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키네코

갈라테이아의 소생

사키네코 잠갈라 후속로그

  • 12님의 CoC 시나리오 <잠 못드는 갈라테이아> 진상 및 엔딩 스포일러 포함

나의 중력의 중점은 바로 여기

내 모든 세상은, 딱 이만큼.

꼬리로 물장구를 치는 것은 발끝을 겨우 움직이는 느낌에 가까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미우라 네코는 이제 다리가 있었을 적의 몸의 기억은 거의 흐릿했다. 오히려 다리가 있었을 때는 이리 물과 가까이 지낸 적이 드물었던 것 같다. 온전했던 모습을 추측형으로밖에 말할 수 없음을 그리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현재의 자신이 있었다. 이를 낯설게 여겨야 하나? 얕고 투명한 수면 위의 창백한 얼굴이 갸웃거린다. 그럴 리가. 성에를 닦아버려야 비로소 바깥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보고자 하는 풍경이라는 건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미우라... 미안해. 많이 좁지? 안 불편해?”

미지근한 습기가 찬 공기 안에 맑은 목소리로 울렸다. 자신의 몸은 불편하진 않았으나 찬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후지와라는 신경 쓰였다. 허나 미우라 네코는 이제 두 발로 설 수가 없어서, 욕조가에 두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최대한 내미는 것이 그녀가 후지와라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간곡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미우라의 말은 반이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욕조에 내민 손으로 후지와라의 손등을 살며시 감싸 쥐는 모습에서 무엇이 거짓이었는지가 드러났다. 핏기라고는 없는 축축하고 차가운 손은 익사체의 온도와 같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펼쳐져 있는 얇은 장막이 그녀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님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었다. 욕조 끝자락에서 물고기의 꼬리가 찰랑거리자 공중으로 물방울들이 튀어 전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후지와라 사키는 이 순간의 광경이 더 없이 아름다웠다. 아늑하고 눅눅한 둘만의 공간. 크림색의 고풍스러운 대리석이 깔린 욕실은 은은한 노란빛이 따스히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잠겨 있어도 넉넉한 둥근 욕조에 미우라가 담겨 있을 뿐인데도 사키는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 추측도, 추상적인 생각이나 느낌도 아닌… 그래, 자신의 텅 비어버린 왼쪽 가슴마저 꽉 채워오는 감각.

후지와라가 상체를 움직여선 팔을 욕조 안으로 넣는다. 손끝에서부터 살을 에는 물의 시림이 느껴졌어야 했으나, 그녀의 체온도 죽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감각은 고요했다. 수면을 흔드는 미미한 진동에 미우라의 손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간다. 맞잡은 손에 온기라고는 일말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만이 따스했다.

똑. 수도꼭지에서 실수처럼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잔잔한 둘의 수면을 깨운다. 그제야 후지와라는 버스럭거리는 입술을 움직인다.

“있잖아… 미우라,”

함부로 널 이리로 데려와서 미안해. 하루하루 널 말라가게 둬서 미안해. 네 다른 친구들을 버려두고 와서 미안해.

미우라의 까만 눈동자가 오롯이 후지와라 사키만을 담아낸다. 자신에 대한 어떤 의문도 의혹도 없는 순수하고 까만 마음. 후지와라는 그 순결한 거울에서 제 얼굴이 조금씩 비틀어짐을 느낀다. 얇게 수면이 들려지는 소리와 뺨에 이질적인 차가움이 닿아 온 것은 함께였으나 그녀에게만은 느렸다. 결코 그 무엇도 갈구하지 않는 태도. 그러나 후지와라만을 바라보는,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두 손길에서 느껴지는 의도는 명확했으리라.

나에게만 집중해 주세요.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소리를 잃은 저주에 걸린 어느 동화 속 비련의 인어처럼, 미우라는 젖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리하여 후지와라 사키는 두 발로 일어설 의지를 잃고 기꺼이 미우라 네코에게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마주 포갠다. 마른 것과 젖은 것이 벌려지며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을 듯이 작은 설육 둘이 맞닿아선 서로에게 빨려 들어간다.

네가 이렇게 된 것을 감히 환희해서 미안해.

그런 사과마저도 의미 없이 녹아버릴 것 같은 수온이었다.

욕조 바닥에 등을 맞대고 누우면 욕실의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살이 미우라의 이마를 간질였다. 가슴께까지 차오른 물의 표면은 바다에 있을 때보다 한참 얕은 터라 인간이 아닌 미우라 네코의 표면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후지와라는 자신이 죽은 이후 집을 바꾸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나 긴 시간을 이 저택에서 홀로 보냈을까. 미우라는 그 아득한 시간을 떠올리면 저절로 눈이 감겨진다. 옛날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꼈던 시절의 자신을 흉내 내 보듯이. 그렇게 얼마나 되는지 모를 시간을 견디는 것이 이곳에 돌아온 미우라의 일상이었다. 찰랑거리던 수면마저 잠잠해지면 공기 중엔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온다.

미우라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먼 그리움만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기억이 망상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하던 그때보다 훨씬 짧은 기다림이다. 오히려 기대에 가까울까. 잠시 눈꺼풀을 감았다 뜨면 분명히 후지와라가 자신의 앞에 있을 테니.

