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조화
사립 리케이온 학원을 졸업하고 10년 후, 우리의 재회는 필연이었다.
리케이온을 졸업하고 어느덧 10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 리케이온의 자랑스러운 졸업생들이 워릭셔로 모였다.
아, 바람이 분다. 늦봄의 바람은 적당히 온기가 실려 있어서 마음에 든다. 하나둘 모여드는 손님들 덕에 안쪽에서 기다리는 그에게도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래글리 홀의 정원을 가득 채운 모두가, 앤 핀치의 결혼을 축하하러 와준 이들이다.
“아아, 머리 아파!”
앤은 응접실 소파에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열 살 조금 넘어서부터 달고 산 편두통이 또 말썽이다.
책상에는 구혼자들이 보내온 선물이며 편지며 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에드워드 콘웨이를 차가운 땅에 묻은 지 반 년이 겨우 되어서, 모두 아직 재혼하지 않은 콘웨이 백작부인에게 날아온 것들이다.
“다들 정신이 나간 거야, 분명해.”
콘웨이 백작부부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에드워드 콘웨이는 앤 핀치 콘웨이가 하는 학문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고, 앤 핀치 콘웨이도 아내로서 남편 에드워드 콘웨이를 존중했으며, 어느 정도의 애정과 제법 컸던 친밀함, 그리고 기저에 깔린 의무감으로 이루어진 결혼 생활 중에는 사랑스러운 아이도 찾아왔다.
행복할 줄 알았다. 에드워드 콘웨이가 갑자기 병으로 죽기 전까지. 그를 데려간 병은 천연두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어린 아들이 전염되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백작부인은 두 살배기 어린 아들과 단둘이 남겨졌다.
세상은 홀로 남은 귀부인에게 가혹했다. 원칙 상 여자는 작위를 승계할 수 없고, 아들은 너무 어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이 여자 혼자 살아가지 못하는 시대도 아닌데, 에드워드 콘웨이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구혼장이라니!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한숨만 내쉬던 앤의 치맛자락을 누군가 잡아당겼다.
“어, 엄마아!”
“헤니지! 엄마 주는 거니?”
헤니지 콘웨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앤에게 사탕을 건넸다. 앤은 그보다 사랑스러울 수 없는 아이를 품속으로 당겨 끌어안고 아이의 온몸에서 나는 고운, 비누 냄새를 맡았다.
“꺄르륵! 엄마, 좋아!”
“응, 엄마도 헤니지 좋아!”
곱슬에 허니블론드, 그리고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가운데 제 얼굴이 투명한 눈 위로 언뜻 비친다. 차라리 세상의 모든 복잡한 것들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채로, 이 시간에 멈추어 살았으면…….
“백작부인, 안에 계세요?”
청년과 중년 사이 여성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앤이 헤니지를 안은 팔에 힘을 풀며 돌아보자 슬그머니 열린 틈으로 가정부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바깥에 손님이 두 분 오셨는데, 부인을 직접 뵈어야겠다고 하셔서…….”
“손님? 오늘 올 예정인 사람은 없었지 않아요? 누가 온 건데요?”
“리버풀 의원님이랑 비서, 아, 베이컨이랑 홉스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던데요.”
영문 모를 일이었다. 리케이온을 졸업하고 10년, 수리과 대부분이 영국이 아닌 유럽 본토가 고향이었기에 제법 많은 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끊어졌다. 모순적이게도 리케이온의 졸업생 중 앤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했던 건 같은 영국 귀족이면서 앤의 스승인 헨리 모어가 교수로 있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물론 졸업장 받기도 전에 자퇴해버리긴 했다만.
“잘 지냈, 음, 오랜만이야, 핀치.”
“너도 오랜만이야, 베이컨. 그리고……, 홉스도.”
“잘 지냈냐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낫겠지, 핀치?”
