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이후
날조하는 뒷이야기
와~ 1.5차...?
잠뜰님 단기 상황극 혁명 2차 연성. 오로지 상황극 혁명 속 캐릭터 설정값만 가지고 씁니다.
오랜 시간 숨죽이고 살다 겨울녘 들불처럼 나타난 혁명은 에투알 왕성의 종탑 꼭대기까지 살라 먹고서야 말라비틀어진 땅에 비료가 될 잿가루를 뱉고 스러졌다. 모든 생이 차고 기울면 이후에 다시 차오르는 순리를 가졌다지만, 죽기 직전 반토막 난 왕권을 계승하고 허름한 왕좌에 앉은 마지막 왕마저 가볍디가벼우나 쉬이 꺼지지 않을 시퍼런 불티가 삼킨 채다. 다시 차오를 시발점이 없다는 사실과 역사를 편찬할 승리자가 뤼미에르인 것, 선대 왕의 마지막 행적을 생각하면 에투알 왕조는 두세 장 분량이라도 어딘가에 적히면 그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과거가 된 셈이니 정말이지 완전한 몰락이어라.
이전에도 바빴으나 이제는 침대에 누울 새도 없이 바빠진 혁명단과 아래로 완전히 뒤바뀐 다수의 인생. 거대한 파도에 쓸려 떠다니는 오리 같은 군중 가운데 동실거리며 떠밀려온 평범하디 평범한 갈색 점 하나가 혼란스러운 때를 노려 조용히 틈바구니에 끼었더라. 오랜 시간 곁에서 지낸 이가 작정하고 보아도 무심코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럽게
무수히 지나간 어제와 다를 거 하나 없는 평범한 오늘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로 요동치는 물가, 찰나 바뀐 삶의 방향을 못 보고 뒤집힌 채 거꾸로 사는 자와 현재에 순응하고 의지를 잇는 불씨 같은 자의 다툼은 혁명 이후로 늘상 반복되던 일이니 고작 말싸움 한 번에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한 지금도 평범하다면 평범하리라. 고로 항상 시키던 보리차 같은 맥주를 들고서 ‘요즘 젊은이란’ 서두로 시비 거는 동네 어르신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평화로운 일상이고, 끝난 왕조 시절이 힘들어도 가장 살기 좋던 때라며 푸념하는 걸 한 쪽 귀로 흘리는 지금도 똑같은 하루인 셈이다. 주에 네 번, 그렇게 4주를 마주치니 맞장구치는 연기력이 늘었는지 보지도 않고 맞는 말이라고 허허실실 넉살 좋게 웃으며 일하는 척 진열대로 행주를 들고 도망친 잠뜰은 의미 없이 깨끗한 접시 안쪽을 뽀독거리게 닦다 못해 안쪽 그림을 지울 것처럼 문질러댔고, 한참을 그러다 혼잣말에 목이 탄 영감님이 맥주 한 모금 하느라 조용해진 사이 들리는 책상 두드리는 소리에 슬쩍 그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지금부터 나흘 동안 마을에 없을 저 대신 가게를 봐줄 주인집 셋째 딸이 거기서 손 흔들며 저가 왔다고 두 사람에게 인사한다. 직원용 책상 아래 숨겨둔 허름한 가죽 짐가방, 서로에게 흔들며 보내는 친밀한 인사 끝말에 카랑카랑하게 따라붙는 노인의 높은 목소리. 누구 하나 훌쩍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해서 어제와 다를 건 없었다. 어제만 해도 사거리 윗집이 반나절 만에 텅 비었으니 떠나감 자체는 별일이 되지 않는, 특별하다고 칭할 게 없는 시간이다.
누구든 고만고만하게 사는 골목에서, 남과 똑같이 고만고만한 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를 누가 특출나게 별나다고 할까. 왕가를 전복시키고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불러온 1대 대통령, 루시엔이 취임하자마자 과거를 기억하자고 세운 국립 왕실 기념박물관이 완공되자마자 득달같이 갈 준비를 끝마친 게 그나마 이 마을에 정착해 산 2년 동안 보인 모습 중 가장 별나다면 별날 터다. 그간 악착같이 그러모아 애지중지하던 돈을, 구두쇠로 유명한 손씨네 영감님도 질리다 할 정도로 모으던 걸 무던하게 털어가며 채비했으니 말이다. 다들 첫날은 무슨 일인지 물으면서 걱정해도 둘째 날에는 말을 잇지 못했고, 떠나는 당일에는 가면서 먹을 음식이나 도시락을 챙겨주는 게 전부일 정도로 간절했으니 끈질기게 말리던 이마저 없더란다. 막상 마차에 앉아 구운 고구마나 뜯으며 끈적한 손을 몰래 지푸라기에 닦는 모습이 태연해서 누가 보면 참 답다고 허탈하게 말할 태였지만.
“뜰아, 도착혔다.”
