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잇솔 합작 'Parallel Love' 백업


해가 쨍쨍한 어느 일요일 오후, 최한솔은 어느 어린 아이의 임시 보호자가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생각보다 훨씬 더 별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게 한솔이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복잡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모든 건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았던 탓이다, 라고 한솔은 생각한다.

오늘 아침의 일을 되돌려 생각해 보자. 아침에 일어난 한솔은 오늘따라 날씨가 좋길래, 여유롭게 산책이라도 하자는 마음가짐으로 공원에 나왔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일이었겠지만,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지루하기도 하고, 직업 특성상 컴퓨터며 작업실 앞에 앉아만 있다면 가끔씩은 환기를 시켜 주기도 해야 하는 거니까. 오늘도 작업실에 오겠냐는 지훈의 연락에 쉰다고 답장도 했고.

합법적인 땡땡이를 얻어낸 기쁨에도 불구하고 별 계획이랄 건 없어서, 오늘 한솔의 할 일이라곤 헤드폰을 쓴 채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가의 즐거움이란 뭔가 특별한 걸 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의무가 없음에서 오는 거니까. 가만 햇빛을 쐬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서 쉬기도 하고,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조금 졸았나? 

햇빛이 따뜻해서 깜빡 졸았던 것 같다. 약간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유로운 느낌.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공원은 늘 그런 거 아닌가. 사람 돌아다니고. 그래서 그런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솔이 뭔가 낯설다는 걸 눈치챈 건 제가 앉아 있는 벤치에 누가 올라온 듯 무게중심이 바뀌는 걸 느끼고서였다. 이 넓은 공원에 자리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내 옆에 와서 앉지. 이상한 사람이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는데.

이런 상황이리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한솔의 눈앞에 있는 건 너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였다.

아이도 한솔이 눈을 뜰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솔의 눈을 마주했다. 서로 마주본 채로 가만히 눈치를 보던 둘의 대치는 아이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서야 끝났다. 갑자기 웬 어린애지. 고민하던 찰나 아이가 슬쩍 한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붙임성이 좋은 편인가.

무슨 일이지 고민하는 사이에 훌쩍 가까워진 아이는 앉아 있는 한솔의 무릎 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밀어내면 다칠 것 같아서 고민하는 찰나 이미 한솔의 무릎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채였다. 

이게 뭐지. 거기 어린애는 키우시는 거예요? 도 아니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한솔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신종 사기 기법인가?’였다. 

아니, 솔직히 못 할 생각도 아니지 않나. 요즘은 길에서 할머니가 짐 들어달라고 하고 길 알려달라고 해도 섣불리 따라가면 안 된다는데, 어린아이들까지 포섭해서 그러나? 아니면 막, 애를 데리고 있으면 유괴범이라고 신고하는 거? 그냥, 요즘 세상이 흉흉하다니까. 없는 일도 아니고, 그런 걱정을 하는 게 딱히 말도 안 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합리화를 하면서도 한솔은 제 머리를 내리치고 싶었다. 무슨 정신이길래 애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해. 아니 그러니까 물론 할 수 있는 걱정이기는 한데. 그래도 세상이 얼마나 각박하면 애를 도와주는 것보다 그런 걱정이 먼저 드냐고. 혹시나 그런 일이더라도 그 정도 손해는 좀, 감수를 좀 하고 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만약 그게 아니었을 때 그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리고 한솔이 그렇게 우뚝 굳어 자책하는 사이에 아이는 어느새 한솔의 품 안에 들어와 앉아 있었다.

이게 어느 일요일 오후, 한솔이 웬 어린아이를 떠안게 된 사건의 전말이다.

이게 뭐지, 진짜. 아이는 마치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라는 듯 편안한 자세를 갖춘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솔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어린이들이 제게 시선을 주는 일 자체에는 익숙한 편이었다. 아직 경험한 세상이 작은 존재들에게는 영화나 티비 화면 속에서나 보던 이목구비를 가진 한솔이 눈에 띄는 존재일 테니. 신기하다고 쳐다보는 건 익숙하고, 와서 말을 거는 일도 가끔 있었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인사로 회답하면 후다닥 도망가는 어린이들은 반복되면 조금 귀찮을지언정 귀엽다고도 생각하곤 했다. 가끔은 보호자들로 인해 불쾌한 일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매번 그런 것도 아니니까. 뭘 모르는 아이들은 잘못이 없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은 영 달랐다. 일단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은 적기도 했고, 그보다도 더 특이한 건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아이의 눈빛은 신기하다거나, 호기심 가득하다거나, 낯설어 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익숙한 존재를 보듯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에 한솔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시선을 피할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으니 한솔은 똑같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이를 되돌아보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무릎의 어린이는 키우시는 건가요, 뭐 그런 거? 아무래도 그렇겠지, 자기 애도 아닌데 이렇게 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렇게 보일 것과는 상관없이, 한솔은 어쨌든 지금 미혼 무자녀의 이십대 중반 남성이었고, 아마 앞으로도 큰 이변이 없는 한은 미혼 무자녀로 남아 있을 사람이었다. 그말인즉슨,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뜻이었다.

