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마법사, 전장에 서다 - 1. 스피넬과 세루사이트
“드디어, 드디어 내 꿈이 실현되었구나. 드디어…! 나를 대신해서 싸워줄 무적의 생체병기가!”
피험체 230109가 세상에서 처음 본 모습은 어떤 과학자가 미친듯이 웃는 모습이었다. 피험체 230109는 자신이 유리 캡슐 같은 공간 안에 있고, 유리 캡슐에는 농도 짙은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는 것도 느꼈다. 연구권들은 피험체 230109를 캡슐에서 끌어내 액체를 닦아주었다.
“너는 근력, 지구력, 살상에 대한 지식, 특수 기능 등에 대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필멸의 존재들을 능가한다. 나는 다이아몬드 박사로, 너에게 플로리스 다이아몬드(Flawless Diamond)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예, 감사합니다. 다이아몬드 박사님.”
“네 명령은 일반적인 엘프가 못하는 것이나 안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네 성공을 어서 보고해야겠군. 병영에 가면 네 숙소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쉬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병영은 배양관이 있는 연구실 밖에 있었다. 병영 안의 숙소는 새하얗게 꾸며진 독방이었다. 새하얀 방 내부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움을 한층 더했다. 잠깐을 침대에 앉아 쉬고 있자, 총사령관으로부터의 명령서가 하달됐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사령부로부터 직접 명령을 하달받는 모양이었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가 하는 임무들은 공포감 조성을 위한 민간인 학살, 포로에 대한 고문과 살해, 징집과 징발 저항자에 대한 살해 등이었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억제된 채 제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임무를 ‘잘’ 성공하면 때에 따라 다이아몬드 박사는 다양한 얼굴로 그를 대했다. ‘나의 분신’이라고도 불렀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 박사를 복제하고 그의 약한 체력을 인간형 생물의 수준을 한참 추월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등에 4개의 기계 팔을 단 생체병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플로리스 다이아몬드가 전투 중 기계 팔에 손상을 입어, 기계 팔을 수리해 줄 수 있는, 그를 제조한 연구소에서 다이아몬드 박사를 만났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했다. 연구소 안이 장병들의 시체로 즐비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제국군 군복을 입고 모여있는 이들이 있었다.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나? 연구소에 침입자라도 있었나?”
일행 중 한 사람이 허둥댔다. 그의 뿔은 뒤로 뻗어있었고, 비늘에 싸인 꼬리를 달고 있는 것을 보니 유각종인 듯했다.
“네에… 그렇습니다요… 저희는 상황을 늦게 듣고 병영에서 왔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어쩐지 의심스러운 기분에 진실만을 말하는 공간을 마법으로 설치했다.
“저, 이 공간에서 너희가 말했던 것을 다시 말해 봐라.”
“저기…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다 그들은 일제히 변장을 풀며 소리쳤다.
“정의의 심판자다!”
“...나는 쟤랑 같은 일행 아니에요. 빼줘요!”
보나마나 연합군에서 보낸 끄나풀에 불과한 이들과 다이아몬드 박사,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의 싸움은 놀랍게도 호각이었다. 다이아몬드는 방어계 마법사이므로 자신과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막으면서,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에게 저들을 멸절시킬 때까지 싸우라는 암시 마법을 걸기도 하고, 점점 더 복잡한 방어계 마법을 사용하면서 버티고 또 버텼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기계 팔 안쪽에서 나오는 무속성 에너지 빔으로 적 중 치유 역할을 거의 초주검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적들은 단단히 준비했다는 듯이 치유의 포션을 들이키며 공격을 날려댔다. 그래도 먼저 쓰러진 쪽은 다이아몬드 박사였다. 그는 일반인 수준으로도 체력이 낮기 때문이었다. 다이아몬드 박사가 쓰러지자,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에게 걸린 암시 마법도 풀렸다. 그러자 진한 파랑과 하늘색의 두 가지 색 머리카락을 한 마법사가 신중하게 다가왔다.
“자, 이제 당신에게 걸린 제약은 사라졌어요. 그래도 우리를 죽이고 싶나요? 우리는 당신에게 자유를 주러 왔어요. 그래도요?”
“자유…?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자유에 대해 모릅니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와 이야기하는 틈을 타, 별안간 금속성의 소리가 났다. 다이아몬드 박사가 제 머리에 권총을 대고 있었다.
“안 됩니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가 기계 팔로 날렵하게 권총을 쳐내자, 다이아몬드가 발악했다.
“왜! 왜 너는 내가 죽을 자유를 박탈하는 거야! 패배자로 시작해서 패배자로 끝날 인생을 구경하고 싶어?”
푸른 머리의 마법사가 씩씩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당신은. 그러니 다시는 살아서 참회해야만 해요! 당신이 겪은 그 어떤 고통도 희생자들이 느껴왔을 고통에 비할 수조차 없으니까!”
한숨을 쉬는 다이아몬드 박사를 푸른 머리의 마법사가 묶었다. 그리고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은 독립된 인격체에요. 그렇게 되기에 앞서 연합군이 처벌한다면 형은 좀 살아야겠지만.”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식하고 있었다.
“박사님. ‘이제부터 너는 자유다.”라는 말이, 사실입니까?”
다이아몬드의 보석 광채 같은 눈이 아래를 향했다.
“...그래. 이제 너는 더 이상 전쟁 병기가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거취는 연합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자유라니…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에게 엄격한 표정의 인간 팔라딘이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에게 제안했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 그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나는 아니, 그대에게 사람을 살리는 의학 지식을 가르치는 뤼키니아 신전에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대가 원한다면 소개장을 써주겠다.”
“원합니다. 부탁, 드립니다.”
“그러면 나는 가마. 잘 살아라.”
다이아몬드는 목구멍에 타오르던 뜨거운 아픔을 억눌렀다. 잘 가라, 나의 아이야.
다이아몬드는 연합군에 끌려가면서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를 바라보았다. 계속, 또 계속해서. 반면에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충격적인지.
다이아몬드는 비어버린 둥지를 지키는 것 같은 쓸쓸함을 느꼈다.
한편 뤼키니아 신전으로 간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역사, 음악학, 신학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덧붙여 공용어도. 신전 사람들은 그를 따돌리지는 않았으나, 그는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몰랐다.
그가 아직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로 불리던 때였다. 연합군과 민간인에게 수많은 잔혹 행위를 한 그가 아폴로의 복사가 된다는 이야기에 많은 이들의 설왕설래가 있었다. 그 설왕설래를 중단시킨 건 대사제가 연 청문회였다. 그가 다시는 이전에 했던 잔혹 행위에 선천적으로 아직 죄책감을 느끼지 않지만, 그는 태양신 아폴로의 사제로서 선진적인 의학 지식을 짧은 기간 안에 소화해 냈으며, 어려운 환자를 돕는 일에도 적극적이라고 하며 그를 옹호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름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과거의 잔재를 한시라도 빨리 없애는 것이 그가 새 출발을 위한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주장이 있었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세루사이트. ‘저’는 세루사이트로 불리기를 희망합니다.”
포로 시절 보았던 보석학 책에 실려있었던 보석의 이름이었다. 다이아몬드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투명한 돌.
“그렇다면, 슬라브니의 생체병기 출신의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를 세루사이트로 부르며, 뤼키니아 신전의 복사로서 신전에 찾아오는 병자들에 대한 구호 활동을 할 것을 찬성한다.”
대신관은 나무망치를 세 번 두드렸다. 세루사이트는 머릿속에서 밝은 노란색의 감정이 서서히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기쁨’이구나.
아폴로의 종교가 그렇듯이 이곳에서는 죄인과 일반 병자들이 모두 평등했다. 그래서 세루사이트는 기계 팔 4개와 생체 팔 총 6개의 팔로 환자들에게 나갈 환자식을 나르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다행히도 용기 있는 한 환자가 그 기계팔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니 사용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세루사이트는 그렇게 했다. 여섯 개의 팔 중 가장 강력한 네 팔을 봉인 당한 기분이라 조금 갑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폴론의 가장 황금빛으로 빛나는 지팡이께
대사제님. 대사제님이 보살핌으로 저는 정말로 괜찮은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세루사이트가 아닌 다른 자의 명령으로 싸워야 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민 상담을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생체병기인 기계팔이 여럿에게 공포감을 주니 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루사이트는 기계팔을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세루사이트는 잘한 걸까요?
아폴론의 가장 보잘것없는 지팡이 세루사이트가」
「대사제 이아소가
그래. 잘한 일이지. 너를 책망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너는 다이아몬드 박사와 제국군의 명령에 의지 없이 따라왔었지. 그것은 틀림없는 것이나, 너에게는 책임 소지가 약하다고 보아 사람들의 너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겉면을 중요시하는 부분도 있는 만큼, 네가 그 기계팔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면 네가 또다시 그 범죄들을 일으킬 거라고 편견을 담아 보는 것이란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세루사이트 너는 그 기계팔을 드러내놓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새싹 월계수 세루사이트에게」
대사제와 이런 내용의 편지를 주고받은 후 세루사이트는 공감 가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루사이트는 꿈을 꾸었다. 아폴로가 자신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며, ‘세루사이트, 너는 나의 소명을 받아들여 프리스트가 되겠는가?’이라고 묻는 꿈이었다.
세루사이트가 뤼키니아 신전의 고위 사제에게 말하자, 그는 세루사이트의 양손을 잡아주며 “축하한다. 그건 자네가 신의 소명을 받아 프리스트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라고 손뼉을 쳐주었다. 다음날 세루사이트가 기도로 승낙의 뜻을 전하자, 그는 즉시 프리스트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세루사이트는 법적으로도 프리스트가 되어야 했다. 문제는 사제도 되기 전에 프리스트가 될 수 있냐는 것과, 최근 성지인 델로스로 향하는 길에서 프리스트들이 전부 살해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두 번째 문제보다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대사제의 청문회를 한 번 더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세루사이트는 그 태생과 악행의 유명세로 더불어 무려 한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대사제의 청문회를 두 번씩이나 여는 영광을 누렸다.
아무튼 신의 사명이라는 것은 이해는 어려워도 반대한다면 그 신앙을 의심당할 게 뻔하지만, 서품도 받지 않은 이가 프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아폴로 교단의 최고 지배자, 대사제의 허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신이 내린 결정에 인간이 받아들인다는 수준이라, 반대 의사는 없었다.
문제는 두 번째 일인데, 델로스로 향하는 성직자라면 세루사이트도 포함된다는 것이었다. 몇몇 사제들이 세루사이트의 등에 달린 네 개의 기계팔로 고민을 해결할 수 있지 않냐는 이야기를 했지만, 세루사이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예 기계팔을 절단할 생각이었다. 과거와의 단절, 그리고 흉터로서 그 잔혹한 범죄 행위를 잊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뤼키니아 신전의 뛰어난 의학 기술에도 불구하고 수술은 쉽지 않았다. 세루사이트가 만들어진 원리는 마도 공학과 마법학이었는데, 대륙 연합군 국가 중 마도 병기에 대한 지식을 제국만큼 가진 국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세 번을 돌고 나서야 세루사이트는 눈을 떴다. 등 뒤에 느껴져야 하는 것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세루사이트는 방 안의 거울을 찾아 다른 거울을 기울여서 제 등을 보았다. 커다란 흉터만 빼놓고는 잘 아물어 있었다. 때마침 대사제와 뤼키니아의 신전의 하이 프리스트가 나타나 수술의 성공을 축하했다. 세루사이트는 이 수술이 ‘사람’이 되는 첫걸음이라 여겼다.
드디어 뤼키니아 신전의 세루사이트를 델로스섬까지 호위할 인력이 선정되었다. 유각종 바드인 아이올라이트 스텔라, 엘프 팔라딘인 유클레이스 바이컬러, 인간인 스피넬 코발트블루였다.
“당, 당신! 여기 있었냐고요!”
스피넬은 소리쳤다. 세루사이트는 기억을 되짚어 내 그들이 누구인지 떠올려 냈다.
“아직, 연합군 소속입니까?“
“뭐, 길게 말하자면 그렇죠.”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는 동안에 안심하고 두 다리 뻗고 자라고.”
아이올라이트는 호언장담했다.
“알겠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여행은 아주 순조로웠다. 초보자 모험가 일행도 물리칠 수 있는 약한 몬스터들과의 조우가 며칠 지속되니, 모험가들은 풀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마부 인형이 갑작스럽게 “쓰러뜨려!” 하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 비몽사몽의 낮잠에서 깨어났다.
“수는 몇이나 됩니까?”
“다섯 명. 너무 자만하지 말자.”
“세루사이트 씨는 후방에서 우리에게 ‘축복’을 걸어주며 몸을 지키는 것을 최선으로 삼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다섯 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일행들도 민첩하게 피하거나 방어막 마법을 쓰는 등 갖가지 고생을 해야 했다.
“이제 너 하나 남았다. 순순히 정체를 밝히시지!”
하며 아이올라이트는 포박된 우두머리를 사로잡았다. 그러고는 심문을 시작했다.
“너희 패거리가 총 몇 명이지?”
“일곱.”
“뭐 하는 찌꺼기들이지?”
“보시다시피 산적.”
스피넬이 코웃음을 쳤다.
“산적치고는 너무 일사불란하지 않았나요? 마법사 눈에도 그게 보이던데.”
산적으로 지칭하는 우두머리는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깨물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을 끔찍하게 뒤틀었다. 스피넬은 당혹한 표정이었다.
“아, 독 잼이 든 사탕! 그래서 원할 때 깨물어 먹을 수 있는…!”
그 사이에도 우두머리의 안색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를, 반드시 우리 손으로…”
“반드시 우리 손으로? 어쩌겠다는 말인가?”
유클레이스가 이렇게 말하며 바라보자, 세루사이트가 만인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세루사이트는 무감정하게 사람들을 돌아보다 이내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반사적으로 익힌 일이다.
유클레이스는 탄식했다.
“적들에 대한 더 이상의 힌트는 없다. 뭔가 더 떠오르는 사람 있나?”
세루사이트가 손을 들었다. 일행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세루사이트를 향한 살인의 동기는 연합군의 누군가라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어떻습니까. 바로 ‘저’, 세루사이트, 아니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는 지금으로서 유일하게 생존한‘기계 팔-인간형 생물’ 결합체입니다. 지금은 기계팔을 떼어냈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다른 자를 병기를 개조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아직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일행은 그 끔찍한 가정을 담담한 얼굴로 서술하는 세루사이트에게,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연합군-슬라브니 제국 간 전선에서 일어날 참혹한 전쟁범죄에 소름이 돋았다.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를 깬 자는 아이올라이트였다.
“자자~ 어느 쪽이든 우리의 의뢰자님을 노리고 나타낸 놈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고. 저쪽에서 나머지 두 명이 나타나도 마부 인형의 기능이 알려주겠죠. 그리고 우리도 한가락 하는 모험가들이고.”
아이올라이트의 쾌활함에 모두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마차로 다시 올라타는 움직임이 씩씩했다.
항구에서 커다란 배를 탄 후 도착한 곳은 아폴로 교단의 성지 델로스 섬이었다. 성지답게 곳곳에 월계관을 쓴 남성의 조각이 일행의 눈에 띄었다. 경건하고 차분한 느낌의 도시였던 것 같지만, 불안이 낮게 깔린 것 같았다. 아마도 최근에 있었을 프리스트 연쇄살인 사건 때문일 것이다.
델로스 신전에 찾아온 일행은 감탄했다. 뤼키니아 신전에서도 맛보았던, 거의 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신선한 채소와 곡물로 된 건강한 음식뿐이었던 것이었다. 아이올라이트는 샐러드의 풀 맛이 별로인 듯 귀리죽만 조금 깨작거리고 말았다. 모두가 잠들 때 사탕을 뽀스락뽀스락하고 먹은 것은 일행 모두가 알기에 몰래 웃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세루사이트만 빼고.
드디어 다음날, 특별 서품식이 열렸다. 햇빛이 들어와 성화를 그린 유리창이 색색으로 반짝거리고, 그 찬란한 햇빛이 세루사이트의 머리카락을 보석 세루사이트처럼 찬란한 광채를 흩뿌렸다. 그러나 특별 서품식에 같이 참여한 다른 프리스트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사제 이아소가 세루사이트에게 아폴로의 선서를 읊게 하였다. 세루사이트가 선서를 다 읽은 순간, 갑자기 이아소가 세루사이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아소는 노인인데도 힘이 아주 정정한 편이었으나, 수없는 실험과 약물로 강화된 생체병기 출신 세루사이트의 괴력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대사제님, 세루사이트에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대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루사이트는 “대사제님. 죄송합니다.” 하고서는 이아소의 아래턱을 올려 쳐 기절시켰다.
“역시 사람을 환혹시키는 마법을 걸어 상대를 조종하고 있음이 확실해요.”
마법에 밝은 스피넬의 분석이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고, 일제히 소리쳤다.
“여기 있는 분들, 곧 전투가 벌어질 위험이 있으니 도망치십시오!”
그러자 하이 프리스트가 휘하 사제들을 끌고 나가 도망쳤다.
도망치지 않은 사람 중, 금빛으로 빛나는 눈을 가진 자가 있었다. 그 눈은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아아, 나는 이렇게 ‘누가 이렇게 했냐!’고 증오를 담은 눈으로 주위를 쏘다니던 시선이 내게 모이는 게 너무나도 짜릿하단 말이야. 나는 슬라브니 제국의 건국 영웅, 루틸 골드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서 한 마법사가 마법책을 펼친 채로 있었다.
모두가 소리쳤다.
“환혹계 마법사다!”
세루사이트는 전에 작전을 짜둔 것에 따라 후방에서 아군에게 ‘축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그러고는 후방으로 빠졌다.
역사를 떠올린 스피넬이 갑자기 소리쳤다.
“아니, 잠깐만. 당신이 정말 ‘루틸 골드’라고요? 루틸은 인간이었어요. 50년이나 지났는데 젊은 얼굴일 수는 없다고!”
“이 몸은 새 육체를 입어 다시 태어났다. 영혼은 루틸의 것이니 나는 루틸이 맞다. 그리고 내 임무는 원래 우리의 것이었던 ‘플로리스 다이아몬드’ 를 되찾는 것이지.”
“역시 그런…!”
루틸은 깔깔깔 웃으며 불의 구체를 날렸다.
일행들은 첫 번째는 모두 민첩하게 피해냈으나, 두 번째로 마법이 날아오는 순간 한계를 시험받게 되었다. 운이 나빴던 유클레이스와 스피넬이 상처를 입었다. 세루사이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모두,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버틸만하다. 정 필요하면 자네의 손이라도 빌리지.”
세루사이트는 환혹 마법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그 마법사의 팔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오는 순간 손을 놓았다. 예배당의 조각상이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이아소는 조종 마법이 풀려 당황하고 있었다. 일행의 일부는 아연실색한다는 임무를 수행하고 남은 유클레이스는 당황하는 이아소에게 사태를 설명한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는 세루사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투 중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뒤처리는 네가 해라.”
“알겠습니다. 시정, 하겠습니다.”
그때 일행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루틸’이 주문을 시전하다가 별안간 자기 몸을 감싸 안고 주저앉은 것이다.
“싫어… 하지 마… 나는 ‘루틸’이 아니야. 나는 실험체일 뿐이야… 나를 괴롭히지 마!”
실험체라는 이야기에 세루사이트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신 또한 ‘만들어진 존재' 입니까? 전투를 위해 설계된?”
“그래…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런데 내 다른 인격인 ‘루틸’은 날 억지로 싸우게 해… 싫어…!”
세루사이트는 난처해하며 일행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시다시피 그의 ‘다른 인격’은 싸움을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루틸만큼은 살려두죠.”
“걱정하지 마. 그 정도 실력은 있다고!”
하지만 이때 가루를 털고 일어난 마법사가 유클레이스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러자 유클레이스는 가장 가까운 대상인 아이올라이트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얘 왜 이래, 미쳤어? 넌 풀 플레이트를 입지만 난 아니란 말이야!”
세루사이트는 한숨을 쉬었다.
“우선 코발트블루 님이, ‘루틸’을 상대해 주십시오. 세루사이트는, 환혹 마법을 쓰는 마법사의 시선을 끌어보겠습니다.”
“괜찮겠어? 이번 의뢰에서 가장 노려지고, 가장 지켜져야 하는 건 너인데.”
아이올라이트가 이렇게 말하자, 세루사이트는 자기 가슴에 왼손을 지긋이 대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을, 믿으니까요.”
아이올라이트는 루틸을 ‘살살’ 상대했다. 세루사이트는 환혹 마법을 쓰는 마법사를 순수한 힘으로 박치기했다. 환혹계 마법사는 피하려 애썼지만, 생체병기였던 자의 근력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러분. 지금 이때입니다. 환혹 마법을 쓰는 마법사를 먼저 치고 ‘루틸’을 속박합시다!”
세루사이트의 외침에 환혹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세 명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되었다. 공격 주문을 별로 안 외운 탓인지 그 마법사는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겼다.
그리고 ‘루틸’을 넘어뜨려 무장해제 상태로 만들었다. 세루사이트가 물었다.
“루틸, 당신은, 이중인격입니까?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이중인격? 하. 자기를 온전한 인격이라 주장하는 천것 말이냐.”
“그건 루틸의, 새 육체에 보관되었던, 루틸의 영혼을 집어넣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인가 싶은데, 맞습니까?”
“...하. 인정하기 싫지만 맞다.”
세루사이트는 루틸을 한동안 바라보다, 다른 사람에게 발언권을 넘겨주었다.
“우리를 숲에서 습격했던 괴한도 같은 편인가?”
유클레이스의 물음에 루틸은 답했다.
“맞다. 어떻게 알았지? 산적처럼 보이도록 복장도 일부러 중구난방으로 입으라 했다만.”
“검법을 보고 깨달았다. 산적에게 제대로 이론이 정립된 검술이 있을 리 만무하잖아.”
“무고한 프리스트들을 살해했던 이유는? 세루사이트가 목적이라면, 세루사이트만 없애면 될 것 아닌가?”
“산적처럼 보이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고, 아폴로 교단 성직자에 대한 증오범죄처럼 보이게 하려고.”
아폴로 교단은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국경을 넘나들며 치료했기 때문에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제 좀 의문이 풀렸군. 대사제님은 괜찮나요?”
아이올라이트가 그전까지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이아소를 언급했다.
“괜찮네. 다만 내 손에 목이 졸려진 세루사이트의 마음이 걱정되는군. 이 아이와 나는 무척이나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사이였는데.”
세루사이트가 앞으로 나섰다.
“괜찮습니다, 대사제님. 이런 불상사가 있었다 해서, 세루사이트가 대사제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을 정리할 시간이군. 자네들에게 이번 사건의 보답으로 각각 70개씩의 금화를 제공할 예정이네. 또한…”
이아소가 모두를 대사제 집무실로 인도한 뒤 말했다. 이아소는 깃털 펜으로 무언가를 써서 네 명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소개장이 있으면 대륙의 어떤 아폴로 교단 신전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네.”
“감사드립니다.”
후한 보수에 모험가들의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러면, 세루사이트는 델로스에 조금 더 머무르다, 가겠습니다. 프리스트로서, 알아야 할 것들을, 교육받기 위해서.”
“그럼, 인연이 허락한다면 다시 한번 더 닿기를.”
세루사이트는 모험가들이 떠나자, 배웅했다.
세루사이트는 델로스에서 프리스트가 알아야 할 것을 교육받고 뤼키니아 신전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별안간 대륙 이곳저곳을 돌며 자선 치료 여행을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아폴로 교단 위세 확장에 도움 되는 일이므로 승낙은 쉽게 떨어졌다.
세루사이트는 뤼키니아 신전에서 떠나 대륙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탈 없이 지냈으나, 조금씩 환자들에 대한 양상이 달라졌다. 전쟁고아와 피난민이 많아지고 있었다.
“사제님. 엄마,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 살려주세요.”
세루사이트는 며칠, 이 마을에 머물렀으므로 이 아이의 엄마가 사망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세루사이트는 죽은 사람은 살려낼 수 없다고 말했다. 아이는 오열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세루사이트는 왼쪽 가슴께를 짚었다. 이상스레 전장 고아와 피난인 환자를 보면 이쪽께가 아파져 왔다. 무슨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번 치료는, 오늘까지, 하겠습니다. 심신이 피곤해서 말입니다. 내일, 다시 오십시오.”
세루사이트는 점점 심해지는 가슴께의 통증에, 진료 가방을 채우고 도망치듯 여관으로 향했다.
세루사이트는 아폴로께 기도했다. 침상에서 섬기는 자세를 취한 뒤, 아폴로께 기도를 올렸다. 오늘 느낀 마음 아픈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를 알려달라고. 그것이 아폴로가 바라는 바라면 세루사이트는 반드시 답을 얻을 것이다. 그 점이 세루사이트에게 위안을 해주었다.
세루사이트가 이 마을의 치료를 끝냈을 무렵, 한 피난민이 세루사이트를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자네에게 이걸 주고자 나왔네. 보아하니 여길 떠날 참이지?”
피난민의 손에는 은으로 고풍스럽게 장식된 단안경이 있었다.
“여길 떠나는 것은 맞지만, 이 물품은, 세루사이트에게 왜 주십니까?”
“이건 내가 젊은 시절 쓰던 물건이네. 자네에게 잘 어울릴 것 같고, 자네가 날 치유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있을 수 없었겠지. 그에 따른 보답이라네.”
세루사이트는 단안경을 껴보았다. 피난민은 껄껄 웃었다.
“젊은 시절 나만큼은 아니지만 안경이 잘 받네 그려. 그럼, 이 흉흉한 시절에 잘 살아남기를 바라네. 나도, 자네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세루사이트는 진실한 마음을 담고 뒤로 돌아 마을로 떠났다.
