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레이! 레이!"
제 누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레이엄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하늘은 붉어졌고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온전히 태양의 시간도 달의 시간도 아닌 그 경계를 걸쳤을 때의 하늘은 오묘한 빛을 품는다. 새파란 것도 아니고 새까만 것도 아닌 붉으면서도 푸른 듯하다가 노란 빛도 맴돈다.
"그러니까, 저게 무슨 원리였더라."
색색의 빛이 하늘을 채우는 것을 보며 그레이엄 스프링필드는 실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학교에서 익힌 것보다 잊은 것들이 더 많다. 그래도 잊지 않은 것들은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인연이 되었다. 슬픈 기억은 다시 색칠할 수 있지만 이미 뒤바뀌어 변색한 것들은 덧칠하더라도 원색에서는 자꾸만 멀어져간다. 베일리의 묘를 바라보다가 그레이엄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색이 변해가는 하늘, 집은 따뜻한 노란색. 그 사이에 새까만 것이 달린다. 목장 전체를 제집 마당처럼 달리는 것을 곧바로 붙잡아 품에 안아 들고는 손을 내준다. 이제 10살이 넘어가는 아이인데도 기운도 좋다. 장갑을 벗고 손을 보여주자 기다렸다는 듯 손에 달라붙어서 열심히 물어뜯기 시작했다.
"콜, 너는 이게 그렇게 좋니."
다른 사람은 안 물면서 유독 제 손만 보면 물고 뜯는 고양이다. 어릴 때 잘 가르쳤어야 했나 후회는 들지만 상처가 조금 더 늘어나는 게 대수인가 생각하며 웃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한 손으로 목에 달린 리본을 고쳐 매어준다. 조금은 해진 유포니엄 3학년들이 쓰던 리본이다. 이것도 하나의 색이고 추억일 것이다.
이제는 완전히 어둠에 잠긴 하늘. 새까맣게 물든 밤을 비추던 따스한 빛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적막함이 찾아온다. 이부자리에 누워선 고양이를 부른다. 예전에는 한 손바닥밖에 안 되는 사이즈 같았는데 어느새 제 팔뚝만큼이나 자라버렸다. 그래도 귀여우니 되었다. 제멋대로에 말 하나 듣지 않고 고집만 부려대고... 꼭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도중에 몸이 바닥으로 끌려 내려간다. 의식은 멀어진다.
전선에서 물러섰지만 꿈속에선 여전히 죽은 것들이 종종 기어 나온다. 아니 이젠 산 사람도 나타난다. 그것들은 웃는다. 사지가 멀쩡한 채로 웃으며 춤추고 떠든다. 양들이 구르던 풀밭 위에서 행복하게 미소 짓는다. 어설픈 각오로 전선에 오른 탓에 잃은 사람들. 내 능력이 부족했기에 지키지 못한 사람들. 내가 약했기에, 구하지 못한 기억들. 후회스러운 것들에 손을 뻗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상처 입고 부러진 팔들이 기어와 뻗은 손을 붙잡는다. 저항해보지만 이미 죽어버린 것들이 일어서서 내 몸을 덮친다. 이것들에게 짓눌린 채, 꿈만 같은 세계를 바라보다가 결국 익사하는 것으로 꿈은 끝이 난다. 언제나 그랬을 텐데. 죽은 것들이 제 등을 민다. 이미 죽은 것들이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붙인다. 죽음과도 같은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온 몸을 옥죄며 호흡을 틀어막는다. 그 어떤 색도 남지 않은 회백색의 저편으로 몸이 추락한다. 혹은 부유했다. 탁해진 녹빛의 별은 인과라는 중력을 벗어나지 못함일까. 바닥에 머리가 닿고 빛이 사그라드는 그 순간 주홍빛의 섬광이 폭발한다. 그림자도, 죽은 것도 모두 사라질 듯한 충격에 눈을 뜨자 어두운 방 안을 무언가가 비추고 있었다. 어딘가에 데인 것처럼 목 안은 따끔거렸고 어디선가 연기가 피어오른다. 창문으로 비치는 풍경은 황혼녘같이 황홀했고 지독했다. 세계가 불타고 있다.
기억은 이어지지 않았고 세계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일렁이는 불 위를 달리고 새까만 연기를 몰아내고 타오르는 추억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것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어린아이처럼 도망치지만, 세계는 용서하지 않았다. 노란 빛의 따스했던 세계가 주홍빛으로 물들고 덧칠되려는 찰나였다. 몸으로라도 화염을 막으려 무너진 다리를 일으켜 세우는 걸 누군가가 붙들었던 것 같았다. 하늘 위에서 소방헬기가 물을 뿌리며 나타났고 소방차 여러 대가 불길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재해에 온점을 찍어낼 것이라 신탁을 받았지만 작은 멸망을 막을 힘이 없다는 사실은 지독하게도 절망스럽다. 내가 지키지 못한 것들은 나에게, 내 것들에게 되돌아온다. 아무리 덧칠해도 바닥에 깔린 도화지에 물든 탁해진 색깔을 덮을 수는 없었다. 그날 스프링필드 대목장을 지탱하던 초원의 사자, 리오나 스프링필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라는 말과 함께 구급차에 실렸다.
목장의 평원은 잿더미만 남고 말았다. 화염과 수압에 축사는 무너졌고 그 사이에 도망치지 못했던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는 제 어미를 보며 구슬프게 운다. 아직 다 녹지 않은 눈과 다 타버린 재가 바람에 같이 휘날린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언가를 이끄는 듯한 마력이 남아 목을 쥐고 어디론가 견인한다. 화마를 견디지 못하고 타버린 베일리의 묘는 무너지고 부러졌다. 뜨겁게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한 화염의 마력에 홀린 듯 두 다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풀리고 만다. 공포와 분노 그 속에서 바라본 환영들 모두가 가슴 속을 파고들어 불사른다. 아름답던 푸른 초원과 새파란 하늘,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 평화롭던 세계에 찾아온 불꽃은 그 모든 색채를 뒤엎고 사라진 자리는 무채색의 풍경만이 생경하게 남았다. 삭막하고 추운 곳 위에 자리 잡은 잿더미 위에 별이 주저앉자 광원은 바래지고 세계는 고정된다. 베일리 너는 어떻게 생겼었지. 갑작스레 든 의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한다. 망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듯 이미 죽은 것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 추억은 망가지고 심상은 뒤틀린다. 새파란 하늘은 검은 연기로 뒤덮인다. 잿더미 위에 쌓아 올려진 차가운 하늘에서도 베일리는 그의 부름에 응한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없던 것으로 만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재생과 부활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가시질 않는다. 바닥에서부터 피어나는 주홍빛의 꽃은 위로 치솟고 사라진다. 불꽃 위에서 어느샌가 그 아이는 다시 몸을 일으킨다. 잿빛의 가죽을 두른 뼈들이 제 모양을 갖췄고 크게 울었다. 베일리는 죽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추억 속에서도. 그러니 죽은 것을 부르면 당연 이런 모습이어야 했다. 애초에 내가 너를 거짓된 피와 살점을 덮어내고 말았구나. 잿빛의 가죽 위에 올라탄다. 검은 재가 떠다니는 공기는 더없이 맑았다. 불타버린 평원 위로 이전처럼 둘은 달린다. 어릴 적 저 동산 너머에는 어떤 땅이 기다리고 있는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달리던 순수함은 재가 되어 흩날린다. 어딘지 모를 그곳으로 해가 지고 달이 지고 별이 지는 그 순간까지 서로의 인력에 의지하며 잿빛으로 발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