“예이~ 감사합니다! 정씨 아저씨”
“그려. 거 도시에서 뺀질~뺀질거리는 놈 조심하고, 밤길도 어? 막 돌아다니지 말어라. 어? 잘 보고 다녀서 헛발질 허덜랑 말고. 뒤로 자빠져서 밤탱이 된 게…….”
“아이고오~ 아저씨! 저, 길이 급해서……! 먼저 갈게용.”
가시는 길에 드시라며 건넨 간식을 두어 개만 빼가고 나머지는 도로 자기 품에 밀어준 정씨 아저씨가 평소 얼마나 군것질거리를 좋아하는지 알던 그는 마차 난간을 잡고 내려가며 천지가 개벽하겠다고 낄낄거리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비처럼 쏟아지는 잔소리에 장난기 가득하던 얼굴을 과장스레 구기곤 뒤로 물러섰다. 하는 짓이 꾀 많은 열 살짜리 같다는 푸념에 재빨리 짐도 다 챙기고서 뒷걸음질로 도망치기 시작한 잠뜰을 보며 더 말하려다 그냥 얕은 한숨 한 번 내쉬고 말기로 했는지 가만히 껌뻑이기만 하던 마부는 어서 가라고 손짓하는 동시에 위태롭게 걸어가는 동네 아는 청년 들으라는 양 혼잣말을 크게 중얼거린다. 거 앞을 보라니깐! 괜찮다ㄱ…… 으악!
어린 시절 기억은 온 머리가 하얗게 세어도 으레 가슴 한쪽에 살아남기 마련이다. 인간이 추억과 관계로 살아간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거겠지. 집 근처까지 들락거려도 눈에 보이는 어른이 덕개 아저씨 한 명이라는 이유로 은근슬쩍 발 들인 친구의 으리으리한 집구석에서 몰래 만져보거나 내다 팔면 얼마일까 혼잣말하던 물건 전부가 잘 닦은 유리 진열장 아래서 반짝이는 걸 말없이 보던 그는 괜히 제 머리 끝자락의 푸석하게 갈라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우물거리며 무는 입술이 허옇게 질렸다가 붉게 퍼진다. 잠뜰에게 기억은 한계까지 쑤셔 박은 창고다. 아니면 위가 불룩해질 정도로 쌓고 질긴 노끈으로 묶어서 억지로 봉해버린 상자거나. 그만치 넣은 걸 까먹고 한참 지나서 아무 생각 없이 건드리면 뒷골이 뻐근할 정도로 감당 못 할 일이 생기지만, 그렇다고 쉽게 버리거나 정리하기 어렵다는 점이 똑같아서 줄곧 그리 생각했다더라. 하얗고 파란 꽃. 물 한 방울 없이 바닥에 떨어져 조각난 화병 파편 사이로 원래 색이 어렴풋이 보이던 기억 속 포푸리 꽃다발과 지금 박물관에 진열한 물건 사이사이 장식으로 꾸몄는지 꽂은 가짜 꽃이 서로 겹치고 분해되어 나눠진다. 불현듯 심장이 불편한 사람처럼 입을 한 번,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다 진열대 유리 은근슬쩍 기댄 그는 옆 방에서 들리는 달음박질과 아이의 간드러진 웃음에 맞춰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라더라는 이름 두 글자만 떠올리면 밀물처럼 밀려드는 까닭 모를 아픔 때문이다. 아버지를 잃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저릿한 통증이 연이은 날숨을 따라 가루가 되어 날아간다.
미처 기우지 못해 구멍이 뻥뻥 뚫린 바지를 입어도 춥지 않아 괜찮던 어린 날 초여름의 기억. 나무가 우거져 볕이 따갑지 않고 포근하던 녹음 속에 멀뚱히 서 있던 희무끄레한 파란색이 점차 덧칠되는 종이 속 점처럼 거칠게 보푸라기가 일면서 선명해진다. 비싼 옷의 색감과 머리 때문인지 묘하게 창백하던 얼굴과 눈이 마주쳤을 때 본 주변 색은 늘 그렇듯 바래진 줄 알았을 때쯤 한 번씩 선명해지곤 했다. 다른 시각적인 구성과 달리 색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인식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다 읽은 책을 덮고 혼자 중얼거린 적도 있더라지. 이어 도서관에 며칠이고 자리를 펴고 탐독한 순간이 떠올랐지만, 당장 필요한 기억은 아니므로 고개 한 번 저어 날려 보낸 잠뜰은 대신에 미완이라 하얗게 빈 곳이 더 많은 그림 위로 마지막 기억의 색을 발끝까지 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머릿속에서만 완벽하게 칠해졌을 오랜 친구의 먼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선이 비싼 쪽색으로 채운 벽지와 기둥, 그사이에 홀로 선 어른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향한다. 내가 보던 너는 파란 벽지보다 온통 푸른 숲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꽃밭이 더 어울렸는데. 박물관 소유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선지 색이 칠해지다 만 파란 벽지 어드메의 허공에 손을 얹은 그가 무심하게 긴 말을 중얼거렸다. 사정 모를 남이 들으면 이상하게 들릴 말은 다행히 박물관에서 날뛰던 아이의 요란한 웃음과 발소리에 묻혀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았고,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겉옷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종이꽃 하나를 꺼내 제 신코에 떨어뜨린 그가 조그만 미소를 짓는다.
