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키네코

틀어진 궤도 안에서

사키네코 답록

개쩌는 고록부터 봐줘야함

우리가 함께이기 위해서는 어둠이, 깊은 심연만이 있어야 하네

당신이 빛나기 위한 거시동공. 비록 서로의 과거를 끌어당겨 호흡할지라도

비천한 나 기꺼이 당신을 위해 심장 뜯어 바치리

오로지 하나뿐인…

숨이 작게 달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눈을 뜨면 잘게 떠는 가냘픈 어깨가 보인다. 아, 또 옛날 꿈을 꾸었구나. 우리에게 있어 이제 과거의 조각은 마냥 아름답게 비춰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날에 베이고 찔리던 적만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미우라 네코는 그 아픔이 달가웠다. 추억을 고통으로 기억하는 것이 또 저희들만이 공유하는 끈이라며 포장한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기척에도 감은 눈을 떼지는 않았다. 천천히 호흡하는 숨결이 얕으면서도 선명했다. 자신의 심장박동을 확인하는 손 위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눈을 뜨면 후지와라 사키의 불안이 서린 얼굴이 가득 들어찬다. 오로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낯빛이다. 으레 그렇듯,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을 달래주는 건 나의 특권이니까.

“잠이 안 오나요?”

달빛에 옅은 빛을 반사하는 입술이 머뭇거렸다. 지친 나비가 쉬어가듯 긴 속눈썹이 내려갔다가 다시 떠졌다. “으, 응.” 뻣뻣하게 고개가 까딱거려지면 그제야 가까이 다가가선 조심스럽게 당신의 등을 쓸어내린다. 이렇게 가까이 후지와라를 느끼고 있다 보면 쉬이 착각하게 된다. 우리가 같은 체온의 인간이라는 착오, 같은 심장으로 근육의 파동을 느끼며 피를 나누리라는 망상. 자신은 유리벽 너머의 조각상을 탐내듯 손끝에만 겨우 힘을 줄 뿐임에도. 좀 더 오래, 이 순간을 박제하고픈 욕망이 든다. 허나 후지와라 사키가 뒤를 돌면, 미우라 네코도 손길을 거둔다. 허락되지 않은 영역인 것이다.

나를 원망하나요, 후지와라.

그리 묻고 싶었던 새벽이 얼마나 많았는지. 결국 묻지 못한 날들이 많았기에 자신은 옆에 누운 후지와라의 보랏빛 머리칼을 매만졌다. 거대한 신상의 발끝에 인간이 입술을 맞추듯, 이 자그만한 움직임이 감히 당신의 신경 한가닥도 건들지 않기를 바라며… 동시에 눈길 하나라도 머물기를 바란 것 또한, 인간인 자신의 어리석음이다.

자신은 눈을 감으면 언제라도 황금빛 사막을 떠올릴 수 있다. 별들의 강이 까망을 넘실되는 남색으로 만들고, 그 아래에서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채 웃어 대던 풍경. 아프지 않은 과거는 이제, 그 정도 뿐이라서.

인정해야 했다. 과욕이었다. 후지와라 사키는 변모해버린 자신을 버리길 원했고, 자신은 그러질 못했다. 어떻게 나를 두고 갈 수 있냐며, 적반하장으로 울고 떼쓰며 너를 붙잡았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서로가 서로뿐이라며 위로하는 동시에 애써 다가오는 미래를 회피하는 찰나. 하지만 미우라는 제 생명이든 인간성이든 그 무얼 희생하던 후지와라를 제 곁에 묶어두리라. 수없이 발생되는 우주들 속 미지의 경우에서도, 변함없이.

그렇지만 과연 후지와라 사키도 그걸 원했을까?

나름 저명한 학자로 이름을 올린 미우라 네코에게도 그건 답할 수 없는 주제였다. 다행이 이제 둘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이 질문에 대해 객관적인 의견을 남겨줄 이는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미우라가 그것을 거부하리라. 후지와라 사키를 오로지 ‘후지와라 사키’로 부를 수 있는 인간은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 그래, 오만한 과욕이었다. 제 심장이 꽉 차올라 터져 버릴지라도 미우라는 그걸 꾸역꾸역 삼켜낸다.

“미우라, 우리….”

“같이 살까.”

단 둘로써 알게 된 후지와라 사키는 자신의 기억보다 조금 기가 죽어 있었다.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꺼내지 않는 자신 또한 이기적이라면 그랬다. 괜찮아요, 우린 이제 서로 뿐이잖아요. 얼마나 얄팍한 거짓말인지. 후지와라 사키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별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모교의 어느 곳이던, 후지와라는 학우들의 중심에서 밝게 빛을 내던 항성이다.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였어도 미우라 네코는 기꺼이 그 빛을 동경했다. 동시에 질투하고, 경멸했다. 자신이 먹지 못하는 포도는 분명 실 것이라고 우기는 어느 우화처럼, 우(愚)자는 그럼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후지와라 사키라는 별의 중력엔, 분명 나는 견디지 못할거야.

너는 그 어떤 이도 머물고 싶어하는 궤도를 가졌으니.

우리는 가족임과 동시에, 친구였고 세계의 멸망의 원인을 아는 유일한 동료였다. 미우라는 자신에게 같이 살 집을 구경시켜주는 후지와라의 들뜬 목소리와 맑게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새벽마다 잠을 깨워서 미안하다며 제 방으로 숨어들듯 들어오는 어색한 웃음 또한 선명하다. 그저 다 괜찮다고, 당신이 알 법한 포괄적인 어머니의 낯을 해보인 나는 기만자인가. 모든 것이 살얼음판 위에 있었다. 투명하게 아름답고, 서늘하게 불안했다. 그래, 달리던 열차에서 내 손을 잡아줬던 너의 체온처럼.