세루사이트가 연합군 소속 국가를 여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세루사이트는 길가 벽보의 내용을 읽었다. 공용어로 '우리의 터전, 우리 손으로 지키자!' 라고 쓰여있는 모병 포스터였다. 세루사이트는 그 포스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재의 자신은 프리스트 마법 수준이 낮아 전쟁에 도움이 될 수 없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의심하고 있을 때, 전쟁에는 종군 의사라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에 가슴이 부풀었다. 자신은 프리스트로서의 치유 마법과 의학 지식이 둘 다 있으니 두 방면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세루사이트는 모병 지원 포스터 하단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모병 담당병이 세루사이트가 머무르고 있던 여관으로 찾아왔다. 세루사이트는 검소하게 생긴 여행용 가방에 짐을 넣은 것을 보여주었다. 군에서 지급하지 않을 만한 아폴로 교단의 경전 등이었다.
세루사이트는 달리고 달려 전신의 마을에 내렸다.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준비하며 세루사이트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세루사이트는 연합군의 푸른 표식이 달린 흰 의무병 군복이 길이 들지 않아 그런지 괜스레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세루사이트는 마을 공터에 설치된 작전 지휘소로 찾아갔다. 사령관 옆에 부관이 있었다. 사령관은 세루사이트를 단박에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쿤자이트라고 한다. 이쪽은 내 부관 히데나이트이다.”
세루사이트는 악수했다.
“감사합니다, 세루사이트를 받아들여 주셔서.”
“5년 전에 프리스트가 되었다지. 자네가 찾아온 것은 태양신께서 우리를 굽어살펴 주시는 것이겠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곧바로 서늘해졌다.
“그러나 내 동료들은 네 손에 전우의 목숨을 잃거나 상처를 입은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네가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로 불리던 시절 너와 다이아몬드 박사의 암살을 의뢰한 자이기도 하고. 그것 또한 염두에 두고 있겠지?”
세루사이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쿤자이트는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
“너 같은 일을 모아 만든 군사 단체가 있다. 이름은 ‘자유 슬라브니 군단’이라 하지만 서로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다른 일을 하지. 네 경우라면 후방의 치료소에 배치될 거다. 후방은 대체로 안전하지만, 혼전이 시작되면 최대한 네 목숨을 우선시하라. 아무튼지 간에, 너는 이제 자유 슬라브니 군간의 의무병 소속이 된다.”
“알겠습니다.”
“히데나이트가 막사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히데나이트 부사령관님,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나를 따르도록.”
히데나이트가 알려준 곳으로 가자, 의무병 막사가 나타났다. 세루사이트는 특수 단일 부대로서 전투에는 익숙했지만, 의무병으로서 치유는 처음이었기에 세루사이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반 사람들처럼 ‘불안’과 같은 감정은 없었지만, 치유사의 컨디션은 일에도 영향을 끼치기에.
세루사이트의 상관 페리도트는 이제 전선에서 전투가 막 벌어졌다고 했다. 세루사이트는 생체병기 실험을 받으며 향상된 근력으로 중상을 입은 전선의 아군들을 후방으로 이송했다. 목숨을 구한 아군은 몇 번씩이나 세루사이트에게 감사를 표했다.
세루사이트는 뤼키니아 신전에서 배운 선진 의학 기술과 신성 마법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세루사이트는 만능이 아니었다. 이미 이송할 시점에 가망이 없는 환자들이 있었다. 그때 세루사이트는 아폴로께 기도를 올리며 그들이 신들이 기거하는 세계에서 이 세상의 시름을 내려놓고 즐겁게 지내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 새벽, 세루사이트는 간이 영안실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시신들이 놓여있었다. 이 아이는 제국군의 손에 엄마를 잃었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어쩌면 자기 손에.
세루사이트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왈칵 흘러나올 것 같았다. 세루사이트는 깨달았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세상 속에서.
그 감정의 이름은 ‘죄책감’ 이었다.
그렇게 죄책감과 뿌듯함, 무기력함과 자기 고양감 사이를 오가던 나날이었다. 페리도트는 전선의 상황이 밀린다고 경고하였다. 그 경고는 많은 환자의 발생을 불러일으켰다.
세루사이트는 치명적인 관통 상처를 입은 자를 돌보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안정화 마법을 걸고 몇 시간 지나자, 환자가 눈을 떴다.
“당, 당신…! 여기 있었냐고요!”
세루사이트는 환자의 목소리를 듣고 기억해 냈다.
“아, 여기 계셨습니까. 코발트블루 님. 치료사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고 나서, 너무나 많은 이들을 접해, 코발트블루 님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뭐요? 감히 나를 잊었다고요! 누구 덕에 새 새 삶을 살게 된 주제에!”
스피넬은 정말로 섭섭해서 뾰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죽을 뻔하신 것을, ‘저’ 덕분에 삶을 새로 얻은 것이니, 되갚은 것으로 치지요.”
세루사이트는 무표정하게도 농담을 잘만했다.
“그동안 없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상황이 좋지 않군요. 바로 다음 환자를, 보러 가야 합니다.”
“나도 갈래요. 도우미라도!”
“코발트블루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이 없었습니다. 안정을 취하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십시오.”
스피넬은 콧방귀를 탕탕 뀌어대며 분노를 표출했으나, 프리스트나 의사가 아닌 그가 봐도 자신의 상태는 회복이 필요했다.
세루사이트가 지금까지 들어온 환자를 다 처리하고, 페리도트에게 보고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짬을 낸 때였다.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에게 다가가 자신이 그간 겪은 일을 말해주었다.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에게 결여된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세루사이트의 흥미를 돋웠다. 최근에 자신이 느낀 감정이 죄책감이었음을 스피넬에게 말하자, 스피넬은 쓰게 웃었다.
“그래요. 그거 죄책감 맞아요. 이제야 알았나요? 하긴, 당신의 감정 중 일부는 다이아몬드 박사가 억눌렀다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무척이나.
”하지만 그 감정에 집어삼켜져서는 안 돼요. 알았죠? 그 순간 당신은 진정한 속죄에서 멀어져 버릴 거예요.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게 되죠. 그러니까 마음 강하게 먹어요. 앞으로 당신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는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날 테니까.”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요.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말아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술 당기는 이야기를 맨정신으로 했네. 당신이 시작했으니 전쟁 끝나고 술 한 잔 사요.”
“좋습니다. 만약 엘프 나이로는 미성년자지만, 몸은 성체인 세루사이트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하지만, 말입니다.”
“그걸 생각해 보면 성년의 종족별 기준에 대한 다각도의 고찰이 필요한데, 그건 말이죠…”
세루사이트와 스피넬은 열띤 토론을 하며 여가 시간을 불태웠다.
의무병으로서의 몇 주가 흐른 시간이었다. 이미 스피넬은 복귀하여 자유 슬라브니 군단 소속의 포격수로 일하고 있었다.
세루사이트로 말하자면 밀려드는 환자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루사이트는 자신이 치료해 준 장병이 다시 또 다쳐서 오거나, 이송 중 사망하거나, 수술 중 사망할 때마다 가슴 속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쌓이는 것 같았다. 결국 페리도트에게 상담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환자들도 다 자고 나도 취침할 시간에 무슨 이유냐?”
“페리도트님, 죄책감이, 점점 마음속에 쌓이고 있습니다. 아니, 이건 허무감인가요? 전쟁에서 병사가 다칩니다. 우리는 그 병사를 치료하여, 원상복구 합니다. 병사는 자신이 다쳤을 때의, 그 끔찍한 경험을 생생히 기억하고서 다시금 전투에 임해 다시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 치료에 의미는 있는 것입니까?”
“네 직업 적성이 안 맞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세루사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치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가 있습니다.”
“너도 떠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이 치료에 의미는 분명히 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돼. 우리는 엘프만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종족이라고 주장하는 제국과 싸움을 하는 거야. 그러니 그것만이라도 의미가 있어.
세루사이트의 얼굴에 먹구름이 걷힌 듯하다.
“그렇습니까… 아직 모자란 프리스트인 제게,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급자의 고민 상담은 상급자의 월급에 포함된 일이지. 잘 자라.”
“페리도트 님도, 좋은 밤 되십시오.”
전쟁의 상황이 긴급해졌다. 제국의 강력한 신무기인 ‘폭격기’가 서부 전선에 등장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세루사이트에게 오는 환자 중 일부는 검은 바탕의 붉게 장식된 기체가 폭탄을 떨어뜨리자, 수십 또는 수백의 연합군이 불에 타는 생지옥의 상황에 힘들었다고 증언했다. 그 마도 병기가 휩쓸고 지나간 후의 환자가 없는 것은 생존의 가망이 없는 것이리라. 그 이야기를 들은 의무병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쿤자이트로부터 막사에 페리도트와 함께 오라는 전언이 온 것이다.
“그대는 치료자로 왔지만, 한 몸 지킬 전투 기술이 있기에 제안했다. 제국의 신무기 ‘폭격기’를 처치할 공중 공격 부대에 참여해 주지 않겠나?
“잠시만요. 직속상관인 페리도트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페리도트는 세루사이트와 나와서 귀에 속삭였다.
“그 폭격기를 만든 자가 다이아몬드 박사라는 추측이 있다. 이 일을 맡게 되면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괜찮냐고 나는 한 번 더 묻고 있는 거다.”
“다시 한번, 괜찮습니다. ‘저’는 인정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 막사로 들어가 세루사이트는 공중 공격 부대에 참가하고 싶다는 신청서를 썼다. 함께 나오자, 페리도트가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마음에 드는군. 자네의 각오는 잘 들었다. 그러면 날 밝는 대로 다시 총사령부 막사로 가게. 구체적인 사항을 안내받을 터이니.”
“예,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네도.”
세루사이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말을 타고 총사령부 막사로 향했다. 그러다가 뒤를 잠시 돌아봤을 때,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방향을 짐작할 필요도 없이, 의무병 막사 쪽이었다. 저들은 지금 환자와 의료진을 불태운 것이다.
“페리도트님! 환자분들! 살아계신 분 안 계십니까?”
세루사이트는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루사이트는 목이 콱 메었다. 자신이 과거에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였을 시절에 저항할 수 없는 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래,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행위로구나. 나의 잘못은… 전처럼 눈앞이 부예졌지만, 감상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세루사이트의 원수, 폭격기의 조종자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총사령부 막사로.
총사령관 막사로 가자 쿤자이트와 히데나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여든 인원은 저번의 일행과 같았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쿤자이트가 작전 설명을 했다.
“자. 너희들은 슬라브니 제국의 ‘폭격기’를 노린다. 폭격기의 공격을 자네들에게 유도해 지상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대신 자네들은 1인 비공정을 타고 공중에서 폭격기를 공격하게.”
“알겠습니다.”
1인 비공정이 사람 수만큼 준비됐다. 네 사람은 각각 한 사람씩 올라탔다.
“이거… 말 타는 거랑 기분이 좀 많이 다르네. 제대로 길들어(?) 있는 게 맞는 걸까?”
아이올라이트의 말에 히데나이트가 설명했다.
“제국의 기술을 접목해 만든 마법 탈것이니, 한 번 탄 주인에게 복종을 바친다.”
“다행이네.” 이라고 하며 아이올라이트는 어색해하면서 그 비공정을 탔다.
네 대의 비공정은 세루사이트가 가장 앞장선 채로 이륙했다. 이 네 대의 비공정은 제국의 비공정을 빼앗아 연합군에서 연구하여 만들어진 최신 탈것이었다.
비공정들이 푸르르고 불그스름한 낮과 밤의 경계를 날자, 폭격기는 즉각 반응했다. 폭격기의 양옆에서 에너지가 모이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일 정도였다.
“여러분,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세루사이트가 소리쳤다. 폭격기는 세루사이트에게 무속성 광선을 날렸으나, 세루사이트의 단단한 피부 덕분에 중간 정도로 피해를 덜 받을 수 없었다.
“크윽…”
고통에 익숙한 세루사이트일지라도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오는 공격이었다.
근거리 직업인 이들은 폭격기에 붙어서 부수기 시작했다. 금세 제국군 비공정이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 틈을 타 유클레이스가 엄청난 기세로 강타했다.
“뭔가 이상하군. 조종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국 출신이라 마도 공학을 공교육으로 들은 스피넬은 깜짝 놀랐다.
“설마 무인 폭격기? 이렇게나 크게?”
“이제 조종사를 찾아서 몰래 습격…을 하면 바로 밑으로 폭탄이 떨어지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아이올라이트의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졌다. 일행들은 음악으로 용기를 되찾았다.
“일단 이 폭격기를 떨어뜨리고 나서 조종사 수색을 생각해 보자.”
모두가 다시 안간힘 다해 공격했다.
하지만 폭격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무속성 빔을 충전해 일행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번의 표적은 스피넬이었다. 스피넬은 민첩하게 비공정의 키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광선의 파괴적인 힘이 스쳐 지나가 지팡이를 떨어뜨리고 상처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에게 소리쳤다.
“스피넬! 세루사이트가 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고는 아폴로 교단의 성표인 은 메스를 높게 들어 올려 기도하였다. 메스에는 은 줄이 있고, 그 줄 끝에는 보석 세루사이트가 세공되어 있었다.
“아폴로 신이시여, 우리를 보살펴 주십시오!”
그의 기도는 치유의 힘이 되어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를 고루 치유해 주었다.
“흠, 신성 마법의 원리는 언제 봐도 신기하다는 말이죠.”
전투 상황에서도 타인의 마법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는 스피넬이었다.
“프리스트가 되기 위하여, 신의 소명을 받을 때까지, 성실하게 성직을 수행하겠습니까?”
“됐다, 됐어요. 내가 누굴 믿는다고 하면 신도 어이없어서 웃겠다.”
둘이 투닥거리는 동안 아이올라이트와 유클레이스가 큰 대미지를 넣어 폭격기를 격추했다. 안개가 낀 숲이었다. 그들이 선공하고 계속해서 폭격기를 인적 드문 곳으로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폭격기가 격추된 곳으로 날아갔다. 세루사이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인체실험으로 얻은 능력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반경 5마일 이내, 우리가 찾는 자의 방향은 북서쪽입니다,”
“언제나 그대가 그런 능력을 쓰는 걸 보면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군.”
유클레이스가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그러자 세루사이트가 굳은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영원히 제국에 돌아설 일은, 없을 거니… 다, 다이아몬드?!”
세루사이트는 비공정을 착륙시키자마자 다이아몬드 박사로 추정되는 사람을 함께 달려갔다. 나머지 일행도 세루사이트를 따라갔다.
가까이서 보니 다이아몬드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흙바닥에서 경련을 일으켰나본지 나뭇잎에 열매의 즙 등이 온몸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다이아몬드! 정신 차려요!”
스피넬은 전통적인 방법(즉 뺨 때리기)을 시전하려 하였으나 세루사이트가 만류했다.
“우선 다이아몬드, 말씀은 하실 수 있겠습니까?”
“으으으…”
세루사이트는 다이아몬드에게 다가가 접촉하여 치유 마법을 시전하였다. 그러고는 나뭇잎과 흙을 최대한 털어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겁니까?”
다이아몬드는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유클레이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면서 소리쳤다.
“그대가 저 폭격기를 조종해 연합군에 큰 인명피해를 입힌 것이 맞는가?”
“...맞다.”
유클레이스는 금방이라도 방패로 다이아몬드의 머리를 내려칠 기색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유클레이스 님."
“저자가 한 악행에 내 분노는 정당하다!”
“‘저’ 또한 상관과 치료했던 환자들을, 다이아몬드의 공격으로 잃었으나,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일제히 숙연해졌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왜 제국으로, 도망간 것입니까?”
다이아몬드는 세루사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법에 밝은 자라면 누구나 ‘명령 강제’ 주문에 대해 알고 있겠지. 나는 그 마법에 당해, 제국의 신병기 폭격기를 조종하게 되었다. 아니, 나는 할 수밖에 없었다. ‘명령 강제’ 주문에 저항하는 시도를 할 때마다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정신적 피해를 보니까. 그것이 무서워서 나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내가 죽인 사람이 추가될 일은 없었을 텐데…”
다이아몬드의 목이 메었다.
“저 폭격기를 조종하는 기술은,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의 뇌에서 내리는 명령으로 기계 팔을 움직였던 기술과 같다. 즉, 이 기술을 가진 자가 나 한 명뿐이니 제국 측에서는 자신들을 배신한 나를 납치한 뒤, 그 기술을 사용해 만들 마도 과학 도구를 만들게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유클레이스는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간악한 제국 놈들 같으니라고.”
다이아몬드는 세루사이트와 같은 색인 흰색과 광채를 띤 눈으로 세루사이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늦게, 너무 늦게 알았구나. 누군가의 명령을 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건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구나. 그런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있었어야 할 일이 아니고. 세루사이트, 미안하구나.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세루사이트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은지 혼란스러워하다가, 예전에 피난민들이 아이를 안고 치료를 받으러 왔었던 때를 떠올리고 다이아몬드를 꼭 안아주었다.
“알았으니 다행입니다, 다이아몬드. 그나저나, 이제 ‘명령 강제’ 마법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풀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다시는 저 망할 것을 조종하고 싶지 않으니까.”
스피넬이 앞으로 나섰다.
“주문 해제 마법을 알고 있어요. 오늘 아침 외워둬서 다행이에요.”
스피넬은 다이아몬드의 명령 강제 마법을 풀어주었다.
“고맙다, 정말로.”
“뭐, 나도 당신이 좋은 건 아닌데, 당신이 저걸 또 날리는 건 원치 않으니 해주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임무도 마쳤으니 총사령부 막사로 돌아갑시다.”
“조심해서 가자고.”
세루사이트는 다이아몬드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자신의 1인용 비공정에 그를 태웠다. 해 질 녘의 따스한 햇살이 그들을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폭격기를 제거하자 전선의 상황이 유리해졌다. 이때 제국과 휴전 협정을 맺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만행으로 인해 심신이 지쳐있는 이들은 총력전을 하여 빠른 승리를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총사령부는 제국의 내분을 부추겨 자멸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제국 내부로 침입해 평화를 외치는 전단을 뿌리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공증 임무 경험이 있어 소집된 아이올라이트, 유클레이스, 스피넬, 세루사이트는 전단을 돌려 보고 있었다. 아이올라이트가 놀랐다.
“히야, 이거 제국의 높으신 분들이 읽으면 뒷머리 잡고 쓰러지겠는데?”
전단에는 제국의 고위 정치인들을 조롱하는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었고, 정치인들의 비리,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슬라브니 제국 측의 사상과, 전쟁으로 인해 심리적 상해를 입은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 종이를 제국 곳곳에 뿌리기 위해 아이올라이트, 유클레이스, 스피넬, 세루사이트는 1인용 비공정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았다. 제국으로 갈수록 추워서 일행도 준비해 둔 털옷을 입어야 했다.
“자, 여기부터 슬라브니 제국 본토에요. 종이를 뿌리기 시작하죠!”
스피넬이 그렇게 외치자 수천 장의 전단지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올라이트는 무언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제국의 반격이다! 다들 조심해!”
제국에서 기총을 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밤안개가 모두를 보호해 주었다. 1인 비공정이라 격추가 힘든 것도 다행이었다.
제국 전역에 전단을 뿌리고 돌아가던 중, 유클레이스의 비공정이 기총을 맞아 비틀거리다 아래로 떨어졌다.
“안개가 옅어져서 그런가! 코발트블루, 비행 마법을 부탁하네!”
“안 그래도 외우고 있었답니다!”
스피넬이 비행 마법을 외우자, 추락하던 유클레이스가 둥실 떠서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바이컬러 님이 맨몸으로 기총을 맞습니다!”
세루사이트의 외침에, 스피넬이 유클레이스를 공중에서 거둬 갔다. 유클레이스는 덜덜 떨고 있었다.
“헉… 헉… 미안하다. 심려를 끼쳐서.”
“살아있으면 됐지! 자, 이제 튀자고!”
아이올라이트의 쾌활함이 모든 이들에게 전염되었다.
제국의 상공에서 그들이 해냈던 일은 천천히 결과물로 나타났다. 전선에서 탈영하거나 징집을 거부하는 제국인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에 힘을 받아 용기를 낸 연합군 총사령관은 제국 내에서 내분을 일으킬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자유 슬라브니의 군단장은 변장하고 제국민들을 만났다. 그들은 대다수 엘프가 아닌 중하류층이었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제공해 둔 상태였다. 군단장은 그들에게 제국 내부에서 지하 운동 조직을 만들어 내라고 부탁하며 활동 자금을 지급했다.
슬라브니 제국의 하류층은 엘프가 아닌 나머지 종족이었다. 지독한 차별 정책은 슬라브니 왕국 시절부터 있었던 것이었고, 신분 상승의 유리 천장에 막힌 중류층도 마찬가지 이유로 부당함을 느꼈다.
군단장이 제국인들로부터 답신을 들었을 때에는, ‘분홍장미단’이라는 반 제국 지하 조직이 태어난 후였다. 군단장이 그들에게 단체 이름의 유래를 묻자, 그들은 제국에서 혼자서 시위하다가 죽임을 당한 열네살의 로자 로조비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분홍 장미단은 날이 갈수록 세를 불려 왔다. 제국은 전제 군주인 황제에 의해 철혈 통치를 당하고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마음속 깊은 곳에 국가에 대한 불만을 품어왔다. 끝없는 전쟁은 가족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고, 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낸 정치인들은 수용소에 갇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엘프들이 행하는 종족 차별은 생산성 악화와 치안 악화를 가져왔다. 그것에 대한 불만도 곪아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군단장은 제국민들의 시위가 묻지마 폭력으로 번지지 못하게 만들어달라고 분홍 장미단에게 신신당부했다.
마침내 분홍 장미단의 첫번째 시위가 시작되었다. 분홍 장미로 꾸민 사람들과 등불이 슬라브니 전역을 밝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정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경비대원들은 경악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인들이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제국 곳곳에 도착해 분홍 장미단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엘프 외 타종족을 가축이라 여기는 슬라브니 제국은 각성하라!”
“식민지들의 도의적 해방을 요구한다!”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수용소에 가두는 것을 금하라!”
세루사이트 일행은 평화 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실현되자 경악했다. 고장이 난 부품을 갈아 끼우듯이, 국가의 이상에 걸맞지 않은 부품은 무자비하게 제거되었다. 일행이 제국 정부의 만행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분노를 터트리는 동안, 총사령부로부터 황제 암살 임무가 떨어졌다고 전령병에게서 들었다. 네 사람은 황제 암살 작전에 가담하기 위해 제국군 군복을 훔쳐서 입었다.
마침내 새벽이 어스름하게 깔린 시각. 네 명은 스피넬의 투명 마법을 받고 황궁 내부를 살금살금 걸었다. 이미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안전하게 가기로 한 것이다.
그때, 황궁 내부에서 구체의 불이 날아왔다.
“망할, 이걸 대체 어떻게 봤다는 말이야!”
아이올라이트는 목소리를 낮춰 욕설하면서 마법을 민첩하게 피해 갔다.
“저 사람, 혹시 투명 마법을 꿰뚫는 특수한 시야라도 가졌나?”
스피넬은 방패 마법으로 받아내었다.
“모두, 두려움을 이겨냅시다.”
세루사이트는 침착하게 희게 빛나는 메스 모양 영체를 만들고, 황제가 시야에 보일 때까지 달려갔다. 일행도 모두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황제는 짧은 민트색 머리카락을 지녔으며, 민트색 보석이 세공된 은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화면에서 중성적인 목소리의 인물이 나타났다.
“저는 졸로토. 황제 폐하의 보좌관 역할의 인공 지능입니다.”
스피넬은 경악했다.
“인공 지능? 그런 걸로 우리를 지배해 왔다고…?”
그때 황제가 위엄있게 답하였다.
“그렇다. 공명정대하며, 우리들의 실수를 없애주는 고마운 존재지. 나는 슬라브니 제국의 황제, 포스포필라이트 슬라브니이다.”
“그, 그 수많은 슬픔은, 죽음은 모두 네 녀석들이…!”
유클레이스는 분노한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효율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싸우려 드는 존재입니다. 그 비효율적인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계를 하나의 체제하에 두어야 합니다.”
스피넬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엘프 우월주의요? 그게 합리적이라고 말할 셈이에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엘프는 700년을 살며 인간의 한계를 언제든 넘을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인간은 많은 번식력 외에는 별다른 쓸모가 없지 않습니까?”
“이 자식이, 말하면 다야?”
스피넬이 졸로토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세루사이트가 필사적으로 말리려 했다.
“코발트블루님, 진정하십시오!”
“진정하긴 어떻게 진정해요! 저 엘프 우월주의 때문에 내가 전방에 내몰려 강제로 살인을 했는데!”
세루사이트는 조금 힘든 표정을 지었다.
“코발트블루님의 감정을 ‘이해’하려 시도하겠습니다.”
“그러면 나를 이해하는 행동을 해요!”
스피넬의 지팡이 끝에서 불덩이가 나갔다. 포스포필라이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이 얼음벽 마법을 써서 막아냈다.
아이올라이트는 황제를 모욕하는 노래를 부르며 바이올린을 켰다. 이미 그들의 황제에 대한 증오심은 엄청난 상태였기에 모욕의 재료는 충분했다. 하지만 졸로토가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모욕의 힘을 상쇄했다.
유클레이스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서 단 한 번의 강타를 시도했다. 하지만 황제를 맞추지 못하고 빗나갔다. 감정이 지나치게 섞인 탓이었다.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 체력의 감소로 패색이 짙은 4인의 일행은 궁성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쪽으로 돌아보자, 얼굴이 들뜬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아마 시민군과 연합군이 제국을 점령하여 지원하려 온 것 같았다.
