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흘마르

모닥불의 빗방울

[마비노기] 케흘렌x마르에드

마비노기 by 치카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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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작업물은 시월상(@MistMistral) 님의 커미션입니다. 제 단골 커미션주 님이세요…

허락을 받아 전문 공개합니다!


모닥불의 빗방울

케흘렌 X 마르에드

땋아 내린 브레이드가 괜히 어딘가에 부딪혀 덜그덕 소리를 낼까, 걱정이 됐다. 페스 피아다의 공간 내부에는 무수한 몬스터가 포진해 있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놀랍도록 강대하여 고작해야 일개 호위병일 뿐인-물론 마르에드는 많은 이들이 그를 기사로 부르는 것을 이제는 반쯤 받아들이고 있었다.-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존재일 것이 분명했다. 훌륭한 호위병의 자질 중 하나는 자신의 역량을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의 생존이며 안전이었다. 그래서 호위병들은 결코 무리하게 적에게 달려들지 않았고 도주와 항복은 이들에게 있어 주인의 안전이 보장되는 한 결코 수치라고 할 수 없었다. 이처럼 그녀 자신이 오래도록 따라온 직업적 원칙에 따라 이번에도 그녀는 숨을 죽이기 위해 애썼다.

오늘 그녀에게 맡겨진 일은 페스 피아다 내부의 정찰이었고 또 피르안이 느낀 불길함의 기척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어리숙한 소년은 언제나 그렇듯 불길한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렸고 그에 따라 몇몇 탐색대가 조직되었다. 르웰린을 위시한 알반 성기사가 한 축을 차지했고 마르에드와 바투르, 미르올이 한데 묶였다.

문제는 그들이 게아타에 손을 댄 이후에 일어났다. 이전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게아타에 손을 댈 때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이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는데, 과연 피르안의 예감 때문인가, 이번에 마르에드가 안개 속에서 눈을 떴을 때는 자리에 누구도 없었다. 미르올과 바투르는 각각 떼어 놓으면 그다지 시끄러운 이들이 아니었지만, 서로 함께할 때는 누구보다 소란스러운 이들이었다. 일이 제대로 풀렸더라면 이런 소리가 들려야 했다. “너 지금 내 발을 밟았어!” 라고 소리치는 소리나 “제가요? 착각이겠죠! 자이언트는 둔하니까요.” 하고 놀리듯 말하는 목소리가 없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마르에드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주변을 수색했다. 몇 번 돌아다녀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고, 게아타 내부에서 홀로 소리를 지르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도 없었으므로 수색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바투르와 미르올의 이름을 크게 부를 수도 없고 기척에만 의지해야 했는데 그 기척마저도 몬스터의 것과 뒤섞이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몇 번인가 슬라임과 마주쳤고 종종은 검은 달의 교단원을 마주쳐야 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피르안이 느낀 불길함의 정체를 아주 조금은 엿볼 수 있게 됐다. 일반적으로 이 안에서 마주치는 교단원들은 몬스터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은 그것이 아닌 듯했다. 수런거리는 목소리들은 일루젼 좀비의 떼거리가 이번만큼은 그들의 통제를 벗어났음을 분명히 했다. 상황만 좋았다면 그는 피르안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미르올과 바투르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누구도 없었다. 마르에드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교단원들을 벗어났다. 게아타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게아타를 구동해야 했는데, 안개 속에서 홀로 헤매는 몸으로서는 그러기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여느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이곳에 머무는 강대한 몬스터들은 타흘룸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발이 빠르지 못했다. 숨을 잠시만 죽인다면 한 무리의 몬스터 떼는 어디론가로 물러갈 것이 분명했다. 기척은 어디에나 있고 이 무리들은 안개 속에서 영영 헤맬 것이다. 그녀는 아무도 그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를 애타게 빌었다.

