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맞은 이야기
카노치카 고백
"뭐야, 카노 너 혼자야?"
"뭐냐니 너무하네, 신타로군~"
조용하디조용하던 아지트의 문이 열리더니 곧이어 노이즈 하나가 들어왔다. 노이즈의 주인, 신타로군은 정말 질리지도 않는지 똑같은 붉은 저지를 입은 채로 성큼성큼 아지트 안으로 들어왔다. 딱히 신타로군의 말이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볼멘소리를 내니 신타로군은 어깨나 한번 으쓱이고는 내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나는 내 무릎 위에 얌전히 펼쳐져 있는 잡지를 다시 보지도, 그렇다고 덮지도 않은 채 신타로군을 바라보았다.
"원래 있던 애들도 안 보이니까 하는 소리지. 다른 애들은?"
"세토랑 이치카쨩은 알바, 다른 사람들은 단체로 쇼핑."
"뭐?! 거짓말이지?! 나 쇼핑간다는 얘기 전혀 못 들었는데?!"
"키사라기쨩이 '오빠한테 말했는데도 컴퓨터 하느라 대답을 대충 하길래 그냥 나와버렸어요, 흥!'이라던데."
"...너 능력 써가면서 설명하지 마. 진짜 모모 같아서 소름 돋는다고."
신타로군은 몸을 한번 떨고는 팔을 문질렀다. 은근 내 능력을 비하한 발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키사라기쨩 집에서 나오면서 그냥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또 한바탕 잔소리와 화를 늘어놓고 홱 하니 나와버린 것이겠지. 사실 뒤에 '오빠 오기만 해봐!'라는 말이 더 있었지만 신타로군을 위해 생략하기로 한다. 딱히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생생한 반응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게 왜 대답 안 했던 거야, 신타로군. 키사라기쨩 화낼 거 뻔히 알면서."
"나도 나름대로 선물 고르느라 바빴다고."
"헤에~? 오늘이 생일인데 오늘 산 거야?"
"아니, 원래는 그 녀석 이어폰이 고장 났다고 하길래 일주일 전에 미리 주문해놨었는데 갑자기 타카네 선배가 헤드폰 선물해줄 거라면서 주문을 취소시켜버리잖아. 밤새워서 다시 선물 고르고, 당일 배송되는 거 찾느라 혼났다고. 하아... 뭐, 도착 예정 시간이 이치카 알바 끝나기 전이니까 괜찮겠지."
말과 다르게 신타로군은 불안해 보였다. 아마 인제야 아지트에 온 이유도 마지막까지 도착 시간을 확인하느라 그랬던 거겠지. 그에 나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그래, 무엇을 더 숨기라. 오늘은 10월 25일. 이치카쨩의 생일이다. 그것도 그 끔찍했던 뫼비우스의 띠를 잘라낸 여름 이후로 메카쿠시단이 처음 맞이하는 생일이다. 현재 아지트에 있는 나와 신타로군, 그리고 아르바이트 간 세토랑 이치카쨩을 제외한 메카쿠시단 전원이 쇼핑을 하러 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 생일 파티 같은 건 며칠 전부터, 하다못해 전날에는 준비해놓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이치카쨩이 우리와 같이 아지트에 사는 데다가 각자의 생활이 있어서 좀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키사라기쨩은 어찌나 기합이 들어가 있던지... 결국, 일주일 전부터 실행도 못 할 계획만 원대하게 늘어놓다가 결국 오늘 아침에 평범한 서프라이즈 파티로 결정 났고 다른 애들이 꾸밀 거리와 음식 등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는 게 현시점이다.
"그런데 왜 넌 쇼핑 안 가고 여기 있냐?"
"집 보기 겸 이치카쨩 마중 가는 역할, 이랄까? 이치카쨩이 파티 준비 전에 올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 결국 선물 뭐로 했어?"
"손목시계. 그 녀석 학생이고 알바도 하니까 필요할 것 같아서."
"오, 신타로군치고는 좋은 선물이잖아!"