“미우라.”

아, 이것 보세요. 입꼬리를 물결처럼 올리면 창백한 뺨을 쓰다듬는 새하얀 손이 사랑스럽게 차가웠다. 손등에 자신의 이형의 손을 올리곤 살며시 끌어 손목에 입술을 꾹 눌렀다. 똑. 젖은 앞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소란스러웠다. 오늘은 또 어디 갔다 왔다던가, 좀 더 자주 이곳에 머물러 달라던가… 그런 유치한 문답을 하고 싶은 마음 정도야 미우라는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지금 이 저택의 빈 시간에는 자신만 있다.

저택은 충분히 넓은 곳이고 두 다리가 없으니 직접 돌아다녀 확인할 수 없음에도 확실히 알았다. 컴컴한 심해에서는 시력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 미우라의 귀는 후지와라의 기척만을 들었다. 사키는 우리의 집을 더럽히지 않았어. 이제 아무 거리낌도 없이 그런 문장을 떠올린다. 아무도 없다는 건 곧 후지와라 사키도 어딘가로 나가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미우라 네코는 그런 건 어찌되어도 좋았다.

결국 이 집으로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 춥지는 않아?”

후지와라는 가끔 자신의 죄악감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어차피 소용없을 질문을 해서 허상뿐인 답을 확인하는 형식으로. 미우라가 있었던 겨울 바다의 수온이 어땠는지 알고 있음에도, 미우라가 예전의 체온을 바라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바르르 떨리며 웃는 입가가 오히려 추워 보였다.

그것이 미우라는 몹시도 사랑스럽다.

시인하지 않으면. 결국 미우라 네코도 마음속으로 무용지물인 고백을 한다. 거짓말이었습니다. 어찌되도 좋다는거요. 저는 역시… 손을 뻗어 그녀의 제비꽃색의 머리칼을 매만진다. 고개를 움직여 가까이 다가가면 뜻을 알아챈 후지와라의 눈꺼풀이 감기고, 작은 열매 같은 입술이 슬쩍 벌려 들었다. 집요하게 파고 들어갈수록 욕조 안의 물결의 표면이 흔들렸다. 상체를 일으켜 다른 손으로도 후지와라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렸던 고개를 다시 꺾어 입술을 빈틈없이 포개었다. 가슴끼리 맞닿으면 미우라의 젖은 피부의 물기가 후지와라의 마른 옷을 적셔 나갔다. 미우라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아니, 역시 부족하다.

오직 뜨거운 건 이렇게 타액을 나눌 때뿐이라서.

미우라 네코는 그 순간에 영원히 데어 죽고만 싶었다.

갈라테이아 해협, 그곳의 인어에 대한 전설은 다른 외국의 동화와는 조금 달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연인을 시기하여 죽이고 마는 바다의 요정. 서로 사랑한다고 하여도 꼭 자신의 바다 안으로 애인을 끌어당겨 익사시키고 마는 이기심. 왕자를 위해 물거품이 되기로 한 인어에게도 그런 욕심이 없었을까. 적어도 갈라테이아들은 사랑하는 이를 얻었지 않았나.

그게 죽은 몸이라고 한들… 다를 게 있었을까?

‘점점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마는구나.’

그러나 미우라 네코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가 되어 버리고 말아.’

예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곁에 다른 이들이 생겼다고 해서…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갈망했으면 더 갈망했지. 미우라의 고독은 이제 후지와라 사키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지와라 사키는?

깊은 바닷속에 있으면 더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여기서는 정말 빛을 갈망하게 되는구나. 심해는 마치 우주처럼 아름다웠다. 미지의 세계라는 점에서 미우라는 자신의 이전 삶의 방식대로 새로운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나름대로 새롭게 채워지는 삶의 방식. 하지만 미우라의 일상은 늘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군가를 그리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미미한 태양 빛이 물그림자를 만들때 그 위로 되새겨보는 얼굴. 무거운 물결처럼 고래들이 지나가며 울려주는 자장가에 덧대는 목소리. 색색의 빛깔들로 흔들리는 산호초들에 맞춰 흩날리는 머리칼.

무엇 하나 후지와라 사키를 생각나지 않게 하는 것이 없었다.

갈라테아아들의 시간은 달빛만이 허락했다. 혹시, 어쩌면… 미우라 네코는 손에 잡히지 않는 숫자를 연구하던 이다. 얼마나 더 크고, 언제까지 더 오래 걸리고, 어디까지 더 작을 수 있을지… 그런 수치들을 구체적인 숫자와 단위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 기억이 다 날아가기라도 한 것일까. 미우라는 후지와라를 기다리는 시간을 자신이 알던 수치에 빗댈 수 없었다. 막연한 기대를 확률로 나타낼 수도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단지 믿음뿐이었다. 사키라면, 날 그리워할 나의 사키라면… 분명 자신을 찾아 줄 것이라는… 그런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소망. 그렇지만 사키가 정말 행복하다면. 나 없이, 날 잊은 채로 행복한 상태라면. 이대로 영영 심해에 갇혀 있다고 해도 좋아. 미우라는 체념을 그런 식으로 가장하고 했다.

