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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바로] 사신과 매달린 남자와 가면 쓴 제자의 모험 -1-

Backlog by 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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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부활


‘올드 베일리의 사신이 부활하다!’

아소기 카즈마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집무실 한편을 바라보았다. 신문에서 떠드는 그 ‘사신’은 피로에 젖은 눈으로 이른 아침부터 ‘신의 유리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고 있었다.

“꼴사납군. 아침부터 취할 셈인가?”

그는 제자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마차를 불렀다.”

스승의 짧은 한마디에 아소기는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 이상 비꼬는 말도 소용없을 것이다.

제자가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반직스는 창에 길게 흔적을 남기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와인잔은 그의 손안에서 부드럽게 흔들릴 뿐 결코 입으로 향하지 않았다.

곧 폭우가 내리겠군. 반직스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피해자는 길버트 블랙로드. 런던의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이자, 일주일 전 발생한 베일 로즈 살인 사건의 용의자였다. 베일 로즈는 허리띠로 목을 매단 채 자택에서 발견되었고 가슴에는 길버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도망치던 길버트 블랙로드를 피해자의 누나가 목격했지.”

반직스가 제자의 보고를 이어받았다.

“피해자의 집에서는 현금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이 사건은 빚 수금 중에 벌어진 우발적인 살인 및 은폐 시도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증거로 제출하려고 했던 단검은 재판 전에 사라졌고 배심원과 판사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지.”

반직스는 재판이 끝난 후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얼굴을 떠올렸다. 길버트 블랙로드는 자신의 화려한 황금 지팡이를 어루만지며 그를 조롱했다.

‘이런, 그 유명한 ‘사신’의 재판에서 무죄를 받아버렸군요. 이제 저는 죽은 목숨인가요?’

“그래, 정말로… 죽어버렸군.”

반직스의 시선을 따라 아소기 또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차가 데번셔가에 있는 길버트의 집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아소기는 폭우 속에서 우산을 펼쳤다. 뒤따라 내리려던 반직스는 아소기가 자신을 돌아보자 멈칫했다. 평소의 제자라면 스승이 뒤따라오든 말든 저만치 가버렸을 것이다.

“뭐 하는 거지!”

귀를 울리는 빗소리에 반직스의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이 폭우를 다 맞고 사건 현장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바로크 반직스 경!”

타당하군. 평소라면 이런 폭우에도 굳이 우산을 쓰지 않겠으나, 자칫하면 온몸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건 현장을 훼손할 수도 있었다. 반직스는 아소기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워낙 강렬한 폭우라 금세 망토가 젖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두 성인 남성을 덮어줄 정도로 큰 우산도 아니었던지라 아소기의 머리와 어깨도 빠르게 젖기 시작했다. 반직스는 아소기의 머리 위로 제 망토를 둘렀으나 아소기가 단호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 반직스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순순히 손을 뒤로 물리고 대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건 현장이 실외가 아닌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반직스 경.”

갑작스러운 방문에 형사가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예고도 없이 현장 수사를 방해한 점, 용서를 구하지, 형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노골적으로 그들을 경계하던 형사는 반직스가 품에서 신문을 꺼내자 난색을 보였다. 반직스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신문 기사를 읽어나갔다.

“‘오늘 5시, 런던의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불과 일주일 전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고 무죄로 풀려났다. 그 재판의 담당 검사가 누구인지는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독자라면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가 아닌 이상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군, 형사.”

“야드의 누구도 이 소식을 외부로 흘린 적 없습니다.”

형사가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동료들을 믿는 그 마음은 높이 사도록 하지. 지금 이 자리에서 수사 정보가 빠져나간 것을 추궁할 생각은 없다. 현장을 봐도 되겠나.”

“죄송합니다만, 이 사건의 담당 검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텐데요, 무엇보다 아직 타살인지 자살인지조차 결론 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하겠다.”

“반직스 경께서는 이 수사를 통제할 권한이 없습니다!”

“아무도 형사에게 통제권을 넘기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니 지금 정중하게 현장을 보게 해달라고 허락을 구하고 있는 거다.”

대체 어딜 봐서? 형사는 그렇게 묻고 싶은 눈치였다. 반직스의 서늘한 눈빛에 움츠러든 듯하면서도 형사는 꿋꿋하게 반직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아소기는 기민하게 평소와는 다른 현장의 분위기를 읽었다. ‘그 사건’ 이후 야드가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적은 없어도 현장 출입을 이토록 고집스럽게 막은 적은 없었다. 반직스도 이번만큼은 쉽게 현장에 들어가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기꺼이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내가 현장에 발을 들이는 게 그렇게 기껍다면, 대신 내 제자의 수사 참관을 요청하지.”

형사가 당황한 얼굴로 아소기를 바라보았다.