“참 밉다. 네 편지 하나 읽겠다고 기껏 글도 배웠는데 이게 뭐야. 맘껏 원망도 못 하잖아.”
투덜거리는 말과 다르게 일견 후련해 보일 정도로 멀끔해진 얼굴에는 눈물 한 자락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냥 슬프게만 여기기엔 사정을 정확히 깨닫는 동시에 모든 게 끝나면서 오랜 친구의 사정을 이해할 시간이 생긴 덕이다. 그래서 참 미워. 그런 계기를 마련해준 네가. 그러면서도 끝에는 눈을 뜨게 해주어 고맙다고 모순적인 말을 거리낌 없이 중얼거린 그가 이번에는 회백색 종이꽃 옆에 갈색 지푸라기로 묶은 하얗고 푸른 종이꽃 하나를 더 떨구곤 미련 없이 바깥으로 돌아나간다. 위로할 상주가 없는, 고요한 조문의 시작이었다.
루시엔은 좋은 선생이자 지도자다. 그러니 쪽지 하나 없이 무작정 나온 이상한 학생이자 조력자인 저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찾으려 할 거라 미리 짐작한 잠뜰은 미리 익숙한 얼굴을 피해 새로 산 갈색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가방에 넣은 둘러대기용 신분패를 연신 확인하며, 수현이 이끌던 시절에 다닌 개구멍이나 수풀이 우거진 비밀스러운 길을 찾아 다 막혀가는 길에 어거지로 몸을 밀어 넣는다. 길이 험하긴 해도 직선으로 이어진 덕에 아침 일찍 아버지의 묘를 찾아 기도를 올리고도 전대 에투알 왕실의 별장 숲으로 해가 한창일 때 들어설 수 있더라.
“……내가 여길 또 오네.”
혁명단에서 활동하며 배운 게 글과 지식만이 아님을 보여주듯 사람의 흔적과 규모를 파악하려 바닥과 주변 나무를 훑던 그가 손을 털면서 이제껏 구부린 허리를 펴고 길게 기지개 켠다. 혁명이 승리로 끝난 바로 다음 날 일어났다는 의문의 방화 사건 이후로 듬성듬성 새까맣게 변한 산장 근처는 일부가 불타 그슬린 채 내골격이 드러나고 부서진데다 멀쩡한 부분은 인근에 사는 주민이 경비 몰래 조금씩 떼어갔는지 이리저리 긁혀 일견 흉하기까지 했다. 자체가 소중할 정도로 들락날락거리며 자주 온 곳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이 군데군데 박힌 장소가 볼품없게 변한 건 아무리 잠뜰이라도 속이 상하는지 가슴팍을 지그시 누른 채 꽉 막힌 속에 겨우 나는 듯 가느다랗고 답답한 숨을 아슬아슬 내쉬며 그나마 멀쩡한 바깥으로 고개 돌린다. 나도 그릴 줄 알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릴 텐데 아쉽네. 들어주는 사람이라도 있는 양 정확한 발음으로 연신 혼잣말을 되뇌던 그가 이번에는 바닥으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터인데 휘이 둘러온 바람에 파스스 나부끼던 풀잎이 까딱이며 대신 긍정한 듯도 싶다.
밟히는 잔해를 조심조심 건너가며 잠뜰이 가장 먼저 찾은 장소는 흐드러지게 핀 언젠가의 꽃은 죄 죽고 푸르죽죽하게 잡초만 무성한 정원. 날씨가 궂어 밖에서 놀 수 없을 때면 둘이서 작당하듯 속닥거리다 찾아오던 신비한 공간은 그 신비함이 주인과 함께 죽은 양 억세고 질긴 생명만 남은 와중에 공간을 가르던 유리와 벽마저 무너져 언뜻 보면 밖과 다를 게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를, 한쪽 무릎을 꿇고서 손바닥으로 더듬거리던 머리에서 모자가 흘러내리자 퍽 다급한 떠돌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바깥이나 여기나 똑같다는 것.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어지간한 어린 시절 기억은 잊어도 잊히지 않는다. 망각이라는 축복을 받았다면서 모순이게도 어떤 기억은 스스로 뾰족한 모서리를 깎고 저를 부드럽게 다듬은 채 미화되어, 그걸 품은 인간이 어떻게든 생각을 이어가게 만든다. 그게 좋은 기억이어서 포슬하고 그리움으로 가득 찼든 다시 떠올리기 싫어질 정도로 끔찍해서 희끄무레한 잔상이나 무의식으로만 남든 본인이 인지하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본래라면 있을 희귀한 꽃 따위야 어떤 무뢰배가 뿌리까지 뽑아서 온 복도에 널어도 별 감흥이 없었으리라. 그런 짓 해봤자 고달픈 건 본인이지, 잠뜰 자신이 아닌데다 여길 아끼던 사람과 긴밀한 관계니 되려 주인에게 냅다 일러바쳤을 터다. 정말 아무도 없구나. 실은 요정이 사는 게 아닐까 쑥덕거릴 정도로 넓고 붉은 꽃잎을 가진 이름 모를 꽃과 모서리마다 피어나 한들거리던 푸른 장미, 신비로운 보라색의 라일락과 히아신스부터-라더가 질려할 정도로 이름을 물었지만, 여전히 기억 못 하는-서로 듬성듬성 모여서 정원을 다채롭게 만들던 꽃 무더기는 거기 없었다. 그 생을 아끼고 살아가게 만들던 주인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게 못내 씁쓸한지 조그마한 잡초에서 돋아난 파란 들꽃을 연신 쓰다듬던 잠뜰이 느리게 눈을 감은 순간. 뻥 뚫린 벽면으로 들어온 바람이 뛰노는 아이처럼 가늘고 긴 소리를 내며 옆을 스치고, 인기척 같은 바람이 저를 쓸어도 감은 눈 뜰 줄 모르던 그는 가만히 내달리는 웃음에 귀 기울였다.
