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세계관

사랑에 빠진 마법사, 전장에 서다 - 2.데만토이드와 토파즈

데만토이드 그라나트는 오늘도 열심히 판타지 소설을 건지듯 도서관에서 빌려둔 상태였다. 그가 집어 온 서적들은 모두 자기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도서관에서 사서 배치한 책까지 손댈 수는 없었고, 지금 버스 너머로 보이는 공터에서 도서관에 선택받지 못한 책들의 화형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문제였다. 그는 아주 어릴 적부터 판타지 서적을 접하고 마법에 대한 환상을 지닌 자였다. 마법이 나오는 콘텐츠들로 애니메이션, 소설, 만화, 온라인 게임,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을 가리지 않고 모두 섭렵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취향은 자기 종교의 사제이자 그라나트 가문의 주인인 알만다이트에게는 극비 중의 극비인 사실이었다. 심지어 자기 부모에게조차.

 

“다음 역은 뒤셀란트 공원. 뒤셀란트 공원입니다. 내리실 분은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살피어 하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버스에서 하차한 데만토이드는 집에서 그가 책을 숨겨두는 곳,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바닥을 손끝에 힘을 주어 들어 올리자, 각종 판타지 소설이 가득 들어있었다. 데만토이드는 이번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재미있으면 구매해서 다락방에 숨겨둘 예정이었다. 다락방에 책을 놓고서는 아버지 로돌라이트가 끓여준 토마토 파프리카 소고기 스튜와 바게트를 먹으며 저녁 식사를 즐겼다.

 

“아빠, 이건 무슨 요리에요?”

 

“구야시라고, 동쪽 대륙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하더구나.”

 

“맛있어요!”

 

데만토이드의 어머니 에버그린이 끼어들었다.

 

“우리 여보의 요리 솜씨가 대단하지!”

 

“...요리 칭찬은 좋은데 너무 염장 지르진 마세요.”

 

“이 녀석아. 우리 가족이 화목해서 네가 제대로 자란 거 아니겠느냐. 감사히 여길망정.”

 

“...할 말이 없네요.”

 

“그러니까 차보라이트는 언제 온대?”

 

에버그린의 질문에 데만토이드가 답했다.

 

“조금 늦나 봐요. 쪽지 시험공부를 한댔던가.”

 

말을 하자마자 현관문이 열려 차보라이트가 들어왔다.

 

“오! 차보라이트! 이제 막 먹기 시작했으니, 너도 씻고 한 술 뜨자.”

 

“음~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기대된다…!”

 

가족은 마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토파즈는 잘 지내던?”

 

에버그린이 물어왔다.

 

“잘 지내요. 바꾼 전공이 잘 맞나봐요.”

 

토파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먼저 데만토이드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토파즈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였고, 거의 항상 토파즈랑만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토파즈에게 새 단짝 친구가 생겼고, 데만토이드는 토파즈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자 토파즈의 새 단짝 친구에게 질투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토파즈의 새 단짝 친구를 계단 위에서 밀어버렸고, 다시는 토파즈를 건들지 말라며 차갑게 웃고 그 곳을 떠났다.

 

토파즈의 새 단짝은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기절했었던 채 학교 선생이 먼저 발견했다. 그는 데만토이드의 보복이 무서웠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 자신이 겪은 사건의 가해자가 데만토이드라는 것을 밝혔다.

 

학교는 뒤집어졌고, 데만토이드는 20일간 정학 금지라는 벌을 받고 집으로 왔다. 집안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가 있었다. 에버그린은 데만토이드에게 물었다.

 

“데만토이드, 혹시 그 아이를 밀 때 주저했다던가, 밀고 나서 죄책감같은 게 생기지는 않던?”

 

“죄책감이 뭐에요? 주저하지는 않았어요.”

 

“죄를 저지르면 마음속이 불편한 느낌 있잖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어?”

 

“아뇨, 전혀.”

 

“...그렇구나. 그러면 그때 무슨 기분이 들었니?”

 

“즐거웠어요. 그렇게 하면 토파즈가 걔랑 한동안 놀 수 없으니. 죽어서 영원히 같이 못 놀면 더 좋죠.”

 

이때 에버그린은 부정하고 싶은 진실에 마주쳐야만 했다.

 

“데만토이드, 너는 아마 사이코패스인 것 같구나. 아직 학교에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우리 함께 손잡고 병원에 들러볼까?”

 

“네, 알겠어요.”

 

에버그린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일 보자꾸나. 좋은 밤 되길.”

 

“네, 엄마도 좋은 밤 되세요.”

 

에버그린은 심리상담사였다. 그러므로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학자와 어머니로서 분리된 마음은 에버그린에게 충분한 변명을 가져다주었다.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 가 ‘역시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것은 오늘의 문답 때문이었다. 에버그린은 로돌라이트에게 데만토이드가 한 말을 전해주었다. 부부는 데만토이드를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방법을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다.

 

다음날, 에버그린은 심리상담가이자 에버그린의 대학원 동기인 미터나흐트 블라우에게 데만토이드를 데려갔다. 미터나흐트는 몇 가지 검사를 해보았다. 뇌파검사가 신기해서 데만토이드는 조막만한 발을 까딱거렸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 데만토이드와 차보라이트가 진료실로 갔다.

 

“에버그린의 말이 정확해요. 데만토이드는 나중에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우리 동생이 사이코패스예요? 그건 괴물 아니에요?”

 

미테나흐트는 고개를 저었다.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야, 사람! 그런 말은 데만토이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차보라이트.”

 

에버그린이 덧붙였다.

 

“사람이라서 우리가 잘 길러내야지. 괴물로 살지 않게끔. 미테나흐트,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 네 심리치료야 매주 다니게 한다면 잘될 거고.”

 

“아무리 훌륭한 심리상담사도 역할은 제한되어 있어. 가족의 협동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데만토이드는 오늘부터 일주일간 특별한 사건이 있다면 알려줘. 네 행동을 어떻게 교정해야 할지 알려줄 테니. 나머지 세 분께는 데만토이드에게 들려주면 좋은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유인물로 나눠드릴게요.”

 

데만토이드는 미테나흐트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지 않고 올바른 방식으로 살 수 있는지 배웠다.

 

데만토이드는 식사를 마쳤고, 가장 늦게 먹은 사람이 정리정돈한다는 집의 규칙에 따라 차보라이트가 설거지를 했다. 차보라이트가 그릇의 겉면을 만지며 뽀득함을 즐기고 있자, 데만토이드가 차보라이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윙크했다. 차보라이트는 벙긋 웃고는 자신과 차보라이트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컴퓨터실로, 최신 사양의 컴퓨터 두 대가 있었다. 원래 게임을 하며 쓰는 컴퓨터는 아니지만 형제들은 과제 5분 게임 55분을 하는 삶을 살아서 에버그린의 어이를 나가게 했다. 하지만 둘 다 성적이 낮지는 않은지라 에버그린은 과제를 하다 게임을 하며 쉬지, 게임을 하다 공부하려 쉬는 녀석들은 내 생전 처음 본다면서 잔소리 조금을 곁들일 뿐이었다.

 

오늘은 데만토이드와 차보라이트의 고난도 콘텐츠 공략의 첫날이었다. 데만토이드가 메인 힐러, 차보라이트가 서브 힐러를 맡았다. 고난도 콘텐츠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도전 후 성공하여 수많은 공략이 있었지만, 데만토이드는 파티원들에게 우리만의 공략을 알아보자고 하여, 파티원들은 수없이 실패해 가면서 맨땅에 헤딩 중이었다. 음성 채팅을 하고 있어서, 형제의 정겨운 악담 (‘힐 왜 그렇게 하냐, 데만토이드? 여기 묻히고 싶어?’, ‘차보라이트야말로 보호막 잘 둘러줘. 맨날 멍때리다가 보호막 감을 타이밍 놓쳐서 깡으로 힐하지 말고.’ ‘힐러 둘끼리 싸우시면 어떡합니까. 딜이 보스 몬스터가 아닌 두 분께 들어가고 있잖아요.’) 으로 인하여 킥킥 웃는 소리가 파티의 분위기를 즐겁게 돋웠다.

 

비록 오늘은 공략에 실패했지만, 생각보다 진도가 많이 나가 두 형제는 뿌듯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파티원들에 대한 뒷담을 깠다.

 

“원소 마법사 걘 뭐하냐. 딜을 스파게티 먹으면서 하나? 딜 측정 프로그램 써보니 딜이 아주 심연을 가던데?”

 

차보라이트의 말에 데만토이드가 반박했다.

 

“걔 움직이면서 딜 하는 거 힘들어해서 그래. 아직 딜 사이클도 정립되지 않았을 테고.”

 

“원소 마법사가 말뚝처럼 뿌리박고 딜하는 게 미덕인 것도 모르나, 쳇.”

 

그 말을 끝낸 직후 차보라이트가 검지를 올렸다.

 

“아, 근데 다들 맨땅에 헤딩으로 하니 탱커 대상 대미지 공격의 시점을 몰라서 대미지 경감기 늦게 쓰는 건 어쩔 수 없다 싶어. 딜러들 죽어서 부활 마법 쓰느라 마나 말라가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쾌적하게 클리어하고 장비 얻을 거면 맨땅에 헤딩 방식이 아니라 나온 공략을 보고 했어야지.”

