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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바로] 사신과 매달린 남자와 가면 쓴 제자의 모험 -2-

Backlog by 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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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유산


“레스트레이드, 너-“

“레스트레이드 수습 형사, 아직도 그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군. 크기를 보니 사냥개로도 못 쓸 것 같다만.”

지나를 손가락질하는 형사의 말을 반직스가 잘라먹었다. 반직스가 굳이 ‘수습 형사’라고 강조하자 지나의 볼이 뾰로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레스트레이드 경감이라니까! 지금 내 파트너를 무시하는 거야? 토비가 아직 경위라서 그렇지, 경감이 될 때쯤엔 너만큼 커질 거라고.”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 아소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저 강아지를 보고 3개월이 지났지만 토비 경위의 덩치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 토비 ‘경위’는 뭘 하고 있었지, 레스트레이드 수습 형사?”

“경감이라니까! 현장을 수사 중이었지. 딱히 찾아낸 건 없지만.”

“귀공의 그 토비 ‘경위’도 별로 쓸모가 없었나 보군.”

“어쩔 수 없잖아! 여긴 범인의 것이라고 특정할 만한 물건도 없었다고!”

“레스트레이드!”

형사가 소리를 지르자 그녀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요?”

“설마 네가 반직스 경을 들여보낸 거냐?”

형사가 내뿜는 험악한 기운에도 지나는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요?”

“그런데요, 가 아니다! 분명 내가 사건 관계자가 아니면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이 사람이 사건 관계자가 아니에요? 피해자는 이 검사의 피고인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안 된다는- 아니, 됐다, 반직스 경, 분명 전 현장 출입을 허가한 적이 없습니다. 근데 아직 제대로 된 형사 자격도 없는 이 꼬맹이 말을 듣고 현장에 들어온 겁니까?”

“잠깐, 멋대로 꼬맹이라고 부르지 마요!”

“다른 형사는 어땠을지 몰라도 전 제 사건 현장에서 사적인 친분을 이용하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형사, 이제 막 일을 배운 수습 형사보다도 이해가 느리군.”

“뭐요?”

“우선 난 이 ‘꼬맹이’와 친분 따위 없다. 난 이자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이자는 상황을 이해하고 날 들여보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확실히 해두지 형사. 길버트 블랙로드의 뇌물공여 혐의에 대한 내 수사권은 아직 박탈되지 않았다. 귀공이 사건을 수사하느라 매우 바쁜 와중에 굳이 검사국으로 수사를 종료해달라는 공문을 보낸다면 검토하도록 하지.”

형사는 진저리가 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반직스가 수사 현장을 헤집고 다니는 것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말을 지키기로 했다.

“지나 레스트레이드,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라.”

“뭐라고요?”

“내 말 못 들었나? 지금부터 넌 이 수사에서 제외된다.”

“제가 이 사람을 들여보내서 그래요? 치사하게 왜 그래요!”

형사가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으르렁거리며 문을 가리켰다.

“나가. 당장!”

“그럴 필요 없다.”

끼어든 건 아소기였다. 그는 이 말다툼을 잠시 중단시킨 뒤 반직스를 돌아보았다.

“바로크 반직스 경.”

“듣고 있다.”

“사건을 둘만 조사하기는 힘들겠지. 내 생각엔 손을 보태 줄 사람이 필요할 듯한데.”

지나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반직스와 아소기를 번갈아 보았다. 반직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만. 지금은 강아지 손이라도 급한 때…라고 여겨보도록 하지.”

토비 경위가 지나의 품 안에서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레스트레이드 수습 형사, 길버트 블랙로드 뇌물공여 수사에 협조를 부탁하지.”

“어? 나?”

지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형사를 한 번 스윽 돌아보더니, 곧바로 보란 듯이 씨익 웃으면서 힘차게 경례했다.

“네! 지나 레스트레이드 경감, 지금부터 수사 시작하겠습니다!”

형사는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너무 놀라 꼿꼿하게 굳은 채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있었다.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항의하려고 했지만 반직스가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미스터 아소기, 난 형사와 남은 얘기를 마저 할 테니 귀공은 수습 형사와 함께 서재 조사를 시작해라.”

“기꺼이.”

아소기는 태연하게 허리를 숙여 형사에게 인사하곤 지나와 함께 현장을 떠났다. 저 귀찮고 짜증 나는 형사는 그의 스승이 알아서 잘 해결해 놓을 것이다.


길버트 블랙로드의 서재는 한바탕 순경들이 뒤집어놓고 간 후였다. 발에 채는 서류와 책들을 집어 대충 구석으로 치워두면서 아소기는 혀를 찼다.

