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해준 | 싹수없는 제자
제자 박서원 × 스승 정해준
재활 목적으로 매일 공백 포함 최소 1천자 이상 쓰기를 진행 중인데 그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두서없고 짧아요.
최근 중국 게이 소설들을 읽는 중이라서 그 영향이 있습니다. 좀 많이.
검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박서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양반다리로 앉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둔 경전을 필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곧게 앉아있는 눈앞의 남자에게 몇 번이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봤지만 영 소용이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던가. 그는 스승이 내려준 숙제를 하지 않았고, 그 덕에 경전을 3번 필사해오라는 벌을 받은 상태였다. 진노하신 스승은 어찌나 무자비하시던지. 경전도 얇은 것이 아니라 아주 두껍고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이로다 싶은 것을 골라 건네주셨다.
한시진 째 앉아 필사를 하던 박서원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감각에 몸서리쳤다. 결국 그가 들고 있던 붓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다리를 책상 아래로 쭉 폈다. 그의 눈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눈썹을 까딱였다. 그 남자는 뭐가 그리도 심각한지 잔뜩 미간을 구긴 채 자신 앞으로 온 서신을 읽는 중이었다. 서신을 읽기 전에는 경전을 읽었고, 경전을 읽기 전에는 자신을 바라보며 일다경(一茶頃, 한 잔의 차를 마실 정도의 시간)에 한 번씩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박서원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해준아."
남자는 서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박서원이 왼손 검지로 책상을 한 번 톡 두드렸다.
"해준아."
남자가 서신을 내려두고 붓을 들어 답신을 적기 시작했다. 박서원이 한쪽 눈을 찌푸리며 이번에는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남자는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정해준."
남자가 붓을 내려두곤 한쪽 손으로 소매를 잡아 그린 듯 바른 자세로 먹을 갈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박서원은 절로 몸이 앞으로 내밀어지고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아무렴, 그도 아직 15세 밖에 되질 않았었다. 결국 그가 포기한 듯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사각사각 먹이 갈리는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먹이 다 갈아지고, 남자가 붓을 들어 쓱쓱 답신을 쓰는 소리가 아주 듣기 좋았다. 박서원이 몸을 일으키곤 포기한 듯 남자를 불렀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호칭이 그의 입에서 내뱉어졌다.
"... 스승님."
드디어 남자가 박서원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박서원이 귀를 막기도 전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온 듯한 한숨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가 붓을 내려놓고 답신을 돌돌 말아 끈으로 묶었다. 그 과정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박서원이 양손을 그에게로 내밀었다. 서신을 읽고 싶으니 내놓으라는 뜻이었지만 남자는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돌돌 말아둔 답신으로 그의 손바닥을 철썩 때렸다. 고작 종이 뭉치인데도 손바닥이 얼얼했다. 박서원의 앞에서 또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입술을 댓 발 내밀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한숨 쉬지 마세요. 복 나가요."
"그 싸가지 없는 말투는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거야?"
"왜요. 어릴 때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그래, 서원아. 나를 만나러 왔니~?'하면서 반겨줬잖아요."
박서원이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다소 우스꽝스럽게 스승을 흉내 냈다. 스승, 그러니까 정해준이 결국 미간을 짚었다. 어릴 때는 '해준아. 해준아.'거리며 따라다니길래 낯을 참 안 가리는구나 싶어서 잘 해줬더니. 결과가 지금 어떻던가. 경전에 반하는 더러운 인성과 싹수없는 말투는 둘째치고, 저 호칭은 도무지 어디서 배워온 것인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었다. 요즘 백씨의 쌍둥이 아들들과 어울리던데 그 곳에서 배운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신을 만날 때 허리까지 굽히며 예를 올렸던 아이들이었다. 그래... 얘가 혼자 잘못 큰 거야. 혼자 잘못 자란 거라고.
이번에는 태양혈(관자놀이)을 짚었다. 박서원이 자신을 불렀던 싸가지 없던 호칭을 다시 떠올렸더니 머리가 절로 지끈지끈 아려왔다. 스승의 고충과 참담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싸가지 없는 제자가 다리를 쭉 뻗어 양반다리한 스승의 무릎을 툭 건드렸다. 맞지 않냐며 어서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정해준이 피곤한 눈으로 그를 쓱 올려다보았다.
"그때는 어릴 때잖아. 네가 내 무릎 정도 밖에 안 왔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도 말 안 했거든."
"그럼 내가 스승님 무릎 정도 크기면 반말 써도 되나요?"
"되겠어?"
다시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발을 까딱거리며 정해준의 무릎을 툭툭 두드리던 박서원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에게 다가갔다. 왜, 또, 뭐, 또. 정해준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박서원이 씩 웃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 보통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활짝 웃는 어여쁜 얼굴이 어찌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등 뒤로 소름이 올라왔다. 봄바람이 살랑이며 창을 타고 들어오는 계절임에도 어쩐지 한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정해준이 몸을 뒤로 물리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것 좀 봐라. 어느 제자가 스승을 이렇게나 내려다보고 격식 없게 군다는 말인가. 정해준은 박서원을 제자로 둔 자신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내 제자인데... 라는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박서원이 그의 자리에 앉아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리를 강탈당한 정해준이 헛웃음을 쳤다. 이젠 스승을 농락한다. 이젠 내 제자가 내 자리에 앉아 남의 서신까지 훔쳐보는 것이다. 정해준은 생각만 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기로 다짐했다.
서신을 다 읽은 박서원이 정해준을 돌아보았다.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고 눈에서는 불만까지 읽혔다. 왜 저래? 정해준이 버릇처럼 손을 뻗어 그의 찌푸려진 미간을 살살 펴주었다. 박서원이 가만히 스승의 손길을 받으며 눈을 지긋이 감고 불평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다들 스승님한테 혼사를 보내요?"