 

“흠, 듣고 보니 논리적.”

 

“네 손위 형제의 논리력에 감탄해라, 후후후.”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좀 당당하게 행동해 봐.”

 

“그건 못 해 먹겠어! 그리고 나 자게 나가!”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가 던진 베개에 맞고 키득거리면서 나갔다.

 

데만토이드가 성가대 연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자,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데만토이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집안사람들을 보았다.

 

“왜요? 무슨 일인데 다들 얼굴이 우중충해요?”

 

차보라이트는 말없이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뒤셀도르프 대성당의 한 사제가 수년간 어린 신도들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습니다. 피의자는 입을 굳게 닫으며 수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합니다.”

 

피의자의 모습은, 그들이라면 한눈에 알아볼 풍채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삼촌이군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도 그게 궁금해 미치겠다. 지금 당장 달려갈까?”

 

로돌라이트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로돌라이트의 전화가 울렸다.

 

“예, 어머니. 가족회의요? 지금 당장요? 네, 알겠습니다.”

 

“뭐라고 하세요?”

 

“얘들아. 여보. 당장 짐 싸자. 어머니 집 안에서 가족회의를 연단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데만토이드와 차보라이트와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는 각자의 캐리어에 자기 짐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속도로 짐을 사고 트렁크에 던져넣은 네 사람은 차에 후다닥 탔다. 로돌라이트가 운전석, 에버그린은 조수석에 탔다. 운전 면허는 둘 다 있었다. 한쪽이 운전 못하는 경우에는 위치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문이 완전히 닫혔는지 로돌라이트가 확인한 후, 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빠, 제발 좀 속도 좀 낮춰요. 저는 하나님께 가고 싶지만 이렇게 일찍 가고 싶은 건 아니라고요!”

 

차보라이트의 절규는 아버지의 고함으로 무산되었다.

 

“지금 이렇게 빨리 안 가면 내가 어머니 손에 간다!”

 

그 말을 듣고 로돌라이트를 제외한 모두는 성호를 그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도착한 할머니 알만다이트의 저택은 언제 봐도 위엄이 굉장했다. 듣기로는 알만다이트는 친적을 모아 대가족으로 살고 싶었는데, 큰아버지인 야그가 독립해 나간 뒤로 막내인 로돌라이트도 독립했다고 한다. 하기야 호랑이 같은 할머니한테 잡혀서 화려한 삶을 사느니 단출하더라도 아내와 눈치를 보지 않고 신혼 생활을 즐기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데만토이드는 생각했다.

 

집에 들어서니 살벌한 눈빛을 한 알만다이트가 제일 상석에, 나머지 친척들은 긴 테이블에 각자 얼굴을 맞대고 함께 있었다. 로돌라이트는 자신이 집이 멀기야 하지만 어머니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는지 호통을 칠 것 같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다 왔느냐? 그러면 가족회의를 시작한다. 회의 주제는 너희들도 알겠지. 토파졸라이트의 처리에 대한 문제다.”

 

야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해를 가한 아동의 양친에게 합의금을 주어 조용히 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성추행 정도면 그렇게 큰일도 아니고, 다들 잊고 지나가면 괜히 평지풍파 일으키는 꼴이 아닐까 우려스럽습니다.”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나더니 몇 명이 야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돌라이트는 화난 기색이었다.

 

“형님. 나는 성직자가 아니지만 아이들이 왜 그자한테 꼼짝할 수 없었던지를 이해합니다. 처음에는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군것질거리로 아이를 끌어들였겠죠. 보상과 그로 인한 강화가 일어났을 수도 있겠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성직자이니, 아이들은 잘못된 것도 잘못된 거라고 인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시는 성직자 중에서 아동 성추행범이 나오지 않게끔 집안에서 제명합시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알만다이트는 매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어느 쪽이 덜 가문에 먹칠할지 선택할 수밖에 없겠군. 더 의견 낼 사람?”

 

모두가 조용했다.

 

“없으면 투표하지. 야그가 맞는 것 같으면 왼쪽 버튼을, 로돌라이트가 맞는 것 같으면 오른쪽 버튼을 눌러라.”

 

친척들은 버튼을 눌러 투표했다. 이윽고 결정이 내려졌다. 로돌라이트의 의견이 아주 약간 더 우세했다. 로돌라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야그를 바라보았다. 야그는 입을 열었다.

 

“네 의견대로 해서 잘 될지가 모르겠다. 나중에 형님 말 따를걸, 하고 후회하지나 마라.”

 

“투표로 결정한 사안에 이러쿵저러쿵 대지 마라, 야그. 이제 무를 수 없는 걸 알고, 로돌라이트 너도 상황에 따라 협력해야 할 일이 좀 생길 거다.”

 

“예, 당연하지요, 어머니.”

 

“그러면 다들 여기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 이 늦은 밤에 차 끌고 가면 졸음운전 한다.”

 

데만토이드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잠을 이룰 수 있을지 궁금했다.

 

데만토이드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말이 맴돌다가 사라졌다. 대신 이전에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가 조심스럽게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데만토이드. 네 작은아버지는 예전부터 어린아이들에게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많았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잘 공감하지 못하고, 집단 따돌림을 주도한 적도 있었어.”

 

“로돌라이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그 사람이 반사회성 인격장애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는 너처럼 심리상담도 받지 않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알만다이트에게 매를 맞으면서 살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니, 결코 그와 밀폐된 공간에 둘이 있지 말렴.”

 

“네, 알겠어요.”

 

데만토이드의 회상이 끝나자, 조용히 문을 열고 차보라이트가 복도로 나왔다. 데만토이드는 속삭였다.

 

“차보라이트, 잠이 안 와?”

 

“응. 아무래도 낯선 곳이라 잠이 안 오는 모양이네.”

 

“실은 나도 잠이 안 와.”

 

“데만토이드도 여기가 낯설어서 잠이 안 와?”

 

데만토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잠시 침묵을 지키자, 차보라이트는 데만토이드의 감정에 공감해 보며 그의 입 속에 숨은 말을 꺼냈다.

 

“너도 토파졸라이트처럼 될까봐 걱정하는 거지?”

 

“흐음,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긴 하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도.”

 

“괜찮아. 누구나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다는 말이지.”

 

“걱정하지 마. 너는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테나흐트 선생님께 매주 상담도 받고 있잖아. 네가 하지 않고자 한다면 충분히 안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각도 같을 거야. 널 믿는 거지.”

 

“안 하고 싶어.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는 거니까.”

 

“그래. 그러면 돼.”

 

차보라이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작은아버지는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글쎄. 상대는 아이고 자신은 어른이니, 자기에게 힘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소아성애자일지도 모르고. 사제라서 연애를 못 해서 성적 욕구를 풀고 싶었는지도.”

 

“그렇구나. 차보라이트는 토파졸라이트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거야?”

 

“악에 대해 이해와 공감이 필요할 때는 오로지 그 악을 저지를 만한 내면을 경계할 때뿐이라고 생각해. 그건 네 주변의 사람들이 도와줄 거야. 너는 그걸 종합해서 네 의견을 만들면 돼.”

 

“언제나 든든하네. 나는 이만 자러 갈게.”

 

데만토이드와 차보라이트는 가볍게 포옹했다.

 

“잘 자, 데만토이드.”

 

“고마웠어, 차보라이트도 잘 자.”

 

데만토이드는 가볍게 오컬트 책을 읽는 중이었다. 이곳은 카셀부르크 대학의 도서관. 뒤셀란트 중앙 도서관의 대학교 판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수많은 장서량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데만토이드가 서가의 반대편으로 돌자, 낯익은 눈동자가 서가의 틈새로 그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데만토이드?”

 

“그래. 나는 미래의 너야. 네게 인생을 뒤바꿀 힘이 필요해서 마법 책을 썼어.”

 

“아니 무슨, 이게 뜬구름 잡는 소리야?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그렇다 치고, 세상에 마법이 존재해? 마술이 아니라 마법이?”

 

“응. 이 책을 읽고 공부하면 너도 마법사가 될 수 있어.”

 

데만토이드는 데만토이드에게 서가의 틈새로 책을 밀어 넣었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자신이 건네는 마법 책이라니, 효과가 없다면 놀라울 지경이겠어.”

 

“날 믿어봐. 너는 자신을 믿잖아?”

 

“믿고말고.”

 

데만토이드는 미소했다.

 

“그러면 용건은 끝났지?”

 

“잠깐만, 아직 안 끝냈어.”

 

“뭔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해줘.”

 

데만토이드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표정은 딱딱한 무표정이었다.

 

“토파즈와 갈라설 수가 있어. 부디 그 아이와 잡은 손을 놓지 말아. 그리고…”

 

데만토이드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엄마 아빠한테 잘해줘.”

 

“그거야 맨날 잘해주고 있잖아.”

 

“그래, 알지. 그러니 더욱 너의 다정함을 그분들께 나눠줘.”

 

“대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미안해. 그건 못 알려줘. 내가 겪은 일이 네가 겪을 일과 차이가 날 수도 있어.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실험하고 싶지 않아.”

 

“알겠어. 이해했어.”

 

“힘내. 좋은 사람들이 네 곁에 있어 주길 바랄게.”

 

“나도 마찬가지야.”