스피넬은 긴 말하지 않았다.
“여러분. 이리 와서 도와주세요! 사람의 미래는 사람이 만들어야 하니까!”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포스포필라이트와 졸로토를 상대로 근거리 무기와 장거리 무기, 마법을 쏘았다. 일대 대다수의 상황에서는 전황을 읽는 인공 지능도 상대하지 못했다. 결국 압도적인 무력으로 포스포필라이트와 졸로토를 쓰러뜨렸다.
“우리의 승리다!”
“우리가 황제를 끌어내렸어!”
“사람의 미래를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모두의 표정에서 기쁨이 찾아왔다. 심지어 세루사이트에게까지도. 사람들은 새로운 영웅을 체포하여 수도의 가장 좋은 술집으로 데려갔다. 일행들과 시민군, 연합군은 자신들이 했던 전투를 서로에게 말해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골치가 아픈 전후처리가 남아있지만, 세루사이트는 일단 지금의 평화를 만끽하고 싶었다. 술집 1층 발코니에서 청포도 주스 잔을 든 세루사이트는 일행들과 잔을 쨍 부딪쳤다.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제국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 300년 후에 이 푸른 별이 멸망한다는 예지술사의 예언이 발표되어 떠들썩한 분위기가 되었다. 장수종들은 이 일을 긴박하게 여기는 한편, 단명종은 상대적으로 덜 긴박하게 여겼다. 아무래도 자신이 죽고 나서야 일어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인간 위저드인 스피넬 코발트블루가 멸망이 벌어질 시간 여행자로 발탁된 것은 세간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일로 여겨졌다. 혹자가 슬라브니 제국의 황제 포스포필라이트의 암살에 이바지한 전쟁 영웅이니만큼, 그는 세계를 위한 영웅으로 다시금 한 발 나섰다고 하자, 그것이 곧 스피넬에게 지워진 숙명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세루사이트는 우유를 마시고 있었고, 스피넬은 달콤한 아이스와인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세루사이트는 무표정했으나 은근히 걱정하는 어조로 말했다.
“코발트블루님, 꼭 코발트블루님이어야 합니까.”
“내가 나섰고, 그들이 나를 선택했으니까요.”
“세계인의 영웅이, 되고자 합니까.”
스피넬은 극구 부정했다.
“달라, 전혀 달라요.”
“그렇다면…?”
“300년 뒤에 나는 죽어있겠지만, 당신은 살아있을 거잖아요. 당신이 살아갈 미래에 나는 없겠지만 당신은 있을 테니까요.”
“코발트블루님. 대체… 그런 놀라운 감정은, 무엇이라 부릅니까.”
“내가 떠나있는 동안 천천히 고민해봐요.”
며칠 뒤, 300년 후의 미래로 향할 시간 여행기가 완성되었다. 슬라브니 공화국에서 기술을 제공해 만들어진 시간여행기는 스피넬을 안전하게 300년 뒤로 데려다줄 것이었다.
스피넬은 시간 여행기가 만든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밖에는 수많은 기자 무리가 있었다. 사람 중에서 스피넬은 세루사이트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으며 점차 몸이 분해되어 가는 감각을 느꼈다.
분해된 몸은 300년 후의 이 세상에서 재조립되었다. 스피넬이 서 있던 야외의 공터는 300년이 지나서 모든 풀과 꽃과 나무가 다 시들어버렸다. 스피넬은 즉각 이것이 겨울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봄에 식물이 피어나지 않는 것은 새빨간 이상 신호였다.
하늘을 바라보니 일식이 일어나 있었다. 예지술사에 의하면 재앙의 형태는 일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스피넬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보통 짧게 지나가는 일식이 영원히 지속되기라도 한다는 건지?
스피넬은 생존자가 있을 만한 환경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래도 물이 근처에 있는 옛 도시일 것 같았다. 스피넬은 바삐 걸어 옛 도시와 수조를 살폈다. 수로를 발견했으나,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스피넬은 나뭇잎을 수로에 던져넣었다. 그러자 나뭇잎이 치지직 소리를 내며 녹아갔다. 아마 물을 마시려 했다면 스피넬의 손도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스피넬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스피넬은 길을 걷다 나타난 호수에 돌을 던져넣었다. 돌도 녹아가는 모습을 보자 스피넬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자가 있을까? 스피넬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스피넬은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조사할 의무가 있었고, 스피넬 자신도 사명을 완수하고 싶었다. 나를 위한 게 아니라, 그를 위해서. 스피넬은 보석 세루사이트처럼 빛나는 휘광의 눈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스피넬은 기차역을 생각해 냈다. 스피넬이 알고 있는 것이 맞았다면, 모든 지하 기차역은 유사시에는 대피소로 쓰이기도 한다고 들었다. 과연 그 상식대로 지하 기차역이 대피소 역할을 했던 정황이 포착되었다. 매장과 자판기, 화재 발생 시 필요한 물이 모두 털려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군데군데 남은 핏자국을 보면, 생존자들은 부족한 음식과 물을 두고 폭동을 일으킨 것 같았다. 스피넬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스피넬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계속 생존자를 수색해서 일식 전에 있었던 일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혼자서 이 재앙을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다 스피넬은 계속 생존자를 찾기로 했다. 저 일식도 뭔지도 모르겠거니와 혼자 막을 자신도 없었다. 그때 스피넬은 생각했다. 아무리 긴 일식이라도 산성화된 물과 식물이 시들어 죽는 것의 원인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저 일식은 달이 태양을 가리는 평범한 일식은 아니라는 소리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자가 있다면 생존자는 어떻게 살아있을까.
스피넬은 걷고 또 걸었다. 벌써 삼 일째였다. 스피넬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생존자를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남쪽으로 올라가서 북쪽으로 이동하는지 보니 어느새 슬라브니의 영토였다. 스피넬은 무너지고 말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갈증에 지배되어 물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불러세웠다.
“멈추시오…!”
…까지 듣고 스피넬은 기절해 버렸다.
스피넬은 전혀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 옆에는 수액이 담긴 팩이 자기 혈관과 연결되어 방울방울 떨어지게 되어있었다. 수액의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스피넬은 수액과 연결된 주사를 뺐다.
이리저리 둘러보자, 천장, 벽, 바닥이 모두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차가운 백색의 조명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스피넬은 몸에 활기가 돌아온 것을 깨닫고 건물 안 탐사에 나서기를 결심했다. 바로 옆 방은 기계로 된 청소기가 바닥을 청소하고 있었다. 스피넬은 제국의 마도 과학 기술이라면 가능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 경계했다.
300년 전 제국은 패배하여 종전 선언을 했지만, 이 세계에서는 어떨지 몰랐다. 제국과 연합군 간에 벌어졌던 세계대전의 이름은 숫자 수식어가 없었다. 이 전쟁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전쟁이 되기를 원하는 바람으로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스피넬은 상념을 지우고 탐사에 마저 임했다. 복도로 나오니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라면 있을 듯한 안내판이 없었다. 스피넬은 이 건물은 외부인의 방문보다는 내부인의 건물 사용에 의의를 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층의 건물에는 사무실인 듯한 방들이 있었다. 문서들을 읽어보니 대체로 재앙의 형태, 범위를 예측한 것이었다. 모두 스피넬이 직접 겪은 것과 일치했다. 마지막 방은 지도자의 방인 듯 다른 방보다 조금 더 화려한 명패가 붙어있었다. 그 지도자의 방에는 기묘한 메모가 있었다.
‘인간형 생물을 자가 복제하는 것으로 이 물질계를 유지한다. 생명이 없는 세계는 그 이치부터 무너지기에.’
스피넬은 머리를 굴렸다. 멸망한 세계나마 300년 후의 이 세계가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아까 전 만난 그 사람이 생존자일 것이다.
스피넬은 위화감을 느끼며 주변을 되돌아보았다. 스피넬은 이내 위화감의 존재를 눈치채었다. 이 층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는 지하일까? 철재로 만들어진 것을 볼 때 벙커일까? 더는 조사할 것이 보이지 않아 스피넬은 아래층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래층에서 스피넬은 이곳은 연구실 같다고 생각했다. 보관된 물건들이 일제히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사실 때문에 말이다. 이곳에서는 연구 기록이 있었다. 외계의 신 ‘검은 별’을 소환해 에너지로 변환하는 방법과, 이 방법이 혹시라도 있을 신의 폭주에 대응하기 위한 송환 주문이 쓰여있었다.
그리고 폐기물 처리방과 이어진 ‘배양실’이 있었다. 배양실에는 똑같은 얼굴을 한 수십 명이 보존되어 있었다. 바로 세루사이트의 얼굴이었다. 예전에 ‘다이아몬드 제거 작전’을 수행할 때 보았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스피넬은 배양실 방의 구석에 있는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세루사이트…?”
구석에 가니 가슴께를 부여잡은 사람이 있었다.
“세루사이트?”
“반만 맞았습니다. 저는 그의 클론입니다.”
“클론의 클론이라? 기묘한 자기 복제군요.”
세루사이트는 쓰게 웃었다.
“현 인류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
스피넬은 잠시 말이 없다가,
“세루사이트의 클론이라면 뭐라고 지칭해야 하죠? 아무튼 나는 스피넬 코발트블루에요. 세루사이트의 친구이자 그의 동료 중 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냥 클론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이제 남은 클론은 ‘우리’ 한 명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요. 당신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천천히 답하세요.”
“알겠습니다.”
“‘인간형 생물을 자가 복제하는 것으로 이 물질계를 유지한다. 생명이 없는 세계는 그 이치부터 무너지기에.’ 이건 대체 무슨 뜻인가요?”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생명은 그 수만큼 세계에 짐을 지웁니다. 이 세계는 각각의 평행세계를 포도송이처럼 달고 있습니다. 생명이 모두 죽은 세계는 질량이 없어 위로 떠오르고, 물 위로 뜬 거품처럼 톡 터져 산산이 날아갑니다. 제 복제는 그것을 막기 위함이죠.”
스피넬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당신이 희생하죠? 이 넓은 푸른 별에 죄인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냐하면, 저는, 아니 선대의 세루사이트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저 재앙 ‘검은 별’의 소환이 제국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국은 왜 ‘검은 별’을 소환했죠? 에너지원이 모자랐나요?”
“모자랐습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인구의 증가가 급격해졌습니다. 공화국에서 나고 타국에서 수입해 오는 농산물로는 늘어만 가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법사가 자신이 후원받는 신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겁니다.”
“나는 300년 전에서 시공을 뛰어넘어 온 사람이에요. 300년 후에 초래될 재앙을 막기 위해서.”
“300년 뒤라면, 인간에게는 별 감흥 없는 기한 아닙니까?”
스피넬은 고개를 젓고 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내가 죽은 후에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스피넬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당신도 생존자를 찾고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이유는?”
“지금까지는 복제로 세상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생존자가 있다면 그의 유전자를 같이 섞어 다양한 조합의 생명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재앙의 해결이 성공한다면, 이 별을 복원하는 것도 꿈만은 아닙니다.”
“유전자를 섞어서 다양한 조합의 생명이라고요…?”
스피넬은 경악했다.
“아, 물론 슬라브니의 기술력으로는 아기들의 종족까지 바꿀 수 있는 정도이니 유전병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스피넬은 수락의 뜻으로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자. 이거 가지고 써요. 하지만 이상한 데 쓰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300년 전으로 돌아간 자신이 가만히 있지 않을 방법은 없었지만.
“제 목숨을 걸고 맹세드립니다.”
복제된 세루사이트는 감사히 머리카락을 받았다.
“그리고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은 주문 시전자입니까?”
“네, 마법사니까요. 그런데 그런 건 왜요?”
“내게는 이계 송환 주문과 주문 증폭 마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합니다.”
“잘됐네요. 이계 송환 주문은 알고 있으니, 그편이 낫겠네요.
그러자 복제된 세루사이트가 앞섰다.
“그러면 벙커 밖으로 나가죠.”
벙커 밖으로 나간 세루사이트가 스피넬의 팔을 잡고, 방향을 일식 쪽으로 돌렸다.
“저 ‘검은 별’을 가리키고, 강력한 목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주문은 ‘검은 별은 우주의 궤도로 돌아갈지니!’입니다.”
스피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껏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스피넬의 마력을 빨아들여 주문을 증폭하느라 세루사이트의 팔에 힘이 들어가서 떨리기 시작했다. 스피넬은 그에게 응원을 해주려는 듯 그의 팔을 힘껏 잡았다. 검은 일식이 금환 일식으로 변하더니, 서서히 초승달 같은 해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빛의 영역이 넓어지자, 일식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태양이 대지를 다시 비추고, 별의 이치가 바로잡히기 시작했다. 물도 땅도 볕도 생명의 재탄생을 기대했다.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의 팔을 내렸다. 그러고는 서로 얼싸안았다.
“300년 뒤의 사람들을 구해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인류를 위해 앞장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피넬은 얼싸안았던 팔을 풀고는 복제된 세루사이트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제 사명은 해결했으니 돌아가 볼게요. 잘 살아요. 부디!”
“그러면, 평안한 시간 여행길이 되시길 바랍니다.”
간이 시간 여행기가 만든 마법진 위로 올라오고, 스피넬은 몸이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감각을 다시금 느꼈다. 낯선 이 감각도 스피넬에게는 기꺼운 것이었다. 이제 드디어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니까.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와 동료가 아닌 단짝 친구가 되고 싶었다. 두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서로가 되기를. 서로서로 독점하는 관계. 서로를 생각하며 매일을 보내며, 여가 시간을 보내는 짝이. 하지만 세루사이트는 그의 과거로 인해 사람들이 친근히 다가가기 쉬운 타입은 아니었다. 세루사이트가 동료가 아닌 ‘친구’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오기는 할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스피넬은 뤼키니아 신전으로 편지를 보냈다. 보내고 나서 생각한 것이지만, 스피넬도 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폴로의 지팡이께
귀하의 세루사이트를 제게 주십시오.」
…이렇게 엉망인 편지를 보냈지만, 뤼키니아 신전의 고위 사제는 상냥하게 답장하였다.
「영웅 스피넬 코발트블루께
그의 마음에 따라 결정하게끔 하고 싶습니다. 세루사이트에게 묻겠습니다.」
세루사이트는 평소 신전에 머물러있지 않고 학문 유학이나 자선 치료를 하며 전쟁 피해 아동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거주지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아폴로 신전은 더욱 곳곳이 있어 그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었다. 스피넬은 이걸 두고 ‘아폴로 신도에게 까불대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다.
「영웅 스피넬 코발트블루께
세루사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승낙했습니다.
부디 그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스피넬은 세루사이트를 자신의 소유물(?)로 할 수 있었다. 스피넬은 첫번째 친구이자 새로운 친구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알고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다. 대충 맛있는 식당 투어, 맛있는 카페 투어, 영화 보기, 같이 소설 읽기, 음악회 같이 가기, 같이 술 마시기까지 두루 추천받아,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잠깐 쉬며 노닥거리자고.
「세루사이트에게.
시간 있으면 여관 아 피아체레에 오지 않을래요?
사적으로(중요!) 재밌게 시간 보내고 싶어서요.」
스피넬은 편지를 기다리면서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매일 여관 공동 우편함에 세루사이트의 편지가 온 건가 하며 매일 초조해했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코발트블루 님에게
좋습니다. 셀루네가 보름달일 무렵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셀루네가 걸린 밤하늘 아래. 세루사이트가 스피넬이 묵고 있는 여관에 방문했다. 여관 주인장의 말대로 스피넬이 묵는 방문을 두드리자, 약하게 미소지은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래간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아폴로의 영광 아래에서 안전히, 전쟁으로 어려워진 사람들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전쟁으로부터는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세루사이트는 그것을 치유하며 속죄하고 있었다. 물론 아폴로 교도 함께 전도하면서.
“고생 많았어요. 당분간은 편지로 쓴 대로 나랑 같이 놀고먹고 해요.”
“알겠습니다. 코발트블루님.”
두 사람은 씻고 밖의 로비로 나왔다.
“씻으니까 노곤해서 잠자고 싶은 마음과 세루사이트랑 떠들고 싶은 마음이 둘 다 있는데 어떡할까요?”
‘내일부터 이리저리 다니게 될 테니, 주무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잘 자요, 세루사이트.”
“코발트블루님도요.”
다음 날 아침은 초봄의 따스함을 담고 있었다. 칼같이 일찍 일어난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을 깨웠다.
“일어날 시간입니다, 코발트블루님.”
스피넬은 이불을 덮은 채 새우처럼 몸을 웅크렸다.
“으으으우… 더 자고 싶어요…”
“놀 일이 많습니다. 서두르시죠.”
스피넬은 그제야 벌떡 일어났다.
“오늘 재미있게 놀아봐요!”
“그럽시다.”
“그러면 먼저 맛있는 카페와 맛있는 식당을 알아봐야겠죠? 여관 주인분께 물어볼래요!”
스피넬의 질문에 여관 주인은 ‘비바체’라는 카페가 이 지역에서 유명하다고 알려주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감사를 표했다.
도착한 비바체는 줄 서서 사람들이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스피넬은 원래 줄 서서 기다릴 정도면 안 먹고 말지 하는 셈이었지만, 세루사이트와 잡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두 사람은 기다림 중에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단 냄새가 진동했다. 스피넬은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쉬었다. 새로 나온 빈자리에 두 사람은 도시 구경하며 먹고 마실 수 있었다. 스피넬은 딸기 차와 까눌레를 골랐다. 세루사이트는 우유와 팬케이크를 골랐다. 얼마 뒤 음식과 음료가 도착했다.
“맛있게 먹어요.”
“코발트블루 님도요.”
세루사이트는 식전 기도를 올리고, 스피넬은 딴짓하며 딸기 차의 맛을 보았다. 딸기 퓌레를 아낌없이 넣어 진한 딸기 맛이 났다. 까눌레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질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까눌레 궁금해요? 궁금하면 세루사이트의 팬케이크로 하나 바꿔요.”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먹어본 팬케이크는 폭신폭신하고 달아 너무나도 맛있었다.
“와, 어쩜 팬케이크도 맛있지. 까눌레는 어때요?”
“맛있습니다.”
말도 간결하게 하고 맹한 표정이 기본인 세루사이트지만 그로서는 최고의 찬사임을 스피넬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몇 년이나 함께 했으므로.
“이거 다 먹고 영화 한 편 같이 볼래요? 재밌어 보이는 거 떴던데.”
“좋습니다. 제목이, 무엇입니까?”
“‘연합군의 영웅들’이에요. 전쟁 영화가 아닐까요?
스피넬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애써 삼켰다.
“그러면, 그걸 봅시다.”
환영 마법으로 돌아가는 영상기가 작동되자, 막이 올랐다. ‘연합군의 영웅들’은 스피넬의 일행들이 제국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일을 다룬 전쟁 영화… 일 줄 알았지만 전쟁 묘사의 지분은 10퍼센트도 안 되었고, 나머지 10퍼센트는 인물들이 매력을 발산하는 시간이었고, 대다수는 인물들 간의 오묘한 사각 관계를 다루었다. 스피넬 →세루사이트→아이올라이트→유클레이스 순이어서 그럴듯한 클리셰로 범벅인 점이 스피넬의 뒷골을 당기게 하는 중이었다.
영화가 끝이 나고 조명이 켜지자, 스피넬은 역정을 냈다.
“저 엉터리 영화가 순위권에 들다니, 저딴 게…!”
세루사이트는 침착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대개, 남의 연애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의 말을 듣고 황당해했다.
“그건 사실이긴 하지만, 프리스트가 할 만한 말로는 들리지 않는데요?”
“아폴로 교단에서 혼인과 성관계가 제한되는 자는 대사제 한 분뿐입니다. 세습을 막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아폴로 교단의 대세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만했다. 많은 사람이 모두 성관계하지 않으면 인구가 줄어들고 말 테니까.
영화관을 나간 두 사람은 맛있는 식당으로 가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줄이 있었다.
“날씨가 초봄이 아니었으면 얼어 죽거나 쪄 죽었을 거예요.”
스피넬의 투덜거림이 있었지만, 마침내 둘은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주문한 요리는 양념한 샤슬릭과 홍차와 라즈베리 잼이었다. 차는 전의 가계에서도 마셨지만, 스피넬은 죽기 전에 한 번은 마셔봐야 한다는 강력한 권장에 세루사이트는 따랐다. 매장에는 슬라브니식 주전자인 사모바르가 있어서 가계의 분위기를 띄워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샤슬릭이 먼저 나왔다. 스피넬은 꼬치에서 고기를 빼서 세루사이트의 그릇에 담아주고 제 것도 그렇게 했다. 세루사이트는 샤슬릭 맛이 맘에 드는지 아주 잘 먹었다. 복스럽게 잘 먹는 세루사이트를 보면 스피넬은 자기 배가 부른 것만 같았다.
샤슬릭을 다 먹자, 사모바르에서 따라진 홍차와 라즈베리 잼이 나왔다. 세루사이트는 홍차 맛이 세서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귀엽기만 했다. 스피넬은 라즈베리 잼을 입에 머금고 그다음에 홍차를 마시는 슬라브니식 홍차 마시는 법을 알려주었다. 세루사이트는 단맛이 좋아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게 슬라브니식, 홍차 마시는 법이군요. 홍차의 향취도 진하고, 그에 라즈베리 잼이,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제국의 병영에 거주할 때는, 맛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외국인 이곳에서, 고국의 홍차 맛을 제대로, 느껴본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슬라브니가 한 만행은 많지만, 그 고유문화는 사랑스럽죠.”
“이하 동문입니다.”
홍차를 마시며 노닥거리다 보니 밤이 되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묵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스피넬은 양피지에 깃털로 소거법을 해보았다.
맛있는 식당 투어 (완료)
맛있는 카페 투어 (완료)
영화 보기 (완료)
같이 소설 읽기
음악회 같이 가기
같이 술 마시기
세 개는 이미 해본 거고, 나머지 세 개를 안 했다. 스피넬은 도서관과 음악회관 위치, 칵테일 집을 여관 직원에게 추천받아 정보를 얻어냈다.
“새루사이트. 내일은 여기로 가볼까요?”
“찬성입니다.”
“그럼 씻고 일찍 자요!”
“알겠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은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은 언덕 맨 위에 있어 찾아가기 쉽지 않았다. 세루사이트는 쭉쭉 올라갔지만, 체력이 떨어지는 마법사 스피넬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헉… 헉… 저기로 가요. 저기가 입구 맞겠죠?”
“그래 보입니다. 코발트블루 님은, 괜찮겠습니까?”
“헉, 안 괜찮으니, 헉, 이렇게 헐떡거리는 거죠…”
“죄송합니다, 코발트블루 님. 다음에는 코발트블루 님을 업고 가겠습니다.”
스피넬의 귀가 달아올랐다.
“아니, 업을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스스로 걸을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코발트블루 님.”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도서관에 들어갔다. 도서관은 차가운 회색의 직육면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누가 봐서는 이 안에 책이 아닌 마도 과학 실험 기구가 들어있을 것이라고 보기에 충분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사서의 안내에 따라 대출증을 만들었다. 이 대출증은 대륙 모든 도서관에서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스피넬은 보석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보석이 찬란하게 빛나는 사진을 보니 보석이 더욱 좋아졌다. 스피넬의 달 지팡이도 마름모 커팅이 된 코발트블루 스피넬을 은에 세팅하여 만든 것이었다. 스피넬이 달 지팡이를 마련한 이유는 첫번째도 폼, 두 번째도 폼이었다.
스피넬이 보석학책을 읽다가 세루사이트를 보니, 세루사이트는 홍차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전날 갔던 티룸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스피넬은 괜히 자부심이 들어 미소했다.
두 사람은 다섯 권의 책을 들고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피넬은 낑낑대며 도서관으로 돌아가 몇 권을 반납할까, 하다가 세루사이트가 들어주었다. 힘도 세고 신성 마법도 잘하고, 잘생겼고,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스피넬은 그 점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30분 전 음악회관에 들어선 두 사람은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천장에는 반짝이는 샹들리에에, 바닥에는 부드러운 카펫이 깔려있었다. 어느 귀족의 소유물이라는데, 이윤이 짭짤하다고 들었다.
연주회장으로 들어가자, 오보에의 ‘라’ 음에 맞추어 모든 악기가 조율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분주한 분위기 속에서 스피넬은 공연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조율이 끝나자, 커튼이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곧이어 정적 속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연주된 곡들은 대중들에게 유명한 곡들이었다. 고국의 강을 묘사하는 곡, 봄을 표현하는 바이올린 협주곡과 무게 있는 교향곡이 순서대로 울려 퍼졌다. 스피넬은 곡이 좋은지 열렬히 손뼉을 쳤고, 세루사이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 손뼉을 쳤다.
공연장에서 빠져나오자,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에게 물었다.
“공연 어땠나요?”
“신기했습니다. 악기로 물, 봄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런 곡이 자주 공연되니 나중에 같이 또 보러 가요!”
“예, 세루사이트도 스피넬과 같이 공연을 보고 싶습니다.”
“정말이죠?”
“네.”
스피넬은 기쁨을 감추느라 애를 썼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술집 가기에요. 칵테일 괜찮아요?”
“좋습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칵테일 바로 향했다. 칵테일 바에서는 느린 첼로 독주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스피넬은 2인석 창가 자리를 골랐다. 도시의 야경은 반짝이는 활기가 넘쳤다. 스피넬은 블루 큐라소를 택했고, 이제 세루사이트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스피넬의 주문을 받은 직원이 세루사이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손님은 혹시 아폴로 교단의 프리스트가 맞는가요?”
