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극 2차

조각글 모음집

뜰팁 2차 조각글 모음

뜰팁_전용 by 자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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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조와 뭐시기가 가득하고, 분량도 짧은 글 모음. 짧은 건 여기에만.

근데 가끔 짧은 게 긴 걸로 바뀌어서 나타날 수도 있음.

1. 별의 아이, 시초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장막뿐인 세상 가운데 빛이 태어났도다. 갓 태어나 출렁이며 갈피를 잡지 못해 흩어지고 흐르기만 하는 빛은 오랜 시간 자연스레 어둠과 그림자, 추위와 더위를 만들면서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여즉 축을 잡지 못해 떠내려가기만 하는 빛이 모든 것의 끝에 도달하기 전에 신께서 떨어진 조각 중 가장 큰 것을 빚어 파수꾼을 만드시매, 그것이 눈을 뜨고 바라본 순간 흩어진 형상으로 흐르던 것이 하나로 뭉쳐 제 것에서 나온 조그마한 파수꾼과 같은 형태로 변질하는 동시에 세상의 중심별이자 섭리가 됨이라.

그대가 나의 파수꾼인가요. 이름도, 형태도 불완전하여 있는 거라곤 유영하던 어둠처럼 새카만 타래와 우주의 구석까지 비추는 푸른 빛을 두른 별은, 우주가 보기에는 하나의 티끌이나 다름없으나 저의 일부에서 태어난 파수꾼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자신을 점차 줄였다. 거대한 몸이 줄고 줄어 마침내 그가 제 파수꾼보다 작아졌을 때, 자신은 빛에서 떨어진 것이니 위에서 볼 수 없다며 무릎 꿇은 자는 인식을 넘어 이해의 바깥 개념으로 새파랗게 일렁이는 얼굴을 직시한다. 영원히 당신을 지키는 자. 온전히 그대를 섬길 자입니다. 강직한 시선이 아직 인식의 바깥에 존재하던 별을 바라보며 읊조리고, 말이 끝나는 동시에 눈을 깜빡인 파수꾼은 이제껏 무릎 꿇어 올려다보던 존재에게서 타래를 가진 빛이 튀어나와 꼬리 형태로 비산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수히 날아가는 빛과 별, 그에 맞춰 확장하는 우주와 존재하나 거기에 존재하지 않던 별의 윤곽이 점차 선명해진다. 인식이란, 일종의 개념화이자 자각하지 못하던 객체를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로 끌어내리는 행위이므로, 저의 부스러기가 건넨 베일을 머리에 드리운 순간부터 낮은 단계의 정의와 이름을 가지게 된 그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별의 파수꾼 라더.”

작열하는 별의 표면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산란하는 빛의 꼬리를 담고 놓치길 여러 차례 반복하던 찰나 진동과 파형으로 일어난 기적이 그에게 도달했다. 소리는 이름 없는 부스러기를 울리며 최초의 자극을 새기고, 그제야 아직 튀며 날아가는 빛 꼬리 대신 여즉 보이지 않던 얼굴을 담은 파수꾼은 제 옆에 쉴 새 없이 너울지던 새카만 타래에 조그맣고 밝은 점이 무수히 박혀 빛남을 깨닫는다. 무수한 별의 주인이 자리에 실존한 동시에 은하수가 탄생한 순간.

“별의 파수꾼 라더, 경청합니다.”

목소리라는 개념이 낯설다고 느낄 새도 없이 제 앞에 있는 근본에 각인되어 충직하고 어눌하게 따라 하던 그는 세계가 웃는 걸 멀뚱히 바라보면서도 점차 발산하던 빛이 잦아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는지 눈매를 가늘게 뜬 채 끔뻑였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갑시다. 


2. 초세여, 후일담(날조상상)

세상은 동그랗다. 각지지 않고 둥글게 이어져서 걷고 걸으면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올 거란 동요도 그렇고, 기계가 측정한 지구의 모습 역시 멀리서 보면 둥그런 구체로 그려지니 동그랗단 정의를 붙일 수 있으리라. 그 동그라미 안에는 단순하지만 공유하는 인과 하나가 들어서 모든 걸 동그랗게 만들고 말이다. 돌고 돌아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초승달은 다시 보름달로 차오르면서 빈 것은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차면 다시 비어간다. 끊임없는 굴레 속에서 만남은 필연적인 이별을 맺고, 헤어짐은 다시 만날 어느 날의 약속이 됨이어라.

그걸 몰랐기에 만날 순 없어도 한 번쯤은 스치듯 지나가겠거니 생각하며 추억으로 간직하겠노라 약속한 어린 시절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기로가 기어코 겹친 곳에서, 딛고 선 땅처럼 동그란 눈으로 재회를 바라본다.

