틸라 이그나시아의 일기장
신생 에오르제아
그리다니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잠시 잠에 들었을 때, 평소와 다른 기이한 꿈을 꿨다. 에테르가 응축된 끝없이 넓은 공간, 검은 법의를 입은 붉은 가면의 남자, 꿈결이지만 다정했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녀가 무슨 말을 건네고 있었지, ...듣고, 느끼고, ...
적절한 때에 잠을 깨워준 잠깐동안의 동행자는 이 도시를 '어머니 품 같은 검은장막 숲에 안겨 정령의 축복을 받는 도시'라고 말했다. 속설에는 그 '정령'이라는 것이 배제하는 사람들은 이 곳에 발을 들이지 못 한다고 하던데.
당분간은 멀리까지 가고 싶지 않아서, '배제당하는' 쪽이 되지 않는 건 아무래도 안심이 된다. 수중에 숙박비가 있는 동안 할만한 '일'이 있는지 알아보는게...
그리다니아에서 활동하기 위해 칼라인 카페에 가서 모험가 길드에 등록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전혀 떠올리지 못 했다. 아무래도 연고 없는 외지인이 아무런 제한 없이 도시 내에서 배회하는 건 불안한 일이 되는 걸테지. 적어내는 이름을 단순히 '틸'로 한정하는게 괜찮을까 싶었지만, 큰 문제가 안 되는지 '좋은 이름'이라는 듣기 좋은 인사치레와 함께 모험가 등록은 문제 없이 끝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화로워보이는 외경과 달리 이면으로 모험가를 경계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 편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괜찮다. ...
내일 오전을 포함해서, 도시를 전부 둘러보고나면 환술사 길드에 찾아가보자. 당분간은 집단에 소속될 일이 없을테니까. 내 몸 건사할만한 치유 능력 하나 둘 쯤을 갖추는 쪽이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떠나오면서 계속 생각했던대로...
소개받은대로, 환술사 길드에서 견습 환술사로서의 등록을 마쳤다. 보이는 모습으로 나이를 판단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에 스미 얀은 역시 부족 내의 가장 어린 아이를 생각나게 만든다. ...
환술의 정의와,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에 스미 얀은 이 모든 것을 지금 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단지 환술이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 아니라고' 했던 말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 독립된 활동의 편의성을 위해 이것을 배우려하는 내 생각을 알고 있는 것처럼.
치유와 파괴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이루는 것들에 이해하며 그 안에 깃든 힘을... 숲의 미코테족들이 사냥하는 것과 비슷한 결의 문제가 아닌지 되물었더니, 정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혼자서 해답을 만들어냈다면 다른 것도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 … …
최근 검은장막 숲에 '수상한 자'가 나타났으니 조사를 부탁한다는 의뢰를 받고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꽤 숙련된 모험가로 보이는 휴런족 남성이 모험 중의 여비로 사용하라는 말과 함께 50만길을 주고 훌쩍 떠나버리는 일이 있었다.
...50만길이 모르는 사람에게 흔쾌히 줄 수 있을만한 돈이었던가? ... 아무래도 꺼림칙해서 뮨에게 물어봤더니, 모험가 중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꽤 있으며, 종종 그런 호쾌한 사람들이 있긴 하다며 편하게 받아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역시 과하다. ...이미 주고 떠난 걸 버릴 수 없으니 받았지만,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눈 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돌려주는 편이 제일 낫겠지...
부탁 받은대로 날이 밝자마자 찾아간 재생의 그루터기에는,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는 검이 꽂혀져 있었다. 그곳에서 쾌활해보이는 휴런 여성과 어딘지 모르게 그녀를 챙겨주고 있는 라라펠 남성을 만났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온게 확실해보이는 그들은, 그리다니아에 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마주친 작은 요정, 같은 생명체의 보증에 경계심을 내려놓는다. 이쪽도 내눈에 수상하다면 수상한 사람들이지만... 나와 관련이 없을 수 없는 일인데도, 7재해의 이야기는 꼭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멀게 느껴진다. 그 시절의 나는 어렸고, 기억은 어쩐지 이도저도 아니게 흐릿한 것들 뿐이다.