“예, 맞습니다. 세루사이트를, 알아보십니까?”
직원은 환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임신 중이던 때, 제 어머니가 손님 덕분에 쾌유하게 되었답니다. 생명의 은인이세요. 다만…”
“세루사이트 님은 대륙의 최연소 프리스트로, 10년 전에 제조되셨지 않나요? 10세는 아무리 봐도 아이입니다.”
“그렇습니까.”
세루사이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이 사람은 교육받고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믿음으로서 자기 한몫 다 했어요. 그래도 이 사람이 성년이 아니에요?”
“이렇게 찬성과 반대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분께 술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의 근거가 됩니다. 누군가 이 일을 꼬투리 잡아 경찰이 색출해 내기만 하면 우리는 한 달 장사 접어야 합니다.”
스피넬은 입이 댓 발 나왔다.
“무알코올 칵테일, 주십시오. 아무것이나.”
“알겠습니다.”
분란을 조정한 건 세루사이트였다. 직원이 돌아가자, 스피넬은 세루사이트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아니, 저 사람 대체 저런 태도로 어떻게 돈을 버는 걸까요? 왜 술을 팔아준다고 하는데 끝까지 안 주네?”
세루사이트는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세루사이트의 태생 때문에, 누군가에게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점에서 늘 우유나 주스를 시키는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스피넬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피이. 나는 세루사이트가 술에 취한 모습 보고 싶은데.”
“10년만 기다리면, 세루사이트도 20대가 됩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야 이거, 나랑 10년까지 놀아줄 거예요?”
“그 이상도요.”
스피넬은 또 귀가 벌게지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주문한 칵테일들이 도착했다.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에 건배라는 것을 해보자고 했다. 세루사이트는 주점에서 익히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건배사는 무엇으로, 합니까?”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에게 물어봤다.
“‘우리의 평생 갈 우정을 위하여!’라는 어떤가요?”
“정말 맘에 들어요. 좋아요!”
하지만 세루사이트의 그 말로 인해 스피넬은 심란해졌다. 평생 갈 우정이라. 우정이라고 해서 평생 가는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피넬은 꾹 참고 건배사를 올렸다.
“우리의 평생 갈 우정을 위하여!”
칵테일을 마시고 나서 취한 스피넬은 입속에서 말이 튕겨 내뱉어질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 무엇 하나 하기가 싫을 정도로 두려웠다. 하지만 스피넬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갔다.
“세루사이트는 연애 생각 있어요?”
“사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생체병기 ‘플로리스 다이아몬드’에는 탑재되지 않은 기능입니다. 신전에서는 갖가지 학문을 속성으로 배우느라 바빠서 연애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 그래서요?”
스피넬은 속이 탔다.
“세루사이트가 배운 감정이, 이토록 서투릅니다. 그래도 이 서투름을 감수한다면, 어느 인내심 높은 분과 연애라는 것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스피넬은 덜덜 떨면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이미 술도 깨어있었다.
“세루사이트. 나 세루사이트를 사랑하나 봐요. 세루사이트와 좋은 경험은 무엇이든 해보고 싶고, 내가 세루사이트와 닮은 점이 있다면 왠지 기분이 좋아지고, 세루사이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그 부분이 좋아지고,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세루사이트에게 사랑의 다양한 감정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우정조차 영원하지 않은데, 평생을 함께할 사랑도 있지 않겠어요?”
스피넬 앞에서 쏟아진 말에 세루사이트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신력을 필사적으로 끌어올려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담았다. 그리고는…
“세루사이트는, 연애는커녕 인간관계도, 서투른 사람입니다. 이 모자란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스피넬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스피넬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나는 북방 대륙 최북단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그 고장에서는 어디에서나 적응력 강한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있었죠. 어느 날, 마법에 두루 쓰이는 귀금속 광산이 발견되었고, 슬라브니 제국은 우리 할머니가 속한 국가를 전쟁 끝에 지배하게 되었죠. 식민지도 아니고 본국으로 편입해 아예 지도에서 그 이름을 없애버렸어요. 우리 집안은 황제에게 앞다투어 충성의 맹세를 한 매국노였죠. 그 매국의 증표로서 슬라브니어로 ‘영광’이라는 뜻의 이름을 하사받게 되었고요. 내 본명은 사피르 슬라바에요. 제국식 이름이었죠.
내 양친들은 나라에 공을 세우기 위해 내가 군인이 될 것을 강요했어요. 내가 작곡한 곡들은 엄마 앞에서 너절한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죠.
연합군과의 전쟁 전, 나는 훈련을 받고 마법병이 되어 전선에 섰어요. 그때의 나이가 열세 살쯤이었네요. 나는 죽지도 죽임당하기도 싫었어요. 나는 적군을 쏘았지만 명중했을지는 지금까지도 불분명한 상태예요. 그래야 내 마음을 죄책감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수면이 방해받아 분노에 찬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가 지면을 강타했어요.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뛰고 또 뛰었어요. 내가 한참 달리다가 기절해 일어났을 무렵, 이미 수백 수천 명을 숨지게 한 드래곤이라는 재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어요. 나는 그 긴 머리를 잘라 변장하고 이름을 바꿨어요. 그게 내 모험의 시작이었죠.”
“슬라브니의 주 종족인, 엘프의 인간 차별도 심했던 만큼, 엘프인 세루사이트를 미워할 이유가 충분한데, 어째서 스피넬은, 세루사이트를 미워하지 않습니까?”
스피넬은 단박에 답을 내놓았다.
“당신은 그들의 도구로써 만들어졌어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밉지만, 전쟁에 쓰인 도구에 죄는 당연히 없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미워하지 않을, 이유는 알았으니, 이제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스피넬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용기를 쥐어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에 속죄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메스를 쓰는 당신의 모습이 멋지고, 또… 단안경을 쓴 모습이 잘 어울리고 잘생겼기 때문이죠.”
스피넬은 이러다 날 새겠다며 나열을 중단하고는, 세루사이트에게 자신의 매력을 말해 보게 하였다.
“짙고 맑은 색의 코발트블루 스피넬을 닮은 눈이 아름다워서, 세루사이트의 속죄를 지지하고 응원해 줘서, 차가운 무표정과 다혈질 안에 숨어있는 ‘내 사람에 대한 따스함' 이 좋아서입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스피넬은 얼굴에 손을 짚었다.
“엄청, 매우, 굉장히 충분해요!”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의 손을 다정히 떼어주고, 그 손등에 키스했다.
“꺄아악!”
스피넬의 낮은 비명과 허공을 가르며 따스한 초봄이 지나갔다.
스피넬은 결국 세루사이트의 연인이 되었으나, 중요한 순서를 놓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와 면회 일정을 잡아야 했어요!”
다이아몬드는 세루사이트의 생물학적 일란성 쌍둥이이자 아버지이기 때문에 다이아몬드의 허락도 필요했다. 대사제가 그들의 연애를 인지하고 있는 이상. 그러니 말하자면 세루사이트의 친아버지는 다이아몬드이고, 정신적 아버지는 대사제 이아소였다.
“그럽시다. 사실 다이아몬드도 뵌 지 오래되긴 했습니다.”
세루사이트의 제조자는 다이아몬드 박사로, 전쟁 중 포로가 되어 연합군 소속 마탑에서 마법과 마도 과학 기술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폭격기 사건이 일어났고, 자신이 강요당한 행위와 스스로 한 행위 사이에서 스스로 한 행위, 즉 포로에 대한 인체실험과 전쟁 범죄적 살상 병기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를 만든 행위에 대해 전범재판에서 더 무거운 형량을 주어, 전쟁이 끝나자 그가 한 전쟁 중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해 연합군에 의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스피넬은 교도소장을 통해 면회 신청을 가까스로 할 수 있었다. 이 교도소 자체가 연합군-슬라브니 제국 전쟁 중에서 발생한 전쟁범죄를 한 자들을 가두기 위한 교도소라, 규칙들이 몹시 엄하고 혹독했다.
그리고 마침내 면회의 날.
스피넬은 흰 마법사 로브를 걸쳤고, 세루사이트는 평소 입던 대로 크라바트가 달린 셔츠 위에 흰 가운을 입고 왔다.
“잘들 지내고 있었나?”
“예. 아폴로의 보살핌과 다이아몬드의 덕분입니다.”
다이아몬드는 픽 웃었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많이 성장했구나. 덕분에 나도 행복하다. 네가 잘 자라주어서.”
“다이아몬드. 그러니 세루사이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해 보자는 궁극적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
“‘저’와 스피넬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스피넬을 휙 돌아보았다.
“네가, 내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인 세루사이트와 교제를 하겠다고?”
“예.”
스피넬은 차가울 정도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나와 세루사이트의 교제 사실을 말릴 명분은 없을 거예요. 세루사이트는 자신을 성년으로 생각해요. 차이점이 있다면 보통의 성인보다는 배워야 할 것이 조금 더 있다는 점이죠.”
다이아몬드는 스피넬의 말에 들은 척, 만 척하고 세루사이트에게 자기 의사를 표했다.
“네 아버지이자 유일한 형제를 버려두고 갈 거니? 나를 살게 만들어서 이 쓰라린 삶을 준 녀석과 교제하겠다고?”
스피넬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이 죽는 걸 망친 게 원망스러워요? 당신 삶의 불행이 나 때문일 거로 생각해요?”
“그래!”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요. 당신에게 들인 감정이 아깝습니다. 가요, 세루사이트.”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을 애원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코발트블루 님, 그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안 됩니까?”
“...당신 얼굴 봐서 딱 한 번 만요.”
“다이아몬드에게도 세루사이트가 겪었던, 죄를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할 겁니다. 지금은 교도소의 제한된 환경 때문에 더 날카롭게 대한 겁니다. 우리 할 일을 마치고, 다이아몬드는 감방 생활에 적응이 된다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간수들에게 그를 위한 부탁을 하고 가겠습니다.”
세루사이트는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게 뭔데요?”
스피넬의 물음에 세루사이트는 종이 뭉치를 탁탁 접어 마무리하고는 한 교도관에게 주었다.
“심리 검사지입니다. 심리학 쪽은 세루사이트의 전공은 아니라, 뤼키니아의 심리학 전공 의사에게 결과 해석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이후 그는 결과에 따른 처치를 받게 되겠죠.”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의학이 그렇게까지 발달했다니. 그나저나 우리 커플링 맞추러 가지 않을래요?”
“커플링을 어디에서 맞출 겁니까?”
“대륙에 ‘다이아몬드 앤 골드 시티’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에 가봐요!”
“그럼, 다이아몬드, 우리는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라. 가버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밖으로 나갔고, 다이아몬드는 쓰디쓴 맛의 눈물을 삼켰다.
‘다이아몬드 앤 골드 시티’는 대륙 중남부에 있는 큰 도시로, 이름값을 하며 귀금속 거래를 위해 지어진 상가가 즐비했다. 바쁜 세공사들을 위한 식사 빵을 파는 빵집, 마법으로 만들어진 합성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저울로 재어보는 학생, 필기구로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는 보석 학원 학생 등등.
가장자리 1층에는 주로 귀금속 소매점이 들어서 있었다. 스피넬은 여기저기 세루사이트를 끌고 다니며 겨우 마음에 드는 샘플이 있는 소매점에 들어가 쉴 수 있었다.
“어떤 것을 찾으시나요?”
“시원한 물이요…”
스피넬은 너무나도 목이 마른 상태라 시원한 물 한 잔에 정신을 차렸다. 강행군을 요청한 건 스피넬인데 정작 쓰러진 사람도 스피넬이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스피넬은 발품을 판 대가로 딱 취향인 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운드 컷의 보석이 세공된 텐션 반지였다. 가게로 들어가자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둘을 마주했다.
“허허, 이분들. 제국 황제 암살 작전의 영웅이 아니십니까.
“부끄럽긴 하지만, 맞아요. 내가 바로 스피넬 코발트블루에요.”
“잘 보셨습니다. 세루사이트입니다.”
“내 손주도 전쟁에 나갔다가 살아남고 국가 유공자가 되었지.”
“대단하신 분입니다.”
“어이쿠, 이러다가 하루가 다 사라질 판입니다. 어찌하다 이곳에 오셨습니까?”
“세루사이트와 스피넬,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커플링을 사고, 싶습니다.”
“생각해 둔 게 있습니까?”
스피넬이 진열장을 가리켰다.
“여기에 있는 텐션 반지요. 세루사이트는 어때요?”
“이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고는 6발 프롱 반지를 가리켰다. 둘 다 같은 크기의 보석 알을 공유하는 반지였다.
“알은 무엇으로 할 겁니까?”
“세루사이트와 코발트블루 스피넬로요.”
“그러면 가격이 천장이 없을 정도로 뛸 텐데 괜찮겠습니까?”
“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스피넬은 잠시 고민하다가, 텐션 반지를 다시 가리켰다.
“일단 이걸 커플링으로 쓰고, 우리가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저 6발 프롱 반지를 하는 게 어때요?”
“그건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알을 구해오는 시간까지 해서 이 주일 내로 작업할 거요. 여기 반지 호수 확인 해주십쇼.”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쇠로 만든 반지 뭉치를 껴보며 자기 반지 호수를 알아내어 세공사에게 알려주었다.
“텐션 세팅은 원래 강도 때문에 다이아몬드랑 금으로만 하는데, 자네들 것은 보석 알 밑에 난집을 붙여서 밑이 빠지지 않게 연결해 주면 될 듯한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네, 은으로 할게요. 은에다가 화이트 도금으로요. 그리고 그 난집을 연결하는 방식도 좋을 것 같아요. 세루사이트의 생각은 어때요?”
“괜찮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두 사람은 반지 주문을 하고 다이아몬드의 심리 검사 결과를 들고서 교도소로 향했다. 다이아몬드의 보호자로서 가는 것이라 세루사이트에게는 검사 결과지를 열람할 권리가 있었다. 물론 다이아몬드가 먼저 접하는 것이 첫 절차였다. 세루사이트는 다이아몬드에게 검사 결과지를 주었다. 숫자와 그래프의 미로를 뚫고 나온 검사 후 소견이 적혀있었다. 세루사이트는 다이아몬드가 먼저 결과지를 읽게 한 이후 자신도 받아 읽었다.
‘검사 결과, 이고르 다이아몬드를 중증의 우울증 환자로 진단함.’
세루사이트는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우울증이었다니. 그것도 중증의. 혼자서 자신을 미워하느라 얼마나 괴로웠을까.
스피넬을 휴게실에 머무르게 하는 동안, 세루사이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이아몬드에게 물었다.
“다이아몬드. 이 검사 결과가 진짜입니까?”
“그럼, 진짜겠지, 가짜겠냐?”
“제게 정신과학에는 조예가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다이아몬드는 대체 어떤 일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으신 겁니까?”
“나의 태생, 내가 저지른 짓과 그에 따른 대가, 그 모든 것.”
“듣고 싶습니다. ‘제’게 들을 권리가 있습니까?”
세루사이트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쳤다.
“너니까 해준다. 나의 형제이자 아들이니까.”
다이아몬드가 늘어놓은 자신의 이야기는 그가 어릴 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소독제 냄새가 서린 차가운 병원의 온도. 부모님과 나. 심장이 약해 활동적인 일을 못 하게 하라는 의사의 선고. 대대로 군인인 가문에는 없던 체질.
집안에서 버림받을까 봐 죽도록 공부를 열심히 해 마도공학과를 전공. ‘제국을 위한 특수한 임무’ 를 수행해 줄 클론의 완성. 그는 배양관을 손으로 쓸어보며 아직 영아 상태인 피험체 230109를 보고 사랑을 듬뿍 받아 아껴주리라 다짐했다. 끝없는 실험의 고통은 그의 아들이자 쌍둥이 형제이자 분신인 피험체 230109에게 사랑을 주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연합군의 모험가 부대에서 패배해, 서로 다른 곳으로 끌려 나간 두 사람. 상실과 그리움, 죽을 듯한 그리움, 타는 듯한 그리움.
하지만 그는 연합군의 명에 따라 마도 공학 무기 발명을 했다. 전쟁의 끝은 집행 유예의 끝을 가리켰으므로, 이 일에 자부심도 의미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터진 ‘폭격기’ 사건. 자신에게 묶인 ‘명령 강제’ 마법이라는 족쇄. 내게 용기가 있었더라면 이깟 마법쯤 저항에 성공한 채 정신에 피해를 당하여 죽어서 연합군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연합군의 의무소를 폭격하던 날, 그는 오열했다. 살아있어서 미안하다. 그때 죽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내 목숨을 가져가 죄를 갚을 수 있게 해달라. 그 요청은 연합군에 의해 가결되었고, 그는 전쟁범죄자로서 감옥에 끌려가 미칠 것 같은 권태감을 강요당했다. 그의 인생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천천히 그를 몰락시켰다.
“이쯤 되니 알겠느냐. 세루사이트.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어떤 생명이라도, 죽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이 미칠 듯한 권태감에서 평생 허우적거리며 살게 할 거냐?”
“교도소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세루사이트가, 도울 점이 있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참, 우울증 약은, 드시고 계십니까? 상담은요?”
“상담이든 약이든 하고 있다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의사로서 부끄러운 일이군요. 그것 또한 교도소장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단한 효자이군. 아비는 이렇게 못났는데.”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는 못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혹독한 말들을 멈춰주십시오.”
“...그래, 알겠다.”
“참, 스피넬에게 당신의 상태를 알려도 괜찮겠습니까?”
“약점 잡힐 일 있냐? 나는 싫다.”
“알겠습니다. 교제 허락도, 더 기다려야 합니까?”
“...하든지 말든지. 네 얼굴을 봐서 봐준다.”
다이아몬드는 투덜대더니 어물어물 말했다.
“뭐, 너희 둘이 그렇게 진지한 사이라면야… 하지만 미리 말해둔다. 네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는 순간 그 관계는 끊어버려.”
“예, 알겠습니다.”
스피넬은 휴게실에서 나와 세루사이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허락받았나요?”
“예.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면회실 내에 있던 다이아몬드가 소리쳤다.
“세루사이트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국물도 없어!”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스피넬은 기쁨에 겨워 세루사이트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이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세루사이트는 어리둥절했고, 다이아몬드는 시어머니처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귀금속 공방으로 다시 갔다. 코발트블루 색의 스피넬과 눈부신 휘광을 뿜는 세루사이트로 장식된 반지는 아주 아름다웠다. 마치 그들의 눈 색깔처럼. 스피넬은 반지 함을 열어 껴보았다.
“너무너무 예뻐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기뻐하다가 정신을 차린 스피넬이 아참, 하고는 스피넬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세공사에게 내놓았다. 기절초풍할 금액이었지만 스피넬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두 사람이 공방을 나서면, 푸른 하늘에 벚꽃이 피어있었다. 벚꽃의 연한 분홍색은 보드라우니 사랑스럽고, 나비와 벌이 춤을 추며 날아들어 아름답고 귀여웠다.
‘다이아몬드 앤 골드 시티’는 왕국 북서쪽에 있었다. 지금은 벚꽃 축제 기간으로, 왕궁의 결계를 최소화하고, 시민들이 왕궁에서 벚꽃 놀음을 할 수 있게 해놓았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왕국의 산책로를 걸으며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세루사이트는 다이아몬드 박사를 성으로 부르나요? 서로 가족 관계 아니에요?”
“아, 그건 이고르가 자기 이름을 싫어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가족이 멋대로, 지어준 이름이라 가족과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나 봅니다.”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은 원래 성 맞죠?”
“예. 아마 개명 절차를 거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아요. 이제 내 차례. 나에 대해 뭐가 궁금하나요?”
“조금 민감한 질문이라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이라면 언제든지요.”
“스피넬에게는 첫 살인이 어땠습니까? 생체병기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관점이 궁금합니다.”
“첫 살인이라…”
스피넬은 곰곰 떠올려 보았다.
“나는 집안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마법병이 되었어요. 상관이 지시한 적군을 향해 마탄을 쏘는 거였어요. 나는 사람을 죽이기 싫다고 거부했지만, 상관은 군법을 들먹이며 내가 사람에게 공격할 것을 재차 명령했어요. 적군 병사가 치명상을 입었는지를 보지도 않은 채, 하늘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을 보고 공황에 빠져 뒤로 돌아 달렸어요. 사람들은 앞다투어 브레스를 피하려 안간힘을 썼죠. 나는 살아남았어요. 그는 살아남았을까요?”
“알 수 없는 것에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도록 합시다. 스피넬은 그동안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요? 정말로 어쩔 수 없었던 것 맞나요?”
“스피넬은 그 전투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세 살이요.”
“열세 살 청소년이라면 그 청소년 본인보다는, 그 청소년에게 무기를 쥐여준 제국이 더 나쁘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게 ‘배운’ 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의견으로 ‘생각'한 건가요?”
“‘제’가 직접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국군 소년병들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스피넬의 목이 멨다.
“이럴 때는, 어떤 반응을 하면 됩니까?”
“...꼭 안아주세요.”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을 꼭 끌어안았다.
“그때 사람에게 마법을 쓴 이후 덕분인지 자유 슬라브니 군단에서는 포격수 임무에 잘만 성공했어요. 상대와의 갈등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형태로 만들어진 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이 날까요?”
“훗날에, 우리 세대가 모두 실패할지라도, 그 평화의 새싹을 우리는,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꼭, 부디, 희망을 놓치지 마십시오.”
“고마워요, 세루사이트.”
스피넬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세루사이트는 다시금 스피넬을 포옹했다.
아이올라이트는 엘프 팔라딘 유클레이스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스피넬이 일행으로 모험을 함께 모험하면서 서로 주고받던 눈길이 그렇게나 다정했는데, 왜! 이 정도도! 눈치를 못 챘다는 말인가!
“유클레이스, 설마 진짜로 눈치 못 챈 거 맞아?”
“그래. 지금도 믿기지 않는군.”
“믿지 않는다면 보여줄 수밖에 없지. 자, 날 따라와!”
그들은 벚꽃 축제가 열린다는 왕국의 산책로로 두 사람을 따라가 미행했다. 상대방이 보일 정도로 가깝게, 하지만 상대방이 눈치를 챌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그러나 유클레이스의 플레이트 갑옷이 절걱거릴 때마다 아이올라이트는 유클레이스의 뒤를 걷어차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벤치에 앉은 채로 벚꽃을 즐겼다. 서로 사랑스럽다는 말을 나누는 모양인지 스피넬의 볼이 달아올랐다. 정말 별꼴 못 볼 꼴이었다.
그러고는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의 품에 안겨 흐느껴 울기도 했다.
마침내 스피넬의 울음이 끝나고 마음이 진정된 듯하자 유클레이스가 빛처럼 튀어들어 갔다. 아이올라이트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유클레이스 좀 제발!”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아아, 이제 정말 끝장이야!
“무엇 하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이올라이트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아니, 그게, 우리도 산책하다 우연히 겹쳤네. 헤헤…”
하지만 유클레이스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거짓말이다. 두 사람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고자 아이올라이트가 두 사람을 미행하자고 했다.”
“뭐라고요?”
스피넬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아니, 그러게, 사내 연애를 무엇하니 몰래 해? 몰래 하면 모를 것 같아? 두 사람 눈깔부터 로맨스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미행하는 것은, 자칫하면 스토킹 사건으로도, 번질 수 있는 일입니다.”
세루사이트가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그래, 알았어. 내가 알았다고. 내가 두 사람한테 실례를 저질렀네. 간식 쏘는 걸로 기분 풀어주면 어때?”
“좋아요. 당신이 고르면 이상한 데는 아닐 듯하고.”
“알겠습니다.”
네 사람은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한 티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벚꽃 장식으로 꾸며진 티룸은 고풍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이올라이트가 애프터눈 티세트를 주문했다.
“나 이런 거 너무 로망이었어! 우리 그동안 너무 바쁘게 다니지 않았어?”
“확실히 값이 좀 비싸긴 하지만, 번 돈은 팍팍 써줘야죠.”
자기 돈이 아니라고 스피넬은 즐거워하며 대답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주문한 애프터눈 티 세트가 나왔다. 1층에 오이 샌드위치와 라즈베리 잼을 곁들인 스콘, 2층에는 장미, 블루베리, 커피, 딸기 맛 마카롱이 놓여있었다. 3층에는 마찬가지로 장미, 블루베리, 커피, 딸기 맛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모두 일행이 좋아하는 맛이었기에 다들 엄청나게 좋아했다.
종업원이 차 주문을 권하자, 스피넬은 얼그레이, 세루사이트는 밀크티, 아이올라이트는 딸기 가향차, 유클레이스는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기다리자, 차를 담은 주전자와 찻잔이 사람 수만큼 나왔다. 식기는 차의 색과 같이 각각 달랐다. 게다가 식기는 은으로 되어있었다. 정말 잘 나가는 찻집임을 알 수 있었다. 식기부터 테이블에 놓인 꽃까지 모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얼그레이는 특유의 향이 너무 좋아요!”
스피넬이 차를 마시고 감탄했다.
“무게 있게 오롯이, 단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장미 마카롱을 먹은 세루사이트의 평이었다.
“초콜릿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맛있네.”
아이올라이트가 초콜릿을 먹고 난 후의 감상이었다.
유클레이스는 오이 샌드위치를 먹고 스콘을 라즈베리 잼에 찍어 먹으면서 한 마디 던졌다.
“맛있군.”
각자 자기가 첫번째로 고른 음식을 보고 난 후, 아이올라이트의 질문이 시작됐다.
“그러니까 두 사람 어쩌다가 연애 시작하게 됐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건 언제?”
스피넬이 말해주자, 아이올라이트는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정말 너무 좋다. 한 편의 로맨스 소설 아냐!”