본래라면 구시가지 광장에서 사도들의 행진을 구경한 뒤 근처 성당 미사에 잠시 예배만 드리고 다음 프라하 관광지로 이동하려던 잠뜰은 뜻하지 않게 뜨뜻미적지근한 캔 커피 하나를 꽉 쥐고 야외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었다. 배낭 여행 중이라 인터넷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한글 상호를 무심하게 툭. 어차피 해 질 때까지 돌아다니지 않나? 안내 음성 들으려고 온종일 끼던 헤드셋을 벗은 순간 답지 않게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 덕개가 그의 손에 떠넘기고 간 캔이다. 여름이 끝날 무렵이라 더위가 한풀 꺾였다지만 여전히 뜨끈한 체코 날씨에, 심지어 미지근한 커피는 또 뭔가 싶어서 따지도 않고 흔들기만 하던 그는 홀로 혼잣말 하며 지난 기억을 되짚는 사람처럼 캔도, 고개도 하늘로 들고서 가만히 멈췄다. 정각 되자마자 움직이는 시계 장치와 인형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건데 정작 목적은 싸그리 까먹은 듯 익숙한 얼굴 세 개와 가만히 눈 맞춘 사람치고 건조하게 가자고 뇌까린 잠뜰은 언제까지 자기가 기다려야 하나, 이러다 일정 다 어그러지겠다는 사족 몇 개 더 붙이곤 앉은 자리에서 느릿느릿 일어난다. 어차피 오늘 자리를 뜰 참이라 체크아웃에서 짐까지 다 가지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될 테지만, 손에 쥔 캔을 다시금 제 눈까지 들어올린 그는 미심쩍을 정도로 미적거리며 앓는 소리를 흘리기만 했다. 꼭 누굴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잠뜰아! 이야,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꽉 쥐느라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헐겁게 쥐어 한쪽으로 기운 캔이 찰랑거렸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떴다고 아까보다 후덥지근한 날씨, 그래서 여전히 기분 나쁠 정도로 미지근한 커피 캔과 기다리는 새 목덜미가 젖을 정도로 흘린 땀이 불쾌할 법도 한데 제 손가락만큼 벌게져서 땀 닦는 얼굴이 막상 앞에 놓이자 뭐가 그리도 웃긴지 킬킬거리던 잠뜰은 한 발자국 다가가는 동시에 캔을 던져서 떠넘겼고, 알 수 없는 말로 투덜거리다 저에게 날아온 연갈색을 얼떨결에 받고 느껴지는 온기에 인상부터 찌푸린 공룡은 센스 좀 키웠을 줄 알았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거 덕개 선배가 준 건데요.”

“역시 덕개야. 센스가 구리다니까”

문득 깃발 든 사람과 이어폰을 낀 무리가 색만 바뀌어 계속 지나가는 광장을 한 번, 결국 메신저백에 캔 커피를 던지고 걘 뭘 이런 걸 주냐며 툴툴거리는 공룡을 한 번 갈마보던 그는 앉은 순간부터 목덜미 대신 팔뚝에 끼운 헤드셋을 가방에 갈무리 한다. 어쩐지 필요하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든 탓이다. 혹시 일정 바빠? 사람 하나만큼 들리는 북적거림과 후덥지근한 바람, 있지도 않는 벌레 소리가 아스라이 들리는 가운데 제가 입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길게 고민하던 잠뜰이 질문의 답을 하는 것치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고개 저었다. 당연히 따라올 거라 믿는지 자신만만하게 보지만 혹시 모른다 여겼는지 덕개와 라더 이름을 꺼내던 차에 질문의 답을 본 공룡은 어차피 여행 중인 모양이니 하루라도 같이 다니는 건 어떠냐 물으면서 손 내밀고, 이미 넣을 건 다 넣었지만 자기도 일정이 있다며 잡는 대신 태블릿을 꺼내 의기양양하게 여행 시간표 사진 먼저 보여주던 잠뜰의 다른 손에 모든 짐이 꽉 잡힌다. 답 없는 안하무인 같지만 실은 셋 중 누구보다 눈치 빠른 공룡이 그걸 못 볼 리가 없었다. 아직 젖살이 덜 빠져 동그란 뺨이 올라붙는 동시에 뭘 그리 미적거리냐고 키들거리던 그가 패드 잡은 손을 붙잡고서 다른 손으로 쥔 나침반을 보여주듯 흔든다.

함께 동아리 일원으로서 지낸 나날이 일년 넘기는 했을까. 그게 어떤 한 사람을 온전히 파악하기엔 짧은 시간이라는 걸 많은 일과 더 넓은 세상의 파편을 짧게지만 엿본 잠뜰은 이제야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여로 고등학교에서 만난 세계 여행 동아리 사람들은 쉬이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저를, 공룡이라면 자신이 어영부영 답하자마자 다른 사람 있는 곳으로 데려갈 거란 자기 안의 믿음을 방금 바라본 그는 눈꺼풀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의자 구석에 꽁 박혀 잠든 밀색 곱슬머리와 이젠 웃으면서 먼저 친근한 인사도 건넬 줄 아는 동갑내기 친구가 앞에 있는 어둑한 장소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그거 없으면 이상한 곳으로 가요? 생각한 것보다 짧은, 어린 시절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긴 이별 뒤 다시 나눈 첫 재회 인사는 누구의 상상처럼 영화 같은 멋짐은 없더란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고작 20분 걸으면 갈 수 있는 체코식 바베큐집에서, 그렇게 넷이 모이자마자 가장 먼저 나눈 이야기는 평범하게도 대학이었다. 셋은 몰라도 적어도 하나는 여느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무슨 대학을 가고, 미래에 대체 뭘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아이니 안부 인사 겸 근황 묻기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래도 마지막 여정 끝에 한 말을 기억하긴 하는지 바로 진학하는 대신 1년 동안 여행으로 세상을 먼저 보고 미래를 정하고 싶다는 말에 당연히 의대로 갔을 줄 알았다며 부러 호들갑 떨거나 진중한 목소리로 너라면 재수해도 원하는 대학 리스트에서 골라갈 수 있을 거라고 장난치는 양을 바라보던 잠뜰은 바로 옆에서 너다운 선택이라고 조곤하게 말하는 라더의 손등을 감사 인사 대신 두드리며 받아친다. 그럼 선배들은 대학 가기는 했어요?

“당연하지! 아저씨네가 대학도 설립했거든.”

“아까 걔네는 거기 일반인 신입생이랑 외부 동호회 회원이야. 뭐 이런 곳인지 몰랐겠지만……. 왜 또 그런 동아리 같은 걸 만들었냐고 묻고 싶은 모양인데 국장님도 허락한 일이야. 이번에도 수현 선생님이 잘 처리해주셨는데 어떻게 들어왔더라. 그때 잠뜰이 너처럼 간절한 무언가를 찾고 있어서 봤을 수도.”