아니, 이걸, 뭐, 어떡해. 차라리 어른이 갑자기 와서 제 무릎 위에 올라타려 든다면 술 취했다고 생각하거나 경찰을 부르면 될 텐데. 애한테는 그럴 수가 없잖아. 뭐라도 해 봐야 하나? 한참 머리를 굴리던 한솔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아, 안녕."

어색하게 손을 들어서 인사를 해 보자 아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실패인가? 머리가 다시 핑핑 돌았다.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보자.

"몇 살이야? 요?"

삑사리가 난다. 습관적으로 조카들에게 말하듯 말을 건네려다가, 어린아이라고 해서 함부로 반말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뒤늦게 떠올리는 바람에 질문이 이상해졌다. 목소리 톤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애매하게 높이던 목소리는 이상하게 갈라진다.

민망함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큼큼, 목을 가다듬고 있자 아이는 못 미덥다는 듯 한솔을 위아래로 한 번 훑더니 손가락 네 개를 쫙 편 채 손을 들어올렸다.

"네 살?"

아이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못 알아듣는 건 아니구나. 아, 어리다. 너무 어려. 나름 안정적으로 안겨 있는 체구는 한솔이 안심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네 살. 네 살 짜리 애하고는 어떻게 대화해야 하지? 한솔은 머리가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동생이 네 살일 때는 어떻게 했지. 근데 그때는 나도 초등학생이었으니 정신연령이 거기서 거기라 특별한 생각을 하고 소통하지는 않았을 거다. 주변 친척들이나 친구들 중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이와는 별로 교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고 뭔가 일을 벌일 것 같다는 불안감과, 그래도 보호자가 더 잘 알지 않을까 하는 마음의 혼재였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문득 정신없는 사이에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보호자. 그래. 보호자가 있겠지. 웬만큼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애를 그냥 두고 사라지지는 않았겠지. 그만큼 무책임한 사람이 사실 세상에 꽤 많이 존재한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책임자는 따로 있지 않은가. 

"어른은 없어요?"

이 질문에는 다시 못 미덥다는 표정이 돌아온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어린아이의 고집은 정말 알 수가 없다. 괜히 억울해지려던 순간 아이는 품에 안긴 채 한솔의 가슴팍을 푹 찌른다. 엥, 설마.

"…나?"

끄덕이는 아이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진다. 한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치. 나도 어른이기는 한데…"

묻는 말에는 옳은 대답이니 수긍하자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아이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겨왔다. 한솔은 조심스럽게 팔을 올려 아이의 어깨에 둘렀다.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천진하게 자신을 믿노라고 말하는 어린 아이의 미소에 당할 위인이 되지는 못한다. 불편할까 신경이 쓰여 슬쩍 무릎을 흔들어 아이를 고쳐 안기까지 했다.

아, 너무 작다. 팔에 힘을 주지 않으면 떨어질까 걱정이 되다가도 팔에 힘을 너무 줬다가는 부스러질 것 같았다. 애가 사교성이 좋네.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어른한테 이렇게 함부로 가깝게 대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지금 하는 게 맞나? 싶다가도.

"그러니까, 음, 나 말고. 가족이나 선생님 같은 사람은 없어요? 오늘 혼자 나왔나?"

"…어.“

그 말을 들은 아이의 눈빛이 잠깐 파르르 떨리더니 금방 울망울망해진다. 실수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수도꼭지가 터진다. 아, 아, 이런. 한솔은 어쩔 줄을 몰라 일단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작은 몸에 목청이 어찌나 큰지, 부드럽지도 않을 청자켓을 끌어안고 엉엉 우는 게 애처롭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방금 전에 한솔을 가득 둘러싼 따스한 느낌은 곧바로 어린아이를 울렸다는 죄책감으로 변모한다. 젠장, 이래서 어린이를 다루고 싶지 않았던 건데! 속으로야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한솔의 손은 다급하게 아이의 어깨 위로 올라간다. 적절한 힘을 찾지 못해 다급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투박하기까지 했다.

"울지 말고, 울지, 아니, 울어도 되는데. 그래도. 어른 찾으러 가요, 우리. 어른 찾으러 갈까요? 이 주변에 있을 텐데."

원래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게 어린아이라지만, 한솔의 말은 아이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듯 했다.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아, 하늘이시어. 왜 저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요. 아무리 제가 좀 죄가 많게 산다지만. 주변에서 저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사람도 있고 그랬는데.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건가. 살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아,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닌데. 일단 중요한 건 이 아이의 보호자를 찾는 일이다. 그게 아니면 경찰서에라도 찾아가던가. 경찰서가 주변에 있던가? 온갖 생각을 하면서 반쯤 패닉하기 직전에,

“현아!!!”

공원 건너편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와 함께 품 속의 아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 애 이름인가? 라고 고민하는 찰나 아이는 한솔이 붙잡을 새도 없이 버둥거리며 품 안에서 튀어나갔다. 뛰쳐나가는 과정에 팔꿈치에 갈비뼈를 얻어맞은 건 덤이었지만. 어우, 쬐끄만 애가 때리기는 엄청 아프네... 물론 보호자를 찾아서 잘 된 일이지만. 아직도 훌쩍거리는 아이를 급히 안아올린 보호자가 한솔 쪽을 보자, 한솔은 본능적으로 자신은 무결하다는 듯 양 팔을 들어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괜찮아? 놀랐어?”

