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클

착각의 증명

싱클 동갑AU

도서실 문을 열기 전 클로이는 답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드르륵- 미닫이문의 마찰 소리는 여름방학의 텅 비다시피 한 학교에 쓸데없이 크게 울렸다. 피부를 서늘하게 식히는 에어컨 바람에도 클로이는 미묘한 불쾌감을 지울 수 없었다.

긴장감 탓이겠지. 괜찮다! 넉살이라면 제법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까짓것, 뭐가 어렵겠어? 겨우 한번 차인 상대랑 단둘이 얼굴 마주하기? 참내, 클로이는 그 상대랑 100분 토론에 만담까지 할 수 있었다. 아니,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또 다짐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아, 안녕...”

“어.”

그 애가 소꿉친구라면 또 다른 문제겠지만.

예상대로 싱은 먼저 와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클로이는 싱의 맞은편의 의자를 잡았다가 좀 더 안쪽으로 가선 그의 대각선으로 앉았다. 가방을 안고 있으니 바깥의 더위가 그대로 묻어 있어 약간 추운 듯한 이곳 공기엔 뜨근하니 딱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안정되니 긴장도 좀 덜 되는 거 같고…

“다른 애들은?”

“류염은 보충.”

“휘는?”

“몰라.”

“또 보충 째고 여친이랑 놀러 갔나?”

“안 궁금해.”

다른 애들 얘기는 이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는데 좋은 구실이었다. 그러니까, 며칠 전 충동적으로 고백하고 차인 소꿉친구이자 짝사랑 상대인 남자애랑 같이 있어야 하는 현 상태 말이다. 이왕이면 둘 중 하나라도 이 자리에 있어줬음 더 좋았을 텐데.

에잇! 아니지! 클로이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지금 이런 일까지 다른 애들한테 의지하면 나중에는 더 힘들어질 거야. 어차피 넷이서 몰려다니는 이상은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싱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

그 꼴을 보자니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끓어오른 클로이가 지익 가방을 열어 필통과 여름방학 숙제를 꺼냈다. 그나마 소일거리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현 상태만 아니었어도 이런 성가신 건 집에 처박아 놨다가 개학 직전에 몰아서 했을 테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냥 튀어나와 버렸다고. 클로이의 입술이 삐쭉 내밀어진다. 누구는 신중하고 싶지 않은 줄 아나… 그러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너 알바는?”

“오, 오늘은 쉬는데...”

툭 꺼내진 물음에 클로이가 흠칫 놀라 대답했다. 왜 말을 걸지? 자긴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뭐야?

“아. 그래.”

싱겁게 끝난 대화에 막상 아쉬워진 클로이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 학교 왔네~ 넌 보충도 안 들으면서.”

“여긴 에어컨 있으니까. 걔넨 성적이 안되니까 필수로 듣는 거고. 난 그런 거 안 들어도 돼.”

“오우~ 상위권의 자신감~ 그럼 당연히 여기 있는 이 문제들도-”

“하나당 만 원.”

“아니, 바가지잖아.”

“돈 없으면 네 숙제는 네가 알아서 해라.”

“췌엣~”

툴툴거리며 문제집을 풀던 클로이는 속으로 작은 쾌재를 불렀다. 됐다! 아무렇지도 않네. 차인 남자랑 대화하기 별것도 아니네~ 작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문제집을 핀다. 수학 부분은 방학식 날 받자마자 다 풀어버렸으니 국어부터 하기로 했다.

보자보자~ 다음 지문을 읽고 화자의 심정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묶인 것을 고르시오.

“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클로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책장으로 가 두꺼운 책 몇 권을 들고 왔다. 세계 해양 생물 사전, 엔드로피의 비밀, 비밀스러운 세계사... 싱이 곁눈질로 봐도 지금 풀던 문제랑 전혀 상관없는 것들뿐이었다.

“읏챠~”

클로이는 쌓인 책 위에 덮은 자신의 문제집을 턱, 하니 올리곤 그 위에 머리를 옆으로 베었다.

