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눈에 남던 이야기
서머타임 레코드 직후 카노치카
볼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부드럽고 상냥하게 볼을 어루만져주는 이 느낌...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빠? 아니, 아니야. 이건...
어젯밤의──
"으음..."
느리게, 천천히 눈을 떴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빛에 반도 채 뜨지 못하고 찌푸리고 말았지만. 마치 길고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은 멍했고 몸 전체에 부유감이 일었다. 이게 지금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쉬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단 아지랑이 데이즈에 들어가서 그녀, 아자미를 만났다는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뒤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몇 번 눈을 깜박거린 후에야 겨우 눈이 빛에 익숙해져 주위를 볼 수 있었다. 가장 처음 보이는 건 천장에 매달려있는 무수한 알전구였다. 여긴 아지트인가.
"아, 일어났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카노가 맞은편 소파에 유유자적하게 앉아있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는데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처음 보는 것 같은 표정. 그렇지만 어쩐지 그게 카노답다고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자 아무래도 오래 누워있던 모양인지 현기증이 일어 잠시 휘청이고 말았다. 다행히 카노가 금방 잡아줘서 넘어지진 않았다. 카노가 걱정하지 않게 손을 흔드니 카노는 그제야 얼굴을 좀 펴고 입을 열었다.
"아지랑이 데이즈에서 나온 후에 시라키쨩이 갑자기 쓰러졌었어. 쓰러졌다기보단 잠들어버린 거지만~"
잤다고?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멍하니 있으니 카노가 내 얼굴을 보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내 표정이 그렇게 이상했나 싶어 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아하하, 시라키쨩이 그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봐!"
...너무 웃는 거 아냐? 짐짓 흘겨보자 카노는 눈꼬리 끝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곤 겨우 웃음을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열이 오르려는 얼굴을 두 손으로 덮어버렸다.
"어쩐지 아지랑이 데이즈 후의 일이 기억 안 난다 싶더니 그냥 자서 그렇구나..."
"그럴 만도 하지. 시라키쨩 전 날밤을 거의 샜었잖아."
맞는 말이다. 거기에 그 뱀을 상대하느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지쳐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납득이 되어 저절로 끄덕이던 머리가 카노와 눈이 마주치자 멈추었다.
"잠시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야 이런 건 익숙하니까? 그리고 시라키쨩은 그전에도 일이 많았던 것 같고."
"아."
카노의 손가락 끝에는 붕대로 칭칭 감은 내 발목이 있었다. 맞다. 히비야를 구하려다가... 아니, 그 이전에 총도 팔에 스친 적도 있었고... 요 며칠간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펼쳐지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용케 죽지 않았네.
그래. 정말로 살아남았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내내 누워있어 굳어버린 몸을 좀 움직였다. 어제 막 움직인 탓에 근육통이 생겼는지 몸 곳곳에서 비명을 질러대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가슴속에서 울리는 심장박동도 어느 하나 평소와 똑같지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살아있구나. 다행이다, 살아있어서. 그것도 모두와 함께. 그제야 아지트의 정갈한 모습에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카노, 다른 애들은?"
"자."
카노는 대답 대신 쪽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깔끔하고 날렵한 글씨에 저절로 누군가가 연상되었다.
일어나지 않아서 우리끼리 뒷처리 좀 하고 올게.
출출하면 냉장고에 먹을 것 좀 만들어놨으니까 그거 먹어.
-키도-
"아, 하긴 실험실은 엉망진창인 그대로겠구나."
"거기에 아야노 누나나 타카네쨩, 하루카군의 사망신고도 어떻게든 해야하고 말이야."
"그것도 그러네. 뭐, 그건 에네가 정보 조작하면 어떻게든 되려나."
잠깐, 그거 범죄잖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반응에 내가 도리어 놀라버렸다. 비일상을 너무 겪은 탓인지 일반 상식이 어그러진 기분이다. 아니. 그렇지만 산 사람을 내내 죽은 사람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보 조작 외에는 별다른 방법없으니... 끄응. 작게 신음소리를 내며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역시 난 조금 이상해진 모양이다.
"그런데 카노 넌 왜 여기 있어? 다른 애들 안 따라가고."
"나는 시라키쨩이 걱정되서 남기로 했지~ 여자애 혼자 두는 건 위험하잖아?"
"거짓말."
카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붉은 두 눈으로 들어온 그 표정이 왜인지 이상해 보여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까의 복수다. 참지도 않고 웃음소리를 흘려보내자 카노는 잠깐 움찔거리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중얼거렸다.
"...그만 웃어."
"후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아아~ 정말이지... 시라키쨩은 못 속이겠네."
카노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평소의 카노에게선 볼 수 없었던 얼굴이었지만 마음이 놓여 붉은 눈인 그대로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다. 진심으로도 웃을 수 있게 되어서. 손가락 사이로 엿보이는 노란 눈동자가 더없이 기꺼웠다.
"시라키쨩 말이야. 너무 능력 남발하는 거 아니야?"
"그거 너한테만은 듣고 싶지 않은 대사인걸."
"그것도 그렇네..."
아, 실수했다. 씁쓸해하는 카노를 보자 이 생각이 탁 들었다. 안 그래도 자기 능력에 컴플렉스가 있는데 장난이랍시고 그걸 건드려버리고 말았다. 뒤늦게 입을 막아봐도 이미 입 밖으로 나간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눈동자만 데굴 굴리고 있자니 이번에는 카노가 풋 하고 웃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 시라키쨩. 괜찮아. 이제는 억제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
"응. 그리고 그..."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던 카노는 머쓱하게 목덜미을 쓸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천천히 해도 된다는 의미로 카노 옆에 거리를 두고 앉자 작은 쇼파가 폭 들어갔다. 이내 카노가 시선을 아래로 둔 채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응?"
"진짜 나를 봐준 것도, 전날 밤 나를 따라와 준 것도, 위로해준 것도, 루프를 끊어준 것도... 그냥 전부 고마워, 시라키쨩."
한순간 살짝 숨이 멈추었다. 조금 어색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카노의 미소에서는 그 어떠한 거짓도 가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노의 진심만이 내 두 눈 가득히 채워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마음 한쪽이 간질거렸다. 카노의 진짜 미소를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순수하게 기뻤다. 내가 누군가를 구했구나. 이제야 붉은색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 걸까. 보람인지 뭔지 모를 것이 속에서 들끓어 올랐다. 아, 뭐야 이거. 기분이 이상해. 이상한 기분을 꾹꾹 누르고선 나도 뭔가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구해주러 와줘서 고마워, 카노."
나만 히어로인 게 아니야. 너 역시. 능력을 풀고 내 본연의 모습 그대로로, 카노가 그랬던 것처럼 환히 웃어주었다. 진심을 담아 거짓말쟁이인 그가 믿을 수 있도록. 아직 이름조차 모르는 감정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꾹 누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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