“아빠아...”

코를 훌쩍거리던 아이는 뭔가 남성의 귀에 속삭이는 듯 하더니 품에 파고들었다. 

“아, 아니에요. 마침 보호자 분이 계신가 찾고 있었는데.”

“네, 제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 아빠는 본인도 놀랐는지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문장이 툭 툭 끊기면서도 사과를 잊지 않았지만 한 손은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능숙하게 달래고 있었다. 역시 애 키우는 사람들은 대단하구나. 정신없어 보이면서도 한솔에게 사과하랴, 아이를 달래랴 바쁜 남성을 보면서, 한솔은 솔직히...

놀라울 정도로 끌렸다.

사이 좋은 부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좀 그런가? 그렇지만 한솔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고, 이상한 페티쉬가 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자기 취향이라는데.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생각은 할 수 있잖아. 아무리 사람과 자주 교류하지 않는 직종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솔도 이런 생각을 대뜸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로는 매너가 있다. 물론 혀를 꾹 깨물고 참아야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참았잖아. 이런 건 원래 결론이 중요한 거다.

“현아, 감사하다고 해야지.”

“감사합니다아...”

“아아, 아니에요.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요.”

못 찾으면 경찰서라도 가려고 했어서, 아, 저도 이 동네 살거든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꺼낸 말이 상황에 적절한지 모르겠어서 한솔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이렇게 말하면 더 수상해 보이려나. 다행히 애 아빠는 별로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천만다행이네요.”

“네에, 뭐... 무사히 찾으셔서 다행이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그, 혹시 해서... 아이가 저한테 너무 잘 다가오길래요. 물론 나쁠 건 없지만... 혹시라도요. 낯선 사람 조심하라고 하셔도 될 것 같아서...”

조심스레 꺼낸 말에 남자는 잠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내 한솔의 뜻을 이해했는지 풉, 하고 웃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웃을 때는 제법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 집중하게 되었다. 웃으면서 입가에 주름이 살짝 지는 게, 아, 귀엽다. 아까 아기도 저렇게 웃었는데.

“들었어, 서현?”

“...”

아빠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아이는 타이르는 듯, 장난치는 듯 하는 말에는 말없이 고개를 파묻을 뿐이었다. 아까 인사하라고 할 때는 잘만 말 하더니. 아, 정말 귀엽네. 한솔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잘 얘기할게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감사했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놀랍도록 한솔의 취향인 아이 아빠는 떠났다.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한솔은 슬쩍 고개를 드는 아이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주고 본인도 갈 길을 떠났다.

그렇게 조금은 따뜻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일요일 낮의 신기한 경험은 끝났다. 가끔 생각나는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아, 그때 진짜 취향인 사람 봤는데. 옛날에 어떤 애가 갑작너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 뭐 어떻게 해 볼 수도 없한참 나중에 불쑥불쑥 생각나는 그런 기억.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고 그런 거지. 

....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솔은 부녀를 또 마주쳤다.

이번에는 일요일은 아니고, 늦잠을 자는 바람에 평소보다 늦게 작업실로 출근하게 된 평범한 목요일 오후에.

“어,”

“아아. 저번에 그...”

“예에, 안녕하세요.”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아닌 사이도 아니고. 솔직히 엄청 어색했는데, 눈앞에서 마주쳐버린 탓에,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가기도 뭣했다. 

생각해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동네 주민이니까 그날 그때 공원에 있었겠지.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건 좀 신기하지만. 아빠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는 수줍은 듯 반쯤 다리 뒤에 숨어 있었으나, 그래도 한 번 본 얼굴이라는 건지 한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한솔은 살짝 손을 올려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아이 아빠는 그런 한솔을 보더니 슬쩍 아이를 부추겼다.

“현아, 인사 안 할 거야? 저번에 도와주셨던 분이잖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빠 뒤에 숨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어린이에게 한솔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가까워진 시선에 아이는 잠깐 주춤, 하는 듯 하더니 곧내 지난 번에 한솔에게 태연하게 안겨 왔던 때처럼 환하게 웃었다. 와, 어린애는 정말 꺄르륵, 하고 웃는구나. 

고개를 들자 한솔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애 아빠가 있었다. 혹시라도 아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고 생각할라 한솔도 부러 환히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괜히. 환하게 웃다 못해 약간 일그러진 표정에 아이는 그마저도 좋다는 듯 웃었다. 어이구, 그랬어요. 어이구. 한솔이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자 지난번처럼 자연스럽게 품에 안기려는 듯 달려든다. 한솔이 그만큼 작지는 않은 탓에 작은 팔은 한솔의 무릎께에만 오고 말았다. 물론 본격적으로 안겨들기 전에 보호자가 아이를 먼저 안아들었지만.

“아, 죄송해요.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아뇨, 괜찮습니다. 귀여운걸요.”