“안 그래도 저희 4인방을, 사각 관계로 엮은 소설이, 있었습니다.”
“막장이네.”
“막장이네요.”
“잘 나가는 소설은 으레 자극적이기 마련이죠.”
유클레이스와 세루사이트는 이해가 힘들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이구, 이 백지같이 순수한 사람들을 어쩌면 좋아.”
아이올라이트가 탄식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스피넬이 동조했다.
“혹시 해서 말인데, 두 사람 쪽은, 어떻습니까?”
아이올라이트가 자신을 가리켰다.
“두 사람? 나랑 유클레이스?”
“예.”
아이올라이트가 유클레이스를 노려보았다.
“되겠냐! 저런 고지식한 엘프 팔라딘이랑 사귀느니 머리 깎고 수도원에 들어가겠어!”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니, 과연 그대는 현명하군.”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나저나 다들 일 쉬고 있었지? 내가 흥미로운 걸 가져왔는데 맞춰볼 사람?”
“너무 범위가 넓은데요. 도플갱어?”
“땡.”
“새끼 드래곤이 유괴당한 사건!”
“땡!”
“새로운 던전의 열림?”
“비슷해. 땡!”
아이올라이트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차원을 건너서 평화를 지키는 경찰 ‘세오리프’에 대해 들어봤어?”
스피넬은 곰곰 떠올렸다.
“아, 들어봤어요. 수많은 평행세계의 정거장이 그들의 본부랬죠.”
그때, 마치 일행이 한 이야기를 듣고 온 듯이 세오리프가 들이닥쳤다.
“여러분, 긴급상황입니다. 어려운 모험을 해주실 실력 있는 모험가들 계십니까?”
아이올라이트가 손을 들었다.
“나 여기 있어! 악의 제국을 쓱싹한 사람!”
“오오, 그러면 이분들은 바드 분의 동료이십니까?”
스피넬은 긍정했다.
“네, 맞아요.”
“그래서 그 긴급상황이 뭔지 알 수 있습니까?”
“제 고향 세계의 일입니다. 기후 조종 마법을 대륙 단위로 펼치고, 자기를 공격하려 하면 고드름 송곳으로 급소를 노려 사망케 하는 마법사를 토벌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세루사이트가 물었다.
“그 마법사와 소통할 수 있는 상태이면, 설득을 시도해도, 괜찮습니까?”
“여러분들의 업적을 담은 책을 읽어보았는데, 적을 살려두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세오리프는 무조건적인 살상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소통이 가능하다면 소통으로 해결해 보십시오. 문제가 배로 더 복잡해진다고 해도,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보이는데. 이 의뢰 받을까?”
아이올라이트가 질문하자 모두가 긍정했다.
네 사람은 세오리프가 조작해 둔 마법진 안에 섰다. 몸이 분해된 후 재조립된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찾아왔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새하얀 울타리가 쳐진 데에 ‘루퍼스 마법 학교’라고 적힌 금속 명패였다. 세오리프의 말처럼 하늘에서는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날씨는 몹시 추워, 미리 입고 온 겨울옷이 아니었다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아이올라이트는 노크했다.
“혹시 누구 있어…?”
노크는 한참 뒤에 대답받았다. 배를 움켜쥔 소년이 기어 오다 울타리에 의지해 일어나 문을 열고는 다시 쓰러졌다. 일행은 서둘러 소년에게 갔고, 세루사이트는 소년의 맥을 짚었다.
“살아있습니다. 다만 복부에, 고드름이 꽂혀, 이것을 빼면 엄청난, 피가 날 겁니다. 바이컬러 님, 세루사이트가 빼고 나서 빠르게 치유 마법을 사용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지.”
유클레이스는 승낙했다.
세루사이트는 더 이상 상처가 해를 입지 않도록 고드름을 뽑았고, 분수처럼 피가 나오기 유클레이스의 치유 마법이 상처를 아물게 했다. 세루사이트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혹시 안쪽에도, 다친 사람들이 있습니까?”
“네. 일정이 있어 나간 교장님을 빼고 모두 고드름을 맞아 쓰러졌어요.”
유클레이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까 하였던 치유 방식도 아주 좋았으나, 나는 한 번에 치유할 수 있는 환자의 수가 한 명뿐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일단 교내와 교외 모두 살펴보고 결정합시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결정할 필요도 없었다. 복부에 고드름이 꽂혔던 그 소년 이후에는 죽은 자들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루사이트의 예상으로는, 이들은 온몸의 피를 쏟으며 천천히 죽어간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유클레이스는 탄식했다. 죽은 이들의 모습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모두 소년의 나이대라는 점이 그를 탄식하게 했다.
“이런 짓을 한 자의 이름을 알 수 있나요? 그리고 당신의 이름도.”
스피넬이 묻자, 소년이 답했다.
“제 이름은 모거나이트 루퍼스, 친구의 이름은 루시드 크리스탈이에요.”
“친구? 두 사람이 친구였습니까?”
“제가 걔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다른 학생들은 모두 루시드를 미워했어요. 걔는 마법을 부릴 수 없었거든요. 걔가 눈송이 모양 백수정 목걸이를 잃어버리기 전까지요. 걔가 자신이 여름 방학이 끝나가는 학교로 돌아오려고 마차를 탔을 때 그런 불상사를 당했다고 들었어요. 자객들에게 살해당할 뻔한 그 때 목을 살짝 베어서 목걸이도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어요. 이후로는 여러분이 보시는 것과 같아요. 흐흑…”
소년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가혹한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추측한 게 맞는다면, 자객들 때문에 크리스탈이 눈송이 배수정 목걸이를 잃어버렸고, 그 후로 학교에 돌아와서 모종의 이유로 감정이 폭발했고, 그래서 생전 써보지도 않은 고드름 창 마법이 크리스탈에 의해 발동되어 모두에게 날아갔다? 이게 맞죠?
스피넬의 추측에 소년은 긍정했다.
“네, 맞아요.”
“그러면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네요. 첫째, 자객은 왜 크리스탈의 목숨이 아닌 무언가를 노렸을까. 둘째, 백수정은 마법을 차단해 주는 효과가 있는데, 왜 백수정 목걸이가 그의 것이 되었을까. 이 두 가지가 의문스럽네요.”
“저는 여러분이 의문스러워요. 도와주신 건 고맙지만,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해 그런 추측을 하시나요?”
아이올라이트는 자기 허리에 손을 탁 짚었다.
“좋은 질문이야. 우리는 정의의 사자라서 이 의문스러운 살인 사건을 해결할 거거든. 그 루시드라는 아이는 나중에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잖아?”
“네… 최대한 빨리 잡아주세요. 그 아이와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라도요.”
몇 시간 뒤에 교장인 듯한 사람이 나왔다. 그 엘프는 사건 현장에 주저앉으며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교장선생님, 맞으시죠? 루시드를 따돌린 아이들이긴 하지만, 복수에 성공하고 어디까지 자신의 힘을 휘두를지 알 수 없겠죠? 아니,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모거나이트에게도 고드름을 쏜 것을 보면 제 힘을 아직 통제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어요. 우리가 조사하고 처리할게요.”
스피넬이 침착한 어조로 말하자 교장은 눈물이 맺힌 눈가를 문지르다가 대답했다.
“나는 아메시스트 루퍼스로, 이 학교의 교장이 맞네. 자네들은 누구이기에 우리 아이들의 죽음을 조사하려 하는가?”
“마법사의 범세계 경찰, 세오리프의 의뢰를 받고 온 모험가입니다. 순서대로 스피넬 코발트블루, 세루사이트, 유클레이스 바이컬러, 아이올라이트 스텔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도움에 감사하네. 혹시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나?”
스피넬은 자신의 의문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메시스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모거나이트에게 이야기했다.
“모거나이트, 이제는 어른들끼리 이야기할 시간이다. 기숙사에 있으렴.”
하지만 모거나이트는 고집을 부렸다.
“내 단짝이자 내 몸에 아픈 고드름을 박아 넣은 친구니 나도 알 권리가 있어요!”
“네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어른들이 이야기야.”
“그 어른의 사정으로 아이가 죽고 다친 거잖아요. 잘 이해 못해도 듣고 물을게요.”
할 말이 사라진 아메시스트는 교장실로 모두를 안내했다. 아메시스트는 모두를 앉게 하며 차 한 잔씩을 내왔다.
“그러면, 모두 들어주게.”
아메시스트는 목을 가다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세계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아는, 가장 고위의 예지술사 ‘프티폰’의 새 예언이 발표되었다. 예언의 내용은 얼음의 마법사와 불의 마법사가 서로 쌍둥이로 태어나 백마법사와 흑마법사 간의 마법 대전을 일으키고, 승자만이 마법사의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이 국가인 시그마에서는 원소 마법만이 백마법이고, 나머지의 마법은 흑마법사로 규제당했고, 흑마법사들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예언이 발표되기 전날, 왕후가 왕궁에서 사라졌다. 쌍둥이 중 한 명을 데리고. 그러나 이미 루시드에게는 사악한 마음을 품게 하는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아메시스트는 루시드에게 마법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는 눈송이 백수정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같은 왕국의 고위 마법사로서 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하게 방관한 것을 후회하며.
예언은 조작된 것이며, 이 예언을 한 이유는 쌍둥이의 경우에는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릴지에 대해 왕실과 귀족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왕후가 루시드를 데리고 도망친 후 제왕 교육은 루시드의 친동생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니까 루시드가 악한 마법사로서 마법을 휘두르지 않게끔 당신이 눈송이 수정 목걸이를 걸어준 건가요? 루시드를 악하게 만든 사람은 누구죠?”
스피넬의 물음에 아메시스트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내 직속 연구 마법사라네. 그리고 그 마법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실험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네. 내 제자를 대신해서 사과의 말을 하겠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력하겠네.”
“예. 저희는, 이 사건을 맡아서, 해결해야 합니다. 우선하여, 루시드가 지금 향할 만한 곳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루사이트의 능력으로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생명 반응 탐지가 불가합니다.”
“아, 그가 있을 만한 곳은 떠올렸네. 그는 숲속, 자기 집에 있을 거야.”
“어떤 근거로 그리 확신, 하십니까?”
“아직 루시드와 동시에 루시에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외딴 숲속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분께서 바란 소망이었네. 하지만 왕후마마도 두고 온 루시에를 생각하고, 그들이 예언에 따라 서로를 죽고 죽이기보다는 아예 모르게끔 하려 했으나, 왕후마마는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네. 루시드가 어머니의 유언을 듣고 이곳, 피타클라의 마법 학교로 떠난 것이니까.”
“안타깝게 되었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수습하기로 하지.”
스피넬은 모거나이트에게 물었다.
“혹시 루시드가 공격할 때 어떤 자세나 동작하고 마법을 썼었나요?”
그러자 아이는 무릎을 안고 옷이 젖는 것도 모른 채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당신은 상처를 치료받고 완치되었어요.”
스피넬은 다정한 어조로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했다.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신이 하는 짓을 명확하게 아는 것 같았어요.”
“자각몽, 그러니까 루시드 드림?”
“그런 모양이에요.”
세루사이트는 그 가설을 지지했다.
“자각몽에서 깨고 나면 모든 건 꿈일 뿐이라고 혼동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메시스트는 손바닥을 마주하고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심지어 흑마법사들이 루시드를 돕는다면, 본래 왕세자가 돼야 했을 루시드는 흑마법사라는 누명을 쓸 수도 있겠네. 이런 상황에서 어린 루시드가 어른들의 권력다툼에 희생되지 않도록 내가 간절히 비네.”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 들고 오겠네.”
일행은 루시드가 갔을 것 같은 숲으로 향했다. 계절이 겨울이라 호수에는 얼음이 얼어있었다. 반대편에는 희고 푸른 장발을 한 아이가 서 있었다. 스피넬은 뭔가 께름칙한 기분을 느끼고 제안했다.
“우리, 호수를 우회해요. 예감이 심상치 않아요.”
“하지만 우회한다면 그 시간 동안 루시드와 우리의 간격은 실시간으로 멀어지지 않을까?”
“알겠어요. 대신 호수를 더 꽝꽝 얼리고 가죠.”
스피넬의 지팡이 끝에서 서너 번 냉기가 뿜어나오며 호수가 단단하게 얼었다. 그러고는 튼튼하게 언 부분을 따라 달려갔다.
그러나 아이는 소름이 끼치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로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얼어있던 물이 모두 물로 변해버렸다. 일행은 차갑디차가운 호수에 빠져버렸다. 일행 중에서 수영을 못하는 스피넬과 아이올라이트를 각각 세루사이트와 유클레이스가 수면 아래로 떨어져 버린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왔다. 그때 루시드가 다시 손바닥을 원래대로 뒤집었다. 그러자 호수 표면이 얼음으로 바뀌어 그들은 얼음 속 차가운 물 속에 갇혀버렸다.
세루사이트와 유클레이스가 주먹과 롱소드의 손잡이 부분으로 얼음 밑바닥을 깼다. 세루사이트의 주먹에서 피가 나서 스피넬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세루사이트는 못 본 척했다. 어느새 세루사이트가 마지막으로 주먹을 힘껏 때리자, 얼음벽이 박살 나며 손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세루사이트!”
얼음벽을 뚫고 나오자, 스피넬은 세루사이트를 다그쳤다.
“아니, 아무리 세루사이트의 근력이 우리 중에서 가장 세다고 해도, 스스로 해를 끼치는 프리스트가 어디에 있어요?”
세루사이트는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기에 있습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하 참. 이건 관용적 표현이에요. 그런데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넘어가죠.”
어느새 루시드는 사라졌었다. 치유의 마법을 쓴 세루사이트는 생명 반응 탐지를 하여 미간을 좁혔다.
“이쪽입니다.”
“역시 그 아이가 살던 곳으로 가나 봐요. 무의식이 바라는 장소를 희망해서 가는 것 같아요. 루시드에게 나지는 않았으나 자란 곳은 숲이고, 도시로 와서 집단 따돌림을 당한 곳은 학교이니, 학교에서 멀어져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 자연스럽죠.”
스피넬이 말하자 모두가 숙연해졌다. 그 따돌림은 어른들이 만든 차별로 인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모험가들은 루시드와 숨 막히는 추격전을 하다가, 외딴 산속에 집이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가 루시드의 집이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아이올라이트와 세루사이트는 추측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루시드는 멀리서 들려오는 스피넬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당신, 루시드 크리스탈이죠? 우리는 당신의 말을 들으러 왔어요. 우리는 당신에 대해 알고 있어요. 이대로는 우리가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요…!”
그 순간 루시드의 눈이 떠졌다. 수정처럼 맑은 눈에는 비참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내 마법은 사람들에게 위험해. 마법 능력을 갖추고 싶었는데, 이렇게 남을 해치고 싶지는 않았어…!”
루시드가 흐느끼자, 어디에선가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나타나 루시드에게 무언가 말했다. 루시드는 주춤하는 듯했으나, 이때 그 사람에게 이끌려 야트막한 산맥 너머로 넘어갔다. 스피넬 일행도 산맥 너머로 갔다.
“이 밑, 지하에 있습니다."
세루사이트가 생명 반응을 탐지하며 일행에게 알려주었다.
“지하라… 지하 대피소 같은 건가?”
“그러면 루시드를 이끌고 간 저자는 흑마법사일까요?”
“예언의 의도한 바를, 실행했다면 그럴 터입니다.”
아이올라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면 인제 어쩌지? 백마법사들은 루시드를 잡아다 처형할 게 뻔하고, 흑마법사들은 믿을 수 없는 미지의 세력이에요. 백흑의 마법대전에서 루시드라는 검을 날카롭게 벼려 전장에 내보내겠죠.”
“그러면 어떡해야 하지? 백마법사도 흑마법사도 믿을 수 없다면?”
“중간에 서 있는 자들이 있죠. 아메시스트, 모거나이트. 이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루시드에게 행복을 되찾아 주려고 노력할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일합시다. 루시드를 위해서.”
스피넬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선 해야 할 행동이 있을까요?”
“당장은 어렵습니다. 두 사람에게, 보고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합시다.”
일행은 피타클라의 루퍼스 마법 학교의 교장실로 돌아왔다. 모거나이트는 소식을 듣고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1. 루시드가 백마법사들에게 붙잡히지 않아서 다행. 2. 그런데 루시에와의 마법대전에 참여하게 되어서 걱정. 3. 그리고 모험가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이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우리도 백마법사로 보였을 겁니다.”
세루사이트의 말에 아메시스트가 자신의 의견을 얹었다.
“어차피 그들은 백마법사를 증오하고 있을 테니 아무래도 도망치는 게 더 안전한 길로 보였겠지.”
“이곳에서 교대로, 밤을 새우다 보면, 언젠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걸릴지 몰라요. 보급하기 편한 환경도 아닌데 흑마법사들이 지내고 있다면, 저 안에서는 자체 공급이 가능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흑마법사들의 루시드가 아닌, 모거나이트의 단짝으로 루시드가 남아있기를, 기대하고 기대합시다.”
“투명화 마법을 쓴 후 몰래 다가가 백수정 목걸이를 거는 방법도 있겠어.”
“좋은 생각이에요.”
드디어 백흑의 마법대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찰대에서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투명 투어멀린인 아크로아이트가 세 번 빛났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모거나이트 일행은 처음부터 이 예언이 조작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방해자를 치우고 루시드에게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모거나이트는 스피넬에게 투명화 마법이 걸린 상태로 루시에를 향해 조심조심 걸어간 뒤, 아래턱을 올려 쳐 기절시켰다. 백마법사들과 흑마법사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모거나이트는 루시드의 목에 캐모마일 조각이 된 새 백수정 목걸이를 던져 걸었다. 지휘관 두 명이 동시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되자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스피넬의 투명화 마법이 풀려 모거나이트는 얼어 붙어있었다.
“우리는 평화를 목표로 움직이는 마법 경찰 세오리프의 대리인들입니다. 모두 당장 전투를 멈추세요!”
스피넬이 모두에게 소리치자,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세오리프?”
“우리 세계의 마법 경찰?”
“진짜 세오리프 맞아?”
“세오리프의 대리인이, 맞습니다. 모두 협조 바랍니다.”
그러나 모두의 머리 뒤에 강력한 충격이 들어와, 시야가 검어졌다.
다시 눈을 뜬 곳은 수정 감옥이었다. 창살, 바닥, 수갑이 모두 백수정으로 만들어져 마법 사용을 차단해 주는 듯했다. 스피넬이 마법의 짜임새에 손을 대려 했으나 허공을 짚을 뿐이었다. 모두 함께 갇혀 있었다.
“마법 못 쓰는 마법사는 발톱 빠진 곰이라는 거지.”
스피넬이 냉소했다.
“그 사실이 맞긴 합니다. 그러나 세루사이트가 부수면, 더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선뜻 힘을 쓰기 어렵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흠. 출석 부르자. 안 온 사람 있으면 손 들어.”
“안 온 사람은, 손을 들 수 없습니다, 아이올라이트.”
스피넬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장난은 때와 상황을 가리면서 좀 해요, 아이올라이트.”
스피넬이 아이올라이트를 꾸짖자, 아이올라이트는 볼이 부어서는 있는 사람만 말하라고 정정했다. 세루사이트, 스피넬, 유클레이스, 루시드, 모거나이트.
“자기의 정적들을 한데 모아 가두다니, 대체 무슨 속셈이지? 수정 감옥이 그렇게 튼튼한가?”
아이올라이트의 혼잣말에 세루사이트는 감옥 창살을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손등의 혈관이 파랗게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었으나 깨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굉장히… 퍽… 튼튼한 감옥이군요.”
세루사이트는 침착하게 손에서 힘을 뺐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대로 다 함께 교수형을 당하나? 화형? 참수형? 자비롭게 무기징역?”
“왕실에 대한 반역죄는 사형이에요. 루시에는 이런 걸 바랐겠죠?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만 주위에 두고, 자기 이상을 옳다고 생각하고, 정적들을 고립시키는 것?”
“그는 당신의 혈육인데, 왜 예언을 조작하면서까지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세루사이트가 물었다.
“당신은 외동이죠? 그래서 형제라는 게 왜 권력을 두고 다투는지 모르죠?”
“예, 잘 모릅니다. 하지만 머릿속에, 넣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세루사이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드, 성격 많이 변했네.”
“내 외로움에 날카로워졌을 뿐이야.”
모거나이트는 안타까움에 눈썹이 내려갔다.
“그러니까 자기 연민이라는 말이죠? 세루사이트는, 아니 모두는 각자의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어요. 우리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했는데, 같이 갇힌 이 상황에 예의상 ‘미안하다’라고도 안 하는 게 맞아요?”
“스피넬. 저들은 열 두세 살밖에 보이지 않지 않나. 미숙함을 이해해 주게.”
“우리는 저 녀석 때문에 얼음판에 갇혀 죽을 뻔했어요. 그걸 잊으면 안 되죠?”
“내가 이렇게 된 건 어른들 탓이라고요.”
“아 진짜 한 마디도 안 지네!”
스피넬이 폭발하려고 하자 유클레이스가 막아 세웠다.
“지금 어린애들에게 무슨 추태를 부리는 건가? 연장자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스피넬은 그에 반박하려 했지만 루시에가 휘하 장병들을 끌고 몰려와 스피넬은 입 속의 말을 삼켰다.
“소란스럽군. 역시 사회 부적응자들의 모임인 흑마법사들 답게 이제 내부 분열 중인가?”
“흑마법사들을 비하하지 마! 이 지옥 같은 사회에서 사회에 적응을 한 건 악마들뿐이겠지!”
루시드가 지지 않고 맞섰다.
“지옥이라니 심한 말을 하는군.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 내 왕국은 천상이다.”
“어련하시겠어. 나를 백수정 목걸이가 없으면 악한 존재의 본심이 나오게 한 것도 너희들 짓이잖아!”
“글쎄? 나는 모르겠는데. 우주의 뜻이 예언이라면, 나는 별들을 움직여 우주의 이치를 바꿀 뿐이다.”
“예언은 네 왕권 획득을 위해 조작되었겠지!”
“네게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이렇게 괘씸하게 군다면 알 자격이 없다.”
“…그 소식이 뭐지?”
루시드는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너희는 살아서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단, 루시드 크리스탈이 라베우크의 마법사 사냥에 협조한다면.”
“그게 무슨 뜻이야, 대체? 마법사가 마법사 사냥에 협조하다니?”
“너는 알고 있겠지만, 라베우크에서는 현재 가축에서 옮은 전염병으로 마법사를 원인으로 몰고 있다. 너는 마법사로서 마법에 의지해 마법사들이 자취를 찾아 그들을 처벌한다.”
루시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더 많은 피가 흘러야 저 녀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수락하겠다. 단, 나머지 사람들은 즉시 풀어줘.”
곳곳에서 큰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루시드, 안 돼!”
“크리스탈, 그렇게 할 것까진…”
루시드는 결연한 목소리로 다짐했다.
“다들 시끄러워! 이건 나의 루시에의 일이야. 간섭하지 마!”
“내가 어떻게 루시드를 두고 갈 수 있겠어. 나도 같이 가!”
루시드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모거나이트를 보다가 수락했다.
“좋아. 모거나이트는 내 친구니까 같이 가도 좋아. 하지만 나머지는 안 돼. 당신들은 외부인이잖아.”
“어차피 우리도 의뢰받은 일은, 당신을 정상 상태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같이 갈 의무는, 없습니다.”
루시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다 나누었나? 시그마에서 라베우크로 가는 마차는 이미 예약해 두었다. 나머지 당신들은 어디로 내보내야 하지?”
“우린 세계를 건너왔어. 세오리프의 의뢰를 받고. 그러니 거기로 돌아갈 거야.”
“함께 해서 뭐 같았고 다시는 보지 말죠.”
스피넬이 툭 던지는 말을 해도 루시에는 딱히 화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제 자기 왕국에서 정적을 치웠으니 그 기쁨을 즐기는 듯했다.
스피넬은 세오리프가 준 세계 간 이동의 마법이 깃든 두루마리를 읽었다. 두루마리를 읽자 익숙한 느낌이 찾아왔다.
“안녕, 잘 있어, 얘들아.”
“안녕히, 지내시길.”
“이제는 무사히 지내길 바라네.”
“모거나이트, 잘 지내요. 루시드는 뭐… 잘 지내든가 말든가.”
네 사람은 처음으로 순간이동을 했었던 마법진에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임무는 달성하셨습니까?”
“달성하긴 했는데요…”
스피넬이 루시드와 모거나이트가 내린 결정에 관해 얘기하자 세오리프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몇 번을 보아도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둘 다 생존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할지…”
스피넬이 나섰다.
“나, 다음 의뢰 있으면 받아들일게요. 다음에도 저 세계에 문제가 생기면 알려주세요.”
나머지 세 사람도 스피넬의 말과 같은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필요해질 때 다시 부르겠습니다.”
세오리프는 마법을 써서 어디론가 떠났다. 떠난 자들은 제각기 각오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초여름. 여기저기에서 앞다투어 가지각색의 장미가 피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장미 축제에 참여할 게 보나 마나 뻔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서 아이올라이트는 유클레이스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 고지식한 엘프를…!
물론 유클레이스를 끌고 나오는 건 쉽지 않았다.
“며칠 뒤에 장미 축제가 열린다는데 가볼래요?”
“꽃에는 큰 흥미가 없네.”
“꽃 관련해서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파는데도요?”
“여행하는 이에게 기념품은 짐일 뿐이네.”
아이올라이트는 스피넬에게 그 고지식한 엘프에 대해 뒷담화하며 스피넬에게 어떻게 하면 유클레이스를 끌고 가서 데려갈 수 있을지 물었다. 스피넬은 아이올라이트에게 그럴듯한 맞춤식 대답도 제안했다.
