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록
우선 이야기의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두 사람 모두 살아남았다.
그레이엄은 제 앞으로 배정된 관물대를 모두 정리하여 택배로 실어두었다. 이제 이곳에 오는 일이 있다면 아마 간식을 들고 평상복 차림으로밖에 오지 않을 것이다. 유포니엄 기관의 소속으로 배정된 삶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계획한 것이 2개월 전이었고 오늘은 길었던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마지막 임부를 배정받는 순간이었다. 전선에서는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사람이 죽는다. 전선에서는 살릴 수 있는 생보다 지키지 못하는 생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 스스로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내가 바라는 방향을 찾지 않으면 앞으로 일어날 혼돈에서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임무는 지극히 단순하다. 강한 마수가 있다. 아군이 공격받고 있다. 사람을 구해오든가. 아님 마수를 모두 죽이든가. 대충 이런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주변 지형정보만 머리에 넣어도 뇌용량이 가득 차는 느낌이니까. 이해했냐는 부관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 오다 보니 손만 들어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손을 든 것은 질문이 있는 게 아니라,
"이해했냐고 묻잖아. 새꺄."
나를 갈구려고 하는 짓이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맞은 뒤통수가 얼얼하다. 좀 적당히 세게 때리지. 몸이 순간 앞으로 휘청거렸고 눈물이 찔끔 나온 듯했다. 진짜 성질머리 좀 죽이라고 몇 번을 얘기했나. 목장에 오면 이제 못 갈구니까 지금 열심히 갈구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니. 진심이었나. 어이가 없다. 그래도 전선에서 이만큼 손발이 맞는 사람을 찾으라고 하면 없을 테다. 사선을 몇 번인가 같은 부대로, 팀으로, 소대로 함께 하며 넘겨왔고 그때마다 손, 발로 맞았으니까. 정신적으로도 무척이나 안정적이었으니 아마 그때가 전선에서 최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지독한 오만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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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느껴지는 공기는 더없이 차가운데 몸에 오른 열은 내려갈 생각을 않고 머문다. 숨을 천천히 고르려고 할 때마다 기침이 튀어나오고 입 안에서는 혈향이 끓어오른다. 아까 낙마하는 순간에 잘못 짚었는지 왼쪽 손목은 움직일 때마다 손이 뽑힐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메스껍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와중에도 손에 쥔 창을 놓는 일 없이 앞으로 내질렀다. 살아야 하니까. 살려야 하니까. 그렇지만 항상 이런 모양이지. 불운이라는 것이 겹치고 쌓여서 제 목을 부여 잡는 듯 했다. 오만했던 죄일까, 책임지지 않고 눈을 돌리며 살아온 대가가 이것일까.
도착했을 때는 고립된 이들 중 살아있는 인간은 없었고, 그 시체를 미끼 삼아서 마수들이 노리고 있었다. 하필 그 위치가 저지대였을 뿐이고 하필 그 순간에 나타난 마수들은 지능이 좋았을 뿐이고 하필 그때 내가 감당하지 못 할 것들이 쏟아져나왔을 뿐이다. 예상하지 못한 숫자와 강함을 육체가 맞서지 못하고 먼저 꺾이고 만다. 무너지는 두 다리와 상체. 만약 베일리가 아니었더라면 전장에서 드러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시체 꼴이었을 테지. 이런 상념이 드는 것을 보니 점점 집중력도 깨지고 무너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이었다. 이마에 났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오른눈을 가렸고 그 틈을 영악한 마수는 놓치지 않는다.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전열에서 한 마리가 삐져나왔고 후방으로 향한다. 피육음이 울린다. 당신 목소리로 듣고 싶지 않았던 비명이 울린다. 젠장, 또다. 또다시 내 나약함과 연약함 때문에 사람이 다치고 만다. 붉은 스파크가 손끝에서 튀어 오르지만 그 무엇하나 똑바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형체는 허물어진다. 결국 손에 쥔 창대를 다시 한번 휘두르지만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부러지고 말았다.
코 앞까지 다가온 마수의 숨결은 영혼마저 집어삼킬 듯한 한기를 품어서는 죽음의 향기를 풍겼다. 내 나약함 때문에 당신마저 이곳에서 죽고 마는 것인지... 주마등보다 먼저 스친 생각은 죄책감이었고 그다음은 억울함이었다. 나는 왜 고작 3등성에 머무르는 별인가. 당신은 어떻게 이 순간에 더 빛날 수 있는가.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탄환이 벌리고 있던 마수의 아가리 안에 정확히 박히더니 거대한 구멍을 내고선 지나갔다. 그토록 버겁던 것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탄환이 조형되는 소리도 멈추고 말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대지를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울리는 것보다 빠르게 달려서는 바닥에 쓰러진 당신을 줍는다. 축 늘어진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삶보다 죽음의 기운이 더 가까웠다. 그 이후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느새 병실이었고... 익숙한 걱정과 잔소리. 깁스가 되어있던 왼팔과...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 사라져버렸다는 당신의 소식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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