아이가 번쩍 들리자 바로 사라지는 작고 부드러운 체온에 한솔은 저도 모르게 제발 괜찮아요! 라고 외칠 뻔했지만,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솔직히, 어린이라는 게 부담스러운 것도 맞고 걱정되는 것도 맞지만 품 안에 안긴 아이는 정말, 정말 귀여웠다. 그렇지만 한 번만 안아보겠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한솔은 보호자의 품에 안겨 제 눈높이와 가까워진 아이에게 작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현이, 라고 했나요? 잘 있었나요?”

“네, 해야지.”

“...네.”

아이고 귀여워. 벅차오르는 감정에 한솔은 방언이 터지는 걸 애써 참았다.

“아저씨 기억해요?”

“...해요.”

“으음. 감동이다. 근데 있잖아요,”

운을 뗀 한솔은 슬쩍 아이 아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흐뭇한 듯 웃고 있는 모습이 새삼 또 취향이라 심장께가 찌르르, 하는 건 애써 무시했다. 

“아저씨가 아빠한테 현이 낯선 사람한테 그렇게 함부로 안기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 달라고 했는데.”

“저는 말했어요.”

지난번에 한솔이 그랬듯, 아이 아빠는 자신이 결백하다는 듯 아이를 받치고 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꾸지람을 들은 아이는 비죽 입술을 내밀더니 조용히 툴툴거렸다.

“아저씨는 저번에 봤잖아요.”

“하하, 그렇기는 한데.”

애가 똑똑하네, 지난번에도 그렇고, 한솔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들의 빈틈을 특유의 어린아이같은 순수함으로 뚫고 들어온다. 원래 애들이 이렇게 똑똑한가. 빈틈을 제공한 건 본인이니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이상한 사람 만나면 안 되니까. 아저씨도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웃으며 당부를 하니 아이도 그건 알아들었는지 꺄르륵 웃으면서도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흐뭇한 표정으로 둘을 보고 있던 아이 아빠는 능숙하게 아이를 고쳐 안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웃음을 터트리는 아이에게 한솔은 가볍게 작별 인사를 했다. 현이 안녕. 아버님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뒤를 돌아 다시 갈 길을 가면서는 솔직히 또 그 남자 생각을 했다. 퇴근하고 온 건가. 평일 오후에 세미정장까지 입고 있으면 아무래도 퇴근하고 온 거겠지. 주말에 봤던 캐주얼한 복장과는 또 느낌이 다르다. 아, 역시 취향이다. 세상에 살다가 저렇게 취향인 남자 보는 일도 있고. 두 번이나 봤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지,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잠시만요.”

이젠 익숙해진 목소리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이의 보호자가 어느새 다시 한솔의 뒤까지 돌아와 있었다. 아이 – 현이 – 는 다시 수줍은 듯 어른의 코트 자락 뒤에 숨어 있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요, 현이가 아이스크림 사 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네?”

“제가 고마운 분이라고 했더니...”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는 보호자의 모습은 다소 곤혹스러워 보였다. 한솔은 슬쩍 제 허벅지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어린이를 살폈다. 어른이 가서 말을 전할 때까지 고집을 부린 건가. 

사실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훈에게 방금 이제 작업실 간다고 연락도 해 놓은 차였고, 지훈은 한솔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이 있다고 했다. 급한 마감은 없지만 할 일은 할 일이지 않은가. 한솔은 나름대로 책임감 있는 어른이었다.

...그러나 한솔은 다른 의미에서도 책임감 있는 어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선이라면 어린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은 어른. 그리고 솔직히 귀여운 어린애와 천년의 완식인 남자를 둘 다 행복하게 하는 것과 제 동업자를 열받지 않게 하는 것 중에 우선순위를 고른다면...

“현이, 아이스크림 먹어도 되나요?”

“네? 아, 네. 저희는 가는 길이었거든요.”

“그럼 가죠.”

애석하게도 지훈은 후순위였다.

‘형, 나 오늘은 결석. 오늘 ㅅㄱ’. 당일 펑크 통보에 분노한 동업자가 휴대폰을 마구 울리거나 말거나 한솔은 이 상황을 외면하기로 했다. 미안, 형. 어린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아이스크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한솔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계속 관찰하던 아이는 결국 당분의 유혹 앞에 어른들은 안중에도 없게 되었다. 자신이 초대한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한솔을 챙기지 않는다면 자연히 사회생활은 어른의 몫이 되었다. 한솔은 솔직히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이의 보호자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눈앞에 두고 얼른 먹고 싶어서 파닥거리는 아이를 능숙하게 말리고 냅킨까지 매 주면서 통성명을 했다. 

“저는 현이 아빠예요. 서명호, 라고 불러주시면 되고. 사실 이름은 쉬밍하오예요.”

중국에서 왔거든요. 지금은 이 근처에 살고. 짧고 간결하게 끝난 설명이었다. 그러나 한솔은 이렇게 담백하게 끊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그냥 넘길 수는 없지. 괜한 장난기까지 돌았다.

“저는 현이랑 저번에 마주친 아저씨고요.”

이걸 예상하진 못했는지 상대는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올리던 아이가 잠깐 놀라 이쪽을 쳐다볼 정도로. 한 건 했다. 한솔은 씩 미소를 지으며 소개를 마무리했다.

“이름은 최한솔이고, 버논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저는 한국에서 오긴 했는데, 저도 이 근처에 살아요.”