“저 동양인을요?”

“내 제자다, 형사. 교육 중인 제자가 실제 수사에 참관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예, 하지만-“

“그렇다면 부탁하지. 난 여기서 기다리겠다. 미스터 아소기.”

“잘 부탁드립니다, 형사님.”

형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소기가 재빨리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마를 짚으며 곤란해하던 형사는 현관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반직스와 뒷짐을 진 자세로 꼿꼿하게 서 있는 그의 제자를 흘끔 보고는 말없이 2층으로 향했다. 저 ‘사신’과 말싸움을 계속하느니 이 동양인 제자에게 현장만 빠르게 보여주고 돌려보내는 게 더 싸게 먹힐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 동양인 제자가 그의 스승만큼이나 영민하고 집요하다는 것을 몰랐기에 나올 수 있는 판단이었다.

형사 뒤를 따르며 아소기는 빠르게 저택 안을 훑어보았다. 반직스 가문의 저택만큼이나 거대하진 않았지만 아소기 본인처럼 작은 단칸방에서 사는 서민들은 평생을 벌어도 살 수 없는 규모의 집이었다. 사건 현장은 2층에 있는 그의 방. 아소기는 사건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방 한가운데에 거꾸로 매달린 사람 모형을 마주쳤다.

‘목도 아니고 발목을 묶어서 거꾸로 매달다니… 덫에 걸린 사냥감 같군.’

“오늘 아침에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신고자는 누굽니까?”

“여기서 일하는 메이드다. 큰 소리가 들려서 올라왔더니 이 꼴이었다고 하더군.”

“큰소리라고 하면?”

“무거운 무언가가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라고 했다.”

“사인은 밝혀졌습니까?”

형사가 피해자 모형을 손가락으로 툭 건들자 모형이 빙그르르 돌며 뒤통수의 시뻘건 표식을 아소기에게 보여주었다.

“뒤통수를 맞았군요. 흉기는 어디 있습니까?“

”없다.“

”없다고요?“

형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없다고. 그런 건 발견되지 않았다. 바닥에 부딪혀서 생긴 상처거나 범인이 들고 달아난 거겠지.”

피해자가 매달린 위치에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바닥에 동그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핏자국으로부터 피해자가 매달린 곳까지, 시신이 끌려간 것처럼 기다란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소기의 시선이 시신 모형을 훑고 올라가 이윽고 천장에 매달린 밧줄에 도달했다.

밧줄은 그냥 천장에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밧줄은 천장에 고정된 도르래와 연결되어 바닥의 장치까지 이어져 있었다.

“피해자가 ‘취미’를 즐길 때 쓰는 밧줄이군요.”

“죽은 동물을 매다는 용도랬나. 헹, 하여간 돈 많은 인간들이란.”

그래, 바로크 반직스는 그 ‘취미’ 덕에 길버트 블랙로드가 무거운 시신을 손쉽게 밧줄에 매달 수 있었다고 주장했었다. 길버트 블랙로드는 자신의 방에 있는 밧줄은 그런 용도가 아니라고 한사코 부인했지만.

“바닥을 보니 머리를 먼저 부딪히고 밧줄에 묶여 끌려간 것 같습니다만… 이 밧줄은 어떻게 움직이는 겁니까?”

형사는 말없이 창가 쪽을 가리켰다. 창문 옆, 벽에 붙은 레버가 보였다. 레버는 아래로 내려가 있었고 그 앞에는 커다란 액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형사님의 소견은 무엇입니까?”

형사는 껄끄러운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피해자가 밧줄 근처에 있다가 액자가 떨어져 레버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피해자는 밧줄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고, 하필 뒤통수를 바닥에 세게 부딪히면서 사망했다…인 거지. 만약 이게 사고사라면 말이야.”

“바닥에 부딪힌 것치곤 출혈이 꽤 심하다고 생각합니다만.”

“흉기로 추정되는 것도, 범인이라고 생각되는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부검을 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진상은 이것뿐이다.”

부검이라면 닥터 시스의 딸인가. 아소기는 괴상한 새 부리 가면을 쓴 닥터 그로이네를 떠올렸다. 그 극비 재판 이후 몇 번 마주쳤었지만, 그때마다 ‘시체가 아직 안 되어서 아쉽다’라느니, ‘동양인의 몸도 어서 해부해 보고 싶다’라느니, 영 껄끄러운 말만 하는 탓에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아소기는 스멀스멀 떠오르는 그로이네와의 기억을 떨쳐내곤 다시 수사에 집중했다.

“하지만 쉽사리 사고사라고 결론 내리지는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무언가 신경 쓰이는 점이라도 있는 겁니까?”

“있지.”

지나치게 성의 없는 대답에 아소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팔짱을 끼며 침착하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제게 말해줄 생각은 없는 겁니까?”