이런 배려는 역시 좀 미묘한데. 새삼 앤은 제 상황이 우스워졌다. 수리과는 죄다 연락이 끊어지고, 남은 고등학교 동창이 과학과를 만든 두 사람이라니. 분명 수리과 친구들이 알았더라면 ‘앤이 과학과의 마귀들한테 모르모트로 끌려가게 생겼다’라며 부산을 떨었을 텐데 말이다.
“프, 프, 프랜, 시스! 아저씨!”
“잘 지냈어, 핀치네 아들?”
“내 아들 이름은 헤니지라니까.”
“그래, 헤니지. 그리고 기왕이면 삼촌이라고 해주라.”
“프랜시스 네가 그 애 숙부도 아닌데.”
“아저씨는 뭔가 나이들어 보이지 않냐?”
아무것도 모르는 헤니지는 몇 번 본 얼굴이라고 프랜시스의 옆에 가 달라붙었다. 토머스 반대편 다리에 달라붙은 걸 보면 둘 중에 갑이 누군지 아는 걸까, 더 무서운 게 누군지 아는 걸까.
앤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홍차를 내어주었다. 차라리 그 둘이라도 붙잡고 속편하게 얘기를 하면 이 편두통이 조금 나아질 것도 같고. 앤은 헤니지를 무릎 위에 앉히고 조금전 아이에게 받은 사탕을 다시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오늘은 어쩐 일이야?”
“잘 지내나 들러본 거지. 혹시라도 법 쪽으로 문제 생기면 말해, 남들은 돈 주고도 못 얻는 학연 뒀다가 어디 쓰게. 이래봬도 그레이즈 인에서 강연자까지 해본 귀한 인력이거든?”
“그러면 나 할 말 없는데, 저번에 네가 안 된다고 못박고 갔으니까…….”
이미 어떻게든 앤이나 헤니지가 백작위를 승계할 방법이 없다고, 장례 도중에 프랜시스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앤이 재혼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앤의 재혼 상대가 백작위를 승계하거나 그가 헤니지가 장성하여 백작위를 승계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줄 수 있다고.
이 미처 치우지 못한 구혼서들도 뭘 노리는 건지는 뻔하지 않나. 가능하다면 남편의 가문을 지키고 싶었지만, 앤은 요즘들어 차라리 포기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 보자. 이야, 잉글랜드랑 웨일즈 귀족 가문 목록이 여기 다 있는 것 같은데?”
“프랜시스, 그 말은 베이컨 가문도 포함인가?”
“오, 제발, 토미. 우리 형 중에 누구 한 명 정신나간 건 아니라고 해주라.”
“잉글랜드랑 웨일즈만 있지는 않네. 이건 스코틀랜드야.”
“왜 대답이 없으시죠, 토머스 홉스 씨?”
프랜시스와 토머스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구혼서들을 분류해주었다. 출신 가문의 작위나, 구혼자의 형편 따위를 바탕으로. 개중 걸러내야 할 것들은 한 데 모아 테이블 아래로 밀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남은 것들은 그 수가 훨씬 줄어 있었다.
“네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라면 이 정도가 다야. 결혼했을 때 콘웨이 가문에 피해가 오지 않고, 너한테도 그럭저럭 문제 없이 남편 노릇 해줄 수 있는 인간들.”
“고마워.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던 참이었어.”
“우린 이런 일이 일상이니까 그렇게까지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핀치. 대가 없이 해주는 일도 아니고.”
토머스의 말에 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토머스를 바라봤다. 그 품에 있는 헤니지도 똑같은 표정을 하고 그를 쳐다보는 게, 영락없이 앤 핀치 콘웨이가 낳은 아들이다.
“세상에, 설마 눈 앞의 신사분들께서도 제 구혼자라고 하시지는 않겠죠? 난 페넬로페의 기분을 이렇게 체험하고 싶지는 않았어.”
토머스 홉스야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안 그래도 몇 명인지 기억하기도 힘든 형제자매들 중 막내이기도 하고, 유산도 얼마 상속받지 못한 데다가 씀씀이도 제법 큰 편이니까. 젊고 친분 있는 백작부인의 재혼 상대라면 썩 괜찮은 조건 아닌가?