“하하, 유쾌하시네요.”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저야 환영이죠. 겸손 차리는 듯 하는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명호는 한솔의 소개가 여운이 남는지, 아저씨예요? 를 되물으면서도 계속 피식피식 웃었다.

“뭐, 애들 입장에서는 아저씨 아니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하하, 그럴 수는 있겠네요. 그냥. 어려 보이시길래.”

이건 좋은 뜻이겠지? 아무튼 계속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명호에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한솔은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물었다. 달콤한 맛이 부드럽게 입 안에 퍼졌다.

“한솔 씨 이 근처에 살면, 자주 보겠네요.”

“네, 사실 제가 원래 밖을 잘 안 돌아다니는데, 요 며칠에 마침 좀 밖에를 나와서.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가다 보겠네요.”

“저도 현이 없을 때는 잘 안 돌아다니는 편이었는데. 조용한 걸 좋아해서.”

“조용한 거 좋아하시는구나. 저는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어서 잘 안 나오게 되더라고요. 음악 쪽 일 하거든요.”

“음악이요?”

명호가 단박에 눈을 반짝이는 게 심상치 않았다. 한솔은 직감적으로 기회를 느꼈다.

이걸 무기로 삼는 걸 한솔이 솔직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통하는 게 이거라면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을 하냐며 궁금해하는 명호에게 한솔은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포장했다. 작곡 일을 하고, 함께 일하는 크루가 있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거기에 명호는 자신도 예전에는 예술 쪽 일을 하고 싶었다며 받아쳤다. 

“음악은 아니고 시각예술 쪽 일이었지만요.”

한솔은 솔직히 명호의 패션만 봐도 뭔가 크리에이티브 쪽이 없는 건 아님을 알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아방가르드한 패션 센스를 가진 거냐고 가볍게 놀리는 것 까지는 참지 않았지만.

“아, 그거는...”

“장난이에요, 장난. 애들이 그렇잖아요.”

“잘 아시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예, 뭐. 저도 만만치 않았다는 얘긴 많이 들었거든요.”

눈을 마주친 둘은 슬쩍 아이 쪽을 바라보곤 씨익 웃었다. 따뜻한 봄 날씨에 크기도 이미 좀 작은 것이 확실한 어그 부츠를 신고 있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았다.

둘의 대화는 즐거웠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낯선 사이이다 보니까 오히려 대화가 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한솔은 명호가 직접 디자인 일을 하고 싶어하다가 아이 때문에 저녁이 있는 삶이 필요해져 패션 잡지의 내지 편집을 맡게 되었다는 것과, 중국에 있을 때는 무용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대신 한솔은 자신이 어떤 사람들과 작업하는지라던가, 프리랜서 특유의 뒤틀린 생활 패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오늘도 출근하는 길이었다는 말에는 명호가 당황했지만, 프리랜서라는 건 마음대로 출근을 쨀 수도 있는 거라는 말에는 또 한 번 밝게 웃는다. 애 앞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말라면서. 그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한솔의 심장이 덜컹거리고 있다는 건 차마 모른 채.

즐겁게 웃다 보면 시간은 빨리 흘렀다. 눈앞에 놓였던 아이스크림은 이미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명호는 음식을 느리게 먹는 타입인지, 아이스크림이 더 이상 아이스가 아니라 그냥 크림이 될 지경이 되어서도 느릿느릿 한 숟가락씩 떠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바닥을 보이고 나서는 정말 일어날 때였다. 자리를 마련한 아이가 이미 지루한지 참을성 없게 다리를 휘두르고 있었던 것도 있고. 슬슬 일어나자는 말에 한솔은 애써 아쉬움을 감췄다. 마지막에 질문을 던진 건 거의 충동이었다.

“번호, 물어봐도 되나요?”

“...번호요?”

“네. 불편하시면 제 번호를 드려도 되고. 그것도 불편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왜요?”

“음.”

솔직한 대답을 한다면 취향이어서요, 라고 하겠지만. 이쪽인지 아닌지, 아니면 어쨌든 사정이 괜찮은 건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렇게까지 들이대는 건 이래저래 매너가 아니니까. 한솔은 욕망에 솔직한 만큼 그런 건 엄격하게 따지는 편이었기에 솔직함은 조금 거두기로 결심했다.

양심에 조금 찔리기는 했다. 이쪽인지 아닌지, 불륜인지 아닌지 그런 거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정도는 하고 싶을 수 있잖아. 엄한 짓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뭘 해보겠다는 건 아니니까.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 같았지만 한솔은 나름 그 마음에 완고했다. 그냥 친구로만 지내는 거야. 지훈이 들으면 정신 좀 차리라고 할 것 같은 말이었지만.

“저는 원래 현이가 아이스크림 대접한대서 온 건데, 오늘은 명호 씨가 사 주셨잖아요. 그럼 그건 제가 보답해야죠.”

잠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명호는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눈빛은 한솔에게는 반쯤의 성공이었다. 원래 웃게 하는 놈이 최고라고 하지 않던가?