“염이 오면 깨워줘.”

“예의상 물어는 주겠는데, 방학 숙제하려고 온 거 아니야?”

“긴 글 보니까 잠 와.”

"네가 보충에 안 걸린 게 용하다.”

“후훗, 걸리면 알바 못하잖아~ 이 누님이 힘 좀 썼지! 그리고 숙제는 어차피 개학 전에 베끼면 돼~”

"내 건 안 보여줄 거니까 나중에 돌머리 셋이서 알아서 잘 해봐라.”

“에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치사하긴. 꿍얼거리던 클로이는 다시 모은 팔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가 고개를 조금 들어선 싱을 힐끗거렸다. 어떻게 대화하는데도 한 번도 이쪽을 안 보지? 그것이 아쉬운지 다행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클로이는 눈앞의 광경에 집중하고 있었다.

풀리지 않은 구간을 발견했을 때의 찡긋거리는 미간이라던가, 미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이라던가... 깜박거리는 눈의 속눈썹을 구경하는 게 조마조마하면서도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 그렇게 고민했음에도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네가 진짜 미쳤구나 클로이.

그래도 아직은 제 심장 고동보단 싱의 사각거리는 샤프펜슬의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리는 것이 다행이었다. 갑자기 노란 두 눈동자와 마주치기 전까지의 일이었지만.

확 열이 뻗쳐오르는 얼굴을 다급히 팔 사이로 숨기려던 클로이의 손이 미끄려져 그만 높게 쌓은 책들을 와르르 넘어트리고 말았다. 자승자박. 클로이가 아까의 문제집의 국어 부분을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했다면 작금의 사태를 이리 비유할 수 있었겠지.

평소라면 코로 비웃는 소리라도 들려왔어야 했는데... 오히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게 클로이의 수치심을 부채질해 그녀의 얼굴을 더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클로이가 고개를 푹 숙인 그대로 주섬주섬 무너진 책들을 다시 모아 정리하고 있자면 건너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너 말이야...”

“어, 어?”

“날 왜 좋아해?”

“… … ”

역시 오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더워도 그냥 집에 처박혀 있는 거였는데!

정작 적정온도 25도의 도서실 안에서도 클로이는 바깥 운동장에 있는 애들처럼 진땀만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그, 그걸 왜, 이런? 상황에서…”

“아니, 저번에도 말 안했잖아.”

“말했는데…”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가 솔직히 대답은 아니지 않냐.”

“이- 이유 같은 걸 넌 왜 또 물어보는데?”

“궁금하니까.”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한데?”

“대답은 네가 해야지.”

계속 시선도 안 맞추는 채로 묵비권만 행사하는 클로이를 가만히 보던 싱이 팔짱을 끼곤 의자를 뒤로 젖혔다.

“그럼 됐어. 나중에 염한테 물어보던가 해야지.”

“뭐? 아니 그걸 왜 염이한테 물어봐?”

이제야 이쪽을 보네? 한쪽 눈썹을 올리던 싱의 얼굴이 다시 돌아온다. 씩씩거리는 클로이는 조금 찔러본 정도로 바로 자리에 일어나 자신을 째려보고 있었다. 단순하긴.

“너희들 여자애들이고 서로 친하잖아.”

“편견이고 그런 거 염이한테도 말 안 했거든?”

“'그런거' 라는 건 날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기는 한가 보네?”

윽. 클로이는 패기롭게 싱에게 손가락질하며 왁왁 거리던 클로이가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의 논리에 말려 들어가면 안 된다. 무응답이 가장 지혜로운 판단이다. 암. 진실로 현명한 자는 바보들과 언쟁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말이야~ 스스로 생각해낸 답이 멋지다고 생각한 클로이가 씩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곤 팔짱도 꼈다.

“연애상담 정도는 했을 거 아니야 너도.”

“안 했어. ”

“어쨌든. 있긴 있다며 날 좋아하게 된 이유.”