"신타로군치고는, 이라니 뭐야! 내가 뭐!"
혼자 열등감 폭발하는 신타로를 대강 진정시킨 후 다시 잡지를 들여다보았다. 형형색색한 여성잡지가 오늘따라 더 정신 사나워 보였다. 손목시계. 손목시계란 말이지. 비꼬며 말했지만, 확실히 좋은 선물이었다. 며칠 전, 이치카가 '손목시계 있는 편이 나으려나'하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참이니. 왠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그러는 너는 선물 뭘 준비했는데?"
"비밀!"
검지 손가락을 세워 입을 막으며 웃었다. 내가 이치카쨩한테 뭘 줄지 알려줄 리가 없다고 속으로는 혀를 내밀면서. 내 말에 신타로군은 금방 샐쭉해졌지만, 딱히 별말은 없었다. 내가 이런 태도를 취하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신타로군도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거다. 그게 내심 미안해졌다. 그래도 말해줄 생각은 없지만. 나는 일부러 여성잡지를 소리 나게 덮고 일어났다. 그 소리에 휴대폰을 향해 내려가 있던 신타로군의 고개가 올라왔다. 신타로군이 날 보든 말든, 나는 소파 위에 걸쳐놓았던 검은 후드에 팔을 꿰었다. 며칠 전 이치카쨩이 지나가면서 내가 보던 잡지를 흘낏 보면서 그거 카노랑 어울리겠다고 했던 바로 그 옷이다.
"어디 가게?"
"응. 그러므로 집 보기는 프로 자택 경비원 신타로군에게 맡길 게~"
"뭐?! 야! 카노!"
날 부르는 신타로군에게는 가볍게 손만 흔들어주고 아지트 밖으로 나왔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한산하기만 한 아지트 근처 골목을 천천히 거닐자 시원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선물. 선물이라...
여러 의미로 특별한 이 생일을 위해 메카쿠시단 전원은 모두 신중히 선물을 골랐다. 아야노 누나는 필통과 다이어리, 카도는 만년필과 잉크, 세토는 화분, 마리쨩은 소설책, 키사라기쨩은 옷, 타카네쨩은 헤드폰, 신타로군은 손목시계, 히비야군이랑 히요리쨩은 핸드폰 고리, 하루카군은 자기가 직접 그린 그림이 들어간 책갈피와 여러 펜. 각자가 고심하고 다른 사람과 상의해가면서 고른 선물들이다. 키사라기쨩의 선물은 조금, 아니 심히 걱정되기는 하지만,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고른 옷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니 뭐, 괜찮겠지.
문제는 나다.
아직 선물을 사지 못했다.
아, 실수했다. 잘못 말했다.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 건데 생일 선물은 골라놓았다. 지갑인데 이치카쨩의 마음에 들 만큼 심플한 디자인에 실용성이 높은 것으로 준비해 이미 포장까지 완벽하게 끝마친 상태다. 즉, 내가 말하는 선물은 생일 선물이 아니다.
"고백할 때의..."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려보내고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바보같이 두리번거리고 말았다. 혹시나 들은 사람이 있을까 봐. 아무도 없다는 걸 굳이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나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하아..."
한숨이 가을바람에 섞이어 금세 저 멀리 날아간다. 내 고민도 멀리 날아가 버린다면 좋을 텐데... 사실 고백할 생각 따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언젠가 고백하긴 고백할 건데 오늘, 이치카의 생일날 고백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치카쨩한테 고백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작으니까. 한심한 이야기지만 오랜 시간 능력으로 나 자신마저 속여왔던 탓에 난 나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 그나마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상태지만.
그런 내가 왜 갑자기 고백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하다. 위기감을 느꼈으니까.
골목길을 빠져나와 드디어 큰길에 다다랐다. 건물이 따닥따닥 붙어있어 그늘밖에 없었던 골목길과 달리 큰길은 고고하게 뜬 태양 빛을 한가득 받고 있었다. 가을이라서 열기가 그리 거세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찌푸렸다. 오늘도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쭉쭉 발을 뻗었다. 목적지는 예전에 히요리쨩이 단원들에게 추천하던 액세서리 샵이다.