그런 종류의 간절한 소원은 잘 이뤄지지 않는 법이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 앞에서 빛나는 푸른 빛을 마주했을 때, 마르에드는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너…!” “케흘렌…!” 그들 두 사람은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서로의 목을 베어 날리고 또 상대방을 땅에 메다꽂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사실 그들이 서로보다 먼저 발견해야 했던 것은 각자의 모습이 아니고 끔찍할 정도로 뭉쳐 다니는 일루젼 좀비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입을 다무는 것은 당연했지만, 케흘렌이 입을 다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몬스터를 통제할 수 없는 것이겠군요.” “그걸 알아서 뭐라도 된 것 같나?” “내가? 당신에게 뭐라도 된다고 나를 여긴다고요?” 이 남자를 앞에 두면 마르에드는 그 자신의 좋은 성품-다정함이나 포용력 같은 것은 분명히 마르에드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였고, 그녀는 피르안을 포함해 많은 이들에게 그 사실을 인정받고 있었다.-을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우리가 뭐라도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에게 무슨 의미라도 되어야 한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자신이 제법 감정적으로 굴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알아차린다고 해도 태도를 바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케흘렌이 이를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한편으로 이 오만한 남자가 몬스터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목숨은 이미 꺼진 채였을 것이고 그녀는 이 남자 앞에서 필사적으로 등을 보이며 도망쳐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구 앞에서도 머리 조아리지 않는 건, 역시 당신 자신의 능력은 아니었겠군요.” “웃기는군. 내가 머리를 숙이는 건 오로지 그분 앞에서….” 그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대치했다. 그러나 석궁에 볼트를 장전하고 또 케흘렌이 손에 쥔 스태프를 고쳐 잡는 그 짧은 기척만으로도 일루젼 좀비들은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옆의 타흘룸들이 땅을 긁는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가까웠다. 일시 휴전을 택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닥쳐라, 네 녀석 때문에 기척을 눈치채이고 있잖아.” “누가 할 말을…당신이야말로, 소리가 큰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녀와 그 남자는 활과 스태프를 잠시 아래로 내렸다. 물론 잠시간의 소강상태가 그들이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것은 서로의 목을 쳐버리겠다는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이끌어 낼 법했다. 타흘룸들은 한 번 질주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고 그것을 떼로 막아내는 일은 에린의 필멸자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녀와 남자는 서로를 눈으로 매섭게 비난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브레이드가 괜히 갑주에 부딪혀 살짝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마저 이제는 조심스러워질 즈음이다.

그녀가 그토록 필사적인 곁에서, 케흘렌이 비웃음을 내뱉었다. 이 남자는 자신 역시도 숨은 처지인 주제에, 또 그런 까닭에 서로 석궁과 스태프를 겨누지 않기로 맹세한 주제에, 그녀를 비웃는 것만은 멈추지 않았다.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시절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구는 양이 얄미웠다. 그와 나이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남자인데 도대체가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이 생각이 짧다. 그가 대거리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 대단하신 검은 달의 교단도 몬스터를 통제할 수 없다고 하면 고작해야 필멸자에 불과한 주제에…. 차라리 피르안 쪽이 조금 더 어른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그녀는 내리 꾹 참았다. 평소보다 입매가 굳건해지는 것이 위험한 신호라는 것을, 원정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테지만, 케흘렌은 알아차리지 못했고 또 알았더라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일루젼 좀비에게서 아슬아슬한 거리를 점했을 때 마르에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적당히 하지 그러십니까?” “뭘 말이지?” “죽고 싶으면, 혼자 일루젼 좀비 쪽으로 뛰어들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물론, 죽을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참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공격 몇 번이 오가더라도 아주 몬스터에게 휩쓸릴 일은 없다는 계산을 모두 마친 뒤의 일이었다. 그녀가 숨을 죽을 때마다 빈정거리던 얼굴이 마르에드를 명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케흘렌과 이토록 가까이서 마주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자꾸 제 신경을 긁어서 좀비 떼에 둘러싸이고 싶은 겁니까?” “너야말로, 에레원의 궁정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는 주제에 고작해야 이 찰나를 못 참아?” “에레원 님은 충성의 대상이니, 숙이는 것이 모욕이지 않습니다.” “그럼 참아. 죽고 싶다면 계속 날 거슬리게 만들던지.” “저를 울컥거리게 만드는 게 당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두 번 말했습니다.” “그건 네 녀석 생각이고. 난 그것보다는 강해.” 그런 사람이 일루젼 좀비 떼에게서 도망쳐…!

그녀가 입을 막 열려던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보고된 바가 조금도 없었으므로, 마르에드는 화를 내려던 것도 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하고 짙은 안개에 휩싸인 곳에서는 수원이 어디인지 혹은 이 빗방울이 진실로 비인지, 어느 것이나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설마 이 비야말로 피르안이 말하던 불길함의 정체인 것일까? 마나난이 파도를 불러왔듯, 어쩌면,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비와 연관된 존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마르에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게아타 안의 일이라면 안타깝게도 궁정의 어떤 이들보다 또 알반 성기사들 중 누구보다도 검은 달의 교단원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연히 그녀의 시선은 빗줄기를 맞으면서도 케흘렌으로 향했다.

