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내가, 겨울엔 네가

밍쿱

김민규가 제일 먼저 벗어던진 건 롱패딩이었다. 지퍼를 열었나 싶더니 쓱쓱 두 팔을 빼다가 옆의 물병을 쳐서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테이블에 있는 머그컵은 엎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조심해.”

최승철은 그렇게만 간단히 말했다. 패딩 정도야 카페에 앉아있으면 다들 몸이 녹자마자 벗으니까.

그렇지만 민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물병에 반이 남은 물을 한 번에 쭉 마시더니, 끝까지 잘 잠그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얼씨구?”

그걸 눈앞에서 직관 중인 승철은 시시각각 어이가 없어졌다.

밖은 영하였다. 폭설이 왔다가 그대로 얼어붙을 정도의 한파였고, 둘은 그런 한파와 빙판길을 헤치고 겨울의 해변가를 무려 삼십분이나 걷고 온 참이었다.

-바, 바다가 얼지 않는 건 계속 파도치기 때문 아닐까?

-계속 뛰자고?

-어, 운디… 움, 움직이자고.

입이 얼어붙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는 주제에 민규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파도소리가 하도 거세서 옆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승철도 처음 3분 정도는 여유롭게 추위에 버텼다.

겨울 바다. 그 두 단어가 주는 낭만에 못 이기는 척 한 것도 있고.

하지만 겨울 바다는 존나 만만하지 않았다. 바닷바람이 진짜 실체가 있는 것처럼 뺨을 갈겨대서 휘청거리고 눈물이 났다. 차가웠던 손발에는 아예 감각도 없어지고, 모자를 썼는데도 귀가 시리다 못해 아팠다.

낭만이고 뭐고 민규조차 꽁꽁 얼어 동태가 되어 카페에 들어왔다. 당연히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아메리카노 한 모금 먹은 김민규가 3분만에 패딩을 벗은 것이다.

“오늘 추우니까 난방 엄청 세게 틀어놓으셨나봐.”

안그래도 아까 카페 주인이 전기 히터를 슬그머니 손님 테이블 쪽으로 밀어놔 주긴 했다.

“와, 니는 어떻게 벌써 땀이 나냐.”

짧게 친 머리카락 아래 반듯한 이마에는 진짜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중이었다.

아직 패딩 안으로 손을 말아쥐고 있던 승철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민규가 셔츠의 단추를 만지작거리다가 샐쭉해졌다.

“더워졌으니까 그러지. 에이, 괜히 아아 안 시키고 따뜻한 거 시켰네.”

“그거 밖에 잠깐만 두고 오면 아아 돼.”

“차갑기만 하다고 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되냐? 맨날 아아 먹는 사람이면서 아아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없어?”

그러고 민규는 셔츠를 풀럭풀럭거렸다. 패딩 벗자마자 얇은 드레스 셔츠 차림이면서 그것도 또 덥다고. 다시 보니까 셔츠도 살짝 땀에 젖어 있었다.

카페 안이 하도 따뜻해서 땡땡 얼었던 승철도 녹고는 있지만 저 정도는…….

“너는 그렇게 까마면서 더위를 그렇게 타냐.”

“뭔 소리야? 형 너는 그럼 아이스크림처럼 생겨가주고 추위를 그렇게 타냐?”

“뭔 소리야 진짜….”

“형이 먼저 해놓고.”

민규가 답지않게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고 홀짝였다. 승철은 소매에서 손가락 끝만 내놓고 살짝 자기 머그컵을 만져봤다. 아직 뜨거웠다.

민규가 카페를 두리번거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머그컵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뿐인데도 승철은 그가 무엇을 할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너무 뜨거운 걸 어떡해.”

“야앗!”

승철이 등받이에 푹 기대있던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말렸지만, 이미 민규는 손 안에 자신의 계절을 불러왔다.

갑갑할 정도로 따뜻했던 공기에 베일듯이 얇고 차가운 바람이 저미고 들어왔다. 민규의 손에 들린 머그컵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려 눈으로 뒤덮였다.

승철이 긴장으로 입을 다문 채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이 앉은 테이블과 카운터 사이에 적당한 인테리어 테이블과 기둥이 있어서 정확히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사장도 카운터 뒤 의자에 앉아 있어서 머리 꼭지만 보였다.