박서원이 경전을 필사하는 동안 정해준이 심각하게 읽고 있던 것은 바로 어느 부잣집 가문에서 온 혼사였다. 박서원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스승에게 다른 소중한 사람이 생겨 자신을 가르치는 것에 소홀해질까 걱정인 것인지, 아니면 그냥 스승이 행복한 꼴을 못 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스승의 혼사가 들려오면 눈에 불을 키고 달려와 그것에 반대표를 던졌었다. 그럼 그의 스승은 한숨을 푹 내쉬고 이런 제자를 키우느라 바빠서 안될 것 같다는 거절의 말을 에둘러 전해야만 했었다.
정해준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 싸가지 없는 제자에게 무어라 말을 해줘야 할까. 사지 멀쩡한 25세의 건장한 청년이 아직 혼사도 안 치렀는데, 무려 삼신할미가 점 찍어둔 박씨 가문의 장자를 제자로 둔 도사란다. 물론 그 제자는 싹수도 없고, 위아래도 안 배운 머리털은 새까맣지만 눈은 시뻘건 놈이라서 스승 노릇은 무슨 맨날 골탕 당하기 일수란다. 꼴에 제자라고 쉽게 파문시킬 수도 없어서 골치 아파 죽겠단다. 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정해준은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그는 그저... 신병을 앓아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가 불쌍했을 뿐이었다. 은혜를 입은 부부가 자신의 아이가 걱정된다고 하길래 한번 댁에 들려 상태를 봐줬을 뿐이었다. 물론 손으로 이마를 짚는 순간 아이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고,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간절히 말을 토해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이의 입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나온 것이 아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인 듯하여 정해준은 부부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형아... 나를... 데려가... 무당 같은 건, 되기 싫어... 잡신들의... 노리개로, 쓰이고... 싶, 지 않아...'
열이 한껏 올라 얼굴이 시뻘게진 아이가 입에서 꺼내는 말이 그것이었는데 어찌 들어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도사라는 자가 그 애달픈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껏 잡은 소매를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그날 정해준은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기를 불어넣어 열병을 씻겨주고, 부적을 방안 곳곳에 붙여 잡신은 물론이고 그 어떠한 신도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삼신할미가 점 찍어둘 법한 방대한 양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손바닥에 상처를 내어 피를 은으로 된 그릇에 담고 그것을 아이에게 먹였다. 온전한 자신의 기운이 아닌 정해준의 기운이 섞이게 된 아이는 그렇게 신들에게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가 5살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어깨까지 올 정도로 키가 큰 박서원이었다. 정해준이 과거를 회상하는 동안 다가온 박서원이 그의 눈앞에서 손바닥을 짝 부딪혔다. 정해준이 그제야 박서원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가까웠다. 그의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정해준이 고개를 뒤로 물렸다.
"박서원."
"왜 대답 안 하세요? 왜 혼사가 자꾸 오냐니까요?"
그래. 그 이야기 중이었지. 헛기침을 한 정해준이 박서원의 어깨를 잡아 그를 제대로 앉히고 자신 또한 그를 마주 보고 앉아 입을 열었다.
"어차피 거절할 건데 뭐가 그렇게 신경 쓰여?"
박서원이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원하는 대답이 이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자꾸 오잖아요.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하세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참 좋겠다. 그리고 남이 혼사인데 이 어린놈은 왜 자꾸 반대질이란 말인가. 정해준이 입을 열려던 찰나 박서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했다.
"결혼하지 마세요."
그를 힐끔 본 정해준이 제자가 한껏 구겨둔 서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루마기가 돌돌 말려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수가 꽤 되고, 전부 다른 이들이 보낸 것이었는데 내용은 전부 혼사를 담은 것인지라 박서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그 서신들을 바라보았다. 눈빛으로 서신을 태울 기세였다.
"안 해."
"진짜 하지 마세요."
"진짜 안 한다니까."
"차라리 나랑 해요."
"그건 또 뭔 소리야."
그의 제자는 종종 저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입에 담았었다. 둘 다 남자인데 스승이 좋다고 한다던가. 차라리 자신과 혼사를 올리자고 하거나, 머리도 다 큰 놈이 같이 자고 싶다며 방 앞에서 생떼를 부리기도 했었다.
결국 참다못한 정해준이 박서원을 자리에서 밀어내었다. 박서원이 뚱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주질 않자 책상을 돌아가 앞에 털썩 앉았다. 양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고 몸을 일으켜 스승의 대답을 종용했다.
"빨리요."
"대체 뭐를!"
"차라리 나랑 결혼한다고 하세요!"
빨리요. 빨리. 해준아. 정해준. 스승님. 제발. 어서. 대답하세요. 네? 박서원이 시끄럽게 정해준을 독촉했다. 정해준은 서신을 정리하는 척 그의 시선을 피하고 전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짓거리가 일각(一刻, 하루를 100등분하였을 때의 15분정도 되는 시간)이 되어가자 참다못한 그가 눈을 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박서원의 집념도 참으로 대단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필사나 해!"
"네!"
답변을 들음과 동시에 박서원이 명쾌하게 대답해주고는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아주 빠르고 글씨가 또박또박 반듯했다. 평소에는 수업이 듣기 싫다며 동태 눈으로 스승을 보곤 했었는데 필사하는 두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자세는 또 어떻던가. 양반다리가 아닌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펴고서 아주 바른 몸가짐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보통은 왼쪽 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 대충 붓을 놀렸던 박서원이었는데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을 바라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해준이 멍하니 믿기지 않는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았다. 나... 방금 말실수를 한 건가...? 박서원을 제자로 둔 스승이 아연실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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