고저가 없어 잔잔한 목소리에 점차 잠이 묻어난다. 따라서 바닥으로 향하는 얼굴을 어이없단 숨으로 바라보며 무어라 손짓하던 잠뜰은 교복 입었을 때보다 넓어진 등에 따끔한 소리가 울리고서야 만족스레 턱을 괸 채 짧은 소리를 흘렸다. 라더가 뒤에서 당연한 소리한다는 듯 끄덕였으니 믿어보는 시늉을 한 거지, 헤어지기 마지막에 본 IPS 국장님의 모습이 워낙 강경했는데 본인이 허락했다는 사실이나 그걸 말해주는 사람이 사람이라 영 믿음 가지 않은 탓이다. 허나 안 믿으면 뭘 어쩌겠는가. IPS 조직 관계자 번호는 물론이고, 바뀐 수현 선생님 번호부터 세 사람의 번호 그 무엇도 없는 잠뜰이 몰래 물어보거나 이른다는 선택지는 없으므로, 그는 그저 옆 테이블에서 투덜거리며 삶은 감자를 포크로 으깨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앞으로 휘말릴 황당한 하루하루에도 평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길 기도할 뿐이다.


3. 도망자, 악몽_뜰

악몽은 피로의 부산물이다. 담 약한 사람은 예지몽이나 귀신 같은 온갖 미신에 결부시켜 소란 떨지만, 상태를 물었을 때 85% 가까이는 과한 피로나 스트레스로 상태 불안정이 지속됨을 감안하면 신체 활동의 이상으로 교란당한 뇌의 농간이라 생각하는 게 더 옳다고 믿는 쪽이었다. 악몽이라 부르는 꿈을 못 해도 한 해에 한 번 이상 꾸는, 그러니까 잠뜰은 말이다.

마치 거울 보듯 반전된 회색 얼굴이 연령대마다 하나씩 나타나 무어라고 이야기하는 걸, 버석거리는 메마른 무명천처럼 건조하게 바라보는 얼굴에 노골적인 관심 없음과 지루함을 연지곤지처럼 찍은 잠뜰이 네 손가락을 펼쳐 들었다. 하나, 둘, 셋. 탈출하려면 도돌이표 노래처럼 조금씩 다르면서 같은 이야기의 끝을 봐야만 하기에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펼친 손가락을 하나씩 접던 그는 대화보다 일방적인 회고에 가까운 말이 끝날 때마다 넘어가도 좋다는 듯 소리 없이 무너지는 무대 뒤로, 만화경 속 다각도로 펼쳐진 빛처럼 여덟 방향으로 자리 잡은 자신과 눈을 맞추고서, 역설적으로 맞췄기에 외면한 자신을 하나씩 바스러뜨리며 마지막 커튼콜이 펼쳐질 암막으로 나아간다. 뒤꿈치가 닳은 허름한 캔버스는 교실 바닥을 서성이다 어떨 때는 벚꽃잎이 떨어지는 낭만적인 풀밭 잔디를, 그다음엔 대리석처럼 보이게 칠한 스티로폼 바닥에서 곰팡이 슬고 퀴퀴한 폐허 바닥의 검댕을 고무판에 묻힌 채 직직 끌었고, 그렇게 요철이 심한 까만 아스팔트 바닥이 나올 때까지 저절로 깨지는 거울을 하나씩 잡아 제치고서 전진하던 ‘착한 아이’는 문득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 자리를 둘러본다. 떨어진 나뭇잎과 말라 죽어 늘어진 갈색 잡초, 물을 머금은 채 얼어 단단하게 굳은 흙바닥이 전부인, 군데군데 깨진 아스팔트 도로의 황량함. 처음 들어갈 때 트럭을 대놓고 간 블랙 스트리트 외곽의 후미진 도로였다.

한 발 두 발. 인간의 몸은 물질계의 법칙을 따라 형상화되었기에, 자연이 정한 관성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 바로 멈춰야 한다는 간절한 위기감이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든 말든 계속해서 앞으로 가던 점박이 캔버스화는 세 발자국 더 나아간 다음에야 멈췄고, 누가 봐도 경계하는 기색으로 살풍경한 배경에 제 발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은근슬쩍 까치발 든 잠뜰은 이제껏 보이진 않고 어디에 있다 정도만 인식할 수 있던 공간이 아닌 직접 볼 수 있는 익숙한 장소가 낯설어 마른 입술에 연신 침만 바르며 하나로 쭉 이어진 직선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이제껏 한 짓은 대담하기 짝이 없으면서 막상 옷깃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하거나 미상의 인기척을 눈치챌 때마다 어깨가 바짝 굳어 긴장할 정도로 겁이 많은 사람이니 당연한 수순이긴 하다. 게다가 그의 악몽은 늘 오감이 살아있는 자각몽이어서, 꾸는 사람이 아무리 이성적인들 현실과 꿈의 경계선을 흐트러뜨리고 안에 자각을 욱여넣어 기어코 헤매게 만드니 겁먹는 게 당연한 두 번째 이유다. 제기랄. 짧게 짓씹은 욕설과 이럴 때가 가장 싫다며 중얼거리는 말이 물안개처럼 불투명하게 흩어져 죽어버린 버석한 나무에 스미고, 조심스러워 입술을 꽉 무느라 하얗게 질린 얼굴과 다르게 총총거리는 걸음이 사뭇 경쾌하기까지 한 발소리가 타르처럼 새까매서 갈라진 틈새마저 잘 보이지 않는 도로를 건너 그의 옆까지 다가온 건 거의 순식간이었다. 자른 뒤로 시간 조금 흘렀다고 고새 어깨까지 내려온 단발머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서늘한데도 추운 기색 하나 없는 여름날 차림에, 멀리서 봐도 생채기가 나 지저분한 파란 목걸이까지. 이제껏 마네킹처럼 얌전히 대각선의 영역에 걸터앉아 그가 오기를 기다리던 무수한 회색 과거와 사뭇 다른 등장이긴 했다. 하나뿐이지만 심지어 색까지 가졌다는 점도, 털 부풀린 고양이처럼 경계하던 잠뜰이 반사적으로 주머니 더듬거리기엔 충분한 이유고. 오, 아버지. 마왕이 날 쫓아와요. 산업스파이로서 윗선과 닿을 일이 많으니 어떻게든 어울리고자 박아넣은 교양은 이럴 때마다 흘리고 이제껏 몰랐던 과자 부스러기처럼 툭툭 떨어졌고

“걱정하지 말렴. 그건 자욱한 안개, 단순히 바람에 흔들리는 잿빛 버드나무, 그리고 날카롭게 이는 바람이란다.”