“이런 곳에서 잘도 증거를 찾았군.”

“쓸만한 건 별로 없을걸. 이미 그럴듯한 건 다른 순경들이 다 가져갔어. 아까 그 검사가 들고 있던 서류도 순경한테서,” 지나가 두 눈꼬리를 바싹 올리면서 반직스 흉내를 내었다. 전혀 닮진 않았지만. “이런 표정으로 빼앗은 거야.”

“그렇습니까…”

“뭐야, 그렇게 실망하지 마, 아소기! 대신 내가 집 구경이라도 시켜줄까? 너희 사실 이 살인사건에 관심 있는 거 맞지?”

“저 형사 놈은 사고인지 살인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던데요.”

“하지만 역시 무죄 판결을 받고 바로 죽어버렸잖아? 사고라고 생각하긴 힘들지.”

“하지만 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거군요.”

“뭐어, 그렇지. 하지만 너랑 내가 조사하면 뭔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 무엇보다 여긴 토비 경위도 있고.”

토비 경위는 바닥에서 종이를 뜯고 있었다. 영 미덥지 않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아소기는 어쨌든 이 수습 형사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녀가 가진 정보가 더 많았다.

“그럼… 미스 레스트레이드,“ “경감.”

“…레스트레이드 경감님, 이 저택 구조를 확인해 보도록 하죠.”

“맡겨달라고! 가자, 토비 경위!”

멍!

토비 경위가 짧은 다리로 앞장서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저택은 크기는 크지만 방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길버트 블랙로드 본인의 방 하나, 게스트룸 하나, 서재 하나, 1층에는 부엌과 거실, 그리고 지붕 바로 밑에는 창고 역할을 하는 다락방 정도. 다락방은 애초에 창문이 없어 누군가가 들어오는 게 불가능했고, 게스트룸과 1층에서도 침입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잠깐, 메이드는 어디서 생활하는 겁니까? 그녀는 오늘 아침 큰소리를 듣고 사건을 발견했습니다. 전 그녀가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아, 그게, 메이드는 다락방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어.”

지나의 말에 아소기는 당황했다. 다락방은 창문도 없어 공기 중에 먼지가 가득했고 빛이라고는 양초 하나가 다였다.

“그 메이드는 어째서 여기서 지내고 있는 겁니까?”

“피해자는 고리대금업자잖아? 그 메이드도 돈을 빌린 사람 중 하나였나 봐.”

“그래서 여기서 노예처럼 부려 먹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 사람한테는 피해자가 죽은 게 다행이었겠네.”

“메이드가 범인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아무튼 체포할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경찰서에서 진술 중이니까 곧 알게 되지 않을까?”

“그 외에 최근 길버트에게 살의를 강하게 느낄 만한 사람은 있습니까?”

“그 인간에게 살의를 느끼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그건 부정할 수 없겠군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한 명 있잖아? 너희가 맡은 사건 말이야.”

베일 로즈 살인사건 말인가. 아소기는 어렵지 않게 지나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해자의 누나라면, 재판 이후에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 이걸 보는 게 어때?”

지나가 흠집 난 초록색 트렁크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건…”

“아직 돈을 못 갚은 사람들 명단이야.”

“형사가 그걸 당신에게 맡겼을 것 같진 않은데요.”

“나에겐 아직 전직의 기술이 있다고.”

역시 훔친 거였군. 아소기는 말없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응시했다. 지나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지레 찔려서 변명하듯이 말을 붙였다.

“뭐, 세상엔 소매치기 잘하는 형사도 필요하지 않겠어?”

“혹시 또 훔친 서류가 있습니까?”

“훔친 게 아니라 잠깐 빌린 거야. 그래서, 안 볼 거야?”

지나가 서류를 다시 집어넣는 시늉을 하자 아소기가 재빨리 손을 뻗어 서류를 낚아챘다. 이번에는 지나가 팔짱을 끼고 말없이 아소기를 응시했다.

지나의 시선에도 아소기는 태연했다. 어쨌든 필요한 정보였다. 아소기는 천천히 명단을 넘겨보며 채무자들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익숙한 이름도 보였다. 베일 로즈. 베일의 이름 가운데에는 두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옆에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베카 로즈…”

아소기의 혀가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녀는 남동생의 살인 사건을 목격한 최초 발견자였다. 길버트가 동생을 죽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죽은 남동생의 이름 대신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남동생의 채무가 그녀에게 옮겨간 모양이었다.

그의 무죄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 때문에-

“망할!”

아소기가 갑자기 욕설을 내뱉자 지나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드렸군요.”

그러나 지나는 이미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 이유로 이 명단을 넘겨준 것이었으니까.