생이 짧아 경험과 지식 없는 아이를 세간에선 티끌 하나 없는 백지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아이가 자라며 겪는 모든 시간과 경험은 백지에 무심히 쏟아지는 물감 방울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색이 한 방울만 퍼져도 백지는 그 순간부터 온전한 백지라 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먼지 한 올 지나치면 직전의 자신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현상의 일그러짐, 모름에서 드러나는 두려움과 생의 불확실성. 매시간 물드는 순간은 어찌 보면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니 작은 통증도 겪어본 적이 없어 과하게 느껴질 어린애나 예민한 어른이나 다름을 기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외로움이 당연하도록 통제받은 에투알 왕자의 입장에서는 그랬으리라.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이상한 건 잠뜰일 터인데……. 너는 왜 그런 말투 써? 지주님 같고 이상해. 발목도 삼키지 못할 정도로 얕은 여울에서 물장구치는 조막만 한 발이 허공에 뜨며 참방거리자 눈이 부신 햇살 조각이 푸른 잔디 위로 후두둑 쏟아지며 흐릿한 세 가지 색을 짧게 비추곤 바닥에 스몄다. 뭐? 반문하는 허여멀건한 얼굴에 오묘한 기색이 방금 뜬 모자란 무지개처럼 서린다.
“내 주변 애들 중에 그런 말투 쓰는 앤 없단 말이야. 역시 부자라 그런가~”
“그럼 평범한 말투가 무언지 아느냐.”
내 주변에선 되려 네 말투가 이상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잔잔한 수면으로 고개 숙인 모습이 토라진 듯싶으나 어울리며 논 날이라고 세어봤자 보름이 채 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심지어 당장 제 속도 모를 아이가 친구라도 타인의 속내까지 짐작할 생각이라고 해봤을까. 단순히 말대꾸라 생각했는지 네가 웬일이냐면서 깔깔거리던 어린 잠뜰은 괜히 손바닥 한 아름 물을 모아 뿌리며 뻐기는 척하는 어른 같다 놀렸고, 혼자서만 신분 차이라는 비밀을 삼키느라 따끔거리던 가슴을 찔려 순간 욱해버린 어린 왕자님은 핏기 없는 입술을 꼭 물었다. 라더야?