사실 고백할 때 선물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오늘은 이치카쨩의 생일. 오늘 고백하기로 했으니 단원으로서의 나의 선물과 한 사람으로서의 카노 슈우야의 선물을 따로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 덕분에 돈이 꽤 깨지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치카쨩을 위한 것이니까.
그리 먼 곳은 아닌지라 금방 도착했다. 온통 분홍색인 벽에는 각종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장식들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며칠 전, 선물을 고를 요량으로 여자의 모습으로 속인 채 들어와서 몇 개 눈여겨 봐뒀었는데 아직 있으려나, 모르겠다. 또 여자의 모습으로 속인 채 들어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치카쨩에게 줄 물건이니 내 본연의 모습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냥 속인 채 들어갈걸. 이런 곳에 남자가 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그런지 바로 여자 종업원이 나에게 붙었다. 진한 화장품 냄새와 부담스러운 모습, 거기에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드는 목소리에 내 머리는 지끈거렸다. 여자 모습이었으면 그냥 둘러보러 왔다고 하면 바로 떨어졌을 텐데.
여자 종업원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바로 얼마 전에 눈여겨보았던 것들을 찾았다. 벌써 없어져 버린 것도 있었지만 다행히 대부분은 아직 남아있어서 하나하나 다시 살펴봤다. 옆에서 여자 종업원이 보는 눈이 있다느니 센스가 좋다느니 하는 소리를 대강 흘러들었다. 그래도 여자친구 선물 사는 거냐고 물었을 땐 살짝 기분이 좋기는 했다.
머릿속에서 수백, 수만 번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여자 종업원에게 부탁하여 포장까지 끝마친 후에 나는 서둘러 문 쪽으로 향했다. 딸랑 소리와 함께 또 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만 설레설레 휘저어주고 나왔다. 그래도 이치카쨩이 이걸 받고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면 또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버리는 나는 꽤 중증일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이치카쨩을 좋아하게 돼버린 걸까. 이런 질문을 혼자 속으로 몇 번이나 던졌는지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잘 모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냥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고들 말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이유도, 좋아하게 된 시기도 정확히 알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치카쨩이니까. 아, 이런. 너무 많이 요약해버렸나?
"뭐, 어때."
맞는 말인걸.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다시 아지트 쪽 골목에 있었다. 그래, 여기. 여기가 시작이었다. 내가 이치카쨩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8월 15일에서 16일로 넘어가던 여름날 밤. 나는 그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눈이 맑아지는 뱀의 명령으로 잠시 히비야군의 상태로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나는 잠깐 내 방에 들렸었다. 그리고 내 침대 위에서 자는 사람을 발견했을 땐 정말 매우 놀랐었다. 자는 거 알고 있으면서도 경계 태세를 갖출 정도로.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야 겨우 그 사람이 이치카쨩이라는 것을 알았고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다가갔었다. 이치카쨩은 내 침대 위에서, 내 이불을 덮고 옆으로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심장에 무리가 올 정도의 장면이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이치카쨩을 관찰했다. 이렇게까지 무방비한 이치카쨩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누나의 말대로, 내 첫인상대로 이치카쨩은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상식적이고 똑 부러졌다. 하지만 계산적이었고 개인주의 성향이 있었으며 사람을 대할 때 일정한 선을 그어놓는 사람이었다. 이치카쨩의 과거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런 성격이 될 만도 했지만 어쨌든 그때의 나에게 있어서 이치카쨩은 장미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모습을 지녔지만 가까이 오지 못하게 가시를 세우고 있는 장미. 그런 이치카쨩이 무방비하게 색색 숨을 쉬며 잠자고 있는 게 그때의 나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동시에 이런 모습을 숨기는 모습이 나와 조금 비슷하다고 느껴버렸다. 그래서 손을 뻗었고,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그게 발단이 되었다.