“발견한 거지? 그 이름.”

아소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숨을 내뱉으며 책을 덮었다.

“레베카 로즈. 빚이 더 늘어났군요.”

“형사는 레베카 로즈도 의심하는 것 같긴 했어. 근데 메이드 말로는 그 사람 최근에 여기 온 적은 없다나 봐.”

“메이드가 현재로서는 유력한 용의자겠군요.”

“그래, 그리고…”

지나는 생각에 빠진 듯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소기는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으나 지나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한 아소기가 그녀를 재촉했다.

“저기, 아소기.”

지나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넌 ‘사신’의 제자인 거지?”

“꽤 새삼스러운 질문이군요.”

“아니, 뭐랄까, 그동안 너희 둘을 봤을 때, 스승과 제자치고는 사이가 별로인 것 같아서 말이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부류의 질문이었다. 아소기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들썩이다가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해 버렸다.

“친구도 아니고, 사이가 좋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시 예전의 그 사건 때문인 거야?”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있다는 거네?”

“미스 레스트레이드,”

“경감.”

“…레스트레이드 경감님, 지금 우린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지나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누굴 바보로 알아? 지금 신문에서 그 검사 얘기가 다시 나오고 있잖아. ‘사신이 돌아왔다’고.”

“설마 당신도 저흴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난 너한테 물어보고 있는 거야. 그 검사를 믿냐고.”

“무슨 뜻입니까?”

지나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아소기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그녀의 표정에 아소기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아소기, 만약에 말이야, 네 스승이 다시 ‘사신’으로 법정에 선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질문을 듣자마자 아소기의 입에서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지나의 시선을 회피했다.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바로크 반직스 경이 범인인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만일이라고 말하는 거잖아.”

“뭐가 그렇게 불안한 겁니까?”

아소기가 끝까지 대답을 피하자 지나는 화가 난 듯했다. 그녀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됐어! 잊어버려, 난 그냥, 그냥…”

신경질적이었던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더니 완전히 풀이 죽어버렸다.

“그냥 생각났어. 내 보스가…”

지나의 손이 코트 주머니 안에서 꿈지럭거리면서 무언가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소기도 그 손을 의식하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들렸다.

“계속 신경 쓰인다고, 사이가 안 좋은 스승과 제자는. 순경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이번에야말로 진짜 ‘사신’의 짓이라고. 증거가 없으니까 그냥 하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스코틀랜드 야드는 검사국을 별로 믿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 아니, 그보다는 이제 같은 경찰끼리도 잘 안 믿는 것 같아.”

그 재판 이후, 고작 3개월이었다. 사법계를 향한 불신은 외부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불신은 당사자인 스코틀랜드 야드와 검사국 내부에서도 끓어올라 서서히 서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게 뒤집어진 방 한가운데에 놓인 시한폭탄처럼.

“참나, 재판에서 날 사악한 범죄자라고 몰아가더니 꼴 좋다. 그리고 내가 형사가 아니라고 했고. 그리고 레스트레이드 경감이라고 하지도 않고! …하지만 그 사람이 만약 ‘사신’으로 다시 법정에 선다면 이제는 변호해 줄 나루호도도 없잖아. 여기서 그 사람을 믿어줄 사람은 기껏해야 덜렁이 탐정이나 아이리스… 그리고 제자인 너뿐일걸.”

“레스트레이드 경감…”

아소기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우선… 미안합니다. 그렉슨 형사를 지키지 못한 건 제 탓입니다. 증오에 눈이 멀어 오히려 그를 해칠 뻔했죠. 결과적으로 그를 해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아소기의 사과에 지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무슨, 너 바보야? 보스가 나쁜 짓을 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 재판은 나도 지켜봤다고. 제일 나쁜 건 그 지팡이 든 할배야. 네가 미안해할 건 없어. 난 그냥, 걱정된다고.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니까…”

아소기는 답변을 회피하며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건 ‘사신’에게서 소중한 스승을 잃은 그녀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내 개인적인 사감과는 관계없이, 바로크 반직스 경이 좋은 검사이자 스승인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으음…”

지나가 영 개운치 못하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게 그 검사를 신뢰한다는 말은 아니잖아?”

“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반문에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던 지나가 결국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신의 모자를 푹 눌러썼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말라니, 누가 봐도 신경 쓰이는 얼굴을 하고선. 아소기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소기는 거짓말로라도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었으나 그건 기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기민한 것 같았다. 어설픈 거짓말은 그녀를 더 화나게 할 것이다.

“조사는 끝났나?”

침묵을 깨는 어두운 목소리에 지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진짜, 왔으면 인기척을 내라고!”