이제까지 함께 보낸 여정은 즐거웠니? 혼잣말에 가까운 탄식은 유쾌한 답을 얻어내고 희게 질린다. 속살거리는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바위를 스치는 바람, 깊은 지하 바닥 공동에서 울리는 진동, 여러 개의 개미 다리가 바닥을 짚을 때 나는 어떤 내밀하고 조그마한 소음에 가까웠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쉬이 놓칠 정도로 하찮지만, 당장은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기어들어 머리를 울리는 기이한 소리의 근원. 나라면 이럴 때마다 알면서도 네가 누구냐 묻는 주인공과 똑같은 소리를 하지 않을 거란 지난 코웃음과 다르게 갈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손가락이 지금의 저와 다른 곳 하나 없이 똑같은 인영을 가리키자 버석한 입술이 들썩였다.

“꽤 즐거워 보인다. 과연 이게 뒤를 봐줄 무기 하나가 생겨서 편한 걸까.”

외곽이어도 블랙 스트리트 영향권이라는 양 어둡게 침잠한 세상의 빛을 죄 빨아먹은 듯 시퍼렇게 반짝이는 목걸이에 손가락을 걸고서 고개를 좌우로 느리게 까딱이는 모습이 사뭇 두렵기까지 하다. 눈매가 가늘어지게 웃으며 이젠 둘이 더 마음 편하다는 그날의 말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고스란히 따라 하는 저 자신에게 바짝 얼어붙어 은근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말에 미처 대꾸하지 못한 잠뜰은 그럴 줄 알았단 낯으로 코웃음 치는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속이 들끓는 분노와 얼굴에서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 정도로 수치가 올라온 탓에 울컥 터진 대답이 목구멍에 걸려 껄떡거림을 여실히 느껴가며 가쁜 숨만 색색거렸다. 다른 녀석은 너의 과거이자 지나친 선택, 한때의 순진한 꿈이겠지만 나는 아니야. 찰나에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을 알고 보니 감탄처럼 꺼낸 건 아닐까 짧게 고민한 그의 귓가를 눅눅한 바람이 핥는다.

“나는 네가 미처 모를 내밀한 속내. 네가 부정하는 걱정이자 근원.”

“진짜 거지 같, 욱! 시…….”

네가 인간이기에 평생 떨치지 못할 어떠한 것. 기어코 목걸이에 건 손가락을 당겨 줄이 팽팽해지다 못해 끊어질 정도로 잡아당긴 그것은 바닥에 떨어진 푸른 조각을 한 차례 짓밟았고, 동시에 시야가 깨지듯 조각남을 느끼며 머리 한쪽에 손을 얹은 잠뜰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굽힌 채 왈칵 헛구역질하기 시작했다. 알아선 안 될 무언가를 알아챌 듯한 가물거림과 부정하기 위한 어질거림. 눈을 대고 보던 만화경이 안쪽부터 점차 무너지듯 시야가 조각나 떨어지는 걸 속절없이 지켜보며 종국에 주저앉은 그가 괴로운 숨을 할딱이고, 떼어낸 발아래 곱게 부서진 푸른 잔해를 신코로 차버려 흐트러뜨린 그림자는 여전히 먼 발치에서 어느 때보다 선명한 소리를 속닥인다. 정과 반에서 마침내 합을 이루어도 네가 얻을 수 있는 결말은 오로지 하나일지니, 그때까지 즐겁게 지내도록 해.


4. 저세마, 이후의 용사님

처음은 항상 하찮은 이유와 충동으로 시작한다. 옆에 두면 감시하기도 편하고 겸사겸사 휘발된 줄 안 옛 기억도 떠올리면서, 무엇보다 이별이 예정되었다는 까닭 하나로 제 보금자리에 마지막 남은 마족 둘이 들어갈 둥지 하나를 만든 오래된 용사처럼 말이다. 주변에 타박할 사람이라곤 마음에 물때처럼 끼었다가 그마저도 시간을 이기지 못해 삭아버린 검은 흔적 같은 기억뿐이니 직접 만든 공고문을 몰래 예상 경로에 붙이고, 어딘가 어설프고 이상한 인간인 척하면서 들어온 둘을 기어코 안으로 들여 살림살이 꼬락서니를 참다못해 직접 생활 방법을 가르칠 때도 그랬다. 짧으나 짧지 않은 날이 지나고, 드디어 어느 것 하나 태워 먹지 않은 냄비 속 스튜를 그릇에 담으며 자기가 드디어 해냈다고 자신만만하던 조그만 마족 비서를 볼 때까지도 본인 딴에는 냉정한 판단으로 저가 감당할 수 있는 지점까지 둘을 봐준 거라 굳게 믿던 용사가 제 실책을 인정한 건 성배 사건으로 무심결에 꺼낸 속내 때문이더라.