“대련하자고 하는 건 어때요? 주최에게 알리고요.”
“일이 꽤 커졌잖아…!”
“일이 커지면 어때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이 정도 이벤트 쯤이야.”
“아니, 나 그래서 유클레이스 같은 근육 뇌 엘프랑은 사귀기 싫다고!”
스피넬은 키득키득 웃었다.
“네네 그러시겠죠. 둘이 잘 되면 나한테 딸기 타르트 하나 사줘요.”
“절대 없어!”
‘제국 황제 제거 작전’의 그 바드와 팔라딘이 연애 직전이라는 과장된 헛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이상하게 협조적으로 굴었다. 신비로운 조화로 아이올라이트와 유클레이스는 인파 속에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순조롭게 무대로 올라갔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졌다. 유클레이스가 만일 진상을 알게 된다면 스피넬이 유클레이스에게 욕을 먹는 진풍경을 모두가 볼 수 있을 터였다.
“아아, 그, 막상 올라오고 나니 너무 잘 보이는 자리인데.”
유클레이스는 무대 위에서 떨었다. 반면에 전투 바드가 되기 전에도 공연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아이올라이트는 긴장이 엿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 생각만이 꿈틀거렸다. 유클레이스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해!
유클레이스는 아이올라이트에게 롱소드를 겨누며 달려갔다. 아이올라이트는 연주하는 바이올린으로 마력 파동을 일으켜 유클레이스를 밀쳐냈다. 그러고는 정신적으로 혼란을 주는 소나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유클레이스는 이곳이 바다인 줄 안듯이 무대 위에서 어푸어푸하며 수영했다. 그러다가 롱소드를 놓쳤다. 깔끔한 아이올라이트의 승리였다.
결투가 끝나자, 유클레이스는 무대 위에서 누웠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헉… 헉… 멋진 대련이었다. 네게도 만족스러운 승부였는가?”
“동감해. 그리고 실력 많이 늘었네, 우리.”
“내가 졌으니 술 한잔 사겠다. 괜찮겠나?”
아이올라이트는 이성의 끈을 잃고 유클레이스가 제안하자마자 대답해 버렸다.
“응!! 응!! 절대로 응!!!”
유클레이스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올라이트는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이었다.
아이올라이트와 유클레이스는 술집으로 갔다. 유클레이스는 보드카를 주문했고, 아이올라이트는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안주로는 소시지를 골랐다. 안주와 술을 먹고 마시며 두 사람이 취했을 무렵, 아이올라이트가 유클레이스에게 질문했다.
“유클레이스. 혹시 우리 관계가… 뭐라고 생각해?”
“좋은 질문이라 생각하네. 내가 앞서서 그대를 지키고, 그대는 뒤에서 일행의 지원을 하거나 공격하고.”
아이올라이트는 심호흡하고 다시 물었다.
“더 진전시켜 볼 생각은 있어?”
“더 진전시키는 것이란…?”
“동료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아직 연애할 생각은 없지만, 친구 관계는 마음에 든다.”
“그렇지? 우리 친구부터 시작할 수 있지?”
유클레이스는 선을 그었다.
“미래는 장담 못 한다.”
“그래. 그 미지의 미래에서 나를 기다려 줘.”
“타인에게 복수를 다짐한 자가, 내 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우습지 않겠나?”
“유클레이스는 복수의 팔라딘이었어? 얌전하게 생겨서 의외네.”
“그게 어떻게 되었나 함은…”
유클레이스는 슬라브니에 인접한 식민지 출신이었다. 그에게는 누이 에레메이파이트가 있었다. 누이는 슬라브니 어를 가르치는 국어 교사였다. 어느 날 그가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누이를 끌고 가려는 군인들과 마주쳤다. 유클레이스는 누이가 죽는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한다고 말하자, 그들은 누이 대신 그를 끌고 갔다. 훈련소를 지나 그는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 전투 중에는 다른 식민지의 저항군과 싸우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팔라딘으로 각성했다. 실력이 올라가자, 그의 계급은 더 올라갔다. 유클레이스는 사람 써는 방식이 발달했을 뿐이라며 냉소했다. 그러다 유클레이스는 고향의 저항군과 싸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법 검사로 각성한 누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누이의 실력은 자신에게 미치지 못했다.
“누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항복하십시오.”
“저항군은 끝까지 저항해야 해. 우리나라를 되찾고 싶으니까.”
“이대로 가다간 생명이 위험합니다, 누님!”
“목숨이 아까웠다면 네가 보호해 준 내가 전방으로 갈 일도 없었겠지. 날 죽여라. 명예롭게 전사하게 해달라고!”
그러고는 소지하고 있던 단검으로 자기 목을 찔렀다. 유클레이스의 눈과 누이의 눈이 마주쳤다.
“안돼!”
유클레이스는 항복 선언을 하고 에레메이파이트를 업고 저항군 의무실로 데려갔다. 그러나 과다출혈이 너무 심해 돌이킬 수 없다는 군의관의 소견을 받았을 뿐이었다.
“유클레이스…”
에레메이파이트가 그를 겨우 불렀다.
“누님! 어째서 자결하려 하십니까!”
“제국군의 포로를 어떻게 대하는 지는 악명이 높잖니? 나는 그 사람들 손에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을 받는 대신… 내 생명을 스스로 끊겠다.”
“하지만… 그렇지만… 누님, 저는 오로지 누님을 지키려 여기까지 왔는데, 왜 자진해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셨습니까.”
“나라를 빼앗긴 사람이 흘리는 눈물 때문에, 나도 오랜 고민 끝에 검을 들고 나섰어. 나는 예감했단다. 우리는 언젠가 전선에서 이렇게 검을 맞댈 거리고.”
에레메이파이트의 팔에 점점 힘이 사라졌다.
“부디… 이 누이의 신념을 가져가라. 이것이 네 누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유언이다. 꼭, 제국이 그 만행에 대한 대가를 갚게 하렴.”
유클레이스는 제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에레메이파이트의 양손을 꼭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가보마. 사랑하는 내 동생….”
“누님, 누님…!”
유클레이스는 누이의 손을 잡은 상태로 처절하게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유클레이스는 시신을 옮기는 들것을 보며 스스로 다짐했다.
제국에 대해 복수를 하겠다고. 남은 생애 동안 영원히.
그는 먼 훗날 복수에 성공했다.
“네가 왜 그렇게 제국을 감정적으로 싫어했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얘기해줘서 고마워.”
“아니. 털어놓으니, 마음이 가벼워지는군.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거든. 그러면 자네의 삶은 어떠했나.
“내 삶의 고통은 유클레이스에 비하면 별것 아닌데도 괜찮아?”
“서로 고통을 비교하자는 게 아니니, 괜찮을 걸세.”
“좋아. 그럼…”
아이올라이트는 악마 혼혈이라는 설이 나도는 바드였다. 아이올라이트는 유각종일 뿐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정절을 의심했다.
유감스럽게도 아이올라이트는 인간, 유각종 모두와 어울리기 힘들었다. 악마의 자식이라고 꼬리표가 붙은 탓이었다. 하지만 아이올라이트는 뛰어난 작곡과 악기 다루는 실력을 묻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올라이트는 실력을 갈고닦아 유명한 바드가 되었다. 그리고 연합으로부터 플로리스 다이아몬드를 회유하자는 임무를 받았다. 아이올라이트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제국의 생체병기를 반드시 제국의 손에서 구해내고, 연합군에서 공로를 쌓아 이름을 드높일 수 있기를.
아이올라이트는 성공해 냈다. 그리고 그는 가족처럼 소중한 동료를 얻어냈다.
“어떻나. 털어놓으니 후련한가?”
유클레이스가 묻자, 아이올라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확실히 내 마음의 짐이 줄어든 기분이야. 유클레이스랑도 조금 더 특별한 사이가 된 것 같고. 그렇지?”
“나 또한 그리 생각하네.”
아이올라이트는 관계의 진전에 대한 좋은 예감을 느끼며 샹그리아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둘이 함께 오붓하게 장미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페이스 페인팅에서 스피넬은 푸른 장미, 세루사이트는 하얀 장미를 골랐다.
“세루사이트, 그러고 보니 푸른 장미의 꽃말은 기적이고, 하얀 장미의 꽃말은 새로운 시작이래요. 나는 자연법칙을 흔들어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고, 세루사이트는 프리스트로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으니 되게 잘 어울리는 꽃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스피넬. 우연히 서로의 머리카락 색에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내가 일으킨 가장 큰 기적은 플로리스 다이아몬드가 세루사이트가 된 것이에요.”
세루사이트는 작게 미소했다.
“세루사이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피넬은 뺨에 그려진 장미를 사랑스럽게 보다가 세루사이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키스했으니, 돌려주세요.”
스피넬은 뻔뻔스레 제 볼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러자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스피넬은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장미로 만든 실내장식 소품을 보자 스피넬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리 돔 안에 든 프리저브드 장미, 도자기로 된 장미 상, 장미 가랜드…
“세루사이트. 우리 돈 좀 모아서 집 살래요? 집에 저런 것들이 놓여있으면 엄청나게 사랑스러울 거예요.”
“동의합니다. 다만 사제는, 품위유지비만 교단에서 받아쓰기 때문에, 집 같은 비싼 것은 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나야 주문 시전 아르바이트하면 돈 벌기 어렵진 않은데, 내 돈으로 살까요?”
“괜찮습니다. ‘저’도 같이 모아서 삽시다. 그래야 두 사람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스피넬은 끄덕이고는, 세루사이트에게 물어보았다.
“세루사이트가 자신을 세루사이트라고 지칭하지 않고 ‘저’라고 지칭하는 건 무슨 의미인 건가요?”
“세루사이트는 자아가 아직 희박해서 자신을 스스로 남처럼 부릅니다. ‘저’는 제 주장이 강하게 들어간 말을 할 때 습관적으로 내뱉는 호칭입니다.”
“그런 이유가 있을 정도야. 세루사이트는 뭐로 자신을 지칭해도 귀여워요.”
다음은 식품이 있었다. 장미 잼, 장미 꽃잎 차, 장미 젤리 등… 스피넬은 호쾌하게 종류별로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이건 먹고 나면 사라지니까.
그다음에는 장미 화장품이 있었다. 스피넬은 바디 로션과 핸드크림, 비누 등을 사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마지막으로는 식당이 있었다. 대륙 각지 풍의 요리 향기가 풍겨 나왔다. 테이블에서는 구매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스피넬은 장미 젤리의 봉투를 풀었다. 은은한 장미향이 퍼져나갔다. 장미 젤리를 씹자, 속에 있는 장미 잼이 팍 터지며 입 안을 달콤하게 물들였다.
“이거 맛있어요. 세루사이트도 같이 먹어요.”
“예, 감사합니다.”
세루사이트는 장미 젤리를 먹으면서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식품보다는 화장품에서 더 많이 느껴지는 향입니다만, 그런대로 맛있습니다.”
“그렇죠? 장미 향이 화장품 향인 게 아니라 화장품이 장미 향인 거예요!”
스피넬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두 사람의 쇼핑 (세루사이트는 아이쇼핑을 하고 스피넬은 실물 쇼핑을 했다.) 이후 그들이 들린 곳은 술집이었다. 그때, 스피넬은 칸막이 너머 익숙한 색의 청보라색과 흰색-하늘색 두 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황급히 칸막이 아래쪽으로 숨었다.
세루사이트는 의아해했다.
“스피넬은 왜…?”
세루사이트는 이유를 묻기도 전에 칸막이 안쪽으로 끌어 내려졌다.
“뭡니까… 대체 뭡니까?”
스피넬의 제발 좀 조용해달라는 손짓과 발짓.
“쉿… 아이올라이트 눈 좀 봐요. 저건 사랑이라니까요? 세루사이트도 저런 시선 내 눈 보면서 봤을 테니 잘 알걸요?”
스피넬은 고함치듯 속삭였다.
“와… 저거 저거 다리 꼬고 턱 짚은 거 봐. 아이올라이트 저 사람 지금 목석같은 유클레이스를 유혹하고 있는데요? 우리랑 다니기 전에는 무슨 선수였어? 저 사람이 저러는 건 처음 봐요.”
“선수라. 운동선수 말입니까?”
“아뇨, 그거 말고 연애에 대해서 한 말이에요.”
“그렇습니까.”
“스피넬이나 세루사이트는, 어느 쪽입니까?”
“뭘 기대해요? 나도 숙맥이고 세루사이트도 숙맥이죠.”
스피넬이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선수면 스피넬은 숙맥이다, 주제 파악 잘하네.”
아이올라이트가 갑자기 스피넬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덩달아 유클레이스까지.
“그대들, 거기 있었나?”
“히익…!”
스피넬은 세루사이트를 데리고 도망치려 하였으나 아이올라이트가 더 빨랐다. 그날 밤 스피넬은 4인석 의자에 정신적으로 묶인 채 알코올 강제 섭취형을 당했다.
세오리프는 정확히 2주 뒤에 스피넬 일행에게로 왔다.
“여러분. 큰일이 났습니다. 루시드 크리스탈이 실종되었습니다.”
스피넬은 깜짝 놀랐다.
“아니, 왜요? 라베우크에서 잘 못 지냈나요?”
“아니요. 충분한 적응 교육을 하고, 성년이 되어 교육이 끝나자마자 임무를 받아 활동했었습니다. 이 실종 건에 대해서는, 실력 좋은 모험가들이 조사할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을 불렀습니다.”
“부디 그가 안전하기를 바라네.”
유클레이스의 말에 세오리프가 답했다.
“저희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 이리 오시죠.”
세오리프는 그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포탈을 열었다. 그들은 한 명씩 차례차례로 들어갔다.
루시드의 집에 들어간 네 사람은 조사를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루시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스피넬이 책상 위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루프레히트가.
당신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편지에는 뒤 내용이 없었다. 집 안에서는 달리 중요해 보이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대체 누굴까? 모거나이트?”
“루시드는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모거나이트에게 ‘당신’이라고 부르지는 않지 않았을까요?”
“루프레히트는, 루시드의 가명이겠죠?”
“비슷한 이름이니까 그렇지 않을까?”
“일단 모거나이트의 집에, 가봐야겠습니다.”
그들은 문에 노크했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모거나이트도 부재중인 듯했다.
“강제 돌입해야 해, 말아야 해?”
아이올라이트가 물었다.
“일단 강제 돌입하죠. 위급 상황이니까.”
곧이어 세루사이트의 주먹이 문으로 향하며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잔해가 흩날렸다.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간 모거나이트의 집에는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만한 장난감과 국어, 시그마어, 수학 등등의 교재들이 있었다.
“루시드와 모거나이트 사이에 아이가 있는 걸까?”
“둘이 아기 만들 사이였어요?”
“우리 세계와 이쪽 세계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면, 우리가 우리 세계로 돌아간 뒤에 몇 년이 지나갔다가 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둘이 부부인데 별거하면서 한 마을에 있는 것도 이상하니, 이 아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오지 않은 아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조사가 막혔다고 판단한 스피넬은 일행에게 탐문조사를 하자고 지시했다.
“루프레히트? 꼭꼭 숨은 마법사들을 우수한 실력으로 찾아내 처형대에 세우는 성실한 친구지.”
“루프레히트와 모거나이트는 서로 깊은 우정을 쌓은 듯 보였어요. 서로 친하게 지낸 기간이 긴 것일까요?”
“모거나이트는 마법사를 사냥하러 타지에 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루프레히트가 안 보이네요. 마을을 떴나? 루프레히트나 모거나이트 모두 여행이 잦은 사람이라 안 보여도 그러려니 하지만요. 아! 한 사흘 전에 영주 성에 가는 걸 봤어요.”
스피넬이 일행의 표정을 보자 모두 무언가 건져서 다행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영주 성으로 가죠.”
“그럽시다.”
그들이 광장을 지나치려 하자 소년이 신문을 건네려고 하였다.
“호외요, 호외!”
유클레이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소년은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해서 동전을 표현했다.
“그건 호외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클레이스는 소년에게서 호외를 구매했다. 일행 모두가 유클레이스의 주변에 빙 둘러섰다.
호외에는 1면에 화형대에 묶여있는 자가 ‘레나테 프륄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날짜상으로 보면 오늘 형이 집행될 것이라는 소식이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 유명 이단심문관 루프레히트, 마법사 레나테 프륄링을 잡지 못하여 중앙에서 온 이단 심문관들이 레나테를 화형대에 세우다.’
소년이 멀어지자, 스피넬 일행은 곧장 추측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루시드가 레나테 프륄링과 무슨 사이였는지 궁금해졌어요.”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편지에서 말한 ‘당신”이 모거나이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의 다른 친구 레나테 프륄링을 마법사라는 이유로 화형에 처한 걸 원망하면서.”
“영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편지를 쓰다 말고, 영주 성으로 쳐들어갔다던가.”
“일리 있는데, 그렇다면 루시드의 신분이 꽤 높아야겠어요. 영주를 ‘당신’이라고 할 정도면.”
“여기에서의 조사는 이미 다 한 것 같으니, 영주의 성으로 가자.”
그들은 영주 성으로 향했다. 영주 성은 굽이치는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하얀 장미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한참 걸린 뒤에야 정원에서 정문으로 갈 수 있었다. 그만큼 큰 성이었다. 성의 정문에는 ‘블루멘크란츠 성’이라 적혀있었다.
문패가 흠집 없이 반짝반짝한 것을 보면, 평소에도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네 사람이 초인종을 올리고 얼마 안 지나 집사인 듯한 사람이 도착했다.
“무슨 용건으로 방문하셨습니까?”
“우리들은 마법사 사냥꾼이고, 이 영지에서 활동해도 괜찮은지 영주님께 여쭙고 싶어요.”
아이올라이트가 이렇게 질문한 것은 이 일행에서 거짓말과 약간의 연기를 가장 태연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스피넬은 순간 위기 모면은 잘하나 오래가는 거짓말은 서툴렀고, 세루사이트나 유클레이스는… 기대하지 말자는 심정이었다.) 아이올라이트의 거짓말이 통한 듯이 집사는 성의 문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모두 유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는 영주 성에 들어가기 전, 이렇게 말했다.
“이 강의 이름은 며칠 전 블뤼텐바흐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이 바뀐 이유가 있나요?”
“영주님의 지시입니다. 그 외에 자세한 이유는 모릅니다.”
집사가 정문을 열어주었다. 네 사람은 귀족의 성에 찰만한 교양 있는 걸음걸이로 걷고자 애를 썼다.
“영주님의 집무실은 성의 꼭대기에 있습니다.”
집사는 그리 말하고 일행들과 함께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하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영주님이 집무실을 왜 꼭대기로 올렸을까?”
“글쎄. 여기가 난장판이 된 이유랑 관련이 있나? 여기를 청소하기 전에 손님이 오면 곤란해지니까?”
“왜 곤란해지는데?”
“쉿, 너만 알고 있어.”
그리고 귓속말이 오가는 듯 이 거리에서 듣기는 힘들어졌다. 여기서 갑자기 투명화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스피넬은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의 내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손님. 그 방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스피넬이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집사가 주의를 주었다. 힘겹게 들은 한마디를 스피넬은 잊지 못했다.
“여기 좀 봐. 깨진 백수정 탄환이 있어. 누굴 쏜 걸까?”
마침내 영주의 방. 영주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모두를 환영하며 인사하자 네 사람은 영주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스피넬이 돌직구로 용건을 말했다.
“루프레히트와 모거나이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시나요?”
영주는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모거나이트는 여행을 갔네. 그리고 루프레히트는… 블뤼텐바흐 강에서 익사한 시신으로 발견됐네.”
“어떻게 그런 일이!”
“참혹한 일이군요.”
“그럴 수가…”
“언제, 말입니까?”
세루사이트의 말에 영주는 침통한 표정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글쎄, 그것은 잘 모르겠군. 오늘 밤에 제사가 치러질 예정이네.”
“그의 시신이 발견된 날짜는, 언제입니까?”
“세루사이트 공은 궁금한 것이 참 많군.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여러분이 마법사 사냥꾼이며, 이 영지에서 활동해도 되는지 물어보려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루프레히트 공의 사망을 조사하려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일은 우리 영지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 귀공들은 임무에 충성하기를 바라네.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고, 절친한 친구의 죽음에 나도 슬퍼하고 있는 참이니 부디 내 가슴을 찢어발기지 말아달라네.”
영주의 축객령에 네 사람은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네 사람은 영주 성에서 충분히 멀어졌을 때 두 번째로 추측을 쏟아냈다.
“루프레히트가 동료 마법사들을 화형대에 올린다는 죄책감이 쌓이고 싸여 레나테 프륄링이 처형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닐까요?”
“루프레히트는 루시드 시절 많은 백마법사를 죽여왔을 때니, 살인에 대한 죄책감은 옅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대체 루프레히트의 시신 발견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물었더니 영주가 축객령을 바로 날렸지? 감추고 싶은 게 있나?”
“어찌 되었든, 어느 쪽의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조사해 봅시다.”
“외부인이, 그것도 죄질이 나쁜 마법사의 화형에 끼어들어 유의미한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만무하나, 세오리프가 준 명령을 이미 수행했으니, 레나테 프륄링의 화형 집행식과 루프레히트의 장례식를 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갑시다.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자.”
마침내 레나테 프륄링의 화형식이 시작되었다. 나무 기둥이 박혀 있었고, 그 위를 땔감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나무 기둥에는 레나테 프륄링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묶여있었다. 사형집행인이 기름을 땔감에 적시고 불을 붙이자, 사람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마법사! 내 가축을 병 걸려 죽게 했어!”
“내 딸도 상태가 위독하다고! 죽여!”
“마법사에게 죽음을! 우리 블라우로젠 영지에 평화를!”
기름에 붙은 불이 레나테 프륄링에게 옮겨붙자, 레나테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비명을 내기 시작했다.
그때, 밀려드는 사람들을 헤치며 한 소년이 불길로 뛰어들려 했다.
“엄마… 엄마…!”
사람들은 아이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 아까 보았던 블라우로젠 영주가 아이를 뒤에서 껴안아 붙잡아 세웠다.
“안 된다. 너는 죄가 없어. 너는 살아야 한다. 키안 프륄링!”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영주님, 제발 엄마 살려주세요!”
영주는 아이를 껴안았고, 불도 거세게 타오르며 레나테의 비명도 더 커졌다. 아이는 더 거세게 버둥거렸고, 영주는 더 큰 힘을 써서 아이를 가로막아야 했다. 곧이어 불길이 사그라들었고, 일행은 불길 너머에서 어쩐지 낯이 익은 마법사 한 명을 발견했다. 세루사이트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모거나이트, 아니십니까?”
“네, 맞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여기에서는 로젠콰츠로 살고 있어요.”
“이런 일로 만나서, 유감입니다.”
“저도 유감이에요. 마법사 사냥은 즐겁지 않은 일이에요. 가끔은 소중한 친구의 친구를 화형대에 올려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스피넬은 로젠콰츠에게 물었다.
“실종되었던 루프레히트가 익사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영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았나요?”
“네? 뭐라고요?”
로젠콰츠는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충격받으실 만합니다. 저희도 충격받았으니까요.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루시드, 고생만 하다가 이렇게 돌아가 버리다니…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레나테와 나, 셋이 함께 있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데…”
일행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지만, 영주님의 행동에 여러 가지 수상한 점이 있었네.”
유클레이스는 일행에게서 나온 의견을 모두 전해주었다. 로젠콰츠는 모든 의견이 그럴듯하니, 계속 주시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섯 사람은 루프레히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루프레히트는 희고 푸른 장미에 둘러싸여 고요히 눈을 감은 채 관 안에 누워있고, 관 뚜껑 위로 신부가 장미 꽃잎을 한 장 한 장 떨어뜨리며 기도했다. 그러자 장미의 달콤한 향이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고요함에 잠긴 이여, 신의 백성이 되어 그들과 함께하라. 신께서는 망자의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해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그대는 시간의 흐름이 없는 영원한 평온과 고요 속에서 살아가리라. 그것은 신의 백성인 우리에게 마지막이자 최초의 안식이니."
장례식이 마무리될 즈음, 다섯 명은 미리 받았던 흙을 관 위로 뿌렸다. 솔솔 흙을 뿌리며, 그들은 루시드 크리스탈과 이별했다. 부당한 삶을 살았던 그가 하늘에서는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장례식도 끝났으니, 우리는 고향 세계로 돌아가겠네. 새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주시기를 바라네.”
유클레이스의 세오리프에게 올린 보고를 끝으로 임무가 완수되었다.
세오리프는 2주 뒤에 다시 찾아왔다.
“잘 오셨어요. 우리들은 루프레히트 사망 사건에 대해서 진상이 궁금해서 미칠 노릇이었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스피넬의 말에 세오리프가 다급하게 말했다.
“키안 프륄링은 블라우로젠 영주의 양아들로서 카를하인츠 폰 블라우로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시그마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무신론을 전파하며 교황청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예에?”
모두가 놀랐다.
“카를하인츠 폰 블라우로젠은 대체 어떤 생각이죠? 어머니의 복수를 실현하려고 하는 걸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싸움이 멈추도록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희로서는 라베우크의 내전 동안 라베우크를 치는 것이 유리하나, 국제 마법 경찰로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최대한 휴전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번 임무도 잘 부탁드립니다.”
포탈을 지나 마이엔 광장으로 가자,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마법사 손에 마법사가 올바르게 심판되었다 볼 수 없어」
「마법사 사냥은 국방력 약화를 일으키는 구시대의 잔재」
「내 가축과 남편의 죽음에 마법사들은 죽음으로 사죄하라」
그야말로 양쪽이 팽팽하게 맞서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점차 마법사 사냥 반대의 의견을 내놓은 이들이 밀리기 시작하다, 영주와 카를하인츠의 개인 교사였던 로젠콰츠도 마법사이니 그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잠깐, 안 돼, 모거나이트는…!”