“사람이 오는지 마는지 신경도 안 쓰고 대화하고 있던 건 귀공들이다.”

반직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나는 불안하다는 얼굴로 아소기한테 달라붙어 속삭였다.

“설마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어깨를 으쓱인 아소기가 반직스를 향해 물었다.

“그 형사는?”

“잘…이해시켰다, 고 해두지.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됐지?”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건네준 채무자 명단을 보니 베일 로즈의 이름 대신 레베카 로즈의 이름이 들어갔더군.”

반직스는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그의 반응을 본 아소기는 직감적으로 그가 이 정보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아소기에게 레베카 로즈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이후에 어떻게 됐는지 아는 바가 있나?”

“피해자와 만났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언제?”

“재판 이후에.”

“귀군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반직스가 대답이 없자 아소기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설마 계속 그녀와 만나고 있었던 것인가?”

“내가…” 반직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재판 이후에 그녀를 만난 건 딱 한 번뿐이다.”

“그래서, 나한테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만난 이유가 뭐지?”

반직스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아소기의 목소리도 점차 높아졌다.

“네놈, 대체 나한테 숨기는 게 뭐냐?”

“아소기.”

“무슨 얘기를 나눴길래 나한테도 숨기고 있던 거냔 말이다!”

“야, 아소기!”

지나가 거칠게 그의 팔을 잡아챘다. 아소기가 돌아보자 그녀가 조용히 서재 문밖을 향해 턱짓했다. 반직스의 뒤에 순경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대놓고 보고 있지는 않았으나 누가 봐도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이쪽을 흘끔대고 있었다. 반직스도 그들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 그는 예의 그 우아한 몸짓으로 지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레스트레이드 수습 형사, 협조에 감사를 표하지.”

지나는 날카로운 분위기에 자신을 경감이라고 부르라는 소리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이제 어떡하려고?”

“지금 만나볼 수 있는 유일한 목격자를 만나러 가야겠지. 그동안 귀공은 현장에서 계속 동태를 파악해 주길 부탁하지.”

“그거야 나와 토비 경위 전문이지.”

토비 경위는 아소기의 부츠를 발톱으로 긁고 있었다.

순경들이 서재에서 나오는 반직스를 보자마자 홍해처럼 갈라졌다. 아소기는 서둘러 반직스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늘처럼 뾰족하다. 아소기는 그들을 무시하고 꿋꿋하게 앞만 보려고 했으나 본능적으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온갖 험한 말들이 머릿속에 하나둘씩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서히 서슬 퍼런 칼날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주변을 난도질할 것처럼-

“미스터 아소기.”

반직스가 축축한 모자와 망토를 다시 몸에 얹으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내가… 레베카 로즈를 찾아가 동생의 빚을 변제하겠다고 했었다.”

아소기의 마음속에서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우던 것들이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그는 멍하니 반직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동생의 빚은 자신이 직접 갚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찾아가지 못했고. 그녀가…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왜 아까는 말하지 않은 거지?”

“내가 사적으로 사건 관계자를 도우려고 했단 얘기를 야드가 알아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그리고… 검사로서도 좋은 태도 또한 아니었다.”

문을 여는 잠깐 사이에 반직스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아소기에게 머물렀다.

“미리 말하지 못해 송구하다.”

아소기는 말없이 우산을 집어 들었다.


“아, 자, 잠깐만!”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지나가 저택의 계단을 소란스럽게 내려왔다. 그녀는 뒤늦게 순경들을 의식했는지 급격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 명탐정, 여기 왔었어.”

갑자기 등장한 의외의 인물에 두 사람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지나를 바라보았다.

“명탐정이면-”

“홈즈 말이야, 여기 왔었어. 한두 시간 전쯤에.”

“지금은 어디 있는 거지?”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정신 사납다고 형사한테 쫓겨났어. 형사가 순경 한 명을 보내서 쫓아가게 시켰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그때 문을 박차고 누군가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으, 으…”

순경이었다. 그는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지금은 비에 홀딱 젖었지만 마치 연극에서나 쓸 법한 화려한 모자였다.

“어,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이 홈즈와 함께 갔었어.”

“순경, 탐정은 어쩌고 혼자 복귀한 거지.”

올드 베일리의 ‘사신’이 눈앞에 있는데도 순경은 정신이 없는지 손을 휘적거리면서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었다.

“모, 몰라요… 이젠, 못해-”

“…순경, 똑바로 대답해라. 탐정은 지금 어디 있지.”

순경은 헉헉거리면서 간신히 손가락을 들어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반대편 건물을 가리켰다. 반직스, 아소기, 지나의 시선이 동시에 그곳으로 향했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 명탐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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