“한솔 씨 정말 특이한 사람이네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근데 예술하는 사람이 다 그렇지 않아요? 이 말은 한솔의 회심의 일격이었고, 명호는 어김없이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예술 하는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데, 라며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린 둘은 결국 평범한 이웃사촌처럼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다음 번에는 집에 초대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 약속이 지켜지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번 한솔의 집에 현이와 함께 찾아온 명호는 천장까지 쌓인 택배 박스에 한 번 기함하더니 다음 번부터는 우리 집에서 만나자는 소리를 잘도 했다. 그럼 한솔은 또 그걸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말로 한 거였을지언정, 그런 멘트에는 책임을 져야지.

처음 방문한 날 명호의 취향임이 분명한 심플한 블랙 앤 화이트 인테리어에 이곳저곳 형형색색의 충돌방지 스티커와 어린이 물품이 흩뜨려진 모습에 한솔은 한참을 웃었다. 명호가 그만 웃으라고 한 대 칠 때까지.

내심 밖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은은하게 스트레스였던 듯, 집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아이를 보는 명호는 한결 마음이 편해 보였다. 한솔은 혼자 살아서 어차피 심심하다는 핑계로 계속 둘을 불러냈다. 어른들에게는 낯을 잘 가린다던 현이도 결국 마주하는 빈도에는 별 수 없었는지 곧 한솔에게는 낯을 덜 가리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틈틈이 제공한 간식 뇌물의 힘이 컸을 수도 있었겠다)

그리고 나서도 조금 더. 드나들면서는 점점 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하고, 아이와도 가까워졌다. 이제는 그냥 동네 이웃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많이 가까울 정도로. 그러다 보면 한솔은 명호를 슬쩍 형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만은 않을 정도가 되었고, 반면 명호는 가끔은 자신이 바쁠 동안 한솔에게 현이 좀 대신 봐 달라는 부탁 정도를 할 수는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솔은 자신의 프리랜서 위치를 십분 활용했다. 요즘 일에 소홀하다는 지훈의 타박은 슬쩍 외면하면서. 그 사이에 한솔은 명호에 대해서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이쪽 아파트가 가족이 같이 살기에는 조금 좁지 않나?”

“두 명 뿐인데. 애 더 클 때까지는 더 넓어도 청소하기만 힘들지. 더 크면 이사갈 수도 있어.”

첫째, 이 집에는 두 사람만 산다. 한솔도 한솔 나름대로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신경을 곤두세운 것이 무색하게, 한솔이 침범하는 다른 사람의 공간은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니면 희망 고문인지. 덕분에 한솔이 현이와 놀아준다는 핑계로 조금 더 오래 집에 있더라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으니 그냥 좋은 게 좋은 셈 치기로 했다.

“현이, 늦었다. 이제 자러 가야지.”

“벌써 자요?”

“아홉 시야. 지금 안 자면 내일 피곤하다고 또 그래.”

“안 피곤한데!”

“그럼 안 자도 되니까 일단 목욕부터 하자, 현아.”

“...안 자면 아저씨랑 더 놀아도 돼?”

“목욕 하고 나서도 안 졸리면 그래도 돼.”

“아저씨는 내일도 올게.”

목욕을 하고 나면 노곤노곤해진다는 걸 모르는 어린아이는 능숙한 아빠의 계략에 쉽게 넘어간다. 한솔의 약속으로 쐐기를 박자 현이는 의외로 순순히 명호의 뒤를 따랐다. 이후 전개가 뻔한지라 명호는 욕실로 아이를 데려가면서 슬쩍 한솔에게 눈짓했다. 그럼 한솔은 그걸 바로 알아듣고 거실에 널브러진 장난감 따위를 대충 수습해서 정리한다. 그래봐야 박스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는 정도이지만.

목욕을 하고 나서 따뜻한 물에 노곤노곤해진 아이는 어김없이 한솔에게 굿나잇 인사를 해 줄 새도 없이 금방 잠들었다. 아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돌아나온 명호를 보며, 한솔은 새삼 감탄했다.

“형 근데 진짜 애 잘 보네요.”

“내 애인데. 오래 하면 그렇게 돼.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 없지.”

둘째, 그렇게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최소한 현이가 꽤 어릴 때부터. 기저귀 가는 거나 새벽에 우는 소리 때문에 깨는 것보다는 말도 알아듣고 말도 할 줄 아는 지금이 더 낫다고 말하는 걸 보면 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언뜻 이야기하는 걸 보면 현이 더 어릴 때는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를 봤던 것 같으니 능숙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육아에 능숙한 명호도 한솔에게는 매력적인 포인트였다. 아, 이런 거 좋아하는 이 취향이 괜찮아, 싶다가도. 저 마른 팔로 어떻게 아이를 그렇게 번쩍번쩍 안아 들고 그러지. 콩깍지가 씌인 눈에는 매일 아이를 들고내리느라 단련된 잔근육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명호가 한솔의 이런 착각을 몰라서 다행이었지.

“너도 나중에 혹시 애 생기면 이렇게 될 걸. 하다 보면 늘어.”

“으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왜, 현이 다루는 것도 예전보다 잘 하잖아. 하다 보면 뭐든지 늘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셋째. 이건 명호에 대해 알게 된 건 아니고 한솔이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 것에 가깝기는 한데.

“저는 남자 좋아해서, 애 생길 일은 없을걸요, 아마?”

