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바로

Nighty Night

Backlog by 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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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두 병째였다. 바로크는 빈 병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고 잔을 기울였다. 머리가 멍해져 온다. 머리가 멍해지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까지 필요한 와인잔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지만 바로크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거대한 초상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꾸지람이든 온화한 위로든 무엇이든 듣고 싶었지만 초상화의 눈은 아래를 내려다보는 법이 없었다.

덜컹, 하고 육중한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직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샛노란 눈동자의 가면이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분명 귀가하라고 했을 텐데, 왜 돌아왔지?”

정체불명의 종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로크도 그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볼텍스가 바로크에게까지 입을 여는 걸 금지하지 않았지만 종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바로크라고 예외는 없었다. 바로크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반쯤 찬 와인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마셔볼 텐가.”

종자가 그에게 다가와 와인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크가 와인잔을 넘겨주자, 그는 그것을 마시는 대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뒷짐을 진 채 그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바로크는 의자에 앉은 채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망토와 가면에 가려진 얼굴, 그 아래 굳게 다물린 입술, 작지만 다부진 체격. 무릎을 꿇고 앉는 모양새. 기민한 움직임. 검을 휘두르는 자세까지. 바로크는 자꾸만 머릿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떠오르려는 걸 막았다. 그는 많은 일본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일본인 변호사라는 정반대의 예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크는 그가 보이는 모습이 일본인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형이다.”

종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바로크가 누굴 말하고 있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10년 전에 살해당했다. 내가 가장 믿고 있었던 남자에 의해…”

이런 말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바로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저 반응 없는 얼굴이 도리어 자신의 입을 열게 만드는 걸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게 됐다. 5년 전에는 몸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도망치듯 런던을 떠나버렸지… 그런데도 여전히 잠을 잘 수 없었어.”

그의 손이 검사장을 움켜쥐었다. 1년 전 검사국으로 돌아온 그날, 검사장을 가슴에 단 바로크는 한참 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장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땄다. 형님의 긍지였던 검사장은 하루가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검사장을 내려놓으면 그는 더한 부채감에 시달려야 했다.

버텨도 괴롭고, 도망쳐도 괴롭다.

“그렇다면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멍하니 중얼거리던 바로크는 그제야 다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종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귀공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길래…”

종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걱정이라도 된 거라면 앞으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바로크는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종자가 치워놓은 와인잔을 향해 다가갔다.

“이만 돌아가라. 내일 야드에서 피고인 사망과 관련해 조사가 들어올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피곤해질 테니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게 좋다.”

주인의 명령에도 종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로크가 뭐하냐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그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와인잔을 들어 올렸던 바로크는 조용히 그것을 내려놓았다.

기억을 잃은 채로 영문도 모르고 이런 남자 밑에서 검사 일을 배우고 있다. 그도 답답하겠지. 그러나 바로크는 그에게 섣불리 공감이나 위로의 말을 건넬 처지가 아니었다. 그를 어서 돌려보내고 홀로 이 침묵 속에 가라앉고 싶었다.

“소파에 누워라.”

종자가 움직이지 않자 바로크는 거친 손길로 그의 팔을 붙잡고 소파로 밀어붙였다. 종자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순순히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주인이라지만 같이 지낸 지는 고작 한 달 남짓이다. 인사불성 직전의 남자를 바닥에 메다꽂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종자가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본 바로크는 직전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소파에 눕혔다. 지나치게 꼿꼿한 자세였지만 목적은 달성했다. 바로크는 소파 앞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버렸다. 평소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등을 소파 아래에 기댄 채 물었다.

“그 가면을 계속 쓰고 있을 건가. 그걸 쓰고 자기엔 불편할 텐데.”

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크가 그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자 그는 빠르게 바로크의 손목을 붙들었다.

“나 또한 귀공의 얼굴을 볼 생각은 없다.”

그 말대로, 바로크의 시선은 조금도 종자를 향해있지 않았다. 종자가 천천히 손을 풀자 그는 종자의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간신히 가면을 벗겨냈다. 짧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바로크의 손등에 스쳤다. 바로크는 간지러운 손등과 그의 손에 들린 가면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어릴 적, 천둥번개가 무서워 형님을 찾아갈 때면… 형님은 옆에 날 눕히고 항상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신기하게도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창밖에서 우렁차게 울리던 천둥도, 눈앞에서 번쩍이던 번개도 무섭지 않았어…”

그를 위로해 줄 생각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그가 편히 잠들었으면 했다. 같은 병에 시달리는 동지로서.

Golden slumbers kiss your eyes,

Smiles awake you when you rise

Sleep, pretty wantons, do not cry,

And I will sing a lullaby

Rock them, rock them, lullaby

Care is heavy, therefore sleep you,

You are care, and care must keep you

Sleep, pretty wantons, do not cry,

And I will sing a lullaby

Rock them, rock them, lullaby…

등 뒤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바로크는 소파에 뺨을 기댄 채 눈을 감고 끝없이 노래했다. 그의 의식 또한 어둠 속에 잠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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