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계

프랜시스 베이컨과 토머스 홉스의 기록, 아테네에서의 마지막 밤에

토머스 홉스는 방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라는 울타리가 그로 하여금 얼마나 많은 것을 가능케 해주는지에 대해 알던 탓도 했지만, 해마다 두 번 그는 자취방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행위의 의미를 아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때마다 기꺼이 친구를 베이컨 저택으로 납치해오는 안하무인 도련님이 되어주기로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기차표만 달랑 들고 몰멜즈베리를 찾아가면 토머스 홉스는 그것만을 기다리던 사람처럼 따라나왔다. 그제서야 두 사람의 제대로된 방학의 시작이었다. 방학이란, 방학이 있는 여름과 겨울이란, 적어도 두 사람에게는 그런 계절로 통했다.


시간이란 건 결국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 한가운데에서 맨몸으로 어디 한 곳에 멈춰 있고 싶다고 빌어본들 그 소원이 이루어지던가? 그들의 후배인 문예부 어느 학생이 말하길 시간을 짧게 만드는 것은 활동이라고 하니, 그만큼 고등학교 3년을 다양한 활동을 하며 열심히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볼 뿐이다.

방학이 아닌 2월이 찾아왔다. 3년 만의 일이랄지, 12년 만의 일이랄지. 프랜시스 베이컨은 기숙사를 정리했고, 짐은 영국의 본가로 보내놓은 채 토머스 홉스의 자취방으로 왔다. 짐 정리도 도울 겸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곳에서 보내고 내일 공항으로도 함께 갈 생각이었다.

정작 도착해보니 이미 거진 다 정리가 되어 있었다. 프랜시스가 도와줄 수 있던 일은 그렇게 짐을 싸놓은 가방들을 문 옆으로 옮겨주는 게 전부였다.

“야, 넌 이제 학생도 아닌데 뭘 이렇게 성실하게 사냐?”

“학생은 학생이지, 대학생. 난 그냥 네가 해준 말을 성실하게 따를 뿐이야.”

부정하지는 않겠다. 내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늘 중으로 하라고 말한 건 프랜시스니까. 그런데 본인이 그 말대로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음, 노코멘트.

고등학교는 멀리 타지로 와도 대학은 귀소본능 마냥 모국으로 돌아가는 리케이온 학생들답게 프랜시스와 토머스도 영국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프랜시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토머스는 옥스퍼드 대학에.

아침에 일어나 등교하면 서로를 볼 수 있다고,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 오늘부로 끝나버렸다. 토머스의 자취방은 어쩌다 기숙사가 갑갑한 날이면 프랜시스가 사감의 눈을 피해 쉬러 오곤 하던 곳이었는데, 이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이 괜히 아쉽기도 하다.

“쓰읍……. 대학에서 아이작 뉴턴 방에 쳐들어가면 안 되겠지?”

“네가 뉴턴과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라고 생각한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윽, 됐어……. 내일 공항에 가족들 나온다고 하셔?”

“작은아버지께서 내일은 한가하셔서 형이랑 어머니 모시고 오겠다시네. 넌?”

“일단 앤서니 형이랑 엘리자 누나는 오겠다고 하던데, 나머지는 연락이 없네. 아무리 형누나들 나한테 관심 없다지만 나 나름 막내인데 너무하지 않냐?”

프랜시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엎어졌다. 대입이라는 인생 최고의 고난(우습게도 말이다. 그들은 이제 겨우 열아홉이지 않은가.)이 사라져버린 예비 대학생에게만 허락된 권태였다. 우유와 홍차를 가져온 토머스가 프랜시스 앞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우유에 홍차 맞지?”

“응. 잘 마실게~”

아, 1학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학생회실에서 둘이 차를 마실 때면 두 잔을 각각 다르게 만들어야 해서 번거로워 했었지. 어쩌다 잔이 바뀐 날이면 그 미묘한 맛 차이를 깨닫고 당황스러워 한 적도 제법 있다.

“뭐야, 왜 웃어?”

“아니, 그냥. 흄은 항상 내가 홍차에 우유를 넣어서 마시는 걸 보고 잉글랜드가 차 마실 줄을 모른다고 말했거든.”

“이 나이에 내가 잉글랜드 출신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줄을 몰랐는데?”

잠깐이지만 키득거리는 소리가 프랜시스의 귀에 꽂혔다. 기분이 좋은 건지 어지간해서는 소리내어 웃는 법이 없는 그의 친구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당황스럽다는 듯한 눈이었지만 후련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문제에서 해방된 사람의 얼굴 말이다. 졸업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너, 이제 어쩔 거야? 입학까지도 또 텀이 생겼잖아,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네 말대로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으니 돌아가자마자 바쁘겠지. 방도 구해야 하고.”

“그렇네, 바쁘겠네. 너도 나도 다.”

“그렇지, 바쁘겠지.”

거기까지 말하고는 방이 온통 조용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로 살피는 것 같기도 하고, 할 말이 떨어져버린 걸 수도 있다. 워낙에 즉흥적으로 찾아왔어야 말이지. 덕분에 이유없이 들떠 있던 감정이 조금 차분해졌다.