“이런, 콘웨이 부인께서 상상력이 풍부하시네. 안 그래, 토미?”
“그러니까 네가 어서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바로잡아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하하!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프랜시스는 웃으며 편지 봉투 한 장을 꺼냈다. 유려한 필체로 한가운데 ‘L’이라고 새겨진 실링왁스는 앤의 기억 속에는 없는 문양이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그 녀석은 구혼서를 보낼 생각 자체가 없었어. 그냥 우리가 보기 답답해서 멋대로 벌인 일이니까 너무 밉게 보진 말고.”
“뭐야아?”
“어이쿠, 꼬맹아. 이건 너 말고 네 엄마가 먼저 봐야 한다~”
토머스가 헤니지를 저와 프랜시스 사이로 데려가 앉히고, 앤은 미미하게 온기가 남은 품을 안 그런 척 아쉬워 하다가 페이퍼 나이프로 봉해져 있던 편지를 뜯었다.
맨 윗줄부터 천천히 읽어내리는 앤의 손이 떨리기 시작한 건, 구혼장의 중간 쯤을 읽을 때였다. 10년 만이지만 여전히 정중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그렇기에 앤 핀치가 너무도 사랑했던 문체가,
“어때, 그 구혼자는 만나볼 의향이 있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문장이, 무수한 고뇌와 좌절을 건너 이제야 앤 핀치에게 닿았다.
졸업을 앞두고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앤 핀치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앤 핀치는 그 고백을 거절했고.
앤 핀치에게는 몇 년간 함께해온 약혼자와의 신의를 저버릴 만큼의 용기가 없었고,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에게는 거절당한 상대에게 체면을 버려가며 매달릴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렇게 끝난 관계였다. 물론 그 둘은 서로에게 앞으로도 좋은 친구이자 훌륭한 동료 학자로 남아 있자고 약속했지만, 졸업하던 그 해, 날이 채 풀리기도 전에 앤이 에드워드 콘웨이와 결혼하던 날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었다. 이후로는 아주 사소한 안부인사조차 오간 적이 없다.
한번쯤은, 아니 사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그 고백이 받아들여졌다면, 결혼식 이후에 연락을 해봤더라면, 그런 후회가 들곤 했다.
“벤 삼촌! 라이 삼촌!”
현관에 쇼핑백을 잔뜩 들고 들어서자마자 초고속으로 돌진한 말괄량이 아가씨가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의 다리에 매달렸다. 베네딕투스는 익숙한 듯 쇼핑백을 고트프리트에게 넘기고 다리에 달라붙은 거대한 매미 아가씨를 안아들었다.
“프랑신! 우리 꼬마 아가씨, 삼촌 보고 싶었어?”
“응! 벤 삼촌 어어엄청 보고 싶었어! 삼촌은?”
“삼촌도 당연히 우리 프랑신 보고 싶었지!”
먼저 집 안으로 들어온 라이프니츠는 딸의 뒤로 걸어나오는 르네 데카르트와 헬레나 데카르트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프랑신의 장난감, 옷, 그밖의 잡다한 살림살이 같은 부부를 위한 선물, 모두 오랜만의 방문을 맞아 베네딕투스와 고트프리트가 데카르트 가족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왜 이렇게 컸어, 삼촌 서운하게…….”
“그러게,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아까처럼 뛰지도 못했는데. 몇 살이지?”
“여섯 살! 한 반 년 더 있으면 생일이야.”
평생 결혼은 무슨, 연애에도 관심 두지 않고 책과 종이에만 파묻혀 살 것 같았던 르네 데카르트가 돌연 결혼 소식을 전한 건 그들이 겨우 스물셋이었을 때였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 가족들과 대판 싸우고는 냅다 베네딕투스가 있는 네덜란드로 도망쳤는데, 거기서 만난 애인인 헬레나와 속도위반으로 결혼해서는 눌러앉아버렸지.