칫.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케흘렌이 마르에드의 갑주를 스태프 끝으로 두드렸다. 시선 끝에 담긴 케흘렌의 얼굴은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식의 표정 관리가 되는 남자였다면 여태 마르에드를 울컥거리게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남자는 조금 당혹스러워 보였고 이내 왜 비가…하고 희미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안개 속에 비가 내리는 것은 남자로서도 예기치 못한 일인 듯했다.

“됐어, 저곳으로 가라.” “저곳?” “안 보이는 건가? 네 녀석은 눈에도 문제가 있는 거냐?”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벼락처럼 꽂혔다. 그녀는 케흘렌이 왜 자신의 어깨 갑주를 두드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만은 알 수 있었다. 거기에는 작은 신전 같은 것이 있었다. 차폐물도 지붕도 없었지만, 신전 기둥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 야영용 방수천을 드리운다면 비를 피하기에는 적합한 곳일 법했다. 만일 마르에드가 종종 교육하고는 하는 수습 호위병이 이런 장소를 척후하는 동안 발견했다면 그녀는 그 호위병을 무척 칭찬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케흘렌이었다. 무슨 의도로 저곳을 가리켰는지 알 수 없었고 또 방심할 수도 없었으므로 마르에드는 칭찬이나 감사보다는-두 사람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기도 했다-히려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당신의 근거지 중 하나입니까?” “내가 네 녀석을 처리할 거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얼마간의 소란을 각오한다면, 못할 것도 없어.” “그럼 저 장소는 왜.” 남자는 말이 없었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비를 맞았다. 마르에드의 갑주 위로도 케흘렌의 머리숱 위로도 비는 은색에 동등하게 떨어져 내렸다.

차라리 소리는 이곳에서 난다. 싸움도 숨도 아니고 빗방울 아래서,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한다. 마르에드는 케흘렌을 케흘렌은 마르에드를 보고 있었다. 희미한 비가 내리는 그 짧은 순간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잠시 울컥임이나 미움, 적의를 잊었다. 그건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다. 케흘렌이 잠시 침묵을 지켰을 뿐이었는데 마르에드는 그 남자의 시선에서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게 되었다. 언제나 그녀가 거슬려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그 시선이 이렇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이었나. 그녀는 순간 공포에 가까운 경이마저 느꼈다. 만약 처음부터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바라봤더라면, 그녀는 결코 이 남자와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읽히지 않는 존재만큼 두려운 것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읽히는 한 케흘렌은 마르에드와 같은 필멸의 영역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자신이 이 남자를 인간으로서 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토록 가혹한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그녀 자신은 남자를 어쨌든, 사람의 영역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마르에드는 그렇게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비는 위험했다. 맞아본 바로는 아직까지 그 어떤 이상도 없었지만, 계속 이렇듯 시선을 맞대고 있다가는 생각해서는 안 될 상념이 떠오를 것 같았고 그건 그녀의 볼트를 무디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에레원 폐하의 호위병으로서는 실격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침묵을 이어가는 케흘렌을 추궁하는 대신 신전 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곳은 신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둥만 남은 신전의 흔적에 조금 더 가까워 보였다. 먼 곳에서 안개와 함께 보았을 때는 터라도 조금 남아있는가 하였는데, 이제보니 천을 매달기 위해 움직이는 것마저 일일 듯했다. 마르에드는 걸치고 있던 망토를 풀었다. 케흘렌이 그녀를 도와줄 리 없으니 스스로 할 생각이었고 사실 그녀는 타인이 자신을 도와주기보다는 자신이 타인을 돕는 일에 조금 더 익숙했고 또 능숙했다.

“네 몫만 쓸 생각인 모양이지?” 여태 내내 말이 없다 싶었더니, 케흘렌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마르에드는 대꾸하지 않고 신전 기둥의 끝에 탈틴 사령부 식의 매듭을 걸었다. 이 매듭은 원정대로서 일하는 동안 안드라스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항상 챙기고 다니는 작은 밧줄로 꼼꼼하게 묶고 다른 쪽을 묶으려고 보았는데, 다른 쪽 매듭은 이미 케흘렌이 묶어둔 뒤였다. 이 남자에게도 이런 구석이 있었나. 그녀는 감탄하려다 그만두었다. 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이 남자의 약점 혹은 전투할 때의 버릇을 알고 싶은 것이었지 남자가 함께하는 이의 일을 아예 외면하지 않는 자질의 소유자라는 것까지는 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부싯돌을 내놔.” “맡겨 뒀습니까?” “가지고 있을 게 뻔하니까, 내놓으라고.” 차라리 이런 형태가 두 사람에게는 걸맞았다. “들고 다니는 스태프는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이런 자리에서 왜 내가 마나를 낭비해야 하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빗방울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컸다. 마르에드는 화내는 시늉을-시늉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케흘렌이 다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어조로 돌아온 데에 감사하는 마음마저 들고 있었다.-하며 가지고 있던 부싯돌을 넘겼다. 남자는 의외로 불을 잘 붙였다. 귀하게 자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생각하더라도 마법사가 부싯돌을 쓰는 것치고는 상당히 능란하여 의외였다.