 

“안녕.”

 

“그래, 안녕. 잘 지내.”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은 서로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데만토이드가 품에 안은 데만토이드가 먼지처럼 분해되어 사라졌다.

 

‘책 제목이 보석의 마법이구나. 마음에 드네.’

 

데만토이드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소중하게 책을 가방에 넣었다. 기대로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집에 도착한 데만토이드는 설거지를 하던 로돌라이트에게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오늘은 뭐했니?”

 

“오르간 악보를 좀 보고, 책도 읽다 왔어요.”

 

“오르간은 꽤 어려운 악기라던데, 잘 배운다면 내 자식이 더 멋있어 보이겠구나.”

 

“제가 좀 멋지긴 하죠.”

 

로돌라이트는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밝은 미소를 띠었다. 로돌라이트가 다시 설거지를 시작하자 데만토이드는 그를 뒤로하고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해먹에 누워서 ‘보석의 마법’ 책을 읽기 시작했다.

 

‘치유 마법? 이거 꽤 쓸모 있겠어. 소소하게 다친 피부 치료할 수도 있겠고. 그런데 지금은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가 없다니, 그렇게 어려운 건가?’

 

데만토이드는 자신이 이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얻을 성취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보석의 마법은 보석을 가지고 시전해야 하는구나. 하긴 고문헌에도 보석은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있었지.’

 

데만토이드는 보석 거래 사이트를 뒤져서 보석 데만토이드를 찾아보았다. 정육면체의 결정이 모암 없이 아름답게 가공된 원석을 주문했다. 해외 배송이라 1~2주는 걸려야 받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데만토이드는 배송을 기다림 틈틈이 책을 읽고 손동작 같은 세부 사항을 암기했다.

 

며칠 뒤, 토파졸라이트가 간 유치장에서 오늘부터 면회를 허용한다는 안내 전화가 걸려 왔다. 다들 차갑게 무시했지만, 데만토이드는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기에 홀로 면회를 나가기로 결심했다.

 

“괜찮겠니? 혼자 가기에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데만토이드는 양친과 차보라이트에게 고개를 저었다.

 

“철창에 갇힌 사람이 뭘 할 수 있겠어요. 전 전혀 무섭지 않아요.”

 

그 말을 듣자, 모두가 인사해 주었다.

 

“조심해서 잘 다녀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데만토이드는 버스를 타고 집에서 떠나 유치장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경찰에게 신분증을 내밀며 말했다.

 

“저는 데만토이드 그라나트로, 수감자인 토파졸라이트와는 작은아버지와 조카의 관계입니다. 그가 갇힌 곳으로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경찰이 대답했다.

 

“예, 들어오십시오. 돌아가면 다른 경찰이 안내해 주실 겁니다.”

 

건물 안의 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데만토이드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유치장으로 가자, 철창 안에 있는 토파졸라이트와 만날 수 있었다.

 

“용건이 뭐냐?”

 

“할머니께서 소집한 가족회의의 결과가 나와서요. 당신을 가문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답니다.”

 

토파졸라이트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내 가족관계등록부상에는 여전히 내가 알만다이트의 자식으로 나올 텐데. 하나 마나 한 소리지.”

 

“과연 그럴까요? 철창 속에서 ‘보호’를 받으니, 할머니가 이제야 만만하게 느껴지나요?”

 

“그래. 부정하지는 않으마.”

 

이번에는 데만토이드가 피식 웃었다.

 

“범죄자다운 허세네요.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요.”

 

토파졸라이트는 데만토이드의 말을 듣고는 미친 듯이 웃었다.

 

“너는 범죄 안 저지를 것 같냐? 너도 나랑 똑같은 괴물이야. 너는 어려서 네 심연에 무슨 악마가 사는지도 모르나 보지?”

 

데만토이드는 여유만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제 심연에 악마가 산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그에게 먹이 주기를 거부하고, 제 종교와 제 소중한 사람들이 합심해서 이 악마에게 ‘수갑’을 채워놓았죠.”

 

데만토이드는 토파졸라이트가 썼던 ‘수갑’에 강세를 두고 이야기했다. 토파졸라이트는 예상대로 고래고래 그에게 욕설하며 삿대질했다. 그것을 본 무장 경찰이 저지하며 그가 감금된 곳으로 끌고 갔다.

 

일주일 뒤, 데만토이드 가넷의 원석이 배달 완료되었다. 데만토이드의 눈 색같이 연녹색으로 찬란한 정육면체 결정을 잘 드러나는 몹시도 아름다운 원석이었다. 그가 “빛이 있으라!”라고 다락방에서 속삭이자, 원석이 데만토이드의 손에서 30센티미터쯤 위로 떠오르며 빛을 냈다. 데만토이드는 진짜 마법을 발견했다며 뛸 듯이 기뻐했다.

 

“이것 봐, 토파즈. 내가 진짜로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되었어!”

 

“아니, 세상에! 원석에 LED라도 넣었어?”

 

토파즈는 너무나도 놀라며 떠오른 원석 위아래를 헛손질했다.

 

“땡! 그런 거 없지롱. 세상에는 마법이 존재해.”

 

데만토이드는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단짝 친구 토파즈에게 자랑했다. 토파즈의 양친은 유일신 세루사이트를 믿었지만, 토파즈는 믿지 않아 안심하고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토파즈와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에게도 이를 보여주었다. 세 쌍의 눈에 마법의 빛이 밝히는 놀라운 불빛이 별처럼 박혔다.

 

데만토이드가 신나게 마법을 독학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데만토이드는 시각이 뒤틀리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자전거를 타며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자신의 앞에는 낯익은 길 대신 낯선 티룸이 있었다. 티룸의 이름은 라피스 루멘으로, 라틴어로 보석과 빛이라는 뜻이었다. 데만토이드는 이에 운명을 느끼고 티룸 안으로 들어갔다.

 

티룸에는 각자 멋스럽게 꾸민 마법사들이 모여있었다. 티룸은 정말 커서 많은 인원의 마법사를 수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마법으로 확장된 공간인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티룸에서 마법사들은 마법사가 사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지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사회자가 데만토이드를 불렀다.

 

“데만토이드 그라나트. 아직 마법명이 없어 사회의 이름으로 부르는 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데만토이드는 드물게 더듬거렸다.

 

“네? 네. 무얼 말하면 될까요?”

 

“신입 마법사의 기운이 느껴져 그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봄날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데만토이드 그라나트에게 질문합니다. 그대는 이 의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데만토이드는 힘겹게,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침착해 보일 말을 꺼냈다.

 

“아, 네. 제 생각은 해가 없는 마법, 즉 빛 마법 같은 것이나 물을 끓이는 등 해가 없는 마법부터 보여주는 게 어떨지 하고 생각합니다.”

 

“다른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여름밤의 세레나데’가 데만토이드 그라나트에게 반대 의견을 냅니다. 우리는 해일을 부르고, 비를 내리고, 불로 태워버리고, 지진을 일으킬 힘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높은 수준의 마법사만이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 주문이 있음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습니다. 또한, 과거 16~17세기 무렵 발생한 마법사 사냥이 종교계의 극단적인 파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티룸에서 차가 식어갔다. 데만토이드는 다른 사람들을 흘긋흘긋 보고는 자신 또한 차를 마시지 못했다. 하지만 차의 맛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 이 티룸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찬반투표를 하겠습니다. 왼손을 들면 데만토이드 그라나트의 의견이, 오른손을 들면 ‘여름밤의 세레나데’의 의견이 다수결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데만토이드는 침착하게 투표의 결과를 지켜보았다. 사회자는 사람의 수를 세었다.

 

“데만토이드 그라나트, 51표. ‘여름밤의 세레나데’는 49표. 이로서 천천히 사람들에게 마법사의 존재를 알려 나가겠다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났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헤어지기 전에 잠시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다. 데만토이드 그라나트, 자신의 소개를 간단히 하겠습니까?”

 

“네. 저는 뒤셀부르크에서 태어난 20세의 데만토이드입니다. 저는 뒤셀란트 대학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잠잠해졌다.

 

“여기에서 제가 더 할 게 있나요?”

 

“마법명을 지으셔야 하고, 마법사의 선서를 하셔야 합니다.”

 

“마법명은 왜 필요한가요?”

 

데만토이드는 사회자의 순간적으로 지나쳐 간 공포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유사시에 우리의 개인정보를, 심하면 학살을 막기 위해 쓰는 가명입니다.”

 

“안전장치로군요. 제가 쓸 마법 명은…”

 

데만토이드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어감 예쁜 단어 중 한두 개를 고르느라 고심했다.

 

“‘사랑으로 연마된 자’로 하고 싶습니다. 가능한가요?”

 

“예, 괜찮습니다.”

 

데만토이드는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사랑으로 연마된 자’, 데만토이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다음으로 ‘사랑으로 연마된 자’의 마법사 선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는 데만토이드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데만토이드는 쓰여있는 말을 결연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선서. 나, ‘사랑으로 연마된 자’는 다음과 같이 선서합니다.

 

첫째. 마법으로 필수적인 욕구가 아닌 사욕을 채우지 않는다.

 

둘째. 전시가 아닐 때 일반인에게 상해를 가하지 않는다.

 

셋째. 마법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금지한다.

 

저는 마법사의 명예에 대고 이를 굳게 선서합니다.”