용사의 숙명은 절대적이고 불공평하다. 정해진 운명 자체가 생의 시발점이자 마지막이기에, 끝내지 않으면 영영 맺음 짓지 못하고 동그란 원을 그리며 살아야 할 정도로 강한 세상의 염원. 본래라면 그 운명을 짊어진 최초의 사람 한 명으로 끝낼 수 있으나 그런 사실을 혼자서 알 정도로 이치는 상냥하지 않고, 몰랐기에 의도치 않게 대를 이어가며 제 숙명을 자식에게 피로서 대물림하던 짐 떠넘기기를 자기 선에서 마무리 짓기 위해 홀로 살아온 그였다. 물론 시작은 본의가 아니었고, 오십이 넘고도 가장 활동성 있는 때 모습에서 변하지 않는 자신을 알아채며 불현듯 깨달은 사실이라 어영부영하게 된 일이지만, 몇백 년을 마땅한 소속감 없이 의무와 목표만 가지고 저를 두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에서 죽지 않고 산다는 것 자체가 유전자에 새겨지길 더불어 살도록 태어난 생명체에게 쉬운 일은 아니므로 이는 한갓 인간이 할 수 있는 끈질긴 집착이자 대단한 각오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으로서 있기보다 아예 하나의 숲이 되고자 했다. 같은 종이나 생애 주기가 달라 몇 번이고 황폐해졌다가 풍성해지는 나무와 들풀 사이에서 홀로, 오랜 세월 살아남은 당산나무처럼 굵게 뿌리를 뻗고 자리를 점했으니 아래로 새로운 뿌리가 자랄 겨를이 없어 넋을 기릴 죽은 그루터기 하나조차 남지 않은 외로운 땅, 곁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들 잔잔하게 깔린 흙바닥 아래 있을지 모르는 죽은 것의 흔적을 깔고서 사니 괜찮다며 자기위로하는 고목이. 허나 그렇게 지내도, 오랜 시간 잊고 살아 이젠 없어도 살 수 있도록 진화해봤자 처음 새겨진 본능에 맨 생명체는 갑작스레 놓인 물을 마시고 만다. 필요 없어도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으므로.

“어쨌든 당신들이 다른 곳으로 가면 이 세계에선 마족이 없어지는 셈이잖아요? 그건 내가 할 일이고”

만약 찾았다면 저도 모르는 새 빠르게 챙기고서 도망칠 수 있도록, 아예 터놓은 성배 방 바로 뒷공간에 이제껏 모아둔 금과 보석을 자기 딴에는 알기 쉽게 쌓아놓고 알리지 않은 건 그래서다. 이걸 가지고 어서 꺼지라고 하기엔 그렇게 모으기까지 들어간 제 노력이 아까운 것도 있으나 마족 둘이 정말 금은보화를 챙기고 영영 이 세계에서 사라진 순간 날 때부터 용사인 공룡의 숙명은 드디어 종극을 맞이하고, 오랫동안 접 붙어 하나처럼 있던 시작이라는 꼬인 선 자체가 잘릴 테니 이후로 펼쳐질 자신의 뒷일을 알 도리가 없다는 게 덜컥 두려워졌으리라. 심지어 너무 오랜 시간 깎이느라 무뎌진 감각이 따끔거리며 살아난 건 오래전이고, 그저 자신이 외면하고 있었음을 느리게 깨달은 용사는 거기에 자잘한 두려움이 몇 개 더 얹어진 걸 깨닫더라. 할 일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들리던 텔레비전 소리와 숨죽여 킥킥거리던 웃음, 어서 오라는 타인의 목소리와 전기세 아까운 줄 모르고 온갖 불을 다 켜서 인기척이 사방에 묻은 방. 자기들 딴에 꼭꼭 숨겼다며 좋아하던, 고작 목표 금액의 절반도 안 되는 10년짜리 적금 통장 두 개와 아득바득 모은 돈을 죄 통장에 넣길래 불쌍하다는 말과 함께 저가 사준 옷 몇 벌.

하찮은 시작은 시간을 먹고 자라 가장 하찮은 두려움이 된다. 켜켜이 쌓인 시간에 짓눌려 빠지지 않을 줄 알았더니 조금이라도 당기면 자신은 매인 적 없다는 양 그대로 쏙 빠져선 그간 쌓인 게 우르르 떨어져 속을 아프게 만드는, 물꼬를 튼 누군가가 작정하고 빼겠다면 저 혼자 어쩔 도리가 없어 그대로 무너지는 시간을 온전히 혼자 감내해야만 하는 두려움 말이다. 강산이 변할 정도로 긴 시간을 보내는 새 무뎌졌다고 해서 한번 아팠던 곳이 다시 찔릴 때 안 아픈 건 아니다. 상실을 수용하고 받아들인 뒤 마음 편한 쪽으로 생각하며 아픔과 멀어지는 거지, 자체에 달관하는 건 용사의 영역이 아닌데다 그럴 정도로 오랜 시간을 투자해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

“있잖아. 금값이 또 올랐단다. 미친 거 아니니? 인간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왜 이리 금을 좋아하고 난리야.”

“왜요. 지금 당신도 금에 미쳐서 목매잖아요.”

“아니, 인간이 금 모으는 거랑 내가 금 모으는 거랑 목표가 같니. 어? 나는 열어야 하는 포탈에 금이 들어가니까 모으려는 거잖아. 그런 의미로 월급 인상 좀 해주라. 응? 벌써 30년이 지났어. 저번에 들으니까 최소임금제라는 거 있다매. 벌써 몇 번이고 인상됐다는데 왜 우리 임금은 동결이 났냐고”

“와아~ 벌써 거기까지 알아냈어요? 많이 똑똑해졌는데 부업 한다면서요. 그거 보태시던가~”