나 때문에 깨어난 이치카쨩은 그날 밤, 이 골목길에서 「진짜 나」를 봐주었다. 아, 여기서 잠깐.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 것인데 이때부터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이치카쨩을 좋아하는 이유는 결코「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만은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이다음이다. 나와 이치카쨩은 누나의 무덤으로 가서 둘이서 같이 목놓아 울었던 것 말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창피하기 그지없는 기억이긴 하지만 그때 들었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구나. 수고했어. 정말 수고 많았어.. 이젠 괜찮아. 괜찮아..'라는 말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아마 당사자인 이치카쨩도 모를 거다.
난 그동안 늘 속이면서 살았다. 사람도, 물건도, 나 자신까지도.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날 부정해주길 바랐다. 거짓된 나를 계속 부정하다 보면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데 이치카쨩은 단박에 진짜 나를 발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약하고 비겁한 나를 인정해주기까지 했다. 그때 나를 가리던 모든 가면은 부서졌고, 이치카쨩은 처음으로 자신의 선 안에 누군가를 들였다.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거기다 이치카쨩은 그 후 능력이 서툰 나를, 속인 나도 진짜인 나도 그저 「카노 슈우야」라는 한 인간으로서 부정하지도 않고 그냥 그 깊고 깊은 눈으로 한결같이 바라봐주었다. 내가 나를 스스로 드러낼 수 있도록 지켜봐 주며 조용히 응원해주었다. 그런 이치카쨩을 사랑하지 않게 될 리가 없지.
"아아~ 진짜 중증이네, 나."
헛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덮고 쓸어내리자 미약하게 열기가 느껴졌다. 중증 입증이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자 슬슬 걸어가면 이치카쨩 알바 끝날 때 즈음에 맞춰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감과 설렘에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를 조심조심 줄여놓고 가볍고도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오늘로 이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든 새드 엔딩이든 어쨌든 결착이 나게 된다.
편의점 근처까지 왔을 때 시간을 확인하니 7시 10분 전이었다. 딱 맞춰 올 생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조금 일찍 와버렸다. 이치카쨩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올 때 놀라게 해 줄 심산으로 자동문 바로 옆에 서려는 순간─
"저, 괜찮으시다면 연락처를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을 알아가고 싶습니다."
─봐버렸다. 보기 싫은 장면을.
흘낏 누구인가 확인하니 이치카쨩을 마중하러 왔을 때 몇 번 보았던 남자다. 단순한 단골이길 바랐는데 그런 거였냐, 쳇. 표정을 숨김없이 와작 구기고 편의점 벽에 기대어 서니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모양새를 보니 역시 거절당한 모양이네. 그렇겠지. 그 사람한테는 안된 일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뭐, 나도 저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최근에 이치카쨩에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처음에는 애써 기분 탓이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키사라기쨩의 얘기를 들어보면 불행히도 기분 탓은 아닌 것 같다. 키사라기쨩도 나처럼 이치카쨩이 고백받는 모습을 몇 번 봤다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2주에 한 번꼴로 고백을 받는 것 같다고 했다. 키사라기쨩은 이치카의 매력을 다들 알게 된 것 같다고 기뻐하면서도 허튼사람에게 이치카쨩을 넘겨줄 순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에는 나도 백배 천배 공감하는 바이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봐도 이치카쨩은 외모도 예쁘고 제법 능력도 있으니 인기 많은 거야 당연하다. 거기다 8월 이후 가시 같던 날카로운 분위기도 많이 죽었고. 그러니 고백이 늘 수밖에. 그래, 나는 그동안 오만하고 있었던 거다. 이치카쨩의 비밀을 알고 있고,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단 이유로 방심하고 있었다. 나랑 이치카쨩은 알고 지낸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학생인 이치카쨩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는 것을 그만 잊고 있었다. 심지어 이치카쨩은 반장이라서 만나는 남자애들이 많을 텐데!