결혼식에는 오지 못하고 뒤늦게 아이가 태어날 즈음에 찾아온 고트프리트가 아기 침대며 모빌이며 옷 하며 온갖 물건들을 챙겨주며 르네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데, 헬레나가 있어서 망정이지, 르네 뿐이었다면 온종일 잔소리를 해도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있지이, 삼촌. 나 크면 벤 삼촌이랑 결혼할 거야.”
“벌써부터 그러면 너희 아빠 운다? 봐봐, 프랑신 아빠 운다.”
“프, 프랑신……? 아빠랑 쭉 같이 사는 거 아냐……?”
“르네, 당신도 참. 커서 남자친구라도 생기는 날엔 어떡하려고 그래~”
고트프리트는 소파에 앉아 평화로운 가정의 전경을 감상하며 헬레나가 미리 준비한 차를 마셨다. 창밖으로는 연푸른 햇발이 드리우는 겨울이다.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에서 잠시 신세지던 것을 정리하고 곧바로 네덜란드로 왔다.
헬레나는 르네에게 오랜만에 본 친구들과 편하게 얘기하라며 프랑신과 함께 나가고, 세 사람은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그간의 일들을 나눴다. 르네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안경점을 하는 베네딕투스는 자주 만났다지만, 아예 국경선 너머에 살고 있는 고트프리트와는 실제로 대면하는 것은 1년 만의 일이었다.
“영국 생활은 어땠어?”
“별로 다를 것도 없었다. 음식이 안 맞아서 초반에는 고생 좀 했지만 금방 적응했어.”
“과학과 애들도 만났지? 요즘 걔네는 뭐하고 사냐?”
“과학과 누구?”
“어……. 글쎄, 아무나? 당장 생각나는 건 학생회나 너랑 대차게 싸운 사과 들고 다니던 걔 정도?”
“로크나 뉴턴은 학회 일로 근래 들어서 좀 바빠졌고, 흄은 대학 때려치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얼마 전에 영국으로 돌아왔댄다. 홉스는 베이컨 비서 일 여전히 하는 중이고.”
‘그’ 리케이온의 졸업생인 걸, 졸업하고 한 10년 뒤에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떵떵거리며 아주 특별한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사회로 나오고 보니 리케이온의 이름이 제법 공신력 있는 뒷배경이 되어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이 특별해지지는 않았다.
르네는 여전히 책만 꾸준히 써도 가족들과 먹고살 정도로 벌었고, 고트프리트는 사서 일을 좀 하다가 얼마 전에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 베네딕투스의 안경점은, 뭐, 평범하게 다른 안경사들이 버는 만큼 버는 중이다. 다른 동문들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본래부터 평범했던 것마냥, 일상의 한 부분으로서 섞여들어 살 뿐이다. 그들은 이제 나이의 앞자리가 3으로 바뀌어버린 참이니, 질풍노도의 시기에 저도 모르게 느끼던 스스로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은 한참 전에 벗어던졌어야 했다.
대화가 점점 무르익어가고, 그러다가 우연히 옛 수리과의 친구들 이야기가 나왔다. 하교 시간에 인사를 하고 다음날에 또 등교를 하면 교실에서 만나는 게 당연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연락이 끊긴 동창들의 수를 헤아려보면 그 시절이 다 꿈인지 환상인지.
“다들 뭐하고 살려나~ 블레즈랑 피에르는 그래도 꽤 최근에 연락했었는데.”
“어느 피에르……?”
“블레즈 파스칼이랑 같이 나올 피에르가 피에르 드 페르마 말고 더 있냐?”
“응. 오랜만에 연락했다가 엄청 장문으로 반박 문자 받았어.”
“어쩌겠냐. 이 유럽엔 네 글 반박문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 반박문으로 먹고사는 데에 보탠 경험이 있는 두 사람이 조용히 르네를 위로하던 때에 갑자기 베네딕투스와 르네의 휴대전화가 동시에 울렸다. 서둘러 연락을 확인하는 둘을 고트프리트가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무슨 연락인데?”
“아……. 별 거 아니야!”
“그보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파스칼이랑 페르마 얘기 했었나?”