“야! 그거 누가…… 덕개야아! 내가 고 박쥐 같은 놈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겸사겸사 하루라도 빨리 모아서 가주면 너나 인류한테 좋은 일 아니냐? 용사가 왜 그리 속 꼬인 얼굴을 해. 30년 하고도 몇 년을 더 같이 살면서 신분증과 집 주소, 모든 신고를 한 번씩 다시 해서 싹 바꾼 어느 날이었다. 주민증이 있다는 건 최소한의 생존을 인간 정부에 꼬박꼬박 알려야 하는 거고, 적어도 그 모든 걸 자신이 원하는 절차대로 밟아 살길 바라는 용사의 편의를 위해 고용주와 노동자가 아닌 동거인이 되어 셋 사는 집 기준으로 책정한 지역 보험까지 떼일 때. 벌써 다섯 번째인 임금 인상 시위를 다섯 번째 거절하는 사장이 아니꼬와 부업 할 때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를 조잘대던 마왕은 문득 제 피부를 스친 달콤한 기운에 어리둥절한 낯을 지었다. 마족에게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은 늘 좋은 입가심이고, 바로 앞에 있는 용사는 한 번도 저에게 단 기운을 준 적이 없으니 어느 지점에서 그런 생각을 했나 인과를 가늠할 수 없어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지만, 함께 지낸 세월이 세월인 만큼 용사의 심리를 어느 정도 알았다 싶으니 더 의문스럽게 느낀 모양이다. 그러기엔 서로에게 뜨뜻미지근한 관심만 두고 살았으나 이만큼도 마족으로선 큰 관심인 셈이니 딴에는 그런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낄 정도로 용사가 크게 진동하는 인과 지점을 모르는 게 커다란 의문인 셈이었다. 물론 당장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금방 뒤로 미뤘으니 잊는 것도 금방일 테지만

“하여간 사장아, 둘이 아니라 월급도 한 명만 받잖아. 슬슬 올려주라. 제에바알. 그래도 몇백년 죽치고 살아야 할 판이라고 진짜. 너도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우리랑 같이 있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존대는 포기했다지만 사장아…는 좀 그렇지 않나?”

슬쩍 내민 입술로 투덜거리듯 말하니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하는 말이 제법 가관이다. 에이, 뭘 우리 사이에 호칭 가지고 그래. 그럴 때마다 용사는 멀게만 느껴져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던 제 끝을 다시금 떠올리며 시선을 내리깐 채 답지 않게 분위기를 잡았고, 똑똑하지 않아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도 억 단위를 만져볼까 말까인 단순한 마왕은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질 땐 이게 최고라며 슬쩍 투명한 포장지로 싼 박하사탕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면 먹긴 하나 딱히 좋아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거니 먹으라며 어거지 부리는 걸 한 번 받아준 뒤로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얻게 된 간식이었다. 그걸 사준 게 용사 본인이어서 꼴이 퍽 우습지만. 그만 주고 혼자 먹으라니까요.

오늘도 절반 넘게 찬 유리병에 들어갈 사탕을 쥐고서 생각해보겠다며 한숨만 푹 내쉰 그는 뿔 숨길 생각도 없이 드러낸 채 시원하게 웃으면서 만세삼창하더니 그대로 뒤돌아 덕개를 열심히 부르며 주방으로 잰걸음 하는 마왕을 바라본다. 주머니에 넣은 손아귀 안으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하얀 사탕을 돌돌 싼 얇은 봉지가 바삭거렸다. 그게 못내 시끄러워 마음까지 술렁이기에 어떤 충동이라도 들었는지 손을 빼어 포장지를 뜯어내고, 인위적인 단맛보다 싸한 향이 더 진한 사탕을 꺼낸 그가 동그랗고 결이 거친 겉면을 이로 물어 고정한 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그대로 짓눌러 와드득 씹어먹더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보다 골수까지 징징 울리는 사탕 부서지는 소리나 그에겐 아마 짐덩이나 마찬가지일 마족 둘이서 떠드는 소리가 더 커서 아까보다 한결 낫다고 중얼거리는 게 정말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당이 들어가선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본인도 이유를 모를 터다.


5. 수이웃, 라일락

호상은 모인 사람 모두 눈물을 머금을지언정 영정 사진을 앞에 두거나 아니면 따로 차려진 옆방 식당에서 옹기종기 모여 큰 소리로 떠들고, 술이나 음료로 그득 찬 잔을 들어 고인의 평온한 마지막 잠을 축하한다. 떠나는 자가 이승에 걱정이나 미련이 생겨 엉거주춤하지 않도록, 사는 날 당신께서 쌓은 덕이 지금 우리의 행복이니 이걸 보고서 편히 가시라는 보여주기식 축제인 셈이다. 허허! 우리 잠뜰 씨가 참……. 장례는 허수아비의 주도로 평소 어울리던 이웃 몇 명과 같은 민원 부서 직원, 가게 단골과 아파트 1세대 주민 몇 명만 이끌고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살아생전 가정을 꾸려 슬하에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붙이의 장례를 주관했으면 했지 대신해줄 사람이 남지 않은 모양이므로 챙길 사람이 없다면 혼 가는 길을 자기들이 배웅했으니 육신까지 책임지겠다나. 꼼꼼하게 바른 선크림에 가장 아끼는 잔까지 챙겨와 매장하는 풍습은 알았지만 이런 관습까지 있는 건 또 몰랐다며 블러드 쥬시를 딱 반 잔 따르고 홀짝거리던 뱀파이어가 멀거니 단상 위 독특한 향 연기에 쌓인 사진으로 눈길을 보낸다. 너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영혼은 이미 안식을 위한 기차 여행을 끝마쳐 이곳에 없는 걸 알면서도 하는 혼잣말 옆에 뭘 그렇게 구시렁거리냐는 타박이 날아들었다.

“즐거워 보인다?”

“안 즐거울 이유도 없죠. 뭣보다 이거 보여준댔다고요.”

정말 볼 수 있을지 여부는 둘째치고 만에 하나라도 본다면 바로 옆에 승화도 있을 테니까 기왕이면 걱정하지 않게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전날 밤까지 누구보다 크게 울어 눈 아래가 팅팅 불고 거뭇한 꿈 토끼가 비슷한 색의 포도 주스로 채운 잔을 와인 잔에 조심스레 부딪쳤다. 짠.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투닥거리는 목소리, 주방에서는 한창 개발 중인 요리인데 맛 좀 보라며 앞치마에 위생모 질끈 동여맨 하프 드래곤이 허수아비의 걱정스러운 충고를 밀어낸 채 불 조절과 고기 굽기로 바쁘고, 과묵한 언데드 기관사는 여기저기 연거푸 따르는 술을 마시며 나오는 구운 고기까지 족족 해치우는 기행을 보이다 바로 옆에 묵묵하게 앉아 있던 친한 저승 주민이 물꼬 터지듯 울기 시작하면 뭘 울기까지 하냐고 달래기 바쁘더라. 당사자가 보면 안심하다 못해 열통 터져 당장 꺼지라면서 늘그막에 애장품으로 들고 다니던 빨간 파리채 휘두르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막내야, 여기 커피. 너 아아 좋댔지.”