“그럼 넌 이상한 사람과 친구를 하려는 게냐. 그럴 필요는 없는데”
당황한 얼굴이 시린 눈동자에 한가득 들어찼다. 부드럽게 미는 바람에 얕은 물결만 슬렁이던 수면에서 거친 동심원이 퍼지고, 뒤늦게 제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했는지 깨달아 뒤늦게 입술을 가리나 세상은 늘 쏟아진 건 다시 주워 담지 못하게 뒤를 밀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재빠르게 말꼬리를 잇지만, 여태 말 한마디 없는 첫 친구를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시선을 비낀 채 어물거리던 라더는 겪어본 적 없는 일에 답을 잃은 사람처럼 희게 질린 얼굴을 숙였고, 마찬가지로 어떤 말이 가장 좋을지 모르겠단 얼굴로 구르던 발을 얌전히 담근 잠뜰은 저 때문에 흠뻑 젖은 파란 정수리에서 보석 단면처럼 햇볕을 잘게 부서뜨리며 나루터에서 수면으로 톡톡 떨어지는 물방울을 괜히 노려보았다. 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사이좋은 친구와 말을 하지 않아도 잘 통하던 형제, 가만히 있어도 시간만 조금 지나면 주인공이 모든 걸 알던 구전 설화와 달리 이해에는 갈등이 필요한 법이다. 이해의 필요를 처음으로 학습하는 순간. 습윤한 공기가 열을 잃고, 단숨에 추락해 퐁당 빠진 지푸라기처럼 수면에 잔잔하고 차갑게 깔려 누군가의 팔이 잘게 떨리던 즈음이면 놀람이 가신 잠뜰은 은근슬쩍 고개 든 삐죽하고 서운한 심정을 담아 제 마음처럼 입술 꼬리를 삐족거리며 근처에 동실거리는 수련잎 하나를 똑 떼어선 발 담그느라 드러난 발목에 던졌다. 둔탁하게 찰박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움츠러든 몸이 하찮다. 내가 너랑 놀고 싶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세상에는 접점 없는 타인이기에 얻을 수 있는 배움도 있는 법이다. 사소한 일로 갈라지기 쉬운 인간관계에서, 철없던 어린 시절에 만난 두 사람이 어른으로 불리는 변곡점까지 각별한 사이로 지낼 수 있는 건 그런 이유였다. 뭐든 처음이 가장 강렬한 세상에서 제 생각을 내려놓기로 마음먹게 한 첫 친구, 바래지 않을 믿음을 토대 삼아 우정과 사랑으로 감정에 한해서라도 솔직할 수 있는 사이는 쉬이 얻기 힘드니 말이다. 자라는 내내 두 사람은 서로의 교보재이자 같은 점 하나 없는 타인을 이해하고자 한 계기고, 빼곡한 처음을 지켜본 증인이었다. 그게 일방적인 관계가 아님은 이제껏 잘 입은 바짓단이 짤똥해질 정도로, 자랄 때마다 안색이 밝고 뻔뻔해진 라더와 뭘 하기 전에 적어도 남의 입장 한 번 더 헤아려보는 잠뜰의 습관에서 여실히 티가 났고, 제 목숨보다 우선인 목적이 있으니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겠다며 은근하게 으름장 놓았던 덕개가 제 말을 번복하고 신세에도 없던 일을 자처할 정도였다. 귀한 왕자님께서 남 손에 놀아나기 좋은, 고립된 꼭두각시가 되는 꼴을 지켜보는 것보다야 단단한 고집쟁이가 되는 게 그에겐 더 좋았는지 종일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하더라.
하여간 얽히고설키면서 지낸 오랜 친구는 기어코 닮는다던가. 다른 점보다 차라리 비슷한 점 꼽아보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다른 게 많던 둘은 고집 하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똑같았다. 누가 누굴 닮았다고 짚을 수 없게 딱 반반 섞인 모양새. 백성은 더 이상 왕을 원하지 않아. 너라면 좋은 왕이 되겠지만, 우린 누군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려는 게 아니야. 문자와 문법을 익히자마자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품에 안고 산 편지로 제 친구의 정체와 속내를 알아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던 건, 쉬이 끊지 못하는 주인 대신 잘 벼린 편지칼처럼 추억을 끊어낸 근위대장이 대화에 끼어들지 않음은 두 사람이 선 자리가 대척점이라고 비틀릴 관계가 아님을 알아서다. 의견과 지내는 곳이 다르다고 감정과 믿음마저 그럴 거란 생각은 처음 다툰 어린 시절에 진득하게 겪고 흘려낸 지 오래. 나 역시 왕도, 왕자도 아닌 평범한 네 친구였을 때가 가장 행복했지. 허나 이건 내게 주어진 의무다. 과열되지 않도록 조곤조곤 이어가는 말투, 제 이야기하다가도 은근하게 머리 내민 걱정이 쌓일 때마다 둘 아닌 셋은 선명하게 정해진 미래를 보았다. 어지간하면 부딪치지 않도록 적당히 맞추던 둘이지만, 의견이 상충할 때면 나름껏 이야기해보다 종국에는 믿음 하나로 서로를 내버려 뒀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나는 네가 비겁하게도 살았으면 좋겠어. 잠뜰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와 혓바닥까지 문득 밀려든 말을 토해내지 않고 송곳니로 잘근잘근 씹어 낱소리로 부순 건 그래서다.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건 서로에게 쓸 구질구질한 문장은 둘 다 한 번이면 족했으니. 가까이 다가가 붙잡고 봐야만 보이는 눈동자 안쪽 어드메, 가늘고 속 깊은 골짜기까지 가지 않아도 둘은 같은 생각으로 등 돌렸으리라.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먼저 떠난 게 라더여서 하염없이 등만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지만, 종국에 살아남아 숨 끊어진 친구의 눈을 감겨 준 것 역시 저였지만, 잠뜰은 바로 전날 제가 했던 말과 행동부터 어릴 때 첫 만남까지 어느 것 하나 후회하지 않았다. 호수 위로 사뿐히 떨어진 오리 깃털인 양 그저 끝 모를 그리움에 잠겨 정처 없이 돌아다닐 뿐
“못된 친구야. 왕이면서 물건 하나 안 남겨주고 가냐.”