그제야 안심하고 승철이 민규의 팔과 등짝을 쳤다.

“미쳤어, 미쳤어. 사장님이 보셨으면 어떡했을 거야, 너.”

“아야, 안 보고 있으니까 한 거야, 나두.”

승철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이나 썼냐? 밖에만 나가면 니 계절이구만 밖에 잠깐 나갔다 오기 싫다고 이러는 거잖아.”

손 안의 계절에 아메리카노는 차가워지다못해 살얼음이 끼었다. 민규는 히히 웃고 손끝으로 살얼음을 톡 건드렸다.

“밖에 나갔다 오면 승철이 또 얼어죽으니까 그렇지.”

“니가 싫은 거면서 왜 나한테 그러냐? 에베베, 겨울 신이 겨울 추위도 못 이기고.”

아니거든. 겨울 신이어도 오늘 날씨는 좀. 시베리아 신도 아니고 한국의 겨울 신인데 당연히 이 정도면 너무 춥지. 그렇게 쭝얼거리며 민규가 머그컵을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나 근데 이거 쫌만 녹여주라.”

“기껏 얼려놓고 왜 녹이게?”

“너무 얼었어…….”

그래서 머그컵 안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 냉기가 소용돌이치다 살얼음 정도가 아니라 커피 샤베트, 더위사냥이 만들어져있었다. 얇은 티스푼으로 저어봐도 사각사각한 얼음이 뻑뻑할 정도.

“이거 어떻게 마셔어… 한 번만 해줘라, 응?”

승철이 또 민규의 등짝을 쳤다.

“이게 뭐야, 아주 잘했다, 잘했어! 이 자식아.”

“하지 마아!”

둘이 수군수군거리다 냅다 서로를 두들겨대도, 다행히 사장은 상도덕이 있는지 머리도 들지 않았다. 사장은 사장 나름대로 바쁘겠지, 이런 겨울에 해변에서 올 손님도 별로 없을 텐데 출근해서 전력비 수도광열비 월세가 따박따박 나가는 꼴을 봐야 하니까…….

어쨌든 승철은 마음을 진정하고 차가운 머그컵을 한 손으로 잡았다.

“손 시려….”

불퉁하게 내뱉으니 민규가 헤헤 웃으면서 다른 손은 자기가 꼭 잡아왔다. 승철도 따뜻했지만 민규는 땀까지 나 있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냥 니가 이 컵 녹여도 될 거 같은데.”

“아이이, 그게 여름이랑 비교가 되나아.”

민규의 어리광에 승철은 못 이기는 척 눈을 감고 손에 그의 계절을 불렀다. 내리꽂히는 태양의 이글거림과 숨이 턱턱 막히는 습도. 한겨울에 떠올리기엔 아직 너무도 먼 자신의 계절.

하지만 사실 떠올리기란 너무 쉬웠다. 민규의 손이 자신을 잡고 있으니까. 땀으로 축축하고 열기로 이글거리는 손. 내 계절을 꼭 닮은 민규.

눈을 뜨자 살얼음이 다글다글 소리를 내며 기화되다시피 빠르게 녹아 액체가 되어가는 게 보였다.

“고마워.”

둘 다 흐뭇하게 웃으면서 머그컵을 응시했다. 그러다 김까지 올라오자 약간 표정이 심각해졌다. 여름 아스팔트에 계란을 깨놓은 것처럼 커피에서 기포가 올라오며 끓기 시작했다.

“어? 이렇게까지 뜨거워지면 아까랑 다를 바가 없는데?”

“조절을 좀 하지!”

“조절 한 거야~~~~~~”

“으휴, 섬세함이 없어. 섬세함이.”

“너도잖아~!”

민규가 성급하게 머그컵에 또 손을 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얼어붙었다. “줘봐.” 그리고 그 다음엔 끓어올랐고. 서로 요것도 못하네 신 이름을 반납해라 투닥투닥 싸우며 손 안에서 머그컵이 왔다갔다 한 덕분에 끓었다 얼었다 반복한 커피는 밍밍한데 쓰고 더럽게 맛없어졌다. 카페 사장님한테 미안해서 끝까지 마셨지만.

“야, 이럴 바엔 여름에 만나. 여름에만 데이트해.”

“승철아, 그 때도 너무 더워서 나 죽어. 그리고 지도 여름 신이 더위 타면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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