아, 머리가 차가워졌다고 하면 더 맞으려나. 예전부터(근거는 없다.) 침묵은 상념을 부르고 상념은 우울을 부른다고 하지 않나. 우울이라고 하기엔 거창했지만 말없이 늘어져 있으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야, 토미.”

“응.”

“이번에는 우리집에 못 오지?”

“……힘들겠지.”

조금 전에도 말한 대로 바쁠 테니까, 런던에서 여가를 즐기다 가기에는 빠듯했다. 가지 않는다면 지루할 정도로 넉넉한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만.

방학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토머스 홉스를 베이컨 저택으로 데려와서 함께 지낸다. 말로는 한 번도 꺼내본 적이 없지만 그건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질 약속이었다. 실제로 여섯 번의 방학 동안 프랜시스가 토머스를 데리러 가지 않은 적이 없었고, 토머스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미리 짐을 챙겨두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리케이온을 졸업한 이후의 방학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연락 없이 몰멜즈베리를 급습하는 프랜시스도, 멋쩍은 척 즐기며 런던으로 따라오는 토머스도,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냥, 그런 것까지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어리고 할 일도 많았다고, 그냥, 그렇다고.

변명이다. 사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처음부터 모르던 사이처럼 연락이 끊어지지는 않겠지만 인간은 쉽게 감정이 앞서버리는 동물이라.

자정이 넘어갔다. 내일이었던 날은 오늘이 되어버렸고, 오늘 오후에 비행기에서 내릴 즈음에는 안녕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공항에서 기다릴 테니까, 각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면 서로가 생각나기까지는 조금 걸리겠지. 입 안이 쓰다.

“방학에-.”

불안하면 자꾸만 확인을 하고 싶어진다. 잘 모르는 문제를 다시 돌아가서 읽고, 읽고, 또 읽는 것처럼. 고작 몇 번 더본다고 답이 나올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몰멜즈베리로 데리러 가도 돼?”

방학에, 1학년 여름 방학에, 처음 너를 데리러 갔을 때 말이야. 그때는 정말로 순수하게 당황한 네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답잖게 허둥거리면서 짐을 챙기고 나왔더니 칫솔 같은 기본적인 것들도 두고 와버려서 새로 산다고 시간을 또 버렸지. 와중에 개학하면 필요한 것들은 착실히 챙겨온 게 참 신기했는데…….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불안 같은 건 다 던져놓고, 언제가 ‘다시’가 될지 모르니 그냥 즐거운 밤이었으면 했다. 졸업식에서 서로 얼싸안고 눈물바다가 된 수리과를 보면서도 그저 재밌기만 했는데, 눈물샘이 늦기도 늦지, 참. 억지로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그 선은 안 넘어줬으면 좋겠는데.

“…….”

“…….”

그럼 그렇지, 참 좋은 친구 나셨다. 욥기에 나오는 뱀 괴물 같은 자식.

“……대학교는 방학이 길지?”

“어, 어……?”

“세 달이니까, 전에는 한 달이 부족해서 못해본 것들도 할 수 있겠네. 이제 둘다 성인이니까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거고. 안 그래?”

그가 웃었다. 맑은 날 윈더미어의 수면처럼 잔잔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렇네. 어디 둘이서 여행을 가도 넉넉하겠네.”

“이번 기회에 술을 마셔봐도 좋고. 겨울방학에는 같이 있는 동안에는 기회가 없었잖아.”

“그것도 좋지. 아, 누구 한 명 골라서 무작정 찾아가도 재밌겠다.”

“그건 실례지, 프랜시스.”

그래서 그도 그냥 웃었다. 상대가 날 향해 웃고 있다면 나도 웃음으로 답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몰멜즈베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프랜시스.”

“그래, 언제 찾아갈지 모르니까 긴장하고 있어~”


아침에 일어나 등교하면 서로를 볼 수 있다고,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은 끝나버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해마다 두 번, 다들 휴가를 갈 그 즈음에 몰멜즈베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매년 다시 여름과 겨울을 기다린다. 때때로 길이 엇갈리기도 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계획이 미뤄져도 해마다 두 번 반드시 몰멜즈베리에서 만나게 되리란 걸 안다. 말하지 않아도 반드시 지켜질 약속이란 게 있는 법이니.


아니 나는 2000자면 끝날 줄 알았지

어쨌거나 이 의지박약 인간이 해냈습니다. 공포 4232, 공미포 3184, 아이고... 계획한 분량 두 배로 나왔네...

토머스 홉스가 방학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한 날조)는 나중에 또 기회가 생긴다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1


  • 궁금해하는 기러기

    와 넘 좋아요...😂😂😂 둘이 같이 있을 때 편해서 천진해지는 영국 소년 두 명 같고 진짜 찐친느낌나서 행복하네요ㅠㅠ 몰멜즈베리 (당연히) 가보지도 못했지만 벌써 그 앞에 가 있는 거 같이 실감나고ㅋㅋ 묘사 넘 쪼아요... 토미 프랜시스 앞에서 더 맬렁해질거같아서 귀여워~~ㅋㅋㅋㅋ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홉스군이 방학을 싫어하는 이유도 너무 궁금하네욬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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