스피넬은 낮게 부르짖으며 발을 동동 굴렀으나 지금 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 농민이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비보입니다. 로젠콰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인질은 한 명뿐이라도 곧 힘을 발휘하기 마련인데, 코앞까지 와있는 카를하인츠가 자신은 영주의 비밀을 알고 그를 꼭 죽여야 한다고 했답니다. 어쩌죠? 여러분? 어떻게 하죠?”
“일단 그들도 마법사이니 화형에 처합시다! 화형에 처한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그 사람의 말에 유클레이스는 검을 들고 뛰쳐나갈 뻔했다가 아이올라이트가 간신히 말했다.
‘흥분한 영지민들한테 불나방처럼 뛰어갈 일 있어요?’
나머지 사람들도 식겁하며 유클레이스를 저지했다. 그제야 유클레이스는 분노를 진정시키며 낮게 말했다.
‘내 긴 생애 동안 추악함에 대한 분노는 익숙해지지 않는군.’
'우선 우리, 몸을 좀 피합시다. 여기에 있다가 보면, 전쟁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세루사이트의 말에 모두 허겁지겁 블라우로제를 떠났다. 그리고 네 사람은 성벽 안쪽에서 솟아나는 연기를 보았다.
“복수를 위해 자기 양아버지를 죽으라고 내버려 두는 인간도 인간이지만, 자기가 처형한 마법사의 자식을 양아들로 맡아 키웠다는 게 소름이 돋아요, 그저.”
스피넬이 냉소적으로 말하면서 수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백수정 탄환!”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뜻입니까?”
“강의 이름이 블뤼텐바흐, 즉 꽃의 강으로 바뀐 건 영주로서 루프레히트를 추모했다는 뜻이죠. 영주가 집무실을 꼭대기로 옮긴 이유는 루프레히트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일 거고. 원래의 집무실이 난장판이 된 이유도 루프레히트가 전투를 했다는 증거가 되고, 루시드가 미처 보내지 못한 편지의 내용은 ‘당신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거였죠. 루프레히트는 그 편지를 쓰다가 영주의 집무실로 달려갔고, 전투를 치르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백수정 탄환에 맞아 영주 성 둘레의 강에 빠지게 된 거예요.
“조금의 비약이 있지만 그럴듯한 추리군요.”
유클레이스가 스피넬의 추측에 감탄했다.
세루사이트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함께했던 사람을 죽이고, 그 죄책감으로 지명을 바꾸는 것은 이상합니다. 세루사이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여러 가지가 뒤섞이는 법이네.”
유클레이스가 설명했다.
“어쨌든 카를하인츠 폰 블라우로젠, 아니 가문 성을 떼고 불러야 하나? 어쨌거나 우리는 카를하인츠와 교황청 간의 싸움을 중재해야 해.”
“카를하인츠는 자신의 무신론 전파를 위해 수도로 향할 테니, 진입 방향을 쫓아가서 그 뒤에서 접선 시도를 하는 방법이 있고, 반대로 카를하인츠의 군대가 있는 곳을 향해 사람을 보내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세루사이트는, 현재가 나아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도 후자.”
“나도 후자가 좋다고 생각하네.”
사절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카리스마가 있는 아이올라이트가 맡게 되었다. 일행은 수도 근처의 도시 폴뢰르크에 가서 대기하고, 아이올라이트가 카를하인츠와 독단으로 만나는 형식이었다.
아이올라이트는 폴뢰르크에 가서 카를하인츠 반란군을 기다렸다. 폴뢰르크는 피난민으로 북적였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렸고, 울음소리에 조용히 좀 시키라고 고함치는 남자들도 있었다. 아이올라이트는 로젠콰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오랜만이네?”
로젠콰츠는 식겁해서 뒤로 돌아보았다.
“누구신지… 아! 세오리프의 용병 아니십니까. 전과 얼굴이 그대로라 알아볼 수 있었어요.”
“아이올라이트 스텔라, 맞아. 처형 전 영주 성에서 탈출했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야?”
“쉿! 여기에서 이단심문관으로 유명한 그 이름으로 부르면 제가 위험해져요. 블루메 아가테라고 불러주세요.”
“미안. 미처 신경을 못 썼어. 그럼 그렇게 부를게.”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세오리프의 임무를 수행 중이야. 카를하인츠와 교황 사이의 중재를 끌어낸다는 임무를 맡았어. 같이 카를하인츠한테 가줄 수 있을까?”
“물론이죠. 안 그래도 달래려고 찾아가자는 계획을 세웠었어요. 둘이면 거뜬하죠.”
두 사람은 폴뢰르크 코앞까지 온 반란군 전선으로 다가갔다. 물론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어 무기를 쓰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면서.
“민간인인가?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될 테니 피난민 행렬에 합류해라.”
“나는 카를하인츠의 대모다! 우리는 너희를 적대할 마음이 없는 마법사다! 너희들의 수장 카를하인츠를 만나게 해달라!”
반란군이 로젠콰츠의 말을 카를하인츠에게 전달한 듯 반란군 쪽에서 소리쳤다.
“용건이 무엇이냐!”
“이 전쟁을 말리는 것!”
“우리는 전쟁을 그만둘 이유가 없다!”
“일단 카를하인츠한테 알리기나 해!”
잠시 침묵이 있었다. 카를하인츠도 지금쯤 각을 재고 있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막사 가장 뒤쪽으로 오라!”
“알겠다!”
두 사람은 반란군 막사 가장 뒤쪽으로 갔다. 그러자 야전용 의자에 앉은 카를하인츠의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로젠콰츠 선생님.”
“편히 부르렴. 나는 이제 선생님이 아니니.”
“제 마음속에서 로젠콰츠 님은 영원한 제 스승님입니다.”
“마법사 사냥꾼으로 살아온 나다. 내 가식과 죄악이 너를 분노케 하지는 않고?”
“제 아버지도 마법사 사냥꾼이었고, 어머니는 당신의 손으로 화형대에 묶인 자는 아닙니다. 다만 제 부하 중에서 당신의 손에 가족이 불타버린 자들이 적지 않을 테니, 행동을 조심하십시오.”
“알았어. 고맙구나.”
“그나저나 옆에 있는 분은 누구십니까?”
“소개할게. 내 마법사 동료인 아이올라이트 스텔라라고 한다. 이쪽은 내 대자, 카를하인츠다.”
카를하인츠는 조금 경계하면서 인사했다.
로젠콰츠는 할 말을 신중하게 고르며 말했다.
“우리의 영주 성이 성난 주민들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영주는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후회했단다. 아무리 교황청이 ‘레나테를 처형하지 않으면 다음은 너희다’라는 메시지를 주었어도, 끝까지 발버둥 쳐야 했어야 했는데…’ 라면서. 너, 키안 프륄링의 봄을 빼앗은 것, 나라 전체에 대한 복수심을 갖게 하며 고통을 준 것, 그 모든 것들을.”
카를하인츠는 발악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 자식이 그랬을 리 없어!”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속죄하려 노력했단다. 왜인 줄 아니?”
“왜죠? 그가 이타적인 행위를 보였기라도 합니까?”
“그는 널 사랑했단다. 아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카를하인츠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오열했다.
“그럴, 그럴 리 없어, 없단 말이다…!”
“믿을지 말지는 천천히 결정해도 되지만, 교황청과의 휴전 여부는 어떻게 할 거니?”
카를하인츠는 간신히 진정하고는 대답하였다.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지금은 이 몰아치는 감정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알겠어. 그러면 내일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예. 밖에 손님용 막사가 있으니, 그곳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일행은 아침에 일어나서 군대식으로 최상급의 식사를 했다. 아이올라이트와 로젠콰츠는 카를하인츠에게 몰려갔다.
“그래서, 어떻게 결정했나요?”
“결정을 바꿨습니다. 교황이 반대하지 않는 한, 포로 교환, 마법사 사냥 금지,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탄압 금지 등의 조정을 시도하려 합니다.”
“원만한 조정이 이루어지길 바랄게. 그럼, 다녀올게.”
아이올라이트와 로젠콰츠는 라베우크의 수도 루체린트에 도달한 후, 나머지 일행들과 합류하여 수도 중심의 교황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사절로 모셔가진 그들은 교황의 앞에 하루 만에 다다를 수 있었다. 교황은 차분함을 가장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용건은 소식으로 전해 들었다. 자세한 요구가 무엇이지?”
세루사이트가 카를하인츠의 요구를 말해주자, 교황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그를 어떻게 종전 협정을 입에 담게 했지?”
“사랑의 힘으로요.”
아이올라이트는 짧게 말했다.
“허허. 놀랍구먼. 우리가 악마라 주장한 그에게도? ‘사상의 자유에 대한 탄압 금지’는 저기 무신론자들에게도 적용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게 된다면 제가 그를 따끔하게 가르치겠습니다.”
로젠콰츠의 말에 교황은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가서 모두에게 전하라. 서로 총칼과 마법봉을 거두고 즉시 전투를 정지하라. 이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반역죄에 처한다.”
소문에 소문이 거듭 울려 퍼지며, 무기가 거두어지는 소리가 연쇄적인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교황청의 남은 영토 루체린트는 신성 루체린트 시국으로 만드는 것은 어떻나요?”
“...어쩔 수 없지. 더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라베우크의 종교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어 죽거나 다친 사람을 무상으로 치료할 수 있게끔 자금을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교황께서도 없습니까?”
“없다. 그만 돌아가도록.”
세루사이트와 아이올라이트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카를하인츠의 막사로 달려갔다. 곧 모든 병사가 무기를 거두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세루사이트 일행은 임무가 해결되었으니,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들을 작별하는 길에 카를하인츠가 직접 행사를 열어주었다.
프륄링부르크의 왕의 집무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카를하인츠는 열어줄 뻔하다 기겁하고 말았다. 언뜻언뜻 보이는 희고 투명한 빛의 선이 그의 아버지, 루프레히트 프륄링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빛의 선은 열어달라는 뜻인지 또다시 창문을 두드렸다. 카를하인츠는 벽에 걸어둔 롱소드를 집어 들고 천천히 다가가려는데,
“루퍼스, 도착했습니다.”
제왕 교육 자료집을 들고 온 모거나이트가 때마침 도착했다. 카를하인츠는 문을 열어주었다.
“루퍼스 경. 그대는 저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영혼… 혼의 형태로 남겨진 루프레히트의 사념이군요.”
“사악한 자는 아니겠지?”
“생전의 성향과 같습니다. 폐하는 그분이 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추호의 의심 없이 카를하인츠는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떠 있는 루프레히트의 손을 잡고 실내로 이동했다.
“고마워, 키안. 오랜만이지.”
“혼령의 형태로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카를하인츠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억울한 죽음이 한이 되어 나를 지상에 묶어두었다. 그동안 뒤에서 너와 모거나이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켜보았어. 마침내 모든 것이 심판받고 나자, 내 한이 줄어들어 무언가를 잡지 않으면 하늘로 떨어질 것 같아서, 급히 이쪽으로 왔단다.”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고생 좀 했지만 이제 훌훌 털어낸 기분이 들어 오히려 가뿐한 느낌이 든단다. 모거나이트는 어떻니?”
“나야, 우리 제왕 교육하느라 정신없지. 전선과 달리 왕성에서는 칼이 펜보다 못하니까, 적응을 좀 힘들어하는 눈치지.”
“카를하인츠 혹시 마법 안 배울래? 네 피에는 얼음 마법을 쓰는 마법사의 피가 섞여 있는데.”
“됐습니다. 지금 수업 따라가기도 벅찹니다.”
카를하인츠는 농담할 수준까지도 마음을 회복했다.
“이런, 떠나기 전에 너한테 마법 좀 가르쳐줄걸. 너 그거 혈통 낭비야! 아깝다고!”
“자식은 원래 양친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게 전통입니다. 게다가 저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법 혈통이 계승될 것 같지도 않고.”
“네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데도?”
"예."
루프레히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알겠다. 나는 이제 하늘나라 가야지. 산 사람은 땅에, 죽은 사람은 하늘에. 그 법칙을 어기고 너희에게 모습을 보인 건 내 한을 풀고 가겠다는 고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어머니……”
“창문을 다시 열어줘, 어서.”
“어머니. 혼령의 형태를 하고서라도 제 곁에 있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게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합니다.”
카를하인츠는 루프레히트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모거나이트와 잘 지내렴. 그것 또한 운명의 만남이었으니까.”
“어머니, 가지 마십시오. 또다시 저를 두고 떠나지 말아 주십시오. 엄마, 가지 말아요…”
루프레히트는 눈물을 간신히 삼켰다.
“나는 하늘에서 네 아버지와 함께 있겠다. 네가 올 때까지 잘 기다릴게. 너무 일찍 오지는 말고, 천천히 오거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카를하인츠는 눈물을 흘리며 루프레히트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루프레히트는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안녕히 가십시오.”
“안녕… 내 친구 루시드.”
지는 해의 석양이 그들의 눈시울처럼 붉었다. 카를하인츠와 모거나이트는 기억 속에 루프레히트를 새겼다. 나중에 하늘나라로 갔을 때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를 알아보기 위해서.
드디어 밤 축제가 시작되었다. 밤 축제는 가을 축제를 대표하며, 이때는 가족끼리 모여 함께 식사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일행 4인방 모두 양친과 돈독한 관계가 아니거나 모두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냥 양친과 보내는 대신 우리는 밤 축제를 즐깁시다.”
유클레이스의 현명한 판단에 따라 네 사람은 거리를 쏘다니며 밤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밤으로 만든 여러 음식과 음료가 즐비했다. 밤 라떼, 밤 아이스크림, 밤 파이 등이 있었다. 일행은 맛있게 먹고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강가에는 자전거 대여점이 임시로 열렸다. 일행은 2인 자전거를 택했고, 세루사이트는 스피넬과, 유클레이스는 아이올라이트와 함께 타기로 했다. 스피넬과 아이올라이트는 각각 세루사이트와 유클레이스를 등 뒤에서 꼭 껴안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악, 이거 너무 세게 밟는 거 아니에요? 세루사이트? 내 얘기 들려요?”
세루사이트는 넘쳐나는 체력을 소모하며 가벼운 기쁨에 달리고 또 달리다 스피넬의 비명을 듣고는 속도를 조금 낮추었다. 그나마 반사신경이 좋아 누구 한 명 칠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걸 보면서 유클레이스는 지지 않고 속력을 높이려고 애를 썼지만, 태생부터 병기인 세루사이트에게는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세루사이트는 역시 이기기 어렵군. 역시 태생적으로 격차가…”
세루사이트가 겸손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팔라딘은 쉽게 할 수 없는, 우리 중에서는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하, 그건 그렇지.”
세루사이트와 유클레이스의 덕담으로 모두가 빙긋이 웃고 있을 무렵, 세루사이트는 제안했다.
“다들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양친을 보고 싶어 하지 않지만, 세루사이트는 보러 가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세루사이트가 괜찮다면요.”
스피넬을 시작으로 모두가 동의하자 네 사람은 교도소로 가기 시작했다.
교도소들은 역시나 면회를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행은 긴 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어머나, 이게 누구니. 사피르 아니니?”
스피넬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이름, 내가 부여받은 이름은 전쟁터에서 버렸어요, 어머니.”
“참 잘했구나. 낳고 키워준 부모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버리니? 무섭구나.”
“부모가 부모라 불릴 자격이 없었으니까요.”
스피넬의 어머니는 스피넬의 뺨을 쳤다. 스피넬이 눈이 돌아간 채 어머니에게 되돌려주려는 순간,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의 손목을 붙잡아 막았다. 그러고는 더 세게 그의 뺨을 쳤다.
“이것들이 미쳤나…!”
“다들 진정 좀 하게!”
유클레이스가 싸움을 말려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너! 플로리스 다이아몬드! 너만 있었더라면 우리 제국이 승리할 수도 있었는데, 배신자가 여기 또 있었군!”
“스피넬이 ‘저’를, 그 전쟁범죄의 늪에서 해주었습니다.”
“시끄러워. 전쟁에서 졌으니까, 전쟁범죄라고 하는 거지. 너희들이 졌다면 형이 떨어지는 건 너희 쪽이었어!”
스피넬의 아버지가 거들었다.
“더 이상 목소리 높여 떠들면 모두 퇴거시키겠습니다.”
교도관이 말하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모두의 얼어붙은 듯한 침묵. 그 침묵을 깬 자는 스피넬이었다.
“우리 집안에도 전쟁범죄자가 있는 모양이죠? 흥,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스피넬은 콧방귀를 뀌며 양친이 면회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기다린 후에 스피넬의 양친이 돌아왔다.
“널 낳은 걸 후회한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내가 할 소리죠.”
스피넬의 양친은 스피넬을 노려보았으나 폭력을 사용하면 끌려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노려보는 선에서 멈추었다. 이후 세루사이트의 차례가 돌아왔다. 면회실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5인 미만 제한이라 아슬아슬하게 걸리는 게 다행인 일이었다.
네 사람은 면회실에 들어왔다. 면회실에는 다이아몬드 박사가 있었다.
“다들 잘 지내냐? 뭐, 얼굴빛 좋아 보인다만.”
“잘 지내요. 세루사이트는 정말로 좋은 연인이에요.”
“하! 당연히 그래야지. 나도 여러 사람한테서 연락처를 받았거든.”
“그렇게 말하니까 다이아몬드는 못생겼다고 말하고 싶네요?”
“나랑 저 녀석은 인공 일란성 쌍둥이인데 뭐 하는 거냐? 자기 연인 얼굴에 침 뱉기냐?“
만담 같은 악담을 주고받는 스피넬과 다이아몬드 옆에서 ‘저기…’ 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세루사이트가 있었다.
투덜거림을 멈추고 스피넬이 뒤로 물러났다. 콧방귀를 뀌면서. 세루사이트가 가까이 앞섰다.
“오랜만입니다, 다이아몬드. 세루사이트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장에서는 군의관으로 일했고, 평상시에는 빈민가에서 자선 의료 활동을 하고 있고, 계절마다 열리는 지역 축제에도 참여하며 일과 생활을 균형있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애도 열심히 하고?”
“…예.”
다이아몬드는 쿡쿡대며 웃었다.
“본래 사랑이란 안 좋은 관계에서 시작하는 게 그렇게 재밌다니까. 실시간으로 못 본 점이 아쉽다.”
“스피넬이 세루사이트를 받아주셔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주책은… 참 내. 내가 볼 때는 네가 천만 배는 더 아깝다.”
“그나저나 감옥 안에서는 어떤 일을 시킵니까?”
“처음에는 아무 일도 하기 싫다고 드러누웠었는데, 그렇게 교도관과 씨름하다가 마침내 내 맘에 드는 걸 골랐다. 비누 만들기.”
“한 번 구경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럴 줄 알고 내 회심의 역작을 가져왔지.”
다이아몬드는 은은한 무지갯빛이 도는 흰색, 새파란 색, 청보라색, 파란색과 하얀색의 비누를 나누어주었다. 비누들은 모두 보석처럼 면이 깎여있었다.
“이건 우리 눈 색이네. 정말 세심해. 고마워.”
“향기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석 비누라, 쓰기가 아까울 정도군.”
“뭐, 미적 감각이 뛰어난 당신이 주는 거니 감사히 받아 들죠.”
“내가 무언가를 만들고, 그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게 굉장히 뿌듯하더군. 그리고 요즘은 비누 만들기뿐만 아니라 내 감옥 방에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마도 과학 기초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역시 천재이니 가르치는 것도 잘하지.”
마지막에 잘난 척이 섞여 들어 있었지만,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음 건강에, 좋은 영향을 끼치겠네요. 대단합니다, 다이아몬드.”
“처방된 우울증 약도 열심히 먹고 있다고.”
“잘했습니다. 계속 그리하시면 됩니다.”
“그래. 모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겠나?”
모두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했다. 한 명이 주도적으로 말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초점을 덧붙이고 맞장구를 치는 모양새였다.
다이아몬드는 세오리프가 보는 평행세계에 대하여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말대로라면 시간에 따라 멸망한 세계가 많아질수록 우리 세계는 위태로워진다는 말인데. 증거 있나?”
“증거는 없지만, 그들은 세계를 뛰어넘으니까요. 우리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겁니다.”
“그러면, 확실한 증거를 달라고 해라.”
“현명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면회는 여기까지 하고, 종료해도 괜찮겠습니까?”
“잊은 게 있어.”
“무엇입니까?”
“사식, 사식을 넣어줘야지!”
“......”
“왜 그래. 사람은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밤 축제가 열리고 있다던데 뭐 사 왔냐?”
“밤 파이와 밤잼을 가져왔습니다. 교도관에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이러면 면회 할 맛이 있지. 다음에 봐.”
일행은 모두 작별 인사를 했다.
세오리프는 3주 뒤에 왔다. 그리고 집요한 질문을 받게 되었다.
“멸망한 세계가 많아지면 우리 세계는 왜, 어떻게 되는 거야?”
“멸망에 휩쓸리지 않는, 세계도 있습니까?”
“새로이 세계를 창조하는 마법은 없나?”
세오리프는 일행을 간신히 진정하게 했다.
“잠깐만요, 여러분. 천천히. 한 사람씩 말씀해 주십시오.”
일행은 간신히 진정하고 한 사람씩 질문하자, 세오리프는 차분히 대답했다.
“우선, 신이 처음으로 만든 ‘최초의 세계’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즉, 여러분의 세계나 우리의 세계는 다른 세계의 멸망에 휩쓸려 강제로 포탈이 열려 이계의 괴물이 침입하거나, 이계의 균이나 바이러스가 침입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 창조 마법은 있습니다. 다만 마법의 범위가 매우 넓고 지속 시간이 영원해야 하니, 아주 고도로 마법을 갈고 닦은 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생물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행의 머리가 굴러가느라 조용해졌다.
“용건은 이것뿐입니까?”
“아뇨, 밤 축제의 밤잼이 맛있으니, 꼭 드시고 가십시오.”
세오리프는 순간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 감사합니다. 즐거운 축제 되시길 바랍니다.”
어느 겨울날.
원래대로라면 한창 눈 축제가 열려야 할 때였지만, 이번의 분위기는 엄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로 오늘이 슬라브니-연합군 전쟁의 종전 기념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이라면 눈송이나 귀여운 동물을 조각한 얼음 조각상이 있겠으나, 오늘은 황제 암살의 영웅 4인의 조각상, 식민지화된 조국을 위해 문화와 정신을 지키려 애쓴 사람, ‘분홍장미단’의 영웅인 로자, 시민군의 영웅 등의 전쟁 영웅들을 묘사한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묵례하느라 꽃을 놓거나, 기도했다.
일행은 다른 영웅들의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영웅들을 추모하고 기렸다.
일행의 얼굴은 엄숙하지만,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스피넬은 박수를 짝, 쳐서 일행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유클레이스가 묻자, 스피넬은 일행을 찬찬히 보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슬라브니 최북단이에요. 자연경관 한번 끝내주는데, 한 번 구경하러 가볼래요?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슬라브니가 또 헛짓 중인지 아닌지 감시하자고.”
일행들은 스피넬의 제안에 따라나섰다. 대륙 중서쪽에 온 그들은 슬라브니 남부로 가는 배를 탔다. 모두 추운 계절에 대비해 오리털로 충전한 두꺼운 외투, 니트, 기모 바지, 기모 양말 등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여기서 내려 수도로 가면서 대충 분위기를 살피는 건 어때요?”
일행들이 모두 좋다고 하자 스피넬은 앞쪽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검문소가 있어 그리로 갔다. 얼굴이 신분증인 네 명은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방문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행입니다.”
스피넬이 대표로 말하자 일행들은 자기들도 같은 목적이라고 말했다.
검문 무사통과로, 일행은 슬라브니 남부부터 수도까지 느긋하게 말을 타며 걸었다.
“바뀐 게 많네요, 여러 가지로.”
스피넬은 꽃집을 가리켰다.
“고향을 추억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요. 원래 저 자리는 비-엘프 종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모이던 엘프 우대 술집이 있었어요.”
스피넬의 말에 일행은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로 보이네요. 이제 엘프들은 혐오의 칼날을 던지는 대신 꽃다발을 주고받을 테죠.”
비로소 그 말을 듣고서야 일행은 마음을 조금 놓았다.
며칠 뒤, 수도에 도착한 그들은 놀라운 것을 보았다. 황궁이 부서진 자리에 의회가 새로 지어지고 있는 모습도 보았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전쟁기념관이 지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쟁기념관 전시물들은 슬라브니 제국의 만행에 대해 꼼꼼히 설명되어 있었으며, 전쟁기념관의 문을 향하며 무릎을 꿇은 남자의 동상이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동상 밑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드미트리 레베데프,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에 대하여 사죄의 뜻으로 무릎을 꿇다.
드미트리 레베데프는 현재 슬라브니 공화국의 임시 총리였다. 그만큼 슬라브니가 슬라브니의 이름으로, 엘프가 엘프의 이름으로 저지른 만행에 대해 무겁게 생각하며, 영원히 사죄한다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은 추악하고도 아름다웠다. 드미트리 레베데프는 자신들의 만행에 사죄하는 것이 국가의 품격을 올리는 참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자, 그러면 내 고향으로 가볼까요? 7박 8일 마도 열차를 타고 가야 하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서요.”
“괜찮습니다. 세루사이트의 호위 임무에는 마차를 타고 간 적도 있는걸요.”
“후후, 과연 그럴까요? 여행하기에 앞서 드라이 샴푸를 꼭 싸세요. 경험자의 조언이랍니다.”