하다못해 금 쪼가리 하나라도! 천장부터 바닥까지 남아 그나마 방이라고 부를 만한 곳만 골라다 1층부터 2층까지 깡그리 뒤진 잠뜰이 짜증을 부리며 아무 벽에 기대더니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힘없이 내려갈 때마다 입은 겉옷 위로 검댕과 오래 묵은 먼지가 새카만 줄 여러 개를 긋고 아래에 손바닥으로 찍은 양 넓게 퍼뜨려도 위협하는 새처럼 날카로운 소리만 몇 번 내고 말더라. 머리 꼭대기에 있던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사방을 뒤지고 다닌 피로가 이긴 모양이다. 세운 무릎 위에 얼굴을 얹어 눌린 뺨이 툴툴거리는 입술 따라 잘게 흔들렸다. 안 남길 애가 아닌데. 어딨는 걸까 중얼거리며 제 신발 바닥에 묻어왔을 모래 한 톨 손끝으로 눌러 이리저리 문지르던 그가 무거운 숨을 쏟아지는 빗물처럼 내쉬고 다시 일어난다. 알갱이에 눌려 하얀 점 하나 찍힌 손가락이 다섯 개 중 딱 하나뿐이라 이질적이고, 무얼 찾는지 두리번거리는 머리가 참 분주하기도 하다. 떨어진 모래알 대신 옴폭하게 자국만 남은 자리를 연신 비비던 잠뜰은 슬슬 온난한 온도에 미지근한 숨을 내쉬면서, 그런 주제에 아직 차가운 바람 때문에 죄 식은땀으로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대강 떼어냈다. 새빨갛게 타던 저녁놀이 가시면서 길어진 땅거미 속에 나와 습관처럼 하늘로 고개 들고, 언젠가 빠진 깊은 물 속 같은 검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수도 성벽 위 회색 깃발처럼 빛을 먹고 울렁거리는 게 선명하다.
넌 어째서 여기로 오는 거냐. 억새와 덜 여문 보리, 밀이 울렁울렁 햇볕 아래 흔들리는 갈색 머리와 함께 너울지던 때 사위를 휘감는 바람과 함께 날아든 말. 숨죽인 늑대가 달리듯 지평선 너머까지 휘청이며 흔들리는 풀만 가득한 곳에서 마주 보던 둘은 여름이 지나고 여기저기 허여멀건 솜털 자라는 가을 언덕 언저리에서 작은 나무함을 들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나 관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먹을 사이가 됐을 언젠가다. 그래서 잠뜰은 반문 대신 한쪽 입술을 빼족이기로 했다. 진짜 뜬금없네. 내 아무리 그런다고 한들 잠뜰, 너만 하겠나. 잘 접은 종이봉투와 함을 주머니에 넣은 잠뜰이 허리 숙여 바짝 말라 죽은 잡초를 뜯더니 허허 웃는 얼굴을 가늘게 뜬 눈으로 흘기며 짧은 기합과 함께 던졌다. 하필 반대로 부는 바람 때문에 던지자마자 조그마한 갈색 풀떼기가 머리를 스치고 뒤로 날아가서 비웃음만 샀지만.
저거 아닌 척하지만 유치하다니까. 그쵸, 덕개 아저씨. 헉, 허억…… 말, 걸지 말아라 인마. 원체 가늘어서 떴는지 안 떴는지 모를 눈이 눈썹 따라 구겨지자 덩달아 콧잔등에 주름 잡히는 걸 보더니 누구도 알 수 없을 이유로 한참 깔깔거리던 그는 덕개가 든 묵직한 가방이 움직이자 앞전까지 투덕거린 걸 잊은 사람처럼 라더 옆으로 달려가 빨리 가자고 채근했다. 뒤에서 아무리 애처롭게 ‘도련님’하고 불러도 꿈쩍 않던 왕자님은 등을 떠미는 통에 부자연스럽게 겅중거리며 달리기 시작했고. 아이고오, 멀어지지 마시라고요! 제에발 같이 가자. 잠뜰아! 야이놈들아!
몇 번 기워 너덜거리는 손수건과 서툴게 접어 모서리가 벌어진 종이꽃, 만든 사람이 강아지라고 우기는 자수 천에 색만 다른 우정의 증표 몇 개를 종이봉투와 가죽 주머니에 이중으로 담고서 나무함에 넣은 둘은 깊이는 어중간해도 사람 하나 들어가게 생긴 구덩이 아래 질긴 천으로 감싼 나무함을 함께 떨어뜨리고선 보지도 않고 가볍게 쥔 주먹을 부딪쳤다. 마을에 갑자기 돈 유행이었다.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며 서로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묻은 뒤 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먼 미래인 어른이 됐을 때도 친하게 지내면 그때 묻었던 걸 파내 어떤 의도였는지 설명해 주는 게 말이다. 잠뜰이 아는 애 중 가장 똑똑하지만 모르는 것도 그만큼 많은 라더는 제 친구가 물어온 이야기를 듣자마자 하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나중에 물으니 하고 싶어서 저한테 말했거니 생각했더란다.-자연스레 뭘 묻을까 고민했고, 그렇게 친한 건 아니지만 함께한 추억이 두 번째로 많은 만큼 특별히 끼워주겠다고 말하며 생색내는 잠뜰을 쥐어박을까 말까 갈등하던 덕개 것까지 들어가서 이제까지 주인이 판 상자 가운데 가장 큰 상자가 흙 아래 자취를 감췄다. 구시렁거리는 것치고 땅을 고르게 다듬는 어깨가 부지런히 들썩거리는 걸 언덕배기 나무 그늘에서 구경하던 둘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킬킬대고 비밀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속닥였다. 그래서 대답은 잘 생각했나.
