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 난 순애 헤테로가 쓰고 싶었을 뿐인데
하늘이 핑하고 돈다. 알코올에 잔뜩 젖어서인지 세상이 어지럽게 느껴진다.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 내딛었지만 혼자 힘으로 가는 것은 무리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누군가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숫자에 취약한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전화번호. 신호음이 가고 달칵,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부드럽고 조금 낮으나 굵지 않은 목소리. 아, 그토록 듣고 싶었으나 감히 용기내지 못했던 그 목소리다.
“ㅇㅇ빌딩 앞 xx포장마차.”
난 그리 짤막하게 말하고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전화가 끊어지고 난 뒤에 수치심이 들었다. 뭐하자고 반 년 만에 그렇게 연락을 한 거야? 난 쭈그리고 앉아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나쁜 x. 미련한 x. 잘 지내자고 내민 손을 뿌리쳐놓고 무슨 자신감으로. 잠시 뒤 헥헥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숨소리의 주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더니 내 손을 꼭 쥐었다.
“네블리, 괜찮아? 어디 다친 거야? 움직일 수 없어? 심각한 거야?”
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이리로 온 것인지 얼굴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나를 향한 걱정에 눈물이 그렁 맺혀있었다.
“…바보.”
“네블리, 일어설 수 있어? 잠시만, 내가 부축해 줄테니까….”
“그냥 좀 취한 거야. 다치지 않았고, 멀쩡해.”
“아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는 그제야 헤실헤실 눈웃음을 지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웃는지. 정말이지 바보천지가 따로 없다. 그는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난 비틀거리며 그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다. 반 년만에 재회인데 하필 이런 추한 꼴이라니.
“집 데려다줄게.”
그가 환하게 웃는다.
그와의 첫 만남은 예술 전문 학교 입학식 전 날이었다. 멀리 지방에서 이곳에 오기 위해 올라온 나는 머물 기숙사 방에 짐을 풀어놓고 창을 활짝 열어둔 참이었다. 그 날은 비가 왔었다. 세찬 빗줄기가 아닌 방울방울 떨어지는 이슬비였다. 비를 맞아 진하게 물들어가는 세상을, 나는 창을 열고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부드러운 음성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난 소리의 근원을 찾아 여기저기를 살폈고, 이내 키가 큰 백금발의 남자가 그 소리의 주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우산도 비옷도 없이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노래를 작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을 헛디뎌 덜컥, 창틀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남자는 깜짝 놀라며 내가 있는 기숙사 2층 창문을 올려다 보았다.
“아.”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흉하게 모르는 사람을 빤히 구경하고 있는 꼴이라니! 남자는 여전히 이쪽을 올려다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관객이 있었네요.”
“아아, 그, 몰래 보려던 건 아니고… 소리가 좋아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그만….”
말을 걸 줄은 몰랐기에 당황하여 속마음을 다 뱉어버렸다. 어쩜 좋아.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것이 뻔했다.
“영광이에요.”
그러나 그는 되려 활짝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러더니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방금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주실 수 있어요? 어머니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거든요. 이렇게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셔요.”
“그… 한 곡 더 들려주시면…?”
무슨 이상한 용기가 난 것인지 난 그리 말했다. 뒤늦게 사실을 깨닫고 낯이 간지러워졌다. 남자는 눈웃음을 짓더니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난 다시 그에게 빠져들어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쉿, 하고 말하더니 우산을 펼쳐들었다. 그의 주변이 일렁이더니 따뜻한 바람이 훅 불어와 내게 닿았다. 젖어있던 그의 머리와 날개, 옷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했다. 그는 우산을 한 번 도르륵 돌려보더니 기숙사에서 멀어져갔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후회하고 있었는데 난 그를 또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학교 입학식에서였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입학생이었나. 키가 원체 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돋보적이었다. 그런데 그도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손을 흔들더니 제 입가를 톡 두들기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의 부탁에 대해 묻는걸까? 확실치 않았으나 난 그저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일주일 간은 정신 없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루틴 탓이었다. 다시 한 번 그를 만난 건 하교 시간 화단에서였다. 담임과의 상담이 있고 나서 교무실을 빠져나오는데, 열린 복도 창문으로 낯설지 않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난 후다닥 계단을 뛰어내려가 화단으로 향했다. 화단 앞 벤치, 그 곳에 그가 앉아 종이 뭉치를 넘기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 오랜만이에요."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 동급생이니까 말을 놓을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첫 날엔 2층에서 내려다 보았고, 입학식 날은 아주 먼 거리였다.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자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미남이라 불러 마땅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잘생긴 사람만 보면 설레던 성질이 여기서도 어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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