일행에게는 잠깐의 시간이 주어졌고, 시장으로 나온 일행들은 커다란 빵과 메도빅 등의 음식 향기에 이끌려 하루를 지낼 뻔했다. 스피넬이 “정신 차려요!” 하며 매혹 상태 이상에 빠진 일행을 양 떼 몰듯 몰고 갔다. 정신없이 스피넬을 몰고 나머지 일행들은 몰리는 상황 끝에,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역무소에서 표도 사고 열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열차를 탄 일행은 주변 풍광을 바라보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 설원의 웅대함과 창문에 낀 서리의 아름다움에 모두 넋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는 따뜻한 중부 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이곳은 비눗방울이 얼어붙고, 낮도 밤도 아닌 백야가 지배하며, 오로라가 비단처럼 너울거리고, 찬란한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보석 가루처럼 반짝거리는 세계였다. 일행 중 슬라브니 북쪽에 살았던 이는 스피넬뿐이라, 스피넬은 일행 중에서 설명자 노릇을 해야 했다. 사실 그것은 그의 기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풍광이 주는 즐거움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거리 열차 여행의 꽃 피는 애로사항을 스피넬이 직접 겪어보고 몸소 체험해 보며 느끼라는 큰(?) 뜻이었다.
첫번째 고난은 멀미였다. 유클레이스가 창백한 안색으로 도움을 청하자, 세루사이트는 “긴급상황입니다. 혹시 이 열차 안에, 의사분 계십니까?”라는 명대사를 읊자, 스피넬이 어이없어하는 기색으로 “의사는 당신인데요.”라고 하자 좌중은 이게 만담인지 실제 상황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세루사이트는 “예! 세루사이트가 돕겠습니다!” 라고 해서 스피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에는 질문이 아니라 대답을 하세요, 세루사이트.”
스피넬은 킥킥대며 웃었다.
세루사이트가 만들어 가지고 있던 멀미약을 유클레이스에게 먹이자, 유클레이스의 안색이 천천히 돌아왔다. 일동은 무슨 심장마비 환자를 살려낸 것처럼 과하게 기뻐했다.
두 번째 고난은 지루함이었다.
북구 기후의 위엄은 따뜻한 객실 창가로 느끼기는 부족했다. 자연스레 일행들은 지루함에 빠져들었고, 그들에게 집단적 독백을 하게 만들었다.
“먼저 ‘불의 구체’로 선제공격을 넣으면… ”
“그러니까 환자의 갈비뼈 이쪽을 메스로 찔러 넣으면…”
“팔라딘에게 있어서 이 기술은…”
그리고 구슬픈 아이올라이트의 바이올린 소리까지 더해져 일행들의 정신은 반쯤 유체 이탈된 상태였다.
이 유체 이탈 상태는 열차가 급정지하면서 깨졌다. 끼이이익 하는 급제동에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 바람에 유클레이스가 아이올라이트를 덮치고 입과 입을 맞댄 상태가 되었다. 유클레이스는 기겁하면서 아이올라이트에게서 떨어졌다.
“왜, 유클레이스? 우리 첫 키스 맛이 달콤하지?”
“첫 키스라니! 우리가 서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한 것도 아니잖은가!”
“왜에. 교통사고도 사고고, 실수로 한 키스도 키스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그대와 어째서…!”
스피넬은 키득키득 웃었다.
“남의 사랑싸움 보기 즐겁다. 세루사이트가 볼 때는 어때요?”
“우선… 열차 밖의 상황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가 ‘나만 정상인’ 포지션이 된 세루사이트는 일행을 이끌고 맨 앞의 기관사실로 갔다.
“괜찮습니까?”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사제님.”
“밖으로 나가 조사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예, 어차피 열차도 멈췄고 하니, 괜찮습니다. 아니, 제발 부디 조사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네 사람은 열차 밖으로 나가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짙은 안개가 걷히고 열 사람이 보였다. 대부분 제대로 갑옷을 갖추지도 않은 자들이었다.
“산적일까?”
“이 추운 곳에서요?”
“그러니까 더더욱.”
세루사이트가 소리쳤다.
“정체를, 밝히십시오!”
잠시 긴장의 순간.
“우리는 사피르 슬라바, 지금의 스피넬 코발트블루를 찾기를 원한다. 몇 년 전, 레드 드래곤 레어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내 가족이 네 녀석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죽음으로 사죄해라!”
스피넬은 몸의 힘을 잃어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 사피르가 쏜 마탄은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그래… 내 첫 살인이로군요. 내 죄의 업보가 여기까지…”
“아닙니다, 스피넬. 그날 제국과 연합군은 합법적인 교전을 치렀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스피넬은 전쟁범죄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저들에게 사과할 의무가 없습니다.”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지만, 스피넬은 이미 울고 있었다.
“죄송해요, 미안해요, 여러분의 가족을 죽여서.”
그들은 듣지도 않고 스피넬에게 선공을 했다. 그것을 필두로 원거리 무기란 무기는 다 날아왔다. 유클레이스는 모두에게 공격이 닿지 않도록 보호막을 세웠다. 적들은 끈질기게 맞섰지만, 황제와의 싸움을 치러냈던 그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다들 스피넬의 마음을 배려해 그들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 죽기 전까지 공격하다가 기절시켰다.
그리하여 열차 우측에는 전투의 흔적과 적들이 널려있었다.
“깨워야 할까요?”
“깨우고 나서 물읍시다.”
스피넬은 유클레이스와 세루사이트가 괴한들을 묶는 사이, 아이올라이트는 객실로 돌아와 모두가 좋아하는 가요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면서 객실 승객들을 안정하게 했다.
스피넬 코발트블루는 적 중 우두머리로 보였던 자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금방 정신을 차려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는, 스피넬을 보고 사나운 표정을 지웠다.
“무슨 속셈이지? 이대로 우리를 죽이려고!”
“그랬을 거면 진작 죽였어요. 묻고 싶은 것을 말하면 풀어주죠.”
“...흥. 이대로 객사하기는 싫으니 말해주지. 무슨 질문?”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러는 건가요?”
“모독하지 마라! 내 육친에 대한 처절한 상실감을!”
“알겠어요. 그 복수심, 채워드리기는 어렵지만 배상금은 어떠한가요. 당연히 당신 혈육의 목숨이 돈과 같은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남겨진 사람들이 그분을 좀 더 좋은 곳에서 모실 수 있겠죠.”
그는 한참을 뭐 씹은 표정을 짓더니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그래. 내 혈육은 전쟁터에서 해골로 뒹굴고 있겠지. 네가 주는 돈으로 내 혈육의 백골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스피넬은 그에게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주었다.
“그럼 합의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래.”
“여러분. 열차 운행에 지장을 준 그분들을 떠나보냈어요. 기다리시는 동안 민폐 끼쳐드려서 대단히 죄송해요.”
승객들은 ‘자신들을 산적들로부터 지켜준’ 그들을 역시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일행 중 스피넬만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곳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키넷츠 젬리” 역입니다. 남기고 가시는 소지품이 없도록 살피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국영 마도열차를 이용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내가 살 때 여기의 이름은 ‘크라이 젬리’ 역이었는데, 지금은 ‘키네츠 젬리’ 역으로 바뀌었네요. 언어 되찾기에 힘쓰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진짜네요.
스피넬이 신기해했다.
“식민지들도 제국의 항복 선언과 동시에 해방되었을 테니, 자유와 혼돈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갈 곳을 잘 찾기를 바랍니다.”
키네츠 젬리에 내린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새하얀 빙하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올려다보니 하늘에 분홍색 오로라가 떠있었다.
“오! 이 색은 보기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의 방문을 축하해 주는 것 같네요!”
스피넬이 기뻐했고, 모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은하수와 오로라를 감상했다. 오로라는 천천히 흐릿해지더니 소멸했다.
“정말… 세루사이트의 어휘력으로는, 서술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마찬가지의 생각입니다.”
“오로라에 대한 전설 같은 게 있을 법한데, 그런 거 있어?”
스피넬은 고개를 저었다.
“제국은 이 땅을 병합하기 전, 언어와 전설, 민요와 속담을 모조리 금지해 사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읽을 수 있는 것은 제국의 것뿐이었죠. 아마 그걸 다시 발굴하는 데에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할 거예요. 그렇지만 언젠가 제국으로부터 되찾겠죠?”
“맞는 말입니다. 나중에 스피넬이 발견해 냈다면 말해주십시오, 학습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잠시 곰곰 생각하던 스피넬은 달빛에 빛나는 호수를 가리켰다.
“저기는 세레브리아노이 오제로, 슬라브니 어로 은의 강을 뜻해요, 되찾을 언어로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저기는 스케이트나 썰매 차기 최고예요. 함께 갈래요?“
일행은 모두 그러자고 했다.
스케이트에서 스피넬을 이길 자는 없었다. 은의 호수 위에는 이런저런 초급 피겨스케이팅을 즐기는 스피넬 옆에 미끄러진 세루사이트와 거의 사족보행 하는 아이올라이트와 그걸 보고 포기한 유클레이스가 있었다. 그나마 세루사이트가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라 다행이었다. 스피넬은 세루사이트를 붙잡고 넘어지지 않게 하면서 간단하게 강습했다.
“자, 이렇게 스케이트의 날을 세우고 부드럽게 미끄러지면서 나아가는 거예요.”
세루사이트는 그대로 따라 했다.
“이렇게, 하면 됩니까?”
“아주 좋아요! 100점!”
“아이고, 저 커플들을 확 그냥.”
유클레이스 옆에 앉아있던 아이올라이트가 스케이트를 신고 있는 발을 위협적으로 들었다.
“싸우는 것보다는 보기 좋지 않나.”
아이올라이트와 유클레이스의 그러한 꼬락서니를 본 스피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당신들 죄다 답이 없네. 답이 없어!’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아까 전 스케이트를 빌렸던 가게에서 얼음 썰매를 양손에 들고 왔다. 얼음 썰매는 앉아서 얼음용 송곳으로 빙판을 꽂아 앞으로 이동하는 방식이라 초보라도 하기 쉬웠다. 곧 4인방은 쫓고 쫓기는 얼음 썰매 술래잡기를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노력파 스피넬과 재능파 세루사이트의 대결이 격했다.
“와! 내가 세루사이트를 이겼어요! ‘그’ 세루사이트를!”
세루사이트는 자신이 졌지만, 사랑하는 스피넬이 모두를 이겼으니 엷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마을로 돌아간 네 사람은 끝내주는 맛의 저녁을 먹었다. 식탁은 슬라브니의 주식 빵인 ‘토삭’, 얇은 팬케이크인 ‘블리니’와 그에 곁들여 먹을 연유, 감자, 다진 고기, 양파, 고기소를 넣어 만든 양배추 말이인 골루브츼, 감자, 근대, 양배추, 양파 등을 썰어 식초, 오일, 후추, 소금에 버무린 샐러드인 비네그렛, 버섯, 토마토, 레몬, 사탕무에 훈제 고기를 곁들인 솔랸카로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디저트로 꿀 케이크인 메도빅까지 만족스럽게 먹고 2층의 숙소로 올라가려는데, 바깥에서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렸다. 여관 주인은 문을 열어주다가 깜짝 놀랐는데, 그가 상당히 큰 키에 굵직한 목소리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손님이오? 방 자리는 넉넉하니 고르십쇼.”
“그래. 여기 은화 이만큼이면 됩니까?”
“되오. 아참, 식사는 별도요.”
“알겠소.”
네 사람은 신기한 키에 신기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신기해하며 바라보았다.
“나는 점술가요. 이 여관에서 점 볼 사람 계시오?”
“심심풀이로 점 한 번 봐도 되나요?”
스피넬의 말에 점술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당 은화 5개씩 받겠소.”
“좋아요.”
“섞기 횟수를 고르시오.”
“음… 4요!”
점술가는 카드를 섞었다가 스피넬에게 세 장을 뽑으라고 이야기했다.
“이제 읽겠네.”
점술가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가, 미간이 좁혀지며 스피넬을 빤히 보았다.
“당신은 과거의 자기로부터 도망쳐 왔군. 그러다가 우연히 직면하게 되어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잘 품어주면 천천히 나을 수 있소. 다만…”
“다만 뭐요?”
점술사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마지막 카드는 미래를 예지하는 카드인데, 당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스피넬은 깜짝 놀랐다.
“내가 바로 여기에서 죽어버릴 거라는 뜻인가요? 뭐, 갑자기 드래곤이라도 쳐들어오나요?”
점술가는 부정했다.
“그런 종류의 위험은 아니오. 다만, 너무 멀리까지 나아가고 있어서 평범한 사람인 나로서는 감히 읽을 수가 없소.”
“그게 대체 무슨…”
“일단 내가 읽은 건 여기까지오. 다음 분?”
세루사이트가 나섰다.
“세루사이트가, 두 번째로 보겠습니다.”
“섞기 횟수를 고르시오.”
“5회요.”
점술가는 카드를 섞었다가 세루사이트에게 세 장을 뽑으라고 이야기했다.
“이제 읽겠네.”
세루사이트는 차분히 기다렸다.
“옆에 있는 분이 당신을 구원했군.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자 희망이오. 그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거요. 그리고…”
점술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카드가 또다시 나오다니, 이럴 수가… 당신의 미래 또한 보이지 않소. 어떻게 이런 일이?”
“어차피 재미로 본다고 했으니 우린 재미 수준에서 즐길 거예요. 그렇죠, 아이올라이트?”
스피넬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일행 중에서 가장 가벼운 성격인 아이올라이트를 불렀다. 다행히 아이올라이트는 눈치도 빠르고 이런 일에도 능숙했다.
“자자, 그러면 나랑 유클레이스가 남았네. 내가 먼저 해도 되지?”
“상관없소.”
점술가는 아이올라이트에게 말했다.
“섞기 횟수를 고르시오.”
“음… 6이요!”
점술가는 카드를 섞었다가 아이올라이트에게 세 장을 뽑으라고 이야기했다.
“이제 읽겠네.”
“과거에 아픔이 있었지만, 지금은 훌륭하게 극복해 낸 듯하오. 그리고 지금은 마음속에 봄을 품고 있고. 맞소? (아이올라이트가 찡긋 윙크하며 미소했다.) 부디 그 사람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오. 틀림없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테니. 당신의 미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소”
“들었지?”
아이올라이트가 유클레이스를 빤히 바라보자, 유클레이스는 못 들은 척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남았군.”
유클레이스는 타로 같은 것을 안 믿는 모양인지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섞기 횟수를 고르시오.”
“다섯 번.”
점술가는 카드를 섞었다가 유클레이스에게 세 장을 뽑으라고 이야기했다.
“이제 읽겠네.”
잠시 침묵.
“원래 복수란 쉽지 않은데, 당신은 복수에 성공해서 상당히 만족스러워하고 있군. 그리고 당신 곁에는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뭐 하시오? 얼른 낚아채고 당신의 것으로 만드시오.”
유클레이스는 투덜거렸다.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뭐… 고생했네.”
“나도 간만에 손님 맞아서 짭짤하게 돈 벌어서 좋았소. 모험의 성공을 비오.”
점술가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값을 계산한 뒤 키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중부 대륙으로 돌아온 네 사람은 여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스피넬이 세루사이트에게 조금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세루사이트, 나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나요?“
“당연하지요. 아폴로께서도, 부정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잠깐 고민하다 스피넬은 반지를 내밀었다. 각각 코발트블루 스피넬과 세루사이트가 세공된 6발 프롱 반지 한 쌍이었다.
스피넬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나와 결혼해 줄래요?”
세루사이트의 휘광 넘치는 눈이 더욱 반짝거렸다.
“승낙하겠습니다.”
스피넬은 커플링을 빼고 결혼반지를 새로 꼈다. 세루사이트도 그와 마찬가지로 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스피넬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 표시를 했다.
스피넬은 이 기쁜 소식을 아이올라이트와 유클레이스에게 전했다. 다들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아이올라이트는 유클레이스를 노골적으로 곁눈질하고 있으나 유클레이스는 정말 징하게 끄덕 않고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두 번째, 집 보러 다니기.
스피넬은 여행할 때마다 책을 사 오고 책을 다 읽고 팔아버리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는 ‘2인 가구 살림법’도 있었다. 집 고르는 방법부터 서로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팁까지 자세히 작성되어 있었다. 스피넬은 세루사이트에게 책을 읽어주고, 책 내용에 따라 점검하는 것은 세루사이트가 했다. 방이 북향이나 남향이나 얼마나 오래되었냐 등등. 스피넬이 바닥의 기울임을 확인하기 위해 공을 바닥에 놓았을 때는 집주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으나, 스피넬은 눈썹 까딱도 하지 않고 집에 티끌만한 흠이라도 있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렇게 까다롭게 고를 집은 하늘색 지붕의 중간 규모였다. 둘이 살기에 답답하지도, 청소하기에도 너무 넓지 않은 장소로. 문제는 둘 다 요리 기술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사 먹죠.”
“사서 먹읍시다.”
역시 남이 돈 받고 해주는 밥이 가장 맛있다는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이었다.
세 번째. 신혼집에 미리 생필품과 가정용 마도 공학 제품 채워넣기.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바디로션을 각자 딸기 향과 라즈베리 향으로 한다는 것만 제하고는 생필품에서 의견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가정용 마도 공학 제품에서는 상당히 견해차가 있었다.
“이런 기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 손으로, 해야 합니다.”
“아니, 손님이라도 오면 그릇 양 감당 가능해요?”
“둘이 함께 나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싫다고요, 나는. 일평생 기계팔 써왔으면서 왜 마도 식기세척기는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스피넬 돈으로 사십시오. ‘저’는 안 쓸 겁니다.”
“흥! 그러든지 말든지 해요. 나나 실컷 쓸 거니까요.”
그렇게 그들의 연애 전선은 급랭 기류를 형성했다.
네 번째. 입을 옷과 메이크업 고르기.
스피넬은 합성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흰색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합성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눈부신 티아라를 골랐다. 부케로는 푸른 장미꽃다발을 골랐다. 고르는 것은 빨랐다. 급랭 기류 때문에 서로의 의견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섯 번째. 청첩장 고르기. 스피넬이 장식이며 은박까지 섬세하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지정한 한편,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결과적으로 푸른색과 하얀색 장미로 꾸며진 덕분으로 매우 아름다워 두 사람 모두 흡족해했다.
“이것 봐요. 내 식견과 안목이 뛰어나죠?“
“인정합니다. 스피넬.”
“그러면 우리 이제 안 싸우기로 해요?”
“그럽시다. 세루사이트는 평화주의자입니다."
여섯 번째. 초대할 사람 결정하기.
스피넬이야 양친과 의절했고 세루사이트를 만든 다이아몬드는 감옥에서 형을 살고 있어 외출할 수 있을지 물어야 했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다이아몬드가 있는 교도소로 함께 갔다.
“오랜만이다. 둘이 행복하게 사느라 나는 신경 좀 썼냐?”
여전히 말투에 가시가 돋쳐있는 다이아몬드였다.
“예, 그동안 여행으로, 바빠 오래 뵙지 못해 미안합니다.”
“뭐, 봤으니 됐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뭔가 큰 소식을 가지고 온 모양인데, 대체 뭐냐?”
“저희, 결혼합니다.”
다이아몬드는 놀라지도 않았다.
“아 그래? 축하한다. 내가 나이 40대에 자식 결혼 소식도 듣고. 하객이 되지 못해 아쉽구먼.”
“그거라면 답이 있습니다.”
말을 건넨 자는 면회를 감독하러 왔던 교도관이었다.
“정말이에요?”
스피넬은 놀랐다. 교도관은 천천히 설명했다.
“우리 감옥은 전쟁범죄자들을 가두긴 하지만, 그자의 반성하는 마음이 진심이라고 판단되어 모범수가 되면 하루 정도는 감시하에 외출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다! 그럼 혹시 다이아몬드도 나갔다 올 수 있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을 안고는 펄쩍 뛰었다. 평소에 보기 힘든 세루사이트의 격한 감정 표현에 모두가 놀랐다.
“흠흠, 여기까지 하고. 날짜 정하면 청첩장에 적어서 보내라. 너무 일찍 하면 내가 못 갈 수 있다는 점 꼭 기억해 두고.”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청첩장을 보낼 사람들의 목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아이올라이트와 유클레이스는 당연히 초대하기로 하고, 세루사이트네 뤼키니아 신전과 델로스 신전의 사제들을 포함하니 그 수가 제법 되었다.
“원래 최대한 소규모로 뤼키니아 신전의 사람들만 부르기로 했는데, 왠지 안 부르면 이아소 대사제님이 실망하실 것 같았습니다. 제게 물심양면으로 사회화에 도움을 주신 분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꼭 초대해야겠어요.”
인원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본래 생각했던 아담한 시장으로는 수용이 힘들 것 같았다.
“델로스 대신전에서 예식을 치르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
결혼식을 치른 그날, 세루사이트는 흰 정장을 입고, 스피넬은 흰 드레스를 입었다. 주례를 선 이아소가 능숙하게 식을 끌어나갔다.
“세루사이트는 스피넬 코발트블루에게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합니까?”
“예.”
“스피넬 코발트블루는 이 맹세에 같이 묶일 것을 약속합니까?”
“네!”
“그렇다면, 서로의 네 번째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우십시오.”
스피넬과 세루사이트는 그렇게 하였다. 푸른 코발트블루 스피넬과 세루사이트가 화이트골드에 세팅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자, 이제 두 사람의 키스!”
세루사이트는 스피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잠깐 두 사람은 지극한 행복을 느꼈다.
그때, 누군가가 결혼식장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 무슨…?”
어리둥절해한 세루사이트를 바라보고 빈민들과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치유하는 칼’의 세루사이트 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제 생명의 은인의 경사라니, 저까지 기쁘네요!”
“앞으로 결혼생활이 무탈하기만을 바랍니다!”
세루사이트는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솟는 것을 느꼈다.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건 여러분입니다.”
스피넬은 눈물을 삼키는 표정으로 빈민들과 전쟁고아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연회를 끝나고 신혼여행에서 행복하게 허니문을 보낸 두 사람에게 세오리프가 찾아왔다. 그는 다급한 소리로 아이올라이트와 유클레이스에게 합류해달라고 말하며 초조해했다. 모두가 모여들자, 세오리프는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세계들이 손 쓸 새도 없이 질량이 0이 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홍수가 발생하거나, 온 대지와 들판이 불타버리거나, 쉼 없이 지진이 일어나거나, 해충이 밭과 논과 산에 뒤끓고 있습니다.”
“왜 재앙이 일어나나?”
“세계에서 신의 권능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신의 숫자가 많으면 그만큼 신의 힘을 증강하는 기도도 분열됩니다. 반면에 신이 유일하다면 기도도 돋보기가 비추는 햇빛처럼 집중되겠죠. 재해는 복구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재앙은 아닙니다. 재앙은 그 별의 온 생명을 죽일 만큼 강력합니다. 이런 재앙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신은 재앙을 막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예컨대, 누군가 한 명이 유일신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요?”
“예. 그리고 그 유일신의 반대급부이자 신의 존재 이유인 ‘만들어진 악마’가 필요합니다.”
일행은 놀랐다.
“만들어진 신과 악마라고요?”
“예, 전에 다른 세계로 파견을 나갔다가 본 책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유일신에 대한 경외는 전지전능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유일신은 한가지 모순을 가집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지은 세계에서 왜 악한 자들이 있는가? 그것은 만들어진 악마가 사람들을 유혹하여 악한 짓을 저지르게 하고픈 마음이 들게 하기 때문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중 한 명이 ‘만들어진 신’, 다른 한 명이 ‘만들어진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일일이 우리를 찾아와서 이렇게 긴 설명을 한 이유라면.”
잠시 침묵이 있었다.
“예. 염치없지만 세루사이트 씨께 ‘만들어진 신’이 될 것을 부탁드립니다. 세루사이트 씨는 종교학과 신학에 능통하실 테니까요.”
“승낙하겠습니다.”
“아뇨, 세루사이트. 거절해요. 왜 하필이면 당신이 되려고 하는 건가요? 세오리프, 왜 세계에 하고많은 사람 중 하필이면 우리여야 하나요?”
“지금 세계에 있는 강한 자들에게 부탁했으나 다들 거부하셨습니다.”
“당연하죠! 소중한 삶을 떠나보내야 하니까!”
“그러니 염치없이 여러분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여러분께 왔습니다. 제발,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해 부탁드립니다.”
스피넬은 세오리프를 노려보았지만 무언가 생각난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저번의 그 점술사가 나와 세루사이트의 미래는 너무 아득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거군요… 좋아요. 세루사이트의 존재 이유가, ‘만들어진 악마’가 되겠어요.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세루사이트가 ‘만들어진 신’이 되면, 자동으로 당신을 ‘만들어진 악마’로 만들 겁니다.”
세루사이트는 빛에 휩싸인 채 하늘 높이 올라갔다. 반대로 스피넬은 악한 존재들이 사는 하계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히, 잘 가요, 나의 신. 나의 사랑. 나의 세루사이트.”
“나’의 악마, ‘나’의 영원한 연인 스피넬 코발트블루. 언젠가 모든 세계에서 생명의 불씨가 꺼질 때, 다시 만납시다.”
두 사람의 이별을 지켜보던 유클레이스가 세오리프에게 말했다.
“이제 세상에 재앙이 멈추길 바라네.”
“멈출 겁니다. 반드시.”
아이올라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우리 둘뿐이네. 많이 외로워?”
“지금도.”
아이올라이트는 유클레이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유클레이스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우리의 목숨이 다하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열심히 살아보자고.”
“그렇게 하세.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둘의 희생에 누가 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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