감이라는 건 꼭 이상한 데서 예민해질 때가 있어서, 서둘러 대화 주제를 돌리려는 것이 고트프리트의 눈에는 퍽 어색하게 느껴졌다. 3초 정도 정적이 흐르고, 고트프리트는 더 가까이 앉아 있던 베네딕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왜 남의 폰을 갑자기 보려고 하시죠? 너 그거 사생활 침-.”
“말로 할 때 내놔라.”
“윽, 이래서 눈치 빠른 놈은…….”
베네딕투스는 뻗어오는 고트프리트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봤지만, 정작 당황해서 어버버하고 있던 르네로 타겟이 바뀌는 바람에 순식간에 휴대전화를 뺏겼다.
르네 데카르트의 휴대전화를 뺏어든 고트프리트가 화면에서 본 것은, 그들의 동창과 후배 몇몇이 어찌보면 조금 의아할 조합으로 한데 모인 단체 대화방에서 그와 일찍이 결혼한 동창의 이름이 오가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단체 대화방의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르네 데카르트,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프랜시스 베이컨, 토머스 홉스,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 해리엇 하디 밀,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니체.
조금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고, 상당히 의아한 조합인 이들이 모인 이유가 오로지 앤 핀치와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연애전선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당사자에게 밝힐 수 있었겠는가.
물론 영국인들은 이런 데에 관심 많은 두 명 탓에 휘말려버린 감도 없지 않으나, 현재로선 모두 진심을 다해 그들을 이어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아, 프리드리히 니체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임마누엘 칸트의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진즉 방을 나가버렸을 위인이므로.
처음부터 그런 목표로 만들어진 대화방은 아니었다. 원래 그 방은 학년에 상관없이 이런저런 일로 친해진 리케이온 졸업생들의 단체 대화방이었다. 그 구성원에 제레미 벤담, 소피아, 앤 핀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까지 더해져 있었다. 그런데 2년에 걸쳐 다들 리케이온을 졸업하고 각자 바쁘게 살다보니 일부는 그곳의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소피아는 졸업하자마자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고, 앤과 고트프리트의 사정이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니 사석에서 각자 안부를 전하는 데에 만족했으며, 1학년들은 옛 학생회와 옛 문제아들(과 그 사이에 끼어버린 하위권 모범생 군)로 나누어진 대화방이 따로 있었다. 결국 그 방에서 계속 떠들고 있기도 뭣하니 종종 대화에 참여하는 몇몇들만 그들 모르게 새로 방을 만들게 된 것이다. 물론 토머스는 의리상 들어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어쩌다 보니 사정을 모르는 1학년과 과학과에서 앤과 고트프리트가 졸업 직전에 갑자기 사이가 멀어진 이유를 물어왔다. 르네와 베네딕투스는 한참 망설인 후에야 간략한 상황을 전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괜히 오지랖 넓은 영국인 두 명(프랜시스와 해리엇이다.), 졸업하고 급격히 주관이 사라져버린 한 명(토머스는 프랜시스의 안하무인 도련님 놀이에 여전히 어울려주는 모양이다.), 그냥 친구가 행복했으면 한 두 명(르네와 벤이다. 벤은 살짝 르네에게 휘둘리긴 했다.), 제 천사가 행복했으면 한 한 명(당연하게도 존, 아니 밀이다.), 재미있어 보였던 두 명(이상한 데서 죽이 잘 맞는 데이비드와 프리드리히다.), 그 모두가 그 방에 있었을 뿐이다.
상식인 두 명(존 로크와 임마누엘이다.)은 재미있어 보여서 참여한 두 명에게 각각 끌려와버렸다. 지금도 때때로 임마누엘은 앤과 고트프리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 한다.