 

“이제 모든 식이 다 끝났습니다. 모두 조심하며 들어가십시오.”

 

마법사들은 열화와 같이 크게 손뼉을 치고는 한 줄로 서서 티룸을 나갔다. 데만토이드는 식어버린 차를 마시고는 티백을 너무 오래 우려 쓴맛을 느껴 에퉤퉤하며 마지막으로 나갔다.

 

데만토이드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자를 잡아 토파졸라이트가 먹칠한 가문에 좋은 소문이 돌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세계와 세계가 잘못 연결되어 이세계의 마물이 이 세계로 침입해 왔기 때문이었다. 마물은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아 인류는 큰 피해를 보았다가, 마법사들의 등장으로 전쟁의 양상이 인간들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이때 마법사의 존재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고, 데만토이드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치유 마법을 사용하여 전쟁 초반에 큰 활약을 했다. 치유 마법사는 방어계 마법사와 공격계 마법사보다 훨씬 더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는 막내가 며칠째 돌아오지 않자, 실종 신고를 했다. 실종 신고의 결과는 데만토이드는 지금 불가사의한 힘을 사용하는 의문의 단체와 함께 더 불가사의한 괴물들과 전장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로돌라이트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더 가슴을 벌렁거리게 할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은 알만다이트 그라나트.

 

“예, 접니다. 예 저도 데만토이드의 거취를 알아내었습니다. 당장 데만토이드에게 전보를 부치겠습니다. 네. 이르면 내일, 늦으면 모레, 아니, 죄송합니다. 요청하신 대로 꼭 내일 받아볼 수 있게끔 하겠습니다. 네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차보라이트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말을 엿듣다가 방문이 벌컥 열리자, 식겁했다.

 

“아이고, 깜짝이야. 차보라이트. 남의 통화를 엿듣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지 않니?”

 

“죄송해요. 저도 데만토이드가 무척 걱정되는데 제 전화는 받지도 않고 그래서…”

 

“네 동생이 이세계의 마물들과 싸우러 갔다는구나. 그래서 가족회의를 소집할 예정이야. 여보! 차보라이트! 둘 다 짐 싸자!”

 

에버그린과 차보라이트는 익숙해진 솜씨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로돌라이트는 세 사람 분의 짐을 트렁크에 헐레벌떡 달려가 던져놓고 저번처럼 최고속 경쟁 상대가 시간인 공포의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전보에는 간단한 문장 한 줄을 썼다.

 

[데만토이드. 당장 네가 쓰는 능력에 대해 알만다이트께 설명할 것]

 

알만다이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로돌라이트와 에버그린을 쏘아봤다.

 

“전보는 보냈겠지?”

 

“예, 보내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알만다이트는 전보가 올 때까지 석고 조각처럼 미동이 없었다.

 

“데만토이드의 답신이 왔습니다.”

 

“읽어라.”

 

“...[저는 마법을 너무나도 재미있게 생각해서 동료 마법사들과 함께 세상에서 활약하기로 했어요.]”

 

“...”

 

“...”

 

“...... .”

침묵이 지나간 다음, 놀랍게도 바로 데만토이드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은 맑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왜 여기 다 모여있어요?”

 

알만다이트는 벌컥 화를 냈다.

 

“네 녀석 때문이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악마 스피넬이 가르친 마법을 어떻게 여러 성직자를 배출한 그라나트 가의 일원인 네 녀석이 할 수 있냐는 말이다!”

 

데만토이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마법이 악마에게서 유래된 건 사실이지만, 그 힘을 우리가 선하게 사용하면 가문의 영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도 그러고 있고요. 할머니께서도 신문 보시지 않나요? 인터넷 뉴스 사회면은 어느새 토파졸라이트의 아동 성추행보다는 제 영웅적인 활약상을 담은 기사가 훨씬 더 많아요.”

 

이세계의 이 세계 침입은 시민들에게는 재앙이지만 영웅에게는 무기나 다름없고, 자신 또한 영웅이라고 데만토이드는 생각했다.

 

“그래. 알겠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대신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또한 앞으로 행여 우리끼리의 전쟁이 발생할 때 네가 마법사들의 편을 들면 너 역시 가문에서 제명한다.”

 

데만토이드는 토파졸라이트의 심정을 이해해 버렸다. 가문에서 제명한다는 말이 타격감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설마요. 우리 쪽에도 규칙이 있으니, 자정작용도 있겠죠. 전쟁이라니, 지금 무슨 2차 세계대전 때도 아니고요.”

 

“그건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부디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네, 말씀 주신 것들을 그 사람들한테 전달하도록 노력할게요.”

 

하지만 종교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유일신의 종교는 유일한 종교답게 기세가 너무나도 세었고, 대부분 사람은 현혹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세계와의 문이 닫히고 몬스터까지 전멸해 이 세계에 평화가 잠시 오는 듯했으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와 종교계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심야에 마법 물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의 유리 벽이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자, 마법사들은 16~17세기에 자행된 마법사 사냥을 두고 ‘제2의 마법사 사냥은 벌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유롭고 당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의견을 내놓았다.

 

두 세력은 서로를 힐난하며 냉전을 시작하다가, 이윽고 ‘루안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보석의 마법에 필요한 귀금속과 보석을 판매하는 금은방에 쳐들어온 강도를 우발적인 마법으로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마법사들은 학살당할 위기를 넘기기 위해 이 상황을 마법사-종교인 전쟁으로 이름을 짓고 전쟁을 선포했다. 일각에서는 아무리 마법사들의 힘을 두려워해도 그렇지, 어떻게 종교인들이 손에 성경 대신 총을 들었냐며 비판했으나, 그런 자들은 의문사를 당해 세상에서 잊혔다. 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신입 마법사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출판된 ‘보석의 마법’ 책을 정리해 모아 세계 곳곳에서 불태우는 의식을 거행했다.

 

마법사 측에서도 성경을 불태우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믿는 마법사’들의 반발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일부는 자신들을 적대하는 종교를 믿으며 어떻게 마법사를 자칭할 수 있냐며 격분했지만, ‘믿는 마법사’들은 자기 삶에 종교는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라 떼어놓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데만토이드 또한 ‘저는 사이코패스로 태어났으나, 종교의 도덕관념을 받아들였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기에 올바른 사람으로 클 수 있었어요.’라고 반박했다.

 

전선의 상황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수가 적은 대신 한 명 한 명의 화력이 좋았으나, 종교계 측의 군인 중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대의를 위해 아낌없이 내던져 가며 싸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신도와 사제들은 자기 집이나 성당을 개방해 야전치유소로 사용했다. 비축 자금도 종교계 쪽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이렇듯 종교인들 쪽이 약간의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마법사 군이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로, 마법사 측은 지금이 아니면 마법사의 미래는 영영 사라질 것이라는 필사적인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벽장’ 안에 있기를 원하는 마법사조차 얼굴을 가리고 전투하는 지경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어느 날, 데만토이드가 있는 막사로 토파즈가 찾아왔다. 토파즈는 종교계 군복을 입고 있었다. 달린 계급장에는 그가 정비병이라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 군복을 보니 나와 적군이 된 것 같은데.”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어. 네게 할 말을 전하기 위해서.”

 

“무슨 할 말?”

 

데만토이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종교 군에 있는 내 오빠가 오늘 죽었어. 그런데 데만토이드, 네 이름을 저주하며 죽어갔어. 혹시 네가 오빠에게 중상을 입혔어?”

 

데만토이드는 자신의 군의원 복을 툭툭 치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나는 후방에서 치유 마법 쓰고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느라 전선까지 가서 네 오빠를 죽일 상황이 아니었어.”

 

그러나 토파즈는 울면서 데만토이드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오빠가 네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 죽을 리가 없어. 너는 직접 사람을 죽이는 대신 마법사들을 치유해서 그 사람이 우리를 죽게 하고 있잖아? 너도 살인자야!”

 

데만토이드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무슨 사람이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논리가 비약적이야? 도대체 무슨 말을 원하는 거야. 네 슬픔은 번지수가 잘못됐어. 네 오빠보고 싸우라 한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야 그 사람보고 네 오빠의 죽음에 책임을 지라고 말하는 게 맞지 않아?”

 

하지만 이미 토파즈는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우리 오빠를 죽였어. 우리 오빠 살려내!”

 

데만토이드는 차갑게 말했다.

 

“너도 내 장애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내겐 없는 죄책감같은 감정을 강요하지 마.”

 

토파즈는 계속 울면서 데만토이드의 두 손을 잡은 채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 오빠 살려내. 너, 치유 마법에 해박한 것 같은데,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못해?”

 

데만토이드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못해. 인간의 영역이 아냐. 그리고 이 불유쾌한 담화를 더 이상 끌어나갈 마음도 없어.”

 

데만토이드는 데만토이드 원석을 꺼내 띄우며 손가락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러자 토파즈는 투명한 마법의 실로 포박되어 둥둥 떠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날 돌려보내 줘!”

 

“안 미안하지만 너는 여기 제 발로 못 나가. 포로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감수한 거 아니었어?”

 

데만토이드는 의무병 막사에서 나와 포로수용소에 토파즈를 사뿐히 내려놓고 경비병들에게 일렀다.