“노코멘트입니다. 애초에 넌 그때 내 고-고백을 듣고 너 미쳤냐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진짜 미쳤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무조건으로 좋아할 수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해?”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으면서. 클로이는 홱 고개를 돌린 채 입술을 삐쭉거리며 못된 생각을 했다. 너무 잘 아는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건 이리도 불리하다. 상처 줄 수 있는 말을 쉽게 떠올려도 공격할 수가 없다. 이걸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하는게 널 좋아한다는거야. 그런 거라고.

“뭔가 있기는 할거 아니야. 연애 감정 같은 건 어차피 다 뇌에서 일어나는 착각이니까.”

“… 그렇게 똑똑하면 직접 알아보지 그래?”

남의 감정을 멋대로 착각이니 뭐니… 빈정이 제대로 상한 클로이가 홱 싱이 안 보이게 옆으로 엎드려선 관심도 없는 '세계 해양 생물 사전'을 펼쳐 자신의 얼굴을 가려냈다.

짜증 나 진짜… 나는 왜 저런 애를 좋아하는 거야?

그런 클로이를 잠시 응시하던 싱은 기울이던 의자를 다시 내려앉곤 문제집에 시선을 옮겼다. 톡톡, 싱이 샤프로 종이를 두드리는 소리만 고요한 도서실을 깨트리고 있던 찰나였다.

“내 얼굴?”

“허어?”

너무나도 어이없는 추측에 클로이가 책을 접어 싱을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홱 책을 펼치는 게 완전히 틀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거든? 좀 생각이란 걸 하고 말을 해봐.”

“내 성격.”

“뭔 소리야 너 진짜 지성이라는 게 휘발됐냐?”

“네가 좀 특이 취향일 수도 있잖아.”

“예를 들면?”

“자신을 비하하는 말에 흥분하는…”

휙! 퍽! 싱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꺼운 세계 해양 생물 사전이 싱을 지나쳐 바닥으로 떨어졌다. 칫! 얼굴을 노렸는데. 사서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이쪽을 향하자 클로이가 머쓱하게 웃으며 주섬주섬 싱의 뒤쪽으로 가 책을 줍곤 돌아왔다.

“너 미쳤어?!”

“조용히 좀 해라. 여기 도서실이거든?”

“누구 때문에 지금…”

목소리가 커지던 클로이가 사서 선생님의 눈치를 보더니 점점 볼륨을 낮췄다. 그걸 보는 싱은 피식 웃기나 하는 통에 클로이의 속은 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연애라는 건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성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취향이라서 날 좋아하게 된 것일 수도 있지.”

“아! 아니라고 했잖아 진짜! 네 연애관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

“네 연애관은 뭔데 그럼?”

보통 이런 걸 자신이 찬 사람한테 물어보나? 잠시 혼란을 느낀 클로이는 싱을 흘겨보다 자세를 고쳐 잡곤 턱을 괸 채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뭐… 그냥~ 같이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고… 소, 손만 잡아도 좋고… 맛있는 거 같이 나눠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같이 하고…”

우와, 심장 두근거리는게 그대로 느껴지네. 가슴의 진동에 괜히 다리를 떨다 주먹을 쥐었다 피다 하던 클로이는 자신의 무의식의 욕망을 못 이겨 결국 고개를 슬 돌려 앞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막, 좋아서…”

아. 이쪽을 보고 있을 줄은…

“웃음부터 나와버리고…”

몰랐는데.

낭패였다. 완패이기도 했다. 클로이는 싱의 두 금안을 마주할 때마다 아직도 시간이 멈추는 마법을 믿고 만다. 피가 빨리 돌아 붉어진 얼굴을 감춘다는 시도가 겨우 시선을 거두는 것이라니. 너무 얄팍하잖아 나. 이렇게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나 버리는데 무슨 이유를 자꾸 찾으려 드는걸까 너는.

“뭐, 그런 거….”

잠깐의 침묵 후 들려온 건 싱의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아~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연인이라는 건 친구의 상위 호환 같은 거네?”

“뭐?”