“어?”

서명호는 최한솔의 긴장을 지나치게 푸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 현이랑 노는 것도 신기하죠. 제 평생에 없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명호가 자신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자길 멍하니 쳐다보고 있거나 말거나, 한솔은 제 할 말을 했다. 솔직히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반쯤은 긴장이 풀려서 튀어나온 말이고 반쯤은 명호에 대해 몇 가지를 알게 되면서 승산이 있나? 싶어서 조금 무모하게 던져본 것도 있고.

그러니까 이제는, 그냥 예전에 엄청 취향인 사람 길 가다 봤다? 같은 무용담으로도 이야기한다거나, 아니면 우연찮은 계기로 동네 사람을 알게 돼서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낸다거나,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넘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 솔직히 그냥 얼굴 구경만 하고 살아도 되지,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게 명호가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그러니까 지금껏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던 게 이제는 정말 슬슬 양심이 찔려 올 시기가 되었다는 거다. 거기다 한솔의 음침한 계략으로 이렇게 된 상황에는 아이까지 엮여 있지 않은가.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빨리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한솔은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었다. 지금까지 봐 온 서명호는 이런 걸 알게 된다고 해서 한솔을 다르게 볼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지. 모르는 일이잖아.”

“뭐가요?”

“애 생길 일이 왜 없어. 남자 좋아해도 애는 키울 수 있잖아.”

예상치 못한 답에 한솔은 잠시 눈을 꿈뻑거리다가, 말 뜻을 이해하고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게 문제다. 이런 부분에서 서명호가 단순히 한솔의 납작한 외모 취향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게 티가 난다는 게. 

“아, 맞는 말이기는 하네. 나는 또, 형이 너무 놀란 것처럼 그래서.”

“아니, 놀랐지. 나는 너가 현이를 너무 잘 놀아 주길래. 자식 생기면 잘 챙겨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그럴 일 없다길래. 남자 좋아하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물론 싫으면 말아도 되는 건데 그래도. 얼버무리는 말에는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태가 나서 그게 또 좋았다. 조심스러워하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이건 누구예요?”

“그거? 전 부인.”

“...아?”

서명호는 이혼남이다.

아, 진짜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전 부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명호에 한솔은 간만에 답지않게 당황했다. 물론 아이가 있으니 과거의 누군가가 있다는 건 별로 놀랍지 않지만, 통상 이혼한 전 부인의 사진을 침대 옆에 두고 그러나? 유사시에 명호가 현이를 자신에게 맡기는 걸 보면 (물론 한솔을 믿지 못하는지 꽤나 불안해하기는 했다) 아이를 매개로 관계가 이어진다거나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나?

“몰랐어? 알 줄 알았는데.”

“얘기를 안 했으니까, 모르긴 몰랐죠?”

“현이 엄마는 없으니까 알 줄 알았지.”

“가족이 없을 수 있는 이유가 뭐 그것뿐도 아니고. 그리고 그게 놀라운 건 아니에요. 사진이 아직 여기 있는데 전 부인이라길래.”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니까.”

안 물어보길래 아는 줄 알았어, 하는 목소리는 높낮이도 없이 지극히 일상적이다. 

그럼 어떻게 헤어졌냐고 물어보면 너무 캐묻는 것 같나? 호기심은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가 틀림없었다. 한솔은 전혀 알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알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꾹 눌러 참았다. 기대하지 말자. 기대해서 좋을 건 없지. 그런 거 기대하고 가까워진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바라기는 했지만, 기대한 건 아니다.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거고.

“아직도 연락 해요?”

“가끔은? 나는 그 사람 때문에 한국 온 거라.”

그래도 기대를 하긴 했었나. 한솔은 괜히 아리는 것 같은 가슴을 쿵, 쿵,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면 명호가 이상하게 볼 테니까 그러면 안 되겠지만. 아, 이래서 헤테로는 최악이야. 뭔가 알 수는 없지만 삶의 터전을 옮길 정도로 세기의 사랑을 한 거 아냐.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도 뭔가 들어가 볼 구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물론 명호가 여자와 결혼하고 애를 낳고 나쁘지 않게 헤어졌다고 해서 그가 바이일 가능성이 배제되는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예를 들면 바이는 맞는데 전 부인을 아직 사랑해서 한솔과는 가망이 없다던가 하는 그런 거.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 이게 문제라니까. 바라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계속 바라게 되는 게.

“...형, 술도 해요?”

결국은 이런 말이나 뱉어 버리고 마는 거다.

“못 하지. 애 있는데. 술 마시고 싶어?”

“못 하는 건가. 애 재우고 나면?”

“밤에 무슨 일 있을 수도 있잖아.”

“밤에 누가 여기 있어서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 준다면?”

“누가?”

“바로 여기 있는 나?”

넘버 원 베이비시터. 한솔은 촤라락, 손을 흔들어 가며 스스로에게 제스처를 취했다. 멍하니 한솔을 쳐다보던 명호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민망해지는 듯 했지만 한솔은 꿋꿋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호감이 있는 상대를 웃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어쨌든 좋은 신호다. 모처럼 노리고 있었던 기회였던지라 민망함에 질 수는 없었다.