“진짜 끈질기네. 작년에 이미 말했잖아. 난 한 말 또 안해.”
“잠뜰아, 그러지 말고. 응?”
사람은 사람에게 약해진다. 잘못한 건 잠뜰 본인인데 되려 자신을 향한 미안함에 침잠하는 아버지에게 약한 것처럼, 옆집 동생이 가장 친한 단짝에게 찍찍거리면서도 딸려가듯, 덕개가 라더에게 하는 것처럼 다양한 사유로 사람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그에겐 시무룩하게 시선도, 눈썹도 떨군 라더가 지금처럼 저를 따라 하는 게 뻔히 보이는 말투로 툭툭 건들 때였다. 늘 어른스럽고, 결정하면 주변 어른이 전부 꼼짝 못 할 정도로 똑 부러지던 친구가 그러면 누군들 속이 불편하지 않겠냐고, 몰래 아버지 앞에서 투덜거린 밤이 있을 정도로 물고 늘어지는 친구에게 약한 잠뜰은 괜히 다 알면서 그러는 거 아니냐 말로 톡 쏘곤 이제까지 기대던 나무줄기에서 밑동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드러누웠다. 거칠한 껍질이 옷 안쪽을 긁는 게 선연하던 순간. 너는 뭘 하든 재미없지만, 난 재밌는 걸 많이 아는 사람이니까 놀아주려는 거지. 짐꾼이나 부하 1호로 모험에 데려가 준댔잖아. 내가 약속은 잘 지킨다니까. 그래도 막상 말하려니 창피한지 에둘러대는 문장이 보글보글 하얀 포말이 되어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이 사이로 새어 나와 톡톡 터졌다. 그럼 놀아주는 건 자기라면서 맞받아치고, 웃기지 말라며 다시 투덕거리다 불현듯 동시에 드러누운 둘 사이로 먼지 같은 솜털과 지푸라기가 날리곤 했다. 폴싹폴싹
“낯간지럽게시리”
“새삼스럽게”
너만치 재밌는 애가 없어서 그런다. 왜.
어린 시절엔 마냥 크고 무겁게 느껴지던 상자를 거뜬히 안아서 어쩔 수 없이 켠 등불과 함께 무너진 벽 아래 숨은 잠뜰이 자물쇠를 풀었다. 사실 자물쇠 모양으로 접은 종이를 붙였을 뿐이라 한 번 칭칭 감았는데도 땅 아래 습기를 먹고 눅눅해지고 삭아 가루로 변했더라. 생각보다 묵직한 주머니에서 하나씩 물건을 꺼내 이게 무슨 의미였을지 어슴푸레한 기억을 되짚으며, 그 탓에 느린 손짓으로 마른 천으로 닦은 뒤 가방에 담거나 따로 챙긴 조그마한 함에 넣던 잠뜰은 무심코 밀랍을 덧발라 굳힌 웃는 눈 종이꽃을 든다. 라더의 깃펜을 뺏어서 냅다 웃는 눈을 그려 넣은 꽃은 굳히기 위해 한 번 폈는데도 못 만들었음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구겨지고, 모서리가 모나게 툭 튀어나와 웃기기 그지없었다. 그날의 잠뜰은 눈을 그리며 뭐라고 했더라. 이렇게 그리면 너랑 똑같이 생겼다고 말하며 라더 얼굴 옆에 뒀다가 진심 없이 왁왁거리고 싸우고, 그러다 지쳐 조용해질 즈음 간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둘이 한참 웃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맞지 않나? 무슨 표정이고, 이목구비가 어땠는지 활자로만 떠오르지 정작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아도 잠뜰은 늘상 저가 낯간지러운 소릴 할 때마다 바로 옆에 선 라더가 문자 그대로 ‘피어난’ 순간을 기억한다. 그러니 종이꽃을 얼굴 대신 넣어도 괜찮겠다고 가만히 종이꽃을 얼굴 위로 든 채 가만히 서서 느리게 눈을 감고, 한참 있다 슬 헛웃음을 터뜨린 그가 물건으로 그득한 함에 꽃을 담았다. 이게 마지막이었나 주머니부터 상자 바닥까지 훑으면 버석버석, 기억에 없는 접은 종이 하나가 들꽃처럼 짠. 서슴거리는 손가락이 꼭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하얗고 매끈한 단면을 만지작거린다. 마구 만져도 삐져나온 알갱이가 없어 살갗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보드랍고 두꺼운 종이, 얼마나 고심하고 썼는지 떠나기 직전에 남긴 편지선 느껴본 적 없는 무수한 요철과 곱게 접은 하얀 귀퉁이 아래 잠뜰에게, 라고 적은 단정하고 익숙한 글씨체. 첫 번째 편지가 실수라면 두 번째 편지는 고의다.