“아니 그렇잖아. 정서적인 교류가 너의 연애관이라면 말이야, 우연히 근처에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서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면 다 되는 거 아니야?”

“그렇지는 않-”

“그래서 날 고른 거네!”

싱의 초점 없는 눈동자에 클로이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비쳤다. 밝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 당당한 바람에 클로이는 이유 모를 섬찟함을 느끼고 만다.

“너는 그냥 자기 곁에 되도록 오래 남아줄 애가 필요한 거 아니야? 이왕이면 서로를 잘 아는 게 좋은 거고. 염은 연애니 뭐니 잘 알 거 같지도 않고, 권휘 그 자식이야 매일 갈아치우는 게 여친이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점점 그의 말에 속도가 붙을 때마다 클로이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클로이는 싱 앞에서 이런 순간이 올 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처지가 비슷해서 난 널 안 떠날 거 같았어? 왜? 그때 내가 넌 나랑 같다고 해서 뭔가 착각을 단단히 한거 아니-”

“고른 게 아니라고!”

꽉 두 주먹을 쥐고 나서야 겨우 소리칠 수 있었다. 아까까지 신나게 떠들던 싱은 말이 없다. 울렁거리는 속을 심호흡으로도 잘 진정되지 않았다.

“그냥 좋아하고 보니 너였단 말이야…”

계기나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사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자신에게서 냄새난다고 했던 여자애들의 발을 몰래 걸어 넘어뜨린 일부터 휘가 사주는 아이스크림의 맛에 ‘아무거나’라고 답하지 말고 제대로 네가 좋아하는 걸 고르라고 했던 것까지.

그렇지만 말해봤자 뭐해. 싱은 계속 이렇게 클로이의 마음을 반박하고 재단하려 들 것이다.

싱은 클로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불편할 테니까.

‘진짜 싫어…’

제일 싫은 건 그래도 난 너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거야.

창밖의 매미 소리가 유난히 길었다. 감정이랄 게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한 싱이 클로이를 가늘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머리칼에 반사된 햇살이 유난히 날카롭게 반사되어 클로이의 팔에서부터 뺨 한쪽까지 비춰냈다. 클로이는 그 옅은 온도에도 데일 것만 같았다.

“그래….”

싱의 어딘가 낙담한 기색이 클로이를 불편하게 했다. 정확히는 싱의 실망이 클로이를 절망하게 만든다. 단어가 주는 의미만큼 깊은 건 아니었다. 그저 발목 정도를 잠기는 수준의 감정. 그러나 클로이는 그 검은 물을 기꺼이 빨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그, 그렇지만 말이야~”

단지 그의 그런 얼굴이 보기 괴롭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 말이지, 나중에 내가 커서 연봉 55억의 키 크고 가슴 크고 다정하고 성격까지 좋은 그런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 양심 있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이 누님 인기 많다? 하여간에… 그런 운동선수? 스타일의 사람이 나 좋다고 하도 빌고 빌어서 만나게 된다면~”

“잘도 그러겠다.”

“이게 진짜! 사람 말 좀 끝까지 듣지? 넌 듣기 평가할 때 중간부터 답 체크하냐?”

“굳이 다 들을 필요가 없으면?”

진짜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하지... 싱의 얄미운 반박에 투덜대면서도 클로이는 아까보다 풀어진 분위기에 안도했다. 싱이 계속 그런 상태로 있었으면 내가 성가셨을 거야. 굳이 안 붙여도 될 변명까지 속으로 붙이던 클로이는 히죽거리며 안면의 힘을 풀어냈다.

“아무튼! 그런 사람하고 만나게 된다면! 먼 미래에 통유리로 된 빌딩 고층 빌딩에서 야경을 바라보면서~ 아아~ 한때는 제가 그런 꼬맹이를 좋아한 적도 있었답니다~ 하고 웃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르지~!”

“평생 나만 좋아하게 될 거 같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거.”