“흠.”

형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발끝으로 바닥을 툭, 툭 두드렸다.

아소기는 어쩐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3개월 전 그 재판에 있었어.”

갑자기 극비 재판이 등장하자 아소기의 눈썹이 들썩였다.

“자네가 검사석에 서서 ‘사신’을 몰아붙이는 걸 봤지.”

“그 ‘사신’이 얼마 전 처형당한 하트 볼텍스를 말하는 건 아닌 것 같군요. 제 착각입니까?”

“지금 ‘사신’이 누구인지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나? 길버트 블랙로드는 무죄를 받고 죽었다. 놀랍게도 그 ‘사신’의 재판에서 말이야.”

“지금 형사님이 의심하는 게 바로크 반직스 경입니까, 아니면 저입니까?”

“둘 다지. 수석 판사와 내 옛 동료가 한 패였던 것처럼. 그래서 자네와 그 검사님이 수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여길 찾아온 것이 정말 오늘 아침에 갑자기 신문을 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뻔뻔하게 연기를 하는 중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억측이 지나치군요. 증거는 있습니까?”

“없다.”

형사는 깔끔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연관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아소기는 이를 갈며 형사를 노려보았다. 저자는 3개월 전 극비 재판을 방청했다. 그렇다면 알 것이다. 아소기 카즈마가 그 ‘사신’이라는 작자들 때문에 누구를 잃었는지. 그런데 감히-

“참관은 끝났나?”

그때,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형사는 목소리의 주인을 보고는 깜짝 놀라 달려갔다.

“반직스 경!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분명 제가-“

“처음부터 날 의심한다고 말해줬다면 기꺼이 내 결백을 입증해 줬을 텐데, 형사. 그 대신 입을 다물고 날 여기서 쫓아내기로 했군.”

“그, 그건-“

“미스터 아소기, 참관은 끝났다.”

끝났다고? 아소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소리냐, 네놈. 아직 수사는 진행 중이다.“

“그래, 귀공 말이 맞다. 지금부터는 참관이 아니라 수사가 필요하다.”

반직스가 품에서 어떤 서류를 꺼내 들었다.

“방금 서재에서 찾아낸 문서다. 미스터 아소기, 읽어보도록.”

반직스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은 아소기는 그것에 적힌 내용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이건, 배심원들 이름?”

그리고 그 옆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단위는 없었으나, 만약 돈이라면 깨나 큰 액수다.

이건 올드 베일리에서 발행한 공식 문서였다. 배심원은 재판 전날 무작위로 선출되고, 담당자는 이 문서에 적힌 이름과 주소로 배심원에 선출되었다는 우편을 보낸다. 근데 이 문서가 이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판사는 몰라도 배심원을 매수한 건 확실하군. 그리고 법원도.”

“어느 쪽이든 역시 그는 유죄였다고 봐야겠지. 이제 그 죄를 추궁할 기회는 없어졌지만.”

“잠깐, 잠깐만요!”

형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멋대로 사건 현장에 손을 대는 건 위법입니다, 반직스 경!”

“멋대로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형사. 나와 미스터 아소기는 길버트 블랙로드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비리의 증거가 발견된 이상 여긴 내 사건 현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길버트 블랙로드는 죽었습니다! 경 말대로 이제 그 죄를 추궁할 순 없습니다!”

“사람은 죽어도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사. 극비 재판까지 본 귀공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니, 실로 유감스럽군.”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로는 절대 이 ‘사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소 치졸한 방식을 쓰기로 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살인 사건의 수사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담당 검사가 없는 지금, 책임자는 스코틀랜드 야드의 형사입니다. 어떤 무책임한 순경이 경의 출입을 허가한 건지 몰라도, 함부로 사건 관계자도 아닌 사람을 현장에 들인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겠군요.”

“뭐라고?”

아소기가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소리쳤다.

“정의를 수호하고 진실을 밝혀내야 할 스코틀랜드 야드가 이런 식으로 수사를 방해하다니, 네놈들은 양심이라는 게 없는 거냐!”

“우리에게도 원칙이라는 게 있다! 아직 검사보도 되지 못한 동양인 주제에 영국 경찰법이라는 걸 알 리가 없지!”

“미스터 아소기!”

아소기가 참지 못하고 허리춤의 검을 움켜쥔 순간, 무언가가 그의 발치에 툭, 하고 부딪혔다. 반직스도, 형사도, 아소기도 논쟁을 멈추고 그 정체불명의 물체를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작고, 검은 강아지였다.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아소기였다.

“이 개, 분명…”

“토비 경위! 범인을 찾은 거야?”

작은 체구의 소녀가 반직스의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미스 레스트레이드?”

지나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경례했다.

“지나 레스트레이드 경감 인사드립니다, 검사님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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