비가 내렸다. 지면을 겨우 파고 올라온 새순 위로 무심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손에 쥔 편지가 혹여 젖을까 황급히 품에 안고 웅크리던 그는 아주 잠시, 일렁이는 제 그림자를 보며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몇 번 뻐끔거리더니 자세 그대로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섧게 입술을 문다. 애초에 위가 막혀 있어 불빛이 새어 나갈 일 없다고 들어온 곳이다. 나갈 게 없다면 들어올 것도 없으니, 이 비는 오로지 저에게서 내리는 거라는 걸 깨달은 탓이다. 여름날 우기에 내리는 비처럼 멈출 기미 없이 쏟아지는 굵은 빗물 새로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추도문이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시냇물처럼 흘러 연두색 잔디 위로 고였다. 벌벌 떨던 이마가 웅덩이에 잠기고, 오랫동안 혓바닥 아래 뭉그러지게 숨은 이름 두 자와 짧은 문장이 차갑고 미지근한 흙에 서글프게 심어진다. 기어코 안에 담은 짐을 감당하지 못한 문짝이 부서지며 이제껏 꾹꾹 눌러 담은 게 죄다 터져버린 것이다. 드디어 내뱉은 오랜 오열이자 숨이었다.
큰 소리 내지 못하는 그날의 아이 대신 따갑게 울어대던 풀벌레가 갑작스레 잠잠해졌을 때, 오래 달리느라 흐트러진 숨처럼 급하게 뱉고 마시던 숨을 겨우 정돈한 잠뜰이 바닥 짚느라 지저분해진 손을 바지에 대강 문질러 닦았다. 길지 않은 문장을 누구보다 길게 읽어가며, 뻣뻣해진 심지 때문에 흔들리는 등불 바닥에 혹시 몰라 챙겨온 등유를 다시 붓고, 마지막 줄에 적힌 발신인을 다섯 번쯤 소리 내 읽은 다음에야 추도문 대신 눈물과 흐느낌을 쏟아낸 그가 온갖 욕을 짓씹기 시작한다. 제일 고지식한 멍청이, 혼자 세상 다 산 줄 아는 놈,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젠체하는 자식. 미미한 바람에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빛 따라 일렁거리는 목소리가 볼품없다. 네가 덕개 아저씨랑 같이 살아서 내가 찾을 수 있길 바랐어. 들을 대상이 이젠 없다는 걸 알기에 오히려 할 수 있는 말을 터뜨리던 잠뜰은 그로부터 더 오랫동안 눈물에 콧물까지 흘리고서야 바닥에 드러누울 수 있었다.
“……야.”
빈정 상했으니 한동안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거라고 달싹대던 입술 뒤로 한참 울어 갈라진 목소리가 듣는 이 없는 넋두리를 줄줄 왼다. 거기서 절반은 다시 욕이었고, 남은 절반에서 반은 발신자가 죽은 뒤 바뀐 세상 이야기, 그다음은 맥주 한 잔만 마시면서 족히 네 시간 동안 불평만 해대는 할아버지와 마주쳐야 하는 자기 생활이더라. 가뜩이나 쉬어서 잠긴 목소리에 슬슬 쇳소리가 섞일 즈음 드디어 할 말이 끝났는지 입을 다문 그가 까만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감고 뜰 때마다 눈꺼풀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퉁퉁 붓고 열 오르는 눈두덩이를 가끔 손등으로 누르면서. 그래도 보고 싶다.
“난 원래 한 입으로 두말 했지. 라더야, 지금만 따악 한 번 봐준다.”
이제 제 인생 통틀어 다신 봐줄 일 없을 거라며 멍하니 으름장 놓던 잠뜰은 울음 그칠 무렵부터 갑자기 나오던 딸꾹질을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손가락을 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따악 놀이 백 가지랑 이야기 오십 개만 알아내. 항상 주도하던 건 저였으니 너도 해야 계산이 맞지 않으냐면서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에 어떻게 놀지, 길고 긴 시간 동안 고민하라며 헛소리 같은 혼잣말을 숨도 안 쉬고 주절거리던 그가 기어코 헐떡였다. 빨리 약속해.
휘이 둘러 가는 바람에 파스스 나부끼던 나뭇잎이 까딱거리며 대신 긍정한 듯싶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찾아온 어느 날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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