어쨌거나 단순히 두 사람의 관계 회복을 목표로 했던 그 이상한 모임은, 에드워드 콘웨이가 병사하고 앤과 그 아들이 곤란한 상황에 놓이면서, 토머스와 베네딕투스, 존 로크를 시작으로 그 성격이 하나둘 변질되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의 변질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고트프리트는 결혼을 했을 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나열해 본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나쁜 점의 수가 좋은 점의 수보다 많았기에, 그는 앞으로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은 사실이, 고트프리트는 그때 그의 결혼 상대가 앤 핀치만은 아닐 것을 상정하고 그 목록을 써내려갔다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앤 핀치라는 가정 하에 그 목록을 써내려갔다면, 결과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덜란드에서 여유롭게 관광이나 좀 할 줄 알았더니, 고트프리트는 웬수 같은 동창 놈들 때문에 해명을 한답시고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해명은 직접 만나서 하는 게 맞다며 하나같이 등을 떠미는데, 아무리 봐도 과실은 동창들에게 있으니 그들이 단체로 영국으로 날아가 앤 앞에 무릎을 꿇었어야 했던 것 아닌가? 그래도 오늘의 목적은 해명에만 있지 않으니, 결국 이곳에 오기는 해야만 했다.
고트프리트는 래글리 홀의 정문 안으로 들어서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마른 혀로 훑었다. 미리 약속을 잡고 온 덕에 젊은 가정부는 익숙한 듯 그를 응접실 앞으로 안내했다.
“부인께선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감사합니다.”
가정부는 종종걸음으로 멀어지고, 고트프리트는 긴장한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 문 너머에,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 앤 핀치가 이 문 너머에 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오른손을 들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창문으로 하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트프리트는 눈이 부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앤의 앞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식간에 얼굴을 되돌렸다.
앤은 응접실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이름만 알고 있는 앤의 어린 아들은 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단꿈을 꾸고 있었다. 앤은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눈빛을 하고서, 고개를 들어 고트프리트의 눈을 마주보았다.
“오랜만이야, 라이.”
“너도……. 네가 결혼하고 처음이네.”
“그러게, 벌써 그렇게나 오래 됐구나…….”
앤은 저가 앉은 소파 옆의 일인용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고트프리트는 그곳에 앉아 새삼 오랜만에 보는, 그의 마지막 기억과는 달라져버린 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우선 그, 동문이라는 것들이 뒤에서 하고 있던 헛짓거리는 불쾌했다면, 아니 당연히 불쾌했겠지. 사과할게.”
“아니야,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고……. 라이가 사과할 일도 아니잖아.”
프랜시스는 먼젓번에 앤과 만났을 때에 그 단체 대화방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물론 그 방에서 오간 온갖 저능한 대화들에 대해 꾸밈없이 고백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인원으로 모여 있는 대화방이 있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앤에게 제법 괜찮은 선택지였다는 것, 그 정도.
물론 동창의 결혼 사정이야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고, 불쾌해 마땅한 일이었지만, 앤 핀치는 그들을 책하지 않기로 했다. 스스로도 바라다 용기가 없어 포기한 일을 대신 이뤄준 셈이었으니.
응접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간간히 아이가 색색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나가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이 너무 멀었다. 10년의 공백은 결코 쉽게 메워질 수 없었다.
앤은 고트프리트의 눈치를 살피며 헤니지의 팔을 토닥이기만 했다. 10년 전 거절당한 사람은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였고, 거절한 사람은 앤 핀치였으니, 이 긴 헤메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가장 앞에 놓여야 하는 건 고트프리트에게 고백받은 그날의 이야기일 것이 분명하지만, 앤은 먼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낼 낯이 없었다.
“으응, 엄마아…….”
“아, 헤니지……. 깼어?”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본 헤니지는 처음 보는 얼굴에 앤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서 아이가 내뱉은 첫말은,
“아저씨.”
“윽.”
“헤니지! 미안해, 라이.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놀랐나봐.”
“누구야?”
앤은 한쪽 팔에 아이를 달고서 난처한 듯 웃었다. 고트프리트는 저를 노려보는 아이와 지그시 눈을 맞추다가 이내 앤이 앉은 자리 바로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네 아빠가 되고 싶어서 온 사람.”
그 말을 듣고 조금전부터 바쁘게 헤니지의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멈췄다.
