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 짭조선풍
조선에유 인피니토
온 난리통이 한바탕 지나가고 그야말로 그간의 질서란 것이 흔들리는 때가 있었다. 웬 어중이떠중이들이 저를 양반이라 떠벌리고 다니지를 않나, 집안이 풍비박산하여 양반이란 지위가 허울뿐인 양놈이 수두룩한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집안의 명예를 지켜온 양반이 있으니, 그가 바로 공조참의 백수환이다.
수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다섯에 소학을 꿰었고, 열일곱에 장원에 급제하였으며, 성품 또한 대죽같이 올곧고 결단력은 바늘처럼 첨예하기 그지없어, 모든 이들의 환심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환은 열여덟에 유서 깊은 공 가의 소저와 혼인을 올렸으나, 이후 무슨 바람이 든 것인지 기방을 제 방 드나들 듯 문지방이 닳도록 오갔다. 그에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 공씨는 정신이 아뜩하였으나 그 심성이 순종적인 탓에 남편에게 무어라 따지지도 못하였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고 수환이 첩을 들여오니, 그 이름 홍국이었다.
이듬해 홍국은 달덩이 같은 아들 하나를 낳게 되는데, 체질이 허약한 탓에 고만 이튿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젖을 물릴 어미가 없으니 세상에 난지 얼마 안 되어 명을 달리하게 될 운명을 가진 아이를 가여이 여기어 공씨가 방으로 들이니, 그 날로부터 아이는 공씨의 아들이나 다름이 없었다. 공씨는 수환과 그의 첩이 미웠으나, 저를 보고 세상 모르게 순히 웃는 아이에게 마음이 가 친자처럼 여기고 크게 자라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한길, 이라 지어주니, 그것이 그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한길이 2돌을 맞이하고 한 달 뒤, 공씨는 아들을 출산하였다. 수환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이름을 정담, 이라 지어주니, 그가 나중에 장성하여 큰 일을 이룰 자였다.
한길과 정담, 두 형제는 어려서부터 여느 형제처럼 허물이 없이 지내며 한길은 그 태생은 얼자였으나 적자인 정담과 다름없이 어여쁨을 받으며 자라왔고, 수환이 말하기 꺼리는 탓에 둘은 한길의 태생에 대해 꿈에도 모르고 자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한길은 열일곱에 이르렀다.
“아부지, 왜 제 이름은 한자로 쓸 수 없습니까?”
아침 공부를 끝마친 한길이 사랑채로 건너와 물은 말이었다. 수환은 아들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 보다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어미가 우릿말을 좋아한 까닭이다.”
“한자로 나타내지 못하면 과거에 응시는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때가 되면 새로 자를 지어줄 터이니, 지금은 학업에 집중하거라.”
한길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상에 논어를 펴놓고 담배를 뻐끔뻐끔 물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우처럼 뜻 깊은 한자어였음 더욱이 좋았을 것입니다.”
“지금 어미의 뜻을 모욕하려는 게냐.”
“그것은 아니옵니다. 다만, 벗들이 농삼아 놀리는 일이 잦기에…”
한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미련한 자들이다. 이름으로 놀리는 자들을 벗 삼을 필요는 없다. 이만 가보거라.”
“네..”
한길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채를 나섰다. 그는 나서면서 아버지 수환의 오랜 벗 대건을 만났다. 대건은 한길을 보고 혀를 끌 차더니 사랑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건은 늘 그런 식이었다. 정담은 어여삐 여기며 올 때마다 선물이나 주전부리를 주곤 하였으나 한길에겐 단 한 번 없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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