“후후후~ 참 성격이 꼬일 대로 꼬인 애였답니다~ 속이 그렇게 꼬여서 키가 안 컸던 걸까요? 엄훠! 울 자기하곤 완전 딴판이었죠~”

“네~ 나도 나보다 짧은 애한테 고백받으니까 목소리가 하나도 안 들렸었네요~”

클로이가 가상의 그이에게 하는 말에 투덜거리던 싱이 흥, 하더니 샤프를 잡더니 다시 문제집만 내려다보았다. 살짝 지켜보던 클로이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평온해진 공기를 틈타 클로이의 입술이 멋대로 열렸다.

“뭐어… 그래도, 네가 새벽 세시에 연락한다면 바로 달려가겠지만….”

“뭐야 그거. 불륜?”

혼잣말에 반응이 돌아오자 클로이가 눈을 크게 뜨다 허리를 세워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거든! 그냥…~ 우리 사이니까… 갑자기 그렇게 연락해도 난 가줄 수 있다! 뭐! 그런 거지~”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얘는 왜 또 이걸 파고들지? 슬금슬금 불안해진 클로이가 입술을 우물거리다 다시 능청스러움을 목소리에 듬뿍 담아낸다.

“이렇게 완벽하고 귀여운 나를 찼지만~ 그보다 더 끈끈한 우정과 세월로 이어진… 관계?”

하여, 필히 들켰으리라. 클로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싱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지 않고 있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단 것을.

“넌 염이나 권휘가 새벽 세시에 연락해도 갈 거잖아.”

“그렇겠지? 그래도 넌 아마 나한테만 연락할 거 같아서.”

그건 클로이의 유일한 자신감이었다. 사랑이니 연인이니 그런 걸로 묶이지 않더라도, 너와 나 사이는 충분히 특별하고 소중할 거라는…

“내가 뭘로 연락할 줄 알고?”

“보나 마나 뻔하지~ 너보다 큰 중고딩한테 시비가 털려서 싸우다 지는 바람에 병원에 갔다던가~?”

“널 불러서 뭘 시킬 거 같은데?”

“합의금 내주기? 신분확인? '흑흑 우리 애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참한 애였어요 경찰관 나으리~' 하며 우는 거?”

하. 하고 비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던 싱이 샤프를 내려놓았다. 양손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넣어 지긋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클로이는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자신이 제대로 웃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싱의 눈동자는 아무 빛을 담고 있지 않아서, 제 얼굴이 거울처럼 비춰짐에도.

구름이 천천히 창문을 가리어 그늘을 만들어내는 간극이 유난히 길었다. 침묵에 질식할 것 같은 클로이가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첫마디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제발, 그게 내 오만이라고만 하지 말아 줘. 차라리 모든 걸 농담으로 치부해 버리면 좋았을까.

하지만 그것만큼은 클로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아무리 싱한테 거절당하고 거부당해도, 그 얄팍하고도 두터운 믿음만 있다면 클로이는 얼마든지 평소의 자신대로 행동할 수 있었으니까.

구름이 걷히자 싱이 밝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 클로이는 알고 있다. 이건 ‘연기’를 할 때의 싱의 모습이다.

“그럼 클로이, 우리 한번 사귀어 보자.”

“…뭐?”

전혀 맥락과 맞지 않은 말에도 클로이는 황당보다는 오싹함을 느꼈다. 또다. 식은땀에 뒷덜미가 너무도 빨리 식는 감각. 클로이는 싱 앞에서의 이런 순간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다.

“네가 말했잖아. 네가 커서도 우리 사이는 계속될 거 같다고.”

“… ….”

“세월이 흐른 뒤에, 멀쩡히 다른 사람을 만나는 너한테 내가 연락할 거 같다고…”

우리 사이는, 그래도 되는 사이라고. 눈동자를 천천히 아래로 굴리던 싱이 클로이가 했던 말을 다르게 발음했다. 그가 모순점을 찾은 것 같은 잠깐의 고요함이 클로이는 끔찍하리만큼 두려웠다. 그럼에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날 싫어하지 않을 자신 있어?

