을 반짝이면서 자기 생각을 늘어놓는 게, 난 이제 저렇게 못할 것 같았는데, 너무 빛나더라고요.”
무채색으로만 칠한 듯이 단조롭게 느껴진 쌍둥이 지구에서 오직 눈동자만이 유채였다. 각각의 것들이 저마다의 색채를 자랑하고 있어도 소피아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한한 탐구욕으로 차오르는 눈동자의 빛깔 뿐이었다.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하고. 그렇게 계속 지켜봤는데 그 모습이 몇 년 전의 저 같기도 해서, 어쩌면…….”
“……어쩌면?”
“나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철학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거.”
그곳에서조차 소피아의, 한지혜의 두 눈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순백이었다.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비어버린 자신이라면 또 분위기를 타고 채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한 구석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 애들은 정말로 서인식 씨가 만들어낸 데이터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좋아요.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거든요. 이미 찌들어서 누가 오든 못 되돌릴 것 같았는데…….”
이미 다 마신 컵을 한참 만지작거리던 한지혜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멋쩍은 듯 말랑이에게 컵을 건넸다.
말랑?
아니, 괜찮아. 고마워.
말랑…….
새 믹스커피 봉지를 다시 넣어둔 말랑이와 한지혜가 최종 점검을 하는 동안, 서인식은 종이컵 윗부분을 돌려가며 잘근잘근 씹었다.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지루하고 별로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잇자국이 선명한 채 일그러진 빈 종이컵이 어질러진 책상 위를 굴러다녔다.
“고마워요, 서인식 씨.”
“……점검 끝나셨으면 시작하시죠. 몇 분 지체됐습니다.”
저한테 이런 기회를 주셔서.
아마도 고맙다는 말의 생략된 앞부분은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잠든 한지혜를 옆에 두고 서인식은 스스로가 그런 감사를 받기에 적절한 사람인지에 대해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저 업무였을 뿐이다. 한지혜를 쌍둥이 지구 프로젝트에 투입시킨 것은 서인식에게 있어 칸트, 그 고지식한 양반이 좋아 죽는 의무란 것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됐다.’
타자와 나 사이의 관계라던가, 감정이라던가, 그런 걸 규정하는 건 과학자인 서인식의 일은 아니었다. 과학자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저 그런 사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 뿐, 조용한 연구실에는 유독 타자 소리가 크게 울렸다.
부족한 글이지만 참여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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