언젠간, 언젠가는 고백해야겠지. 다짐보다는 채무에 가까웠다. 제가 꾸는 악몽은 늘 미래의 당신이 있습니다. 어느 날의 교실처럼, 자신이 없음에도 환히 다른 이들과 웃는 당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이면 자신은 후지와라의 방으로도 가지 못했다. 그저 당신이 먼저 악몽을 꾸기를, 나를 당신의 나쁜 습관의 포용자로 만들어 주기를. 함부로 그녀의 궤도 안에 들어갈 생각은 못하면서, 후지와라가 먼저 자신의 안으로 들어와주길 원했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당신의 궤도 안에 들어간다면…

그렇게 된다면

후지와라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만 유난히 뜨겁다. 당신과 닿아올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탓이다. 아직도 떨고 있을까. 가까이 다가가 두 팔로 가두어도 될까. 그러면 이 심장의 고동을 네게도 전할 수 있을까. 어느 유행가의 상투적인 가사 같은 생각을 한다. 나 때문에 심장을 뜯긴 당신이, 내 심장이 당신 때문에 뛴다는 것을 알까. 그 원리를… 이해해 줄까.

“미우라.”

“……네.”

대답이 한 박자 느려졌다. 딴 생각을 해버린 탓이다.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다. 감정표현이 잘 없어 사람이 아니라 무슨, 인형 같다고.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평가 중 하나였지. 그러나 당신만큼은 알아주길 원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발음할 적에, 어떠한 가벼움이 일고, 어떤 무거움으로 당신을 바라보는지. 안면의 근육이나 성대의 움직임으로 그걸 쉬이 표현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미우라는, 내 친구지?”

“그렇습니다.”

“내 가족이고.”

“……그렇죠.”

왜 새삼스레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요. 궁금증은 공기를 울리진 못했다. 고요함 속에 제 심장 박동만 울릴 뿐이다. 확인하려 들지 않아도 저는 당신의 모든 유일함일진대, 이리 확인하려 들면 오히려 자신이 불안해졌다.

“거기에 하나만 더 추가하고 싶어.”

돌아보는 얼굴이 결연하다. 허나 자신만은 알 수 있다. 상징 속의 별처럼 노랗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진한 공포가 비친다. 아니, 이것은 애원인가? 미지의 가능성에 제 심장만 바짝 조여들었다.

“미우라의 연인 자리도, 갖고 싶어.”

아. 불현듯 미우라 네코는 깨닫는다. 자신을 앞에 두고 가늘게 움츠러드는 후지와라 사키를, 이전에도 보았다는 것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사이를 흔들며 들어오던 여름이었다. 덕분에 더위보다는 산뜻함을 먼저 떠올렸다. 상대는 자신을 처음 봤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언제나 다른 여학생들과 함께 있던 인기인. 선생님들에게도 신임을 받는다는 학생. 어쨌거나 자신하고는 먼 세상이었다. 그럼에도 초록의 나뭇잎 바람이 흔들리는 배경에서, 붓이 물감 칠을 한번, 쫙 그은 것마냥 선명했던 보랏빛 머리칼과, 자신을 향한 호의로 반짝이던 두 눈동자.

아니지, 그렇게 생각했던 건 자신의 바램이었을수도.

“그, 그럼 난 가볼게! 도와줘서 고마웠어!”

감사 인사를 두 번이나 받아버렸다. 생각보다 다르게 어쩐지 어수선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 감상을 상대에게 전할 기회는 없었다. 후지와라 사키와 미우라 네코는, 그저 클레스 메이트에 불과했기 때문에.

잠시 말이 없으니 제 옷자락을 후지와라가 꽉 붙잡는다. 퍼특 놀라 얼른 그 손을 맞잡는다. 떨고 있었을까. 아니면, 떨고 있던 쪽은 오히려 제 쪽이었나. 몸을 움직여 더 가까이 붙여 왔다. 심장이 곧 멈출 것만 같다. 너무 확실한 감정은 곧 죽음과도 같음을. 미우라 네코는 이 또한 경험했음을 기억해낸다. 그래, 그 열차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왜… 갖고 싶다, 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동그랗게 놀란 금안에 오롯히 자신만이 비춰졌다.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신성해서. 그리고 또, 감히 사랑스러워서. 어째서일까,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는 당신의 뺨이 따뜻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체온. 눈물은 이뤄 말할 수 없던 감정이 녹아들며 생기는 거군요.

“이미 갖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굽실거리며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차분히 정리해서 귀 뒤로 넘겨주는 손끝이 떨려왔다. 분명 우리는 지금 많은 것을 외면하고 있다. 앞으로 당신을 두고 흘러가는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진리와, 당신을 그렇게 만든 자신의 원죄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욱이.

후지와라의 손을 잡아 제 왼쪽 가슴 위에 얹어 주었다. 생의 증거를 표현하는 박동이 크게 울려온다. 사랑이 살아있는 이들의 특권이라면, 사키, 당신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저의 모든 것이, 후지와라… 당신의 것입니다.”

여기 뛰고 있는 이 심장 마저도.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의 진실을 귓가에 속삭였다. 자신의 중력은 한없이 작아 당신을 가둘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먼저 나에게 부딪혀 왔으니, 이제 놔주지 않아.

“사랑합니다. 나의 연인.”

나의 사키, 내 영원히 빛날 단 하나의 별이여. 사제가 신 앞에서 맹세하듯 경건한 목소리로 제 불경한 마음을 토해낸다. 알면서도 눈을 감아주는 자애처럼, 후지와라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맞닿은 입술이 시려워 데일 것만 같아. 깍지 껴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한다는 생각이 그런 것이었다. 틀어진 궤도가 서서히 합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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