“면허 없잖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호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택시 부르면 되지.”

“쉽지 않을 텐데. 애 본 적 없잖아.”

“애 본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건 자신 없고. 그냥 만에 하나 무슨 일 있으면 태우고 나를 준비는 되어있다는 거지. 누가 있으면 마음이라도 좀 편하잖아? 그리고 세상에 쉬운 게 있게요?”

물론 호락호락하지 않기로는 한솔도 지지 않았다. 뻔뻔한 한솔의 태도에 명호는 허, 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너, 나 같은 말을 하네.”

“하루이틀 붙어다녔어야죠. 그리고 워낙 가르침을 주시다 보니.”

서로 절대 굽힐 생각이 없는 방패 두 개가 마주보며 대치한다. 침묵 속에서 한솔은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셋까지 세면 명호의 표정이 이내 허물어지면서 웃음으로 둔갑한다.

“알았어, 알았어. 이불 꺼내 줄게. 애 재우고 와.”

유레카! 한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상치 못한 과거를 알게 되어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패배감에 젖을 시간은 없다. 쟁취하려면 앞으로 나가야지. 그러니까 어쨌든 지금 결혼한 상대는 없는 거고, 한솔과 이렇게 거리낌없이 지내는 데에도 별 생각이 없는 거고. 남자 좋아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리고 일단 많이 가까워졌으니까. 서둘러 아이를 재우고 돌아오니 오랜만이니 좋은 술을 꺼내겠다며 캐비닛을 여는 뒷모습이 짜릿했다.

“아, 진짜 오랜만이다. 이거 있는 줄도 까먹었는데”

“술을 전혀 안 해요?”

“원래도 잘 안 했어. 안 좋아해.”

“그런데 오늘은 마시네. 싫으면 안 마셔도 돼요.”

“원래 안 좋아해도 안 된다고 하면 괜히 하고 싶은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비싼 술을 꺼내오는 걸 보면 그렇게 싫어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괜히 그걸 들먹이며 놀렸더니 원래 자주 안 먹으면 좋은 걸 먹어야 하는 거라며 능청스럽게 넘어간다. 아무튼 금욕적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화끈한 면이 있다니까. 이미 콩깍지가 씌여 다 좋아 보이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이런 면모 하나하나가 다 취향인 건지. 어느 쪽이건 간에 호감 포인트는 착실하게 쌓여만 갔다. 심지어는 잔을 두 개 내려놓고 좋은 거라며 술을 따라 주는 모습에도.

“술은 왜 마시고 싶었어?”

“그냥 그런 날이 있잖아요. 술 땡기는 날.”

“그런가? 사실 잘 몰라.”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그래, 그럼 그런 걸로 해. 괜히 캐묻지 않는 상대에 한솔은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쉽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솔이 잔을 비우는 족족 채워주는 움직임은 다정하다. 비싼 술이랬으면서 엄청 퍼 주네. 비싼 술은 비싼 값을 해서, 높은 도수에 금방 얼굴이 뜨끈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한솔의 원래 목적은 명호의 긴장을 푸는 거였는데, 얼결에 제 긴장이 먼저 풀리고 말았다. 술도 들어갔겠다, 앞뒤 잴 것 없이 오늘의 목적인 진솔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온 얘기, 해 줄 수 있어요? 싫으면 말고. 그냥 궁금해서.”

“아, 그거, 음... 별로 재미 없는데.”

“재미있으려고 해달라는 건 아니고...”

명호는 그러고서도 두어 번을 거절했지만 한솔은 꿋꿋이 궁금하다고 말했다. 싫거나 불편해서 안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재미없을 것 같아서라면 괜찮다고 진짜 당신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서 그렇다고 세 번째 말했을 때에서야 명호도 고집을 굽혔다. 이야기하기 싫은 건 아니고 진짜 별 게 없어서 그랬다고.

“진짜 별 거 없어. 나 중국 있을 때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이어서 만났고, 결혼했어. 그러다 그 사람 들어올 때 돼서 나도 들어왔고, 현이 낳고 얼마 안 돼서 이혼하고.”

“그분 때문에 온 거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거 아니에요?”

“어허, 갓난애를 데리고 어디를 가. 너무 큰 일이야.”

“...그건 그렇긴 한데. 그분도 너무하다.”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예의상 하는 소리다. 이 사람을 고생시켰다는 건 너무하지만, 이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게 아니기에.

“아냐, 뭐. 원래 그렇게 하기로 했어. 나는 잘 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말투에는 괜한 희망을 가지게 됐다.

그 사람은 외국 많이 다녀서, 지금쯤 유럽에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랑 아이는 잘 안 어울리지. 내가 키우고 싶다고 했거든. 그렇게 말하는 명호의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별 거 없다고 말은 하지만, 내가 괜한 얘기를 꺼냈나? 그만 파고들어야 하나? 그렇지만 한솔도 이미 취했고, 한 번 터진 물꼬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사진은 왜 거기 뒀어요?”

“보내는 걸 깜빡했는데, 버리기도 그렇고 해서. 별 의미는 없어. 거기에 뭐가 있는 게 익숙해서.”

“...왜 이혼했어요? 이것도 싫으면 얘기 안 해줘도 돼요.”

“