매번, 싱의 그런 시험에 들 때마다 클로이는 자신의 심장이 뒤엉킨 박자감으로 뛰는 걸 느낀다. 그거 알아?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거면 나는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그런데…

“네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는 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웃는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너랑 사귀어 주지 않아서 나중에서까지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면, 차라리 지금 깨닫는 게 낫지 않아? 그러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그냥 지금 사귀어 줄게. 그게 너한테도 낫지.”

“무슨, 착각?”

클로이의 떨리는 목소리에 싱의 잘 꾸며진 호수의 수면 같은 얼굴에도 흔들림이 비췄다. 그 미약함에도 클로이는 위로를 받고 만다. 그리고 간절히 빌며 되뇐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아달라며…

“너와 내 사이가 유별나다는 착각.”

찰나에 클로이는 아연해진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은 원망에도 몸은 오히려 무릎에 힘을 쥐어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분노인지 야속함인지 혹은 슬픔인지. 뒤죽박죽인 감정들로 인해 클로이의 목에 싱을 상처 입힐만한 말들이 턱턱 걸려들었다.

“너는…! 어떻게…”

그러나 클로이는 내뱉지 않는다. 못한다는 표현이 적절했을까. 그저 필통을 싱의 얼굴에 집어던졌을 뿐이었다. 입구가 열린 탓에 펜과 샤프와 지우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책상과 바닥에 흩뿌려진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클로이는 자신의 눈가가 뜨거워짐을 깨닫고 홱 몸을 돌려 다급히 문제집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클로이가 짐을 싸는 동안 조용히 클로이의 필통에 필기구를 담아내던 싱이 클로이를 향해 필통을 세게 밀어 보냈다.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던 클로이가 다시 필통을 싱한테 던졌다. 탁, 이번엔 한 손으로 잡아낸 싱이 클로이를 슬 째려보았다.

“챙겨줘도 난리네.”

“내일 다시 가지러 올 거야.”

“…내일은 알바 간다며.”

“상관없어. 내일 가지러 올 거니까 그건 네가 갖고 있어.”

가방을 들춰 맨 클로이가 싱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착각이라면…”

내가 널 그려냈던 모든 날들이 가짜였다고 해도.

“난 그냥 영원히 착각 속에 살 거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거 너답지도 않잖아. 날 밀어낸다고 너답지 않은 짓까지 하지 말라고.

내일 또 봐. 클로이는 정말, 그 말을 겨우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대신 터져 나올 거 같았으니까.

도서관을 뒤로하고 걷자 신기하게 울고 싶은 마음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늪에 스스로 걸어가는 듯한 우울감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클로이는 고작 이런 일로 울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싱을 지금과 같은 감정으로는 좋아하지 않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클로이는 어떻게 해도 싱을 진심으로 싫어하게 될 수는 없었다. 감정의 절댓값. 이걸 싱이 사랑으로도 우정으로도 부르지 못하게 한다면 클로이가 정의 내릴 수 있는 답은 그 정도뿐이었다.

‘어떤 말도 괜찮다고 했지만 솔직히 오늘 건 좀 많이 아팠어.’

그럼에도 클로이는 익숙해지려 할 것이다. 혹자는 그걸 호구고, 멍청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네가 알아만 준다면…’

복도를 걷다 보면 지루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클로이가 빼꼼 창문을 통해서 보니 염이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악 얼굴이 밝아진 클로이가 손을 들어 톡톡 창문을 쳤다.

염이 화들짝 깨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아무도 없는 복도 쪽을 보기 전까지, 클로이는 그만 무언가를 깨닫고 만다.

지금 염을 데리고 놀러 간다면 분명 즐겁겠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싱은 도서실에 혼자 남게 될 것이다. 클로이는 끊임없이 상대를 밀어내는 그 애가 혼자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있을 수 없는 거라면 다른 누구라도 그 애의 곁에 있어줬으면 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하려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클로이는 누군가가 할 반박에 쉽사리 동의했다. 네가 혼자서는 외로울 거란 착각. 너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나의 착각. 그걸 증명하는 방법의 이름조차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어…”

착각 속에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클로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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