 

“적군 소속 정비병이에요. 이름은 토파즈 핑크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데만토이드는 쌀쌀맞은 표정을 토파즈에게 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무병 막사로 돌아갔다. 그의 등 뒤에서 토파즈가 여기서 나가겠다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토파즈는 그에게 짝사랑 대상이었지만, 데만토이드는 그를 ‘자신의 사람’ 목록에서 지워야 하는 날이 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사람을 필요에 따라 사귀고 상대방이 나를 미워하게 되면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토파즈와의 사실상 절교 선언은 그의 가슴을 꿰뚫은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종교계와의 전투 양상이 달라졌다. 마법사군 신입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바가 있었다.

 

“영혼이 불에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육체가 아닌 정신이. 그래서 더 힘들었어요.”

 

데만토이드는 그 마법을 ‘신성력’이라 이름을 붙였다.

 

“아마도 유일신께서 이 전쟁에 대해 힘을 행사하시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종교계 쪽에서 좋아 날뛰겠는걸요. 우리 쪽의 피해를 감소할 만한 마법을 개선해야겠어요.

 

“그런데 그라나트 님, 그라나트 님은 치유 마법을 쓰잖아요. 저들 중에서도 치유 마법 비스무리한 걸 사용하던데, 차이점이 뭔가요?”

 

“아마 제가 쓰는 치유 마법과 저들이 쓰는 치유계 신성력은 같을 거예요. 저는 종교의 신도이면서 마법사이기 때문에 치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앞서 자신들의 존재를 밝힌 ‘믿는 마법사’들은 모두 치유 마법을 쓸 수 있겠죠?”

 

“이론상으로요. 한 번 봅시다.”

 

데만토이드는 신성력에 피해를 당한 마법사와 함께 평소 자신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마법사들을 한 명 한 명씩 조사해서 치유 마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은 후방의 의무병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총 여섯 명이었다.

 

“저까지 합하면 딱 일곱 명이군요. 안정감이 듭니다. 우리 같이 상처 입은 마법사들을 치료해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도록 해요!”

 

데만토이드의 말에 모두가 큰 손뼉을 쳤다.

 

얼마 뒤, 뜻밖의 사람들이 입대했다.

 

“안녕하세요… 차보라이트 그라나트입니다. 저는… 어, 그러니까, 아군에게 마력 탄을 쏘아 전투 환경에서, 음, 즉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루벨라이트 투어멀린입니다. 저는 종교계 측에서 실전에 사용하려 했던 거대 폭격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발명한 자입니다. 제가 만든 거대 폭격기를 타고 흰 백기를 꽂은 채 여러분께 망명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데만토이드는 반가운 사람을 향해 기뻐하며 소리쳤다.

 

“차보라이트! 어쩌다가 여기에 오게 된 거야. 잘 지냈어?”

 

차보라이트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신문이랑 뉴스에서 하루가 멀다고 보이는 게 네 활약상인걸. 물론 할머니의 표정은 썩고 있지만 알 게 뭐야.”

 

“부모님은? 뭐 하신대, 잘 지내셔?”

 

“귀여운 막내가 마법사가 되어 입대한다는데 얼마 안 되는 치유 마법사라고 하길래 기특해하고, 걱정도 많이 하더라. 그래서 부모님들 둘 다 우리한테 부디 살아서 돌아와달라는 부탁을 했고.”

 

“암, 엄마 아빠가 기다리시는데 살아서 돌아가야지.”

 

데만토이드는 자신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탕탕 쳤다.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나저나 루벨라이트도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저 거대 폭격기를 타고 온 특별한 일이 있을까요?”

 

“저는 원래 기계공학 전공을 하던 대학원생이에요. 종교를 갖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위에서 의무병과 환자들이 있는 막사를 폭격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법을 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양친은 저를 버렸어요. 그래서 폭격기를 끌고 이곳에 온 거에요.”

 

그들은 악수를 주고받았다.

 

“대단해요. 큰 용기를 내신 분들이군요. 숙소 막사는 저 따라오면 있으니 앞서서 걸을게요.”

 

“네, 알겠어요.”

 

두 사람이 오자 전선은 쭉쭉 잘 밀렸다. 차보라이트의 마력탄은 아군을 치유하고 적군의 생명을 앗아갔다.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에게 물었다.

 

“차보라이트. 혹시 마법 배웠어? 내가 ‘보석의 마법’ 책을 준 기억이 없는데.”

 

“아, 그래, 순수한 마력을 탄으로 만드는 것까지는 나도 할 수 있더라. 난 원래 직업군인이 될 예정이었잖아. 지금도 별반 차이 없고.”

 

“차보라이트는 마법사의 회합을 가진 적이 있어?”

 

“그래. 내가 마력탄을 만들 수 있게 된 게 그들 덕분이었으니까.”

 

데만토이드는 재미있는 상상을 했다.

 

“그럼, 차보라이트의 마법명은 뭐야?”

 

차보라이트는 창피해하며 얼굴을 가렸다.

 

“왜 그러는데, 궁금해지잖아!”

 

차보라이트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간신히 답했다.

 

“마… 마탄의 사수.”

 

데만토이드는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이름에 폭소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루벨라이트가 컥… 컥… 소리를 내는 것을 마지막에서야 눈치챈 차보라이트는 루벨라이트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루벨라이트는 놀라며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에… (딸꾹) 앞으로는 (딸꾹) 다른 분의 마법 명을 듣고 (딸꾹) 웃어젖히지 않을게요. (딸꾹)”

 

데만토이드는 아까보다 더 크게 웃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두 사람이 오자 전선은 뒤셀부르크를 향해 쭉쭉 잘 밀렸다. 마법사 진영은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 에버그린과 절연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던 외할아버지인 세룰리안 블루가 사돈인 알만다이트를 인질로 삼아 데만토이드가 속한 마법사 군을 멈추려 한 것이었다.

 

[알만다이트의 목숨을 지키고 싶다면 너희 전원 모두 항복하라.]

 

그걸 보고 데만토이드는 차갑게 웃었다.

 

“가문에서 제명당한 상황인 나와 차보라이트가 알만다이트를 안 살리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니, 외조부님 정말 실망이에요.”

 

그러고는 손에서 전보 종이를 불태웠다.

 

마법사들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성안으로 들어갔더니 예상대로 종교군이 불태운 것은 알만다이트의 옷을 입힌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데만토이드는 실컷 비웃었다.

 

때마침 종교계에서 독특한 ‘영웅’이 떠올랐다. 데만토이드와 차보라이트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토파졸라이트 그 작자군요. 아동 성범죄자.”

 

루벨라이트도 그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가 겪은 일인 것처럼 화냈다.

 

“종교인이면 누구나 아는 그런 사람인가요? 그런데 그런 성범죄를 저질렀어요?”

 

“네, 어린아이가 읽을 만한 종교 서적을 많이 쓴 사람이에요.”

 

차보라이트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음, 저, 토파졸라이트가 성추행한 122명의 아이 중에서 다섯 명은 서로 동반 자살을 했어요. 주민이 긴급 구조 번호로 신고했다고 하지만, 음... 그 아이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사망해 버린 채였어요.”

 

데만토이드는 잠시 미간을 좁히고 말았지만 루벨라이트는 책상을 쿵 하고 주먹으로 쳤다. 의외의 모습에 데만토이드는 놀라서 눈을 끔벅였다.

 

“고약한, 정말 고약한 인간 같으니라고! 당장 내일 전장에서 그 자식을 찾아내서 폭탄을 퍼부을 거예요.”

 

데만토이드는 솔직하게 두 사람에게 물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잖아요. 그 아이들의 경우에는 어디가 잘못된 거죠?”

 

루벨라이트는 이 사이코패스 치유 마법사의 존재를 오늘 알았기에 깜짝 놀랐지만, 차보라이트는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 제가 설명할게요. 제 동생이 장애가 조금 있거든요.” 라고 루벨라이트에게 말하고는, ”데만토이드. 사람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죽는 것을 무서워해. 죽기까지의 고통, 죽은 이후의 미지에 대한 공포, 남겨진 주변인들에 대한 걱정같이 좋지 못한 감정도 생기겠지. 아이들이 그 나이에 죽음에 대한 개념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아왔던 날보다 살아갈 수 있었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건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이야.”

 

데만토이드는 이해했다.

 

“응, 설명 고마워.”

 

“아니야. 내가 세상의 모든 감정을 내게 가르쳐주지 못한다는 게 미안할 뿐이야. 그래도 내가 좋지?”

 

데만토이드는 환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차보라이트 너무 좋아!”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의 품에 따뜻하게 안겼다. 둘이 열 살 터울이 있어서 데만토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차보라이트를 의지했고, 차보라이트는 데만토이드를 아이처럼 대했다.

 

“보기 좋은 우애네요. 그러면, 우리 오늘부터 군용 식량 같이 먹을래요?”

 

“좋아요!”