“엄마만 아저씨여도 좋다고 해주면.”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만은, 10년의 시차마저 무시하고, 앤에게 고백하던 그때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것은 앤 핀치와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더이상 스물이 아니라 서른이라는 것과,
“앤, 청혼서가 전달된 건 자의가 아니었지만 얘기를 들은 후에 여러 번 생각해봤다.”
“라이…….”
“지난 10년 동안 넌 어땠을지 몰라도 난 여전히 내게 있어서 너 이상의 상대는 없다고 생각해.”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에게 용기가 생겼다는 것.
10년, 그 긴 시간 동안 부단히도 서로를 피하기 위해 애썼고, 그렇기에 그보다 아쉬울 수 없는 시간을 지나서,
“이 자리를 빌려서 정식으로 청혼할게. 앤 핀치, 네 인생의 다음 장에 내 이름이 있었으면 해.”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앤 핀치 앞에 반지를 내밀었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대학을 졸업하고 얻은 첫 직장은 도서관의 사서였다. 나름 고학력자이기도 했고, 운영 자금도 넉넉한 곳이라 초봉을 다른 곳에 비해 많이 주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사회 초년생의 첫 급여, 사치를 할 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본 광고 때문에 사버린 반지는 돈을 모아가야 할 단계인 그에게는 꽤나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당장 이 커플링을 끼워줄 상대도 없는 주제에 가져서는 어쩌겠다는 건지.
100년의 사랑, 이라고 했던가. 이제 와서 그 캐치프레이즈를 떠올려보니, 100년의 사랑을 얻는 댓가로 그 정도 금액과 10년이라면 싸게 먹힌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은 서둘러 준비해서, 조금씩 낮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하는 봄의 끝무렵에 치러졌다. 수리과니 과학과니 하는 것은 리케이온을 졸업하고 한참 지난 지금은 그저 철없던 시절의 편가르기에 불과했기에, 그저 오랜만에 만나는 동문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뒤섞여 서로 인사를 나눴다.
아주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던 수리과의 편입생이 얼굴을 비췄다는 소소한 해프닝도 있었는데, 옛날이라면 소피아에게 달려들고도 남았을 르네가 나이가 들었다고 얌전해져서는 조용히 인사만 하고 끝난 게 소피아에게는 퍽 낯선 모양이었다.
본식이 시작되고 하객들은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에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락을 끊고 산 지 10년이라 누구와 섞여도 어색한 소피아에게 수줍게 옆자리를 권한 건 존 로크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학생회와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소피아는 곧 신부가 걸어나올 붉은 융단이 깔린 길을 바라보았다.
“신부, 입장!”
새하얀 면사포를 쓴 앤 핀치가, 두 손으로 부케를 쥐고, 홀로 그 길을 걸어나왔다. 처가의 사내가 아내를 남편에게 넘겨주는 의로 맺은 결혼을 한 번 지나서, 아내가 선택한 남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성은 그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천천히.
주단의 좌우로 늘어선 테이블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옆으로 지나간다. 앤 핀치는 그 무리 사이에서 제 오빠와 함께 앉은 아들을 찾았다. 아들은 얌전히 저가 걸어나오는 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서 있다. 앤 핀치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내민 손을 잡고, 단 위에 올라 그와 나란히 섰다.
이 자리에 서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볼 붉히며 고개 내민 어린 마음을, 두려움과 이성이 한 차례 눌러버린 까닭이었다.
서로를 피해가기 위해 부단히 애써온 날들이었다. 회피하고, 포기하고, 찰나동안 기뻐하고, 또 슬퍼하고, 그런 소용돌이 안에서 조금씩 멀어져가는 중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애정은 우주가 지어질 적부터 예정된 조화 안에서, 서로를 향해 가고 있었기에—,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곳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웃을 수 있었다.
❗️마지막 그림은 트레틀 사용했습니다.
6000자 이내로 끝내려 했던 게 결국에는 두 배 분량이 되었네요…ㅋㅋㅋ
부족한 글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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