“떠니~ 막내가 나중엔 이 시리다고 뜨아만 먹는댔어.”

“난 뜨아 싫은데…….”

누구는 들어오는 입구부터 울고, 누구는 얼큰하게 취해 깔깔거리다 불현듯 추억 이야기가 나오면 가장 먼저 끼어들어 조잘거리며 고인과 얽힌 추억담을 줄줄이 읊다 점차 수그러든 목소리로 울먹거리다 몇 분 울더니 고작 술기운에 슬픈 걸 싹 까먹고 왜 이리 분위기가 칙칙하냐며 춤을 추는 난장판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잠뜰의 장례식장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인간과 이종족이 거리낌 없이 한자리에 모인 채, 잔을 맞대고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 눈시울이 붉어지면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고 진심으로 위로하면서. 여기만큼은 종족의 다름이 의미가 없었다. 색이 어떻든 키나 육체의 유무, 같은 생리 활동을 거치지 않아도 모두가 공통점 하나만 가지고 애도하며 축하하기 위해 모인 만큼 이 공간 안에서는 죄 동일한 존재이므로, 처음 만났어도 스스럼없이 말 거는 모습 전부가 사무친 나머지 아까까지 뱀파이어가 선 자리에 들어가 홀로 눈가만 훔치던 허수아비는 길이 다른 향이 빼곡하게 꽂혀 이게 향로인지, 드라이아이스 통인지 알 수 없는 단상으로 다가가 두 번째 향을 꽂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세 가지 계절을 거쳐 그리고 다시 봄. 마냥 아름답기만 한 해피 엔딩은 세상에 없지만, 그렇다고 내내 어여쁘기만 했다면 어떤 등장인물이 사랑받기만 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리 사무치게 와닿지 않을 터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별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이 오듯 그들이 함께 사랑하던 이를 떠나보냈으나 다시 곁에 찾아오는 것이 순리고, 이별은 언젠가 뒤집혀 재회 혹은 만남이 되니. 다시 찾아올 만남은 지나간 이별보다 유독 각별할 터다.


6. 도망자_트그내글

욕망은 인지의 부산물이다. 인지하지 못해 그러한 개념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미지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일이란, 적어도 인간사에 전례 없던 일이니 남자의 욕구는 오롯이 자기만의 자각과 이해에서 나온 결과물일 터다. 삶의 의지, 저가 버릇처럼 살고자 발버둥 친 욕구가 어디서 비롯된 줄도 모르면서 관성적으로 그러리라 믿고 지금까지 살아온 남자가 깨달은 것.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나름 중대하다면 중대한 문제의 시작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모든 문제가 최초의 ‘왜?’라는 질문에서 우후죽순으로 태어나듯

 

도플갱어. 단순히 외형만 똑같은 존재를 일컫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은연중에 생각하게 되는 단어를 떠올리며 지나간 사람 두 명을 가만히 생각하던 그는 조수석에서 미동도 없이 잠든 파트너를 곁눈질로 힐끔거린다. 사실 머릿속에서 그려보던 사람이나 바로 옆에 잠든 사람이나 외관 자체는 옷을 바꿔 입은 본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같아 구태여 옆까지 볼 필요는 없지만, 꼭 눈에 담아야 성이 차는 사람처럼 가만히 지켜보더라. 잠든 것치고 빠르게 오르고 내리는 가슴, 소리는 없지만 안정된 숨보다 무언가를 숨기는 자 특유의 가파르고 미세한 바람 소리를 담아낸 그가 흐릿한 달빛으로 어두침침한 세계의 조각이 섞여 탁해진 눈을 가늘게 떴다. 디디제약에서 보낸 요원 일로 똑같이 생긴 둘이 대면했으니 이제껏 마주친 모두가 다른 존재라는 건 알지만, 계속해서 드는 의구심으로 일을 할 때 잠뜰이 그러하듯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울렁거린 탓이다. 생존에 문제가 될 거란 직감이나 의심 따위가 아닌 본질적인 관심. 제 인생에 새로이 끼어든 존재의 외관이 어째서 제 주변에 심심찮게 널렸는지, 그때마다 어째서 자신은 위기에 봉착했는지 따위가 궁금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가끔 달달거리며 지나가는 여행객의 자동차 엔진 소리, 부는 바람에 풀이 버스럭거리며 흔들리다 멈추거나 야생 동물이 지나갈 때마다 조용해지는 풀벌레 소리만 선명할 정도로 고요한 트럭 안에서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숨죽인 삵처럼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과 상태가 불분명한 잠자는 사람 사이에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는 침묵이 앉았다.

“자냐?”

가뜩이나 어두운 세상에 두꺼운 높층구름이 달을 가리자 사위는 말 그대로 암전 상태로 변하고 트럭에 붙은 내장형 라디오의 흐릿한 주황색 불빛이 두 사람을 비출 때, 동공에 들어찬 빛을 먹는 듯 생기 없는 붉은 눈동자에 전자 불씨가 일렁이면 살짝 들린 턱이 울렁이다 한 번의 침 삼킴과 함께 불그스레한 빛이 섞인 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 먼지 티끌처럼 존재감 없이 드러나는 거다. 이제껏 계속 지켜보던 자의 시선에는 확연한 변화지만 말이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데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자냐. 있던 잠도 날아갔다.”