 

차보라이트의 아군은 원거리에서 체력이 떨어져 위험한 아군을 저격하여 치유의 힘이 담긴 마력탄을 쏘았다. 동시에 적군의 생명은 살뜰히 앗아갔다. 루벨라이트가 모는 폭격기는 범위가 넓고 폭탄의 폭발력도 커서, 한 군단을 한 번씩 불태웠다. 루벨라이트와 차보라이트의 활약으로 마법사 군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때맞춰 토파졸라이트는 무혐의로 수사가 종결되었다. 본래 아동 대상 성추행은 실형을 선고받으나, 경찰에 종교계가 압력을 넣은 결과로, 집행 유예 20년을 선고받게 한 것이었다. 자살한 아이들의 유가족은 뒤셀부루트 대법원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매일 같이 시위했다. 그러나 경찰이 무응답하자 뒤셀란트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 중에는 전쟁에 나갔다가 제대하거나 휴가를 온 마법사 군이 섞여 있어,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민 중 한 명이 불의에 맞서 세계를 넘나드는 마법 경찰 세오리프에게 연락하여 이 사태를 해결해달라고 청원한 것이다. 세오리프는 오히려 늦게 파악해서 죄송하다며 모조리 마법사로 구성된 군단 하나와, 과거 세오리프와 함께 일하고 결국 전설의 영웅이 된 유클레이스를 데려왔다.

 

“이 세계에서 지적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는데, 혹시 종족이 어떻게 되십니까?”

 

병사가 묻자 유클레이스는 답했다.

 

“엘프라네.”

 

“과연, 고전대로 훤칠하십니다. 많은 활약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엄호할 테니.”

 

“그렇게 하세나.”

 

마법사와 유클레이스는 전선에 가기 전 소소한 담화를 나누었다.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703세라네.”

 

“그 나이에도 창창하신 모습이니 경외감이 솟습니다.”

 

“경외감은 나와 그대들이 호흡을 맞추어 함께 싸워보고 나서 느끼게나.”

 

유클레이스의 겸손하다면 겸손한 대답이 돌아오자, 마법사들은 옅게 미소했다.

 

유클레이스는 팔라딘으로서 아군 보호와 피해 경감, 적군의 자신에 대한 시선 집중 마법과 날이 갈수록 위력이 솟아오르는 강타로 특별한 활약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유클레이스는 성기사같은데 왜 신을 믿지 않고 마법사들에게 협력했어요?”

 

“내 세계의 팔라딘은 신을 믿지 않아도 되어서 신을 모시지 않았다.”

 

데만토이드의 물음에 답한 유클레이스는 그리움에 찬 눈빛으로 별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곳은 유클레이스의 세계보다는 훨씬 더 별이 적게 보였다.

 

“별을 좋아하시나 봐요?”

 

“짝사랑 상대의 이름이 아이올라이트 스텔라였네. 별이 뜬 밤하늘을 보면 그의 눈빛이 생각나 그리움이 밀려오네.”

 

데만토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짝사랑 상대가 있었어요.”

 

“있었다니, 과거형인가?”

 

데만토이드는 쓰게 웃었다.

 

“저는 치유사인데 우리 쪽 마법사 군을 치료해 그 사람들이 자신의 오빠를 죽게 했냐는 말 때문에 절교했어요. 너무 자기중심적인 생각 아닌가요?”

 

유클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는 오빠를 잃은 슬픔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다.”

 

데만토이드는 조금 답답했다.

 

“감정 같은 건 가끔은 정말 사람을 바보로 만드네요.”

 

유클레이스는 반박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적 생명체가 가지고 있으니, 그것에 반응하는 것이 좋겠네.”

 

“아이올라이트는 죽었나요?”

 

“아이올라이트는 뿔이 달린 종족, 즉 유각종이었으나 엘프인 나의 수명보다는 한참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네. 즉 노환으로 자연사했지. 나는 그때에도 모험하고 있었고, 나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사랑 고백을 할 수 없었다네.”

 

“...... .”

 

데만토이드는 침묵을 지켰다. 그랬다가 불현듯 데만토이드가 말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토파즈와 갈라설 수도 있어. 부디 그 아이가 잡은 손을 놓지 말아.’

 

“저는 그 아이의 손을 놓아버렸어요. 나중에라도 다시 화해해야겠죠?”

 

“그렇다네. 부디 그대는 나처럼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네.”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그러면 제 환자들을 살펴보러 가야겠어요.”

 

“이 늙은이의 말을 들어주느라 수고 많았네.”

 

“저도요.”

 

본래 이 세계의 국제법에는 전쟁 범죄 중 하나로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이들, 즉 민간인, 환자, 항복한 자들을 해하지 말 것’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쟁에서는 지켜지지 않는 일이 더 많았다.

 

마법사들이 폭격기와 고위 원소계 마법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자, 종교군은 닥치는 대로 마법사 측의 어린아이, 환자, 의무병을 공격해 가며 복수하였다. 마법사군은 결코 의도적으로 적군의 비무장인 자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는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벽장’에서 나온 마법사들이 자유롭게 숨 쉬며 사는 삶을 만끽하고 싶다.’ 였기 때문이었다.

 

소박하면 소박하고 지극히 당연한 그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라 대신 마법사군 종군 기자들을 종교군이 일으키는 학살을 사진으로 담고 기사로 엮어 온 세계에 퍼뜨리게 하였다. 종교군은 중도 세력의 민심을 점점 잃었다.

 

마법사들은 종교군이 쓰던 폭격기를 노획, 조종사를 포로로 묶어 항복을 이끈 후 모든 폭격기에 투명화 마법을 걸었다. 레이더로도 뜨지 않고 실체도 보이지 않아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혼란 상태에 빠진 종교군은 고스란히 손실을 보았다.

 

데만토이드와 의무병 임무를 수행하던 어느 때의 일이었다. 막사로 들 것에 들려온 환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곧 공습경보가 울렸다. 데만토이드는 환자들을 감싸는 돔 형태의 보호막을 쳤다. 그리고서는 눈에 익은 환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토파즈였다.

 

“포로수용소를… 종교군이… 습격을…”

 

토파즈는 심장에 총알을 맞아 피를 왈칵왈칵 흘리고 있었다.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토파즈는 환자였다. 의사는 국가와 인종과 종교를 넘어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데만토이드는 마음 속을 싹 비운 뒤 수술과 마법을 준비했다. 토파즈에게 전신 마취 마법을 건 다음 집게로 총알을 빼내 금속 접시에 툭 놓고서는 심장의 상처를 치유 마법으로 봉합하는 방식이었다. 고도의 치유 마법을 빠르게 거느라 데만토이드는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나 데만토이드의 실력 덕분으로, 토파즈의 마취가 풀리자마자 의식을 회복했다. 데만토이드는 황급히 진통 마법을 사용하면서, 창백했던 토파즈의 얼굴 상태도 돌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반가워, 데만토이드.”

 

“나도 반가워, 토파즈.”

 

데만토이드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자, 나는 널 살렸어. 이제 빚은 청산됐어.”

 

“그래.”

 

토파즈의 대답은 짤막했지만, 많은 의의를 담고 있었다.

 

“상태가 나아지면 다시 포로수용소로 이동하게 할게. 종교군이 포로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경계 마법을 사용해 24시간 감시할게. 물론 무조건 네 건강을 염려해서. 너도 봤지? 종교군이 의무병이나 포로들을 죽이는걸.”

 

토파즈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부모님과 달리 무교지만,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며 마법사들을 향해 적의를 쏟아부었어. 나는 진짜로는 어떤지 보려고 종교군에 왔지. 내 엄청난 실수였어.”

 

“이미 일은 벌어졌고, 토파즈 너는 이곳의 포로가 되었지. 나는 최대한 너를 집까지 안전하게 보내줄게. 내 유일신에 대해 맹세해도 좋아.”

 

데만토이드는 토파즈에게 다 잘될 거라고, 전장이 끝나면 사귀자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포로수용소로 나왔다.

 

데만토이드는 자신의 할 일을 하면서 가끔 포로수용소에 들러 토파즈의 예후를 살폈다. 토파즈는 하루에 열두 시간쯤을 잤고, 저녁에 잠깐 일어나 오트밀 죽을 먹은 후 데만토이드와 담소를 나누었다.

 

“우리 엄마랑 아빠는 둘 다 성당에 가잖아. 모태신앙인 셈이지.”

 

“그래. 그런 네가 종교군에 속했던 것도 충분히 알겠어. 그런데 여기로 온 이유가 뭐야?”

 

“데만토이드, 너는 치유 마법을 쓰는 적군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어. 소문으로는, 마법사군에 투항하면 네 세심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돌던데.”

 

토파즈는 푸스스 웃었다.

 

“어이구, 적진의 명장이라니 나 엄청나게 출세했네.”

 

데만토이드는 키득키득 웃고는 덧붙였다.

 

“실은 치유 마법을 배운 것도 작은아버지가 먹칠한 가문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한 거였어. 마법사 선서에는 정치적 신념에 휘둘리지 않고 모든 환자를 공평하게 대우하며 치료하라는 이야기도 있어. 그걸 지켰을 뿐이야.”

 

“데만토이드도 참, 겸손이 지나치네.”

 

토파즈는 덧붙였다.

 

“네가 치유 마법의 명장으로 종교군에도 알려진 상태라 꼭 만나고 싶었어. 종교군에는 마법사 군의 포로에 대한 끔찍한 소문들이 나돌았지만, 난 믿지 않았어. 데만토이드는 결코 그런 짓거리들을 하는 집단에 속하지 않을 거라고.”

 

데만토이드는 조금 놀란 어조로 말했다.