나는 금세 초조해졌다. 이대로라면 진짜 누군가에게 이치카쨩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그게 내가 이치카쨩에게 고백하기로 한 이유다.
"나 정말 단순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리니 어리둥절해 하는 이치카쨩이 보였다. 아아!!! 실수했다! 실수했다고! 큰일 났다! 머릿속에서 엄청난 속도로 빨간 불이 깜박거렸지만 서둘러 능력을 써서 평범을 가장했다. 모습은 속일 수 있어도 내가 이치카쨩처럼 그 자리에서 바로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바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으응.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괜찮지만..."
침묵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다는 뒷말이 들린 것 같았다. 이치카쨩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계속 나를 응시하자 더욱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정말 이치카쨩은 못 속이겠다.
"아, 혹시 생일 파티 준비에 무슨 차질이라도 생긴 거야?"
"에?"
뜬금없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능력이 풀렸다. 생일 파티 준비라니 지금 그게 이치카쨩 입에서 나온 말이야?
"설마... 우리가 생일 파티 준비하고 있다는 거 눈치채고 있었어?"
"응.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게 티가 나는데 어떻게 눈치를 안 채."
이치카쨩은 너희들 진짜 거짓말에 서툰 거 아냐고 덧붙이며 싱긋 웃었다. 혹시 이어폰 고장 났다던가, 손목시계가 있으면 좋겠다던가 말했던 것도 우리 선물 준비하는 거 도와주려고? 내가 멍청하게 두 눈만 깜박이고 있는 것에 반해 이치카는 싱긋 미소지었다. 맞구나!
그때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키도한테 온 문자였다. 이치카쨩에게 눈짓을 한번 보내고 메세지함에 들어가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자가 떴다.
제목 : 카노
본문 : 준비하는 데 차질이 생겨서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미안하지만 시라키 데리고 시간 좀 끌ㄹ어주ㅓ.
준비가 긑나면 문자ㅎ
나는 키도의 문자를 한번, 이치카쨩을 한번 보았고 이치카쨩도 나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우리 둘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웬만하면 오타가 안 나는 키도인데 끝맺음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니! 대체 아지트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열에 여덟은 키사라기쨩이 원인이겠지만. 음음. 주변 사람들 시선도 신경 못 쓰고 둘이서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웃었다.
"하아... 너무 웃었다. 자, 그럼 갈까?"
"응."
키도의 부탁이 있기도 해서 다른 길로 돌아서 가자는 제안을 하자 이치카쨩은 순순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렇게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거리를 이치카쨩과 사이좋게 걸어갔다. 일부로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히비야군과 히요리쨩을 처음 만났던 그 공원으로. 주택가 주변에 있는 공원이라 뛰어놀던 아이들이 사라진 이 시간쯤에는 사람 없이 한산하기만 한 곳이다. 그런 공원의 벤치에 이치카쨩과 나란히 앉았다. 둘이서. 단둘이서.
이제 시간이 온 셈이다.
바로 옆에서 이치카쨩은 가만히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칠흑 같기만 할 줄 알았던 밤하늘은 의외로 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콕콕 박혀있는 별들 사이에 초승달이 걸려있었다. 아름다운 밤하늘, 그리고 그 밤하늘을 검푸른 눈동자 속에 그대로 담고 있는 이치카쨩. 꼭 한 폭의 그림 같다. 콩깍지인지 뭔지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있지, 이치카쨩."
밤하늘만 바라보던 이치카쨩이 내 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심장이 뛰어버린다.
"나..."
조심스레 운을 뗀다. 이치카쨩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군말 없이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만 있다. 거짓말만 하던 내가 진심을 전하는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나 자신을 진정시키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나... 커피 좀 사 올게!"
─나는 이치카쨩을 두고 멀리 있는 자판기를 향해 뛰어갔다. 아아아아! 이 바보가! 멍청이! 얼간이! 거짓말쟁이!!! 자판기를 붙잡고 머리를 쾅쾅 부딪쳤다. 이 순간만큼 나 자신이 한심스러운 적도 없던 것 같다. 아니, 왜 말을 못 해! 한 마디면 되는데! 딱 한 마디면!