왜. 또 뭐가 문제신데요. 잠을 방해받은 사람이 으레 그러듯 날 선 신경질이 휘핑처럼 올라간 잠긴 목소리가 배경 음악 같이 잔잔한 라디오 속 아나운서와 풀벌레 울음을 뭉개고 운전석을 꽉 채웠다. 어쩌면 남자의 집중이 라디오나 풀벌레 따위에 있는 게 아니어서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른다. 문제는 아니고 궁금한 게 생겨서. 이제껏 기어 스틱 근처에서 배회하던 손이 무심하게 뻗어진다. 멎은 숨과 바짝 조여 올라간 어깨에 시선이 스치고, 짧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잡은 손가락이 물건 감정하는 전문가처럼 꿈지럭거리더니 한순간 힘이 들어가 그대로 머리카락 두어 개를 뽑았다.

“아! 진짜 뭐가 문젠데 이 자식아!”

“왜 똑같은 녀석끼리 만나면 죽는다잖아. 진짜는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아저씨한테 가져가서 분석 의뢰 넣을 생각이라고 히죽거리며 하는 말에 할 짓도 없다고 비아냥거리던 잠뜰이 주머니에 이제껏 넣은 손을 빼 열지 않은 문짝 창틀에 얹는다. 희미한 불빛을 보고 계속해서 머리 박는 날벌레와 그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선팅. 얇은 유리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불일치를 손바닥으로 문지른 그가 가만히 눈을 맞췄다. 그래서 진짜 할 말이 뭔데.

“차라리 다른 녀석을 죽여.”

죽음이 만연한 세계에서 누군가를 죽이라는 말 역시 너무나 가벼운 문장이다. 임무나 세상이 강제했다는 핑계를 들어가며 포장한 개인적인 이유로 온 사람이 남발하고 다니느라 본래의 뜻이 희미해진 말. 뭐가 나오든 죽이고 네가 살아. 가방 비밀번호를 아직 알려주지 않았다고, 간헐적으로 움칠거리며 떠는 다부진 손이 핸들을 꽉 쥐는 동시에 피로와 병색으로 파리한 얼굴에서 온 짧은 진심이 흔한 말에 묻어간다. 어우, 재수 없는 소리를.

“나도 죽을 생각 없어. 인마”


7. 그아없_범인뜰 스파이룡

근데 본인들이 안 나오는

뾰족한 첨탑 지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고성에는 사람 먹는 괴물이 산다.

정확히는 암암리에 그런 입소문이 돌았다. 그도 그럴게 비루 먹은 꼴로 빌빌거리는 자든 기름진 털의 백마 두 마리가 끄는 황금 마차에서 으스대며 간 고풍스러운 자든 새까만 흑철문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철문을 열고 돌아간 자가 아무도 없는 탓이다. 아무리 성이 외진 평지숲 중앙에 있어도 가는 길목에 조그마한 촌락조차 없기란 어려움으로, 적어도 그곳에 사는 촌락민에게 인기척 없이 늘 새하얀 고성은 괴물이 사는 공간이요, 그러면서 매 분기마다 드나드는 행렬이 끊이지 않는 이상한 곳이자 미지의 공포였다. 아무리 고집 센 아이여도 새까만 문이 열린다고 하면 재빠르게 집으로 돌아갔고, 혈기왕성한 청춘이나 겁을 모르는 만취자도 흰 성으로 가 진실을 밝히겠다며 객기 부린 적이 없으니 이정도면 그네의 머릿속에 어떤 두려움으로 박혔는지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달 중앙이 새카맣게 뻥 뚫린 밤. 창문 밖으로 빛이 새지 않게 침 묻힌 손가락부터 놋쇠 뚜껑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촛불을 끈 촌락민 대부분은 오늘 같이 불길한 밤이면 말하는 법을 겨우 익힌 어린아이부터 무릎이 시린 노인까지 잠들기 대신 은밀한 틈새로 집 바깥의 유일한 큰길이자 평지숲으로 향하는 도로를 엿보길 바란다. 꼭 불길한 날에 알려지지 않은 자의 축제라도 있는 양 하얀 성으로 향하는 행렬이 유랑극단의 순회 공연처럼 꼬리를 물고 움직여서다. 점잖은 차림새에 다채로운 가면, 모두 어느 정도 일면식이 있는지 은근하게 서로의 발자국을 살피며 걷는 무리와 그들을 이끄는 길잡이인지 설원 속 흰 늑대처럼 얼룩덜룩 묘한 하얀색 깃발을 성의 첨탑처럼 치들고서 가장 먼저 숲으로 들어가는 경계에 발 들인 길쭉한 초록색의 누군가.

꼭 죽은 마을 같다는 속닥거림이 선명할 정도로 모든 생이 숨죽인 가운데 괴팍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도 동상인 양 가만히 숨만 내쉬며 지켜보던 대부분의 촌락민은 행렬이 가져온 횃불 그림자가 길목을 덮다 못해 새까만 숲 안으로 먹혀 사라질 때에야 이제껏 엿보던 은밀한 구멍을 헝겊이나 종이, 못으로 박아둔 얇은 나무 판자로 다시 가린 채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사람 먹는 고성이 다시 배를 채웠다, 한동안 마을은 안전할 거야. 누군가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며 기도하듯 손을 모았던가. 아니면 조그마한 단상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의 신을 찾았던가. 무엇이 되었든 당장 기도부터 올리는 신실한 자든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어 한탄을 사는 자든 누구도 고성으로 들어간 자의 무사까지 걱정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리라. 늘상 그러듯 물 먹은 양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흑철문을 열고 나올 자는 없을 테니.

갑작스레 부는 돌풍에 외마디 비명처럼 철문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섞이고, 귀가 밝은 아이 여럿이 제 베개를 안고 부모나 형제를 찾아 어두운 거실을 헤매는 밤. 도깨비불처럼 숲을 헤매며 둥실거리던 빛이 돌연 사라진 어두운 월식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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