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혹은 고백
잘 관리된 묘비 위에 한 사람이 선다. 들꽃들을 엮어서 만든 꽃다발이 그 위에 올라간다. 사람은 그 앞에 앉고는 하늘을 바라본다. 새파란 하늘과 탁 트인 시야가 들어오자 네가 떠오른다. 갑갑한 콘크리트 숲에 갇혀 있을 때면 네가 떠오른다.
푸른 대지 위에서 함께 뛰어놀던 그토록 사랑스러운 찰랑거리는 갈색 털들이 그리워.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다시 널 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기다리고 있노라면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그만두곤 해. 그렇지만 내가 매일같이 네 생각 속에 빠져 살아가길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 네 검은 눈동자를 만나는 날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가끔만 생각하려고 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너도 이해할 거야. 어떻게 잊겠어. 그 초원 위를 같이 달리며 세차게 부는 바람을 얼굴로 맞던 그때를,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서 뒹굴었던 그 추억들을 떠올리며 너를 불러.
나지막하게 내뱉는 말들. 이건, 이제껏 자신이 짊어지지 않은 책임에 관한 넋두리다.
열일곱살이 된 해의 겨울날, 눈이 오지 않고 평소랑은 다르게 하늘이 맑던 날이었습니다.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진 탓에 산책도 할 겸 마구간으로 걸어갔는데 유독 가는 길이 멀었고 무거웠습니다. 날이 맑으니 같이 나가서 놀까 생각하여 베일리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아침잠이 유독 없던 아이기에 항상 제가 올 때면 두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바라보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고요함만이 느껴졌습니다. 그날 저는 제 하나뿐인 친구를 떠나보내었고 그 아이를 직접 제 손으로 묻어 묘를 올렸습니다. 그 애의 묘 앞에서,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땅으로 넘어간 그 아이에게 한 가지 맹세를 했습니다. 내 평생동안 내 손으로 만들어낼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너 하나뿐일 것이라고. 내 추억 속에서 불러낼 것은 다름 아닌 너 하나뿐이라고.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까 펑펑 울었었는데... 학교는 가야 했고 일주일 뒤에, 유포니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참...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렇게 3년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저를 이곳에서 반겨주셨습니다. 베일리는 제가 10살 때 선물로 받은 아이인지라, 그전까지는 어머니의 애마였습니다. 저 못지않게, 아니 저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 베일리를 타고 가서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네게 했던 약속을 계속 지키고 있다고. 너는 그 어리던 애밖에 못 봤겠지만 이제, 나 정말 많이 컸어. 라고.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지고... 이전처럼 소심하지도 않고, 친구가 없지도 않아. 정말 잘 자랐지. 보고 있어? 묻고 싶었는데, 그날 어머니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타고 온 말은 도대체 누구의 말이냐고.
마음 속에 담긴 추억을 재생하고 떠올리듯이 제 머릿속에 남는 것이라면 사람 빼고는 모두 다 만들어내는 것이 원래 제 능력입니다. 완벽히 진짜와 같은 가짜를 만들어냅니다. 그게 복잡한 기계건 단순한 고무공이건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건... 제 마음속에 깊이 남으면 남을 수록 오래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정확하게 만들어낸다는 것이 제 능력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제 마음은 뒤틀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베일리는 제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제 모든 사랑을 다 퍼주었던 아이입니다. 그 마음이 그 애를 점점 다르게 만든 겁니다. 추억 속에서 좋았던 기억들만 모인 탓인지, 그 어떤 말보다 더 총명한 눈에 윤기가 항상 흐르는 보드라운 털, 그러면서도 온 몸이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데다가 다른 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것 같은 말로 바꾼 것입니다. 완벽한 가짜를 만들어내는 줄 알았지만... 저는 그런 거짓된 모습을 베일리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 제가 온전하게 그 아이를 기억할 수 있었더라면 저는 평생 그 아이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베일리가 육신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그 아이의 영혼을 죽게 만든 것은 저의 뒤틀린 애정이었던 겁니다.
그 뒤로 제 삶이 다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가족의 추억이 담긴 앨범을 모두 다 불태워버린 기분이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전 앨범을 보아도 만들어지는 모습은 항상 그대로입니다. 과연 이것을 베일리라고 불러야 합니까. 이건 제 마음속의 추악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에 꺼낼 수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대는 말이 많았지만 전선에 참여한 이유는 저 스스로를 내던지고 싶었습니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때 저는 그만큼이나 어리석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전선에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하나둘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겼고 슬퍼하지 못한 마음이 쌓였습니다. 이전에 묘비에서 했던 다짐이나 마음 같은 건 너무 어린 생각이었습니다. 그 무엇을 해서라도 사람은 살려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아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청년은 어느샌가 소년의 티를 벗었다. 해가 저물고 달도 뜨지 않는 날. 하늘에 수 놓인 별들이 쏘아낸 빛이 용케 이 땅에 닿아 적막한 밤공기를 데운다. 과거에 쌓아 올렸던 것을 모두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이 옳다 여겼으나, 짊어질 필요 없는 것에 짓눌려 눈물을 흘려야 할 순간에 흘리지 못 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니던가. 그레이엄 스프링필드는 이제껏 저지른 죄업을 바라보기로 했다. 검은 돌멩이 하나하나 모두 들어서 바라본다. 크기도 제각각에 모난 것, 둥근 것 모양도 제각각이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쌓았다. 쌓아 올려진 탑은 어느새 밤하늘을 바라본다. 탑 위의 작은 구멍으로 난 틈으로 비추는 별이 머나먼 거리를 뚫고서 날아들어 온다. 유독 하늘이 맑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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