그 절벽 아래에서 달빛보다 부드럽고 태양보다 환하게 빛나는 금안을 마주한 순간, 미우라는 자신의 원래 본능을 알아차렸다.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돼.

미우라는 전설 속의 갈라테이아들을 이해했다. 분명 자신도 사랑하는 연인을 바닷속으로 끌어당겼으리라. 깊게 침잠시켰으리라. 연인이 태양 빛을 그리워하지도 못하게, 아주… 깊은 바닷속까지.

그날은 웬일로 후지와라가 아침 일찍부터 집에 있었다.

“잠시면 되니까, 조금만 참아줘.”

다시 한번 작아진 미우라는 작은 어항에 담겨 후지와라의 품 안에 안긴 채로 어딘가로 이동했다. 얌전히 그녀의 말에 따르면서도 미우라의 심장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해 쿵쿵 뛰었다. 만일 이대로 다시 갈라테이아 해협으로 가는거면 어쩌지? 후지와라 사키는 심성이 여린 사람이었다. 그 열차 안에서도 그랬다. 후지와라 사키가 미우라 네코에게 하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닌 축복이었음에도, 후지와라는 늘 죄책감을 짊어졌다. 아, 아니다. 역시 죄가 되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사키… 부디 나를 버리지 마세요.’

후지와라 사키에게는 책임이 있었다. 미우라 네코의 손을 잡고, 서로를 돌보게 된 책임. 그러나 그건 그녀의 자의가 아니야. 오히려 나로 인해 겪고 만 타의여서… ‘인간’이었을 적 미우라라면 그렇게 제한선이라도 그었으리라. 지금 미우라는 갈라테이아였다. 아니, 사실은 그 이전에도…

“다 왔어.”

어항에서 넓은 물속으로 빠트려진다. 술식이 풀려 몸이 점점 원래의 크기로 돌아오는 와중에 피부로 느껴지는 물은 바닷물의 감촉과 매우 닮아 있어 미우라 네코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수면 위로 올렸다. 두 팔을 뻗는다. 망설임은 없었다. 사키라면 분명 함께 빠져줄 거야. 설사 아니더라도, 나와 함께라면 언젠가는… 뻗어진 손에 너무나도 쉽게 체온이 닿는다. 미우라의 눈에 비친 후지와라 사키는 너무나도 환히 웃고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그제야 미우라는 자신이 담겨 있는 곳을 살폈다. 컴컴하지만 미우라의 검은 눈동자는 금방 시야를 확보한다. 멀리서 반짝거리는 불빛은 유리창 너머의 야경이었다. 수면이 찰랑거리는 곳은 이전의 욕조보다는 충분히 깊고 넓었으나 자신이 있던 바다와 비교할 대상은 아니었다. 이곳은 수영장이었다. 백여 명은 족히 이용할 수 있는 곳을 미우라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충만감은 거기서 오지 않는다.

“일부러 물은 바닷가의 수질과 맞추었어. 그래야 미우라가 편하게 느낄 거 같아서…”

후지와라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린 채 시선을 아래로 숙였다. 몰래 준비한 선물을 내미는 아이의 수줍음 같기도 하고, 가식을 들킨 것이 두려운 어른의 걱정같기도 했다. 맞잡은 손의 반대쪽을 물 안에 넣어 잘게 참방거린다. 수면에 일렁거리던 미우라와 후지와라의 얼굴이 흐려졌다. 아직 아무 반응이 없는 미우라의 얼굴을 볼 용기가 후지와라에게는 없었다. 꾹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몇 번 헛숨을 들이키더니 결국 먼저 입을 연다. 말할 때마다 호흡의 끝마다 떨려왔다.

“저기 미우라… 앞으로는 우리…”

쭉 함께 있으면 안될까? 후지와라의 말은 그렇게 끝날 예정이었다. 그 전에 겹쳐진 차가운 입술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왔던 바닷물과 염도를 맞춘 물의 짠맛이 먼저 들어온다. 말캉한 감촉이 타액과 함께 진히 섞이며 그것을 중화시켜 나갔다. 제 체취가 후지와라에게서 옅어져 가는 것이 성에 안 찼는지, 아니면 단순히 기쁨을 표현할 길을 이렇게밖에 찾지 못한 건지.

미우라 네코의 두 손이 후지와라의 팔을 꽉 잡고 물속으로 당긴다. 이가 떨릴 정도의 차가운 수온이 거칠게 후지와라를 덮쳤다. 맞닿은 입술만이 다정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다정함은 아니었다. 미우라의 손은 사키의 뒷목을 잡으며 계속해서 그녀의 호흡을 빼앗고 있었다. 그러나 후지와라는 이 뒤엉킴을 몹시도 따스하게 느꼈다.

미우라 네코는 이 바다의 모조품에서 얼마든지 헤엄칠 수 있었다. 분명 후지와라 사키도, 한낱 바다의 저주일 뿐인 자신과 함께 깊은 심해 아래로 떨어져 줬을 테니까.

불온한 확신만이 더없이 고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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