또 의외인 것을 알게 된다.

마르에드는 깊게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서서 잠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잠시간 눈을 감았을 뿐이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케흘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에는 부싯돌이 들려 있었다. 케흘렌의 등 뒤에서는 온기가 느껴졌고, 희미한 안개 속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 장작 뭉치 위로 남자가 붙인 불길이 타오른다. “서서 잠이라도 자는 모양이지?” “잠들지…않았습니다, 잠시 눈을 쉬게 했을 뿐입니다.” “흥,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대거리하는 쪽보다 그러지 않는 쪽을 택하고 허물어져 가는 기둥에 기대앉았다. 빗방울이 마르에드의 망토 위로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이제 더는 춥지 않았다. 동료들과 함께였다면 분명 기뻤을 사실이 남자가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일이 된다.

불빛 곁에서 또 희미한 안개 안에서 남자의 은과 마르에드의 창은 서로 비슷한 색으로 물들어, 그 차이를 알 수 없게 됐다. 더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르에드 자신뿐으로 남자는 아무 생각도 없이 불빛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마르에드의 속을 끓게 했다. 남자의 눈에는 복잡한 심사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당신은 왜 그렇지, 어째서 그럴 수 있지, 그것은 당신이 나보다 강하다는 데에서 오는 자신감입니까? 왜 이 순간 경계도 잊은 것처럼 칫, 하는 빈정거림도 잊은 것처럼 다만 불빛을 바라보고만 있는지…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물음이어서, 마르에드는 내도록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거슬리는 녀석.”

남자의 목소리마저 평소보다 나직했다. 그녀는 오기로라도 대꾸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므로 아무 말 없이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에게 별다른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빈정거리던 남자가 오늘은 무언가를 떼어내듯이, 귀찮단 듯이, 그렇게 말을 잇는다. “비가 그치거나 불씨가 사그라들면 네 녀석은 동쪽으로, 나는 서쪽으로 간다.” 그녀는 따를 생각도 없이 그러나 부정할 생각도 없이 가만히 들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좀비건, 슬라임이건, 무엇이 있더라도 스태프를 겨눌 거라는 말에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볼트는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고 이를 갈았지만, 그것을 포함하더라도….

빗소리 때문인가 그들은 평화로웠다. 그래서 마르에드는 어쩔 줄 모르고 장작이 꺼질 때까지 다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티가 습한 공기에 채 튀어 오르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그라든다. 어쩌면 그들이 작은 모닥불 앞에서 이토록 고요한 것은 이 비 때문일지도 몰랐다. 마르에드도 케흘렌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무 말도 않고 불씨만을, 서로의 기척만을 느끼고 있었다.

아, 피르안의 불길함이란 무엇이었을까.

마르에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몬스터가 지금 잠시 검은 달의 교단원들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 불길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고 또 고요하던 페스 피아다의 게아타 안쪽에 마나난이라도 나타난 듯 비가 오는 일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 마르에드의 마음을 가장 격렬하게 흔든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가장 불길한 일이었다.

우리는 싸우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싶지 않았어.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려는 듯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은폐했다. 피르안이였다면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누님, 하며 그녀를 걱정했을 테고 다른 이들은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엘프의 노래를 혹은 자이언트 식 위로를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케흘렌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마르에드의 옆에서 고요히 빗소리를 불가를 혹은 그녀의 그림자를 내버려 두었다. 그것은 도통 남자답지 못한 일이어서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고 싶었지만, 무엇에도 명명백백한 그녀답지 못하게, 이번만큼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빗속에서 남자를 보는 순간 무언가 변할 것 같았는데 그녀는 아직 에레원 폐하의 검으로 있고 싶었다.

언젠가, 마주할 과거의 추억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존재로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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