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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하는 집

Backlog by 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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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기 카즈마는 창문도 없는 단칸방에 앉아 지금 자신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 방 안을 덥힐 수 있는 가스등 외에는 옷가지가 든 작은 가방과 붉은 머리띠가 묶인 검 한 자루뿐이었다. 그는 밀항자였다. 그가 탄 배는 끊임없이 움직였고 목적지는 끊임없이 바뀌었다. 그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아소기는 검집을 잡아당겨 반쯤 드러난 칼날 위로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기억이 돌아오면서 이 검도 드디어 주인 곁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복수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소기의 손에 들린 검이 떨렸다. 그는 이윽고 떨리는 건 검이 아니라 자신의 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분노 때문이다. 아소기는 떨림을 멈추기 위해 검을 꽉 움켜쥐었다.

창문도 없고 그에게는 시간을 알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없었지만 방의 공기가 점차 서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스등이라도 켜지 않으면 자는 사이 얼어 죽을 판이었다. 동전을 찾기 위해 그는 침대맡에 던져놓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거친 손길에 가방이 열리면서 몇 벌 없는 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소기는 그 사이에서, 이 허름한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주머니를 발견했다. 아소기는 그것을 집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번쩍거리는 동전들은 그가 이 방을 1년을 빌리고도 남는 돈이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아소기가 집을 나서려는 순간, 노집사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아소기는 등을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소기는 순간 울컥해서 ‘당신 주인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라고 쏘아붙일 뻔했다. 그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 노인은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주인을 누구보다 아꼈다. 그는 주인이 갑자기 데려온 이름 없는 남자에게도 친절을 베풀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아소기는 그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아소기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노집사에게 인사했다.

‘그동안 감사했다.’

‘지내실 곳은 있으신 겁니까?’

아소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밀항자에게 갈 곳 따위 없었다. 정 지낼 곳이 없다면 수석판사라도 찾아갈 생각이었다.

노집사는 대답이 없는 아소기를 바라보다가 손에 쥔 주머니를 그에게 건넸다.

‘가져가세요.’

‘받을 수 없다.’

사신의 집에서 나온 것은 그 무엇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아소기가 손을 내밀어 거절하려 했으나 노집사는 완강하게 아소기의 손에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당장 오늘 밤에 갈 곳도 없지 않습니까. 가져가세요. 런던의 밤은 춥습니다.’

노집사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아소기는 어쩔 수 없이 주머니를 받았다. 주머니가 묵직했다. 아소기는 그가 이 안에 얼마나 많은 돈을 넣은 건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소기 카즈마다.’

노집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연륜 있는 집사답게 다시 의연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소기 님. 어디로 가시든… 이것만은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있어서 저도, 주인님도… 오랜만에 누군가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요.’

주머니가 더러운 바닥 위를 구르며 동전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아소기는 분을 못 이겨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노집사는 모를 것이다. 그 말이 아소기에게 얼마나 모욕적이었는지를.

그는 가스등을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검을 움켜쥔 채로, 런던의 겨울이 그를 삼키기 전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사방이 벽돌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소기에게는 길바닥 한 가운데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오로지 한 남자를 떠올렸다.

과거의 자신이 그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했다면, 지금의 내가 그를 영원히 고통받게 하리라.


“아소기 님.”

노집사가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그가 정말로 행복해하는 것이 느껴져 아소기는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집사는 그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층으로 그를 안내했다.

“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정말 오랜만입니다. 클림트 님이 돌아가신 후로 오랫동안 부를 기회가 없었지요.”

노집사의 뒤를 따라가던 아소기는 그제야 그가 아버지를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 당연한 사실을 몰랐을까. 그는 클림트 반직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직스 가를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용인이기도 했다. 그가 아소기 겐신을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 아버지도 이곳에서 지냈나?”

“아니요. 하지만 자주 오셔서 클림트 님과 체스를 두곤 하셨습니다. 처음엔 규칙이 익숙하지 않으셨는지 매번 클림트 님께 지셨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클림트 님이 인정하실 정도로 실력이 빠르게 느셨습니다. 훌륭한 전략가셨지요.”

노집사는 아소기에게도 익숙한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한발 물러나 아소기에게 들어가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아소기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았다. 종자를 위해 원래 있던 책상도 치우고 들여놓은 좌식 책상과 방석도, 그 위에 두고 떠났던 고급스러운 가죽 수첩도 그대로였다. 아소기는 수첩을 펼쳐보았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다 보면 조금이라도 기억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며 이곳의 주인이 선물한 것이었다.

"주인님이 마음대로 하라고 하셔서, 그냥 두었습니다. 어쩐지 빈방으로 두고 싶지 않아서요.“

아소기는 말없이 수첩 첫 장에 쓰인 글자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바로크 반직스.’

그는 뒤를 돌아보다가 문가에 서 있는 바로크 반직스를 발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노집사는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 이후에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피곤하겠지.”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바로크 반직스였다.

“쉬어라. 저녁 식사가 준비되면 집사가 부를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아소기는 생각했다. 저 남자는 마음대로 하라고는 했지만, 이곳은 형을 죽인 자의 아들이 쓰던 곳이다. 그런데도 방을 당장 치우라고 하지 않았다.

“미련한 놈.”

완전히 닫히려던 문이 멈추었다. 아소기는 문틈으로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그는 작은 숨소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은 결국 침묵 속에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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