 

“나는 ‘사랑으로 연마된 자’잖아. 인간 사회의 선한 가치를 전쟁한다고 잊어버릴 줄 알았어?”

 

“아니, 나는 네가 변하지 않을 걸 느꼈어. 하루하루 만나는 날만을 생각했어.”

 

뜻밖에 훅 치고 들어오는 토파즈에게 데만토이드는 드물게 어버버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내 생각 말고 치유에 전념해. 불 끈다?”

 

“응, 꺼.”

 

잠시간의 만족이 지나자, 모든 사물이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것만 같았다. 데만토이드는 토파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언젠가는 정말 안전해진 뒤 고백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되새겼다.

 

이후 마법사 군이 토파즈가 포로수용소에 계속 있을지, 아니면 마법사가 되어 자신들과 같이 싸울지를 묻자, 토파즈의 대답은 같이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토파즈의 전공은 기계공학으로 마법 무기의 보수를 할 수는 없지만, 마법사들이 노획한 종교계의 무기 수리를 맡긴다고 하였다.

 

“드디어 우리랑 함께 싸워주는구나. 기대했어!”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니까. 데만토이드한테 도움을 주고 싶었어.“

 

데만토이드는 기쁜 얼굴로 토파즈의 손을 잡았다.

 

잠들지 못한 밤, 데만토이드는 토파즈를 생각했다.

 

‘저는 사람들의 감정을 읽어 그들을 조종하는 건 식은 오트밀 죽 먹는 것만큼입니다만, 토파즈의 감정은 손대지 않고 순수한 그의 사랑을 받고 싶어요. 하나님. 부디 저와 토파즈의 연이 오래 가도록 하옵소서.’

 

토파즈의 새 단짝을 계단에서 밀어버린 이유를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질투와 독점욕으로 인해 벌인 일이었다. 스무 살의 데만토이드는 질투도 독점욕도 토파즈를 위해 참아낼 자신이 있었었다. 그런데도 고백할 날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데만토이드는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사 종군 기자들은 종교군이 일으키는 학살, 포로에 대한 학대에 대해 쉼 없이 기사를 쏟아냈다. 전쟁이 벌어진 후에 마법사로 갓 각성한 이들도 마법사 군에 입대하고 싶어 해 기나긴 줄을 서야 했다.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함께 싸울 수 없으나 마음으로 동참하고 싶어 하는 시민들의 모금 참여로 모금액은 천문학적인 수치로 치솟았다.

 

그러나 종교군은 집마다 돌아다니며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붙은 소문은 멈출 수 없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종교군이 저지른 것이 무엇인지 소문으로 타고 돌았고, 같은 종교인이지만 종교 군의 편을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이들도 속출했다.

 

“아악, 으아아악, 어머니, 살려주세요!”

“뜨거워, 너무 뜨거워, 사, 사람 살려…!”

“차라리 죽여줘 죽여줘 죽여줘”

 

곳곳에서 밀리기 시작한 종교 군은 심지어 백린탄까지 투하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마법사들이 꺼지지 않는 불길에 타들어 갔다. 이 무기를 막기 위해 마법사 군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당한 끝에 마법사들은 방어막을 더 넓게 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실전에서 사용하였다.

 

마법사들의 방어막 대처법은 한 수 올라갔다. 아군이 뼈째 불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던, 간절한 바람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루벨라이트의 할아버지이자 종교 군의 고위 장성인 시베라이트는 마법사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루벨라이트는 다시는 자신의 조국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라고 일갈하며 그 사실을 마법사 군에 알렸다. 루벨라이트는 양친을 비롯한 일가친척에게서 쫓겨났으나 데만토이드, 차보라이트, 토파즈가 지지해 줬다.

 

“괜찮아요. 어디 부모자식 싸움이 하루 이틀인가요. 언젠가 부모님도 당신의 뜻을 인정해 줄 거예요.”

 

“가족에게서 떠나와도, 자신의 편을 들어줄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해요.”

 

“전쟁이 끝났대도 부모님 얼굴 안 보려고 해도 괜찮아요. 루벨라이트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루벨라이트는 세 사람의 말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눈물을 터뜨렸다.

 

“고맙습니다… 다들 이야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뭘요. 우리는 같은 군용 식량 먹는 식구인걸요! 당연하죠.”

 

루벨라이트는 다시 밝은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서로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이 승기로 치달을 무렵, 종교군이 다시 한번, 가족인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 두 사람을 인질로 삼고 있으니, 가족을 잃고 싶지 않으면 전 마법사들이 진격을 멈추고 항복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왔다. 시간은 내일 밤까지로,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우선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와 함께 직속상관으로부터 양친을 만나기 위한 허가를 받아야 했다.

 

“내일 밤까지 다시 들어오게나. 내게는 너희들이 더 소중하다.”

 

“네, 응원 감사드려요. 그러면 저희는 정찰을 시작하겠습니다.”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와 함께 적군의 막사로 투명 마법을 건 후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나 웬걸, 이번에도 허수아비에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의 옷을 입혀둔 상태였다. 데만토이드는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입을 꾹 닫았다. 차보라이트도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돌아와서 마법사 군의 총사령관 실리마나이트에게 종교군 측에서는 이번에도 허수아비 인형으로 우리를 속이려 한다고 보고했다.

 

마법사 군은 그대로 진격했다. 그러자 화형대에 불이 붙고, 이윽고 피부가 타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났다. 성벽 너머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차보라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설마 진짜로 우리 부모님을 불태운 거라면…”

 

데만토이드는 헐레벌떡 실리마나이트에게 다가갔다.

 

“총사령관님, 아무래도 저들이 불태우는 건 제 양친이 맞는 것 같아요. 혼자 나가서 살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허락하네. 의무병들 쪽에 자네의 부재를 알리도록 하지.”

 

세루사이트는 차보라이트에게 비행 주문을 걸었다. 두 사람은 투명화된 상태로 성벽을 넘어가 현재 상황을 살펴보았다. 화형대에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가 묶여있었다. 그들을 살라 먹은 화염은 이미 다리를 파먹어 가 뼈가 드러난 상황이었다. 로돌라이트와 에버그린은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었다. 데만토이드는 조심스럽게 그들의 맥을 짚어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차보라이트.”

 

데만토이드는 차분하게 차보라이트를 불렀다.

 

“...왜 그래? 혹시…”

 

“엄마랑 아빠는 이미 죽은 것 같아.”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가 감정적으로 행동하기 전 간신히 침묵 주문을 걸었다. 그는 비행 주문으로 강제로 차보라이트를 의무병 막사로 끌고 갔다. 차보라이트는 발버둥을 쳤다. 그러고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데만토이드는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비정한 아우를 위해 울어줘서 고마워.”

 

데만토이드는 차보라이트를 끌어안았다.

 

“이제 내 가족은 차보라이트뿐이야.”

 

‘엄, 므아. 아, 쁘아.’

 

처음으로 엄마와 아빠를 부르던 날.

 

“차보라이트만큼은 잃고 싶지 않아.”

 

‘엄마, 아빠. 비는 왜 내리는 거예요? 하늘은 왜 푸른 건가요? 바다도요!’

 

부모님께 끊임없이 질문하며 사고의 지평을 넓혔던 기억.

 

“그러니 오늘 울고 내일은 앞으로 나아가자.”

 

‘아빠, 저 유치원 가는 거 너무 기대돼요!’

 

유치원에 처음 아빠의 손을 잡고 입학했을 때의 기억.

 

“의무병 숙소에서 기도하자. 엄마 아빠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해주세요.’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를 위한 기도를 드렸던 기억,

 

“이 전쟁이 지나가면 상처는 아물 거야. 그때 내 성가대 공연을 봐줘.”

 

‘엄마 아빠! 저 공연하고 있어요! 저 여기에요!’

 

피아노 학원 자체 콩쿠르에서 엄마와 아빠를 부르다가 선생님의 주의를 받았던 기억.

 

“그리고 못 가본 곳을 여행하자. 동쪽 대륙은 거의 가보지 않았었지? 좋은 여행이 될 거야.”

 

‘엄마, 저 여기서 매운 라면 한 번 도전해 볼래요. 이 나라 사람들은 무지 맵게 먹는다던데.’

 

가족끼리 세계 곳곳을 여행하던 기억,

 

그 모든 기억, 그 사이에 가족이 있었다. 넷이 함께 행복했던 추억들과.

 

데만토이드는 밀려들어 오는 슬픔에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갔다. 자기 감정을 꾸며내어 보일 힘조차 없었다.

 

토파즈가 다가와서 두 사람을 포옹했다.

 

“우선 둘이 피곤했을 테니까 푹 쉬어. 제발. 응?”

 

토파즈와 차보라이트는 자신의 무표정을 읽었고, 이것이 부모님의 상실에 대처하는 데만토이드의 자세임을 알아차렸다. 그럴 때일수록 휴식이 더욱 필요했다.

 

“응, 알겠어.”

 

“…… .” 차보라이트는 말을 잃은 듯했다.

 

우연하게도 종교론이 필사적으로 농성 중이고, 데만토이드와 차보라이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카셀부르크였다. 이곳은 카셀부르크 성당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였다. 지금은 몰려드는 마법사 군에 의해 불타고 유리가 깨져 있었다.