"후우...."
스르르 자판기에 머리를 기댄 채 미끄러지면 자리에 앉았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내뱉은 말도 있고 해서 대충 동전을 집어넣고 커피 버튼을 두 번 눌렀다. 덜그럭 소리와 함께 커피 캔 두 개가 내 앞으로 떨어졌다. 진정하자, 카노 슈우야. 이렇게 된 거 고백을 어떻게 할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거야. 뭐, 그런 생각이야 수도 없이 했지마는.
캔 두 개를 꺼내 팔 사이에 낀 후 이번에는 아까 샀던 선물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핑크로 도배되어있던 가게답게 포장도 요란한 무늬가 한가득 새겨진 핑크였다. 그걸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냥 북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치카쨩이 좋아할 만한 포장도 아닐뿐더러 내가 이런 요란한 취향이라고 보이기 싫었다. 내용물만 달랑 남아버린 선물을 어떻게 줘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나답게,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기로 결정 내버리고 다시 이치카쨩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자고로 이런 시간에 여자애 혼자 오래 두면 안 된다. 멀리서 얌전히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이치카쨩에게 점점 다가가자 눈이 점점 뜨거워졌다.
"왔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미안, 미안. 자, 여기 커피."
이치카쨩은 내가 건넨 커피를 받고 두 손으로 그러쥐었다. 이번에야말로.
"...저기, 이치카쨩."
"왜?"
"나 봐줄래?"
이치카쨩은 내 말에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눈을 감았다. 역시 이치카쨩. 눈치가 빠르다니까. 나는 남몰래 살짝 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다시 눈을 뜨자 붉은색으로 변한 이치카쨩의 시선이 닿는 곳엔 당연하지만 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어?"
"Happy Birthday."
준비했던 선물, 열쇠 모양 목걸이를 벤치 뒤에서 이치카쨩의 목에 걸어주었다. 내 목소리와 목에 닿는 서늘한 느낌에 이치카쨩은 고개를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돌렸다. 나의 속이는 붉은 눈과 이치카쨩의 꿰뚫어 보는 붉은 눈이 서로 얽히었다. 사실 고백 멘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두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나올 것 같이 로맨틱하고 오글거려서 나 혼자 이불을 뻥뻥 차댈 정도의 멘트를 아지트 안에서 연습까지 해둔 터였다. 그런데 이치카쨩의 그 깊고 깊은 눈을 보자마자 그 멘트가 어디로 간 건지 사라져버렸다. 백지로 변해버린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직 내 마음 한 자락뿐. 숨김없이, 속임 없이, 가식 없이 나는 그것을 내보냈다.
"좋아해, 이치카쨩."
말했다.
"정말 좋아해."
드디어 말했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한 마디, 한 마디에 듬뿍 담겨 나왔다. 한 번 뚜껑이 열리자 이젠 더는 억누를 수 없이 솟구쳐 오른다. 억지로라도 막으려고 눈을 꾹 감았다. 아니, 이건 변명이다. 사실 무서워서 감았다. 아직 이치카쨩의 대답이 남아있으니까, 차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내 볼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놀라서 눈을 뜨자 이치카쨩이 내 볼을 상냥하게 감싸 쥔 채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미소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나도 좋아해, 슈우야."
아아. 이치카쨩의 말 한마디에 걱정도, 불안도 전부 녹아내린다. 우리는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이끌렸다. 가볍게 입술과 입술이 닿자 희열이 얼굴과 온몸 곳곳에 퍼져나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행복감.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지는 작은 소리와 함께 우리는 다시 서로를 자신의 눈에 담고는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키도의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계속 그렇게 희희낙락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슬슬 돌아오라는 짤막한 문자에 나는 이치카쨩의 손을 잡고 아지트로 이끌었다. 이치카쨩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가 준 펜던트가 가로등 빛을 반사하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제 아지트에 돌아가면 메카쿠시단 전체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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