에테르가 흐트러진 이후로 숲이 예민해졌다고 말한 것이 무색하지 않게, 생각지 않았던 급작스러운 전투가 끝난 직후- 어디서 나타난건지 모를 푸른 크리스탈을 발치에서 주워들었을 때 그것을 다시 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과, 수도 없이 떨어지는 운석들, 머리속에서 울리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 하나의 말, 듣고, 느끼고, 생각하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 생명이 약동하는 거대한 크리스탈 앞에서, 자신을 하이델린이라고 소개한 여자의 목소리는 내게 별의 세상을 누비며, 빛의 크리스탈을 손에 얻고, 이 별을 멸망으로부터 구하라고 말한다.
...내가? 내게 하고 있는 말이,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맞았을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묻고 싶었다. 단순한 꿈일수도 있고, 그렇기엔 의미심장하지만, 어쨌던지간에 어째서 '나같은' 사람이...
베넥 연병장의 선임 병사인 몽랑갱은 조사원의 측량 임무를 돕고 있던 연병장의 신병이 겁에 질려 도망갔다며 측량 도구를 찾아와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어쩐지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일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이 도시에, 어쩌면, ... 한때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생각을 이어가다보면 그가 이 곳에 '없다'는 쪽에 걸어버리게 된다. 단순한 예감은 아닌, 단지 합당한 추론에 따른 생각이다. 애정의 무게에 책임지지 않고 도망친 사람이 재해를 이겨냈을리가 없으니까.
꿈속에서 봤던, 검은 법의를 입은 남자를 다시 만났다. 좀 더 단순한 형태의 가면을 쓰고 있다. 전에 봤던 인물과 동일한 사람이거나, 혹은 단체거나, 어느 쪽이든 불길한 것은 매한가지다.
일전에 재생의 그루터기에서 만난 두 사람, 연병장의 소대장이 ‘이다’와 ‘파파리모’라고 말했던 이들이 뒤늦게 찾아왔다.
써놓기는 할 테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제삼자의 눈으로 타인을 보는 것처럼, 꿈보다 선명한 어떤 기억. 어린 시절 보았던 불길한 붉은 위성, 숲의 나뭇가지마다 감돌던 스산한 바람의 움직임, 지금과는 조금 다른 차림새의 두 사람이 흐트러져가는 별의 이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각했던 시간과 다르게, 의식이 돌아왔을 때 많은 시간이 흐르진 않은 것으로 보였다. 요즘의 기묘한 일들이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푸르게 빛나는 거대한 크리스탈을 보고 나서부터...
상황을 정리해 뮨에게 보고를 끝냈다. 중요한 의식이었던 만큼 도사들을 구해온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보답해 줄 일이 크게 없다며 미안해하던 그녀가 여관의 숙박비를 조금 할인해주었고, ‘신입 모험가’로서의 신임도 그만하면 된 것 같다며 길드를 통해 들어오는 의뢰들도 소개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의 호의면 내게는 충분히 차고 넘친다. 숙소에 돌아오기 전에 알아본 바로는 단순한 마물 처치 외에도 호위 임무나, 조사, 미행, 가능한 경우에는 채집 탐사 등의 의뢰가 있는 것 같았는데. …할만한 의뢰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외지인'을 기피한다고 말했던 이곳 사람들의 호의가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가죽공예가 길드의 납품업을 맡고 있는 랜달은, 내가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레몬 커스터드 파이나 계피 사탕 같은 달콤한 과자를 하나씩 손에 쥐어준다. 내 의뢰 활동을 온전한 선의로 여기고 있으며, 누구에게 무엇을 들었는지 '괜찮은 환술사가 나온 것 같다'며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말한대로 도사들에게 배운 일련의 환술은 내 손에 꼭 맞춘듯이 맞았다. 에 스미 얀은 이것이 내 안에 세워진 지표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라 말한다. 자연은 이전부터 내 일부였고, 에테르의 기운은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결단은 항상 기껍다. 불온한 꿈과 정체 모를 과거의 잔상을 보는 것 외에는, 모든게 하나같이 바로 잡혀 흘러간다. .......
숙소에 돌아와서 레몬 파이를 조금 먹어봤다. 음식을 일부러 달게 먹을 일이 없으니 하나같이, 부족 안에서 살아갈 때는 접하지 못 했던 음식들이다. 입 안은 달고, 꿈결의 피로감과 생각은 가볍게 씻겨내린다.
...지내기에 충분히 여유가 생겼으니 당분간은 조금 쉬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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