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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반동

Backlog by 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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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잘 지내고 있어?’

녹슨 구치소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바로크는 그를 찾아온 손님이 미스터 나루호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일본인 변호사의 발소리는 이렇게 절도 있지 않았고, 그라면 분명 법무조사라는 동행인이 함께했을 것이다. 그는 새까만 그림자가 저벅저벅 걸어와 구치소 복도에 걸린 가스등의 불빛을 등지고 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로크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던 유일한 빛이 남자의 몸에 가려지고, 그는 어둠 속에 잠겼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라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정확히는 서로의 그림자만을 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크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마치 그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여긴 무슨 일이지.”

“…담당 검사가 피고인을 보러 오는 게 이상한가?”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피고인을 심문하기엔 야심한 시각이군.”

“나루호도의 변호를 받기로 했다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에서는 희미한 비웃음이 느껴졌다.

“일본인을 혐오한다는 남자가 대단한 각오를 했군. 그렇게도 살고 싶었나?”

“귀공이 일본인인 줄 알면서도 종자로 받아들였다. 대단한 각오랄 것도 없지.”

남자는 침묵했다. 바로크는 그를 입 다물게 했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분노 어린 목소리가 그림자로부터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누군가를 혐오할 자격이 있나?”

“내 형을 죽인 남자와 그 아들을 증오하지 않으면 누굴 증오해야 하지?”

어둠 속에서도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크는 그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덤덤하게 마주했다.

“귀공이 아소기 겐신의 아들인 줄 알았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담지 마라.”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지. 그는 자신이 클림트 반직스를 살해한 것을, ‘프로페서’라는 것을 인정했다. 귀공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놈이 10년 동안 무수히 많은 피고인을 죽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

“네놈은 부정한 수를 써서 내 아버지에게 살인의 누명을 씌웠어. 그리고 10년 동안 네놈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피고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 그게 네놈의 ‘고귀한 형님’이 가르쳐주신 영국 검사의 방식인가?”

바로크가 본능적으로 가슴의 검사장을 보호하듯 움켜쥐었다.

“감히 형님을 욕보이지 마라.”

“착각하지 마라. 그 형님을 욕보이고 있는 자는 내가 아니라 너다, ‘사신.’ 그를 존경하고 그리워한다면서 잘도 그 거대한 초상화를 앞에 두고 더러운 짓을 하고 다녔군.”

“귀공은 3개월 동안 내 종자로 지냈다. 귀공은 정말 내가 ‘사신’이라고 생각하나?”

남자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 말했다.

“고작 3개월이다.”

“고작 3개월 동안 귀공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 옆에 있었지.”

바로크가 반박했다.

“귀공은 그 당시에도 내가 ‘사신’이라고 불리는 걸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을지 몰라도 귀공은 멍청이가 아니다. 그때도 내가 정말 ‘사신’이라고 생각했나?”

“…아니.”

남자가 순순히 인정했다.

“네놈이 ‘사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멍청이였으니까.”‘

바로크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네놈은 멍청이가 아니니 기억을 잃은 종자 따위에게 네놈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았겠지. 아니, 오히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말없이 따르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을지도 모르겠군. 안 그런가?”

바로크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집무실에서 클림트 반직스의 거대한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처럼 늦은 밤이었다.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뒤를 돌아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종자를 바라보았다. 흰 가면 아래의 입술은 꾹 다물려 있었고, 샛노란 눈동자의 가면은 그의 정체를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분명 귀가하라고 했을 텐데. 왜 돌아왔지?’

종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바로크는 다소 취해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들은 파편처럼 바로크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전부를 보여줬지.” 바로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 또한 멍청했으니까.”

바로크에게 그는 완벽한 타인이었다. 도리어 그렇기에, 그에게 모든 걸 드러낼 수 있었다.

“…왜 날 찾아온 거지.”

그리고 바로크는 알 수 있었다.

“오늘도 잠이 오지 않나?”

그건 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바로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철창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남자는 굳은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바로크는 한 걸음 떨어진 거리가 되어서야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소기 카즈마.”

이름이 불리자마자 남자는 곧장 등을 돌려 독방을 떠났다. 철창 앞에 가만히 서서 불규칙한 발소리를 듣고 있던 바로크도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펜을 들어 벤자민에게 보낼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벤자민, 무사히 독일에 도착했다니 기쁘다. 나는’

펜을 쥔 손이 채 단어 몇 자도 쓰지 못하고 멈추었다. 그러나 편지를 끝마쳐야 했다. 내일 그의 운명이 결정되기 전에.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

꼿꼿했던 등이 초라하게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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