 

마법사들은 카셀부르크 성을 공략하려 하였으나, 공성전의 특성상 수가 적은 마법사들에게 불리했다. 데만토이드는 성의 뒷문에 이어지는 하수구를 기어들어가 문을 몰래 열어둔다는 토박이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데만토이드는 버려도 되는 옷을 입고 하수구로 기어들어가 성 안쪽으로 들어왔다.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데만토이드는 얼음덩어리를 소환해 경비원들의 아래턱을 강하게 쳐서 기절시켰다. 그렇게 성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토파졸라이트가 장교 군복을 입고 데만토이드의 앞을 가로막았다.

 

“설마 당신은? 당신은 갇힌 게 아니었어요?”

 

“혐의가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됐다. 덕분에 여러 가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활약의 예를 들자면…?”

 

데만토이드는 허세 심한 토파졸라이트를 조종해 자기가 저지른 범죄를 자백받고 싶었다. 그는 몰래 녹음기를 켰다.

 

“백린탄도 백린탄이지만, 가장 큰 활약은 뭐니 뭐니 해도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 화형식이었지. 민간인인 알만다이트 때는 허수아비 인형을 샀으니, 이번에는 허수아비 인형을 철거하고 실제로 화형을 집행했다는 말이지. 이번에는 속아 드는 걸 보니, 정말 너희의 멍청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이 자식이!!!”

 

데만토이드는 드물게 화를 내며 토파졸라이트의 온몸을 조각조각 분해하는 주문을 외우려 했지만, 하수도에서 나온 누군가가 데만토이드의 팔을 뒤로 붙잡았다.

 

“무슨 짓이야! 누구든 죽여버리겠어!”

 

자신의 뒤에 있는 자는 놀랍게도 차보라이트와 토파즈였다.

 

“이거 놔! 이건 저자가 농락하고 죽인 아이들, 전쟁으로 학살당한 마법사들, 그리고 내 양친에 대한 복수라고!”

 

차보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실현하고자 하는 게 정의 구현이야, 아니면 복수심이야? 복수심은 안 돼. 이건 교전이 아냐. 적을 사적으로 보복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불법이야.”

 

“알 게 뭐야, 그놈의 정의, 나는 내 정의를 실현하게 하겠다고!”

 

토파즈가 슬프고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데만토이드. 안 돼. 너는 괴물과 사람의 경계에 서 있어. 저자를 죽이면 너도 저 인간처럼 똑같은 괴물이 되는 거야. 그러면 너는 네 소중한 사람들을 평생 못 볼 수도 있고. 그게 좋아?”

 

데만토이드의 팔에 힘이 빠지자, 차보라이트는 그대로 데만토이드를 붙잡은 채 순간이동 주문의 두루마리를 읽었다. 세 사람은 마법사군 막사에 도착했다.

 

데만토이드가 들어갔던 방식으로 하수구를 통해 올라온 마법사들은 성 안에서 종교군을 상대했다. 데만토이드의 마음은 참담했지만, 아군의 사기는 최고조였다. 데만토이드는 후방으로 돌아가서 환자를 보았다.

 

그러던 중, 군단장 토파졸라이트가 데만토이드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둥근 원이 파바바박 그려지고, 데만토이드는 결투장 안에 섰다.

 

하나, 둘, 셋. 수를 세고 그들의 신성력과 마력이 충돌했다. 토파졸라이트는 신성력으로 마력을 밀어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어서 이겨라. 이겨서 살인자가 되어라. 그러면 너나 나나 같은 피를 지녔음을 인정하게 될 거야.”

 

“아뇨. 저는 당신이랑 달라요. 저는 사랑으로 연마된 가넷이니 그럴 일은 없어요.”

 

토파졸라이트는 비웃었다.

 

“그래. 주변 사람들에게서 사랑만 받고 자라던 너는 모르겠지. 네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때렸고, 난 움츠러든 모습을 보여 학교에서도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니 나도 세상에 복수할 명분이 있어!”

 

데만토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할머니를 방관한 로돌라이트를 원망하세요. 엄마의 학대로 인해 성추행범이 되었다? 그건 지금도 학대에 맞서 싸우는 아이들에게는 추한 변명일 뿐이에요. 이제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세요!”

 

데만토이드는 마력으로 토파졸라이트를 밀었다. 그러자 토파졸라이트의 발뒤축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다, 데만토이드가 기합 소리를 내며 최후의 공격을 가했다.

 

그때, 토파졸라이트는 가루가 되어 땅바닥에 소복소복 쌓였다. 데만토이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 이겼군요.”

 

“정말 끝이구나……”

 

“많은 일이 있었죠.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데만토이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토파즈에게 달려갔다.

 

“데만토이드, 네가 결투에서 이겨서 너무 다행이야. 네가 지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어.”

 

데만토이드는 토파즈를 껴안다가, 무릎을 꿇고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토파즈 핑크, 지금, 이 순간부터 나를 사랑해 줄래?”

 

토파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만토이드의 손등에 키스했다.

 

“응, 당연하지. 데만토이드 그라나트, 이 순간부터 널 사랑해.”

 

전쟁 후, 더 이상 마법사들을 대놓고 배척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데만토이드와 차보라이트는 그라나트 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알만다이트와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지만, 그의 가시 돋치고 엄한 말은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 보기 어렵겠지만, 각자의 세계에서 힘내서 살아요.”

 

데만토이드는 유클레이스와 악수했다.

 

“평안한 여생이 되기를 바라네. 선하게 살다 보면 신께서도 좋게 보아주셔서 천국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다.”

 

“덕담 감사해요, 유클레이스.”

 

데만토이드와 토파즈는 고심 끝에 데이트 장소를 정했다. 둘 다 계획을 세우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토파즈 또한 뒤셀란트 중앙 도서관에 다니고 있었다. 데만토이드는 연애를 하면서 성가대 연습도 하고, 마법사의 회합에 온 신규 마법사들을 위한 교재 집필로 엄청나게 바빴다. 토파즈와 데만토이드는 교정을 걸으며, 음료를 마시며,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했다.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각자의 집에 가서 새벽까지 장난치며 공부했다.

 

데이트하는 중간 중간은 전쟁의 부서진 폐허를 복구하는 일을 도왔다. 토파즈는 전공을 살려 새 건물을 세울 때 더 효율적인 기계를 설계했다. 데만토이드는 한 데 잔해를 모아두고 건물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마법을 발명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데만토이드는 큰 마법을 여러 번 쓴 바람에 앓아누워 토파즈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

 

“으윽… 나머지 B3 구역은 내가 완성해야겠다니까! 날 돌려보내 줘!”

 

“다 낫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 환자 절대 안정!”

 

토파즈는 으름장을 놓았다.

 

평화가 태양처럼 떠오름에 따라 전쟁기념관도 세워졌다. 마법사들은 전시물에 설명에 대해서도 꼭 토론했다. 데만토이드는 그럴 때마다 중재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반면 루벨라이트는 국제 사회에 따라 자신이 제작한 폭격기가 과거에 국제법상 금지된 백린탄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고 하며, 앞으로도 절대 그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자는 연설을 했다. 시간에 따라 상처는 희미해지겠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아있을 권리를 가진 마법사들의 목소리를 전쟁기념관에 맡겼다.

 

마침 데만토이드는 자신이 사용한 마법을 교과서로 만들자는 생각을 하였다. 중간고사 공부를 하는 틈틈이 데만토이드는 책을 완성했고, 이것을 과거의 데만토이드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데만토이드가 서가 사이로 가자, 낯익은 연두색의 눈이 그를 빤히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용건은 끝났어?”

 

“잠시만, 아직 안 끝났어.”

 

“뭔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해줘.”

 

데만토이드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표정은 딱딱한 무표정이었다.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에 그의 감정 결여는 튼튼한 방파제와도 같았다.

 

“토파즈와 갈라설 수 있어. 부디 그 아이의 잡은 손을 놓지 마. 그리고…”

 

데만토이드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엄마 아빠한테 잘해줘.”

 

“그거야 맨날 잘해주고 있잖아.”

 

“그래. 알지, 그래서 더욱 너의 다정함을 그들에게 나눠줘.”

 

“대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데만토이드는 에버그린과 로돌라이트가 영원히 자신의 곁을 떠날 테니 후회하지 말고 잘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로의 시간 여행자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려 들지 말 것.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왔다. 토파즈는 과 수석, 데만토이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점수가 높았다. 이제 공부로 잔소리를 할 사람이 엄하디엄한 알만다이트라는 사실이 끔찍했다. 아니나 다를까 알만다이트는 그라나트 가의 가주 후보가 될 녀석이 성적이 이러냐며 잔소리 세례를 퍼부었다.

 

그해 여름, 마법사들 측의 추도식이 열렸다. 단지 마법사로 태어났을 뿐인데 화형당하고, 과학이 세상을 지배할수록 ‘벽장’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던 이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보통 사회 속에서 존재할 권리를 위해서 희생을 치른 것이다. 데만토이드는 영웅으로서 추도사를 읊었다.

 

검은 옷을 입은 마법사들이 전쟁에서 희생된 마법사들의 이름을 적은 거대한 비석에 한 사람씩 나와 가지각색의 꽃을 놓았다.

 

데만토이드는 토파즈의 손을 꼭 잡았다. 마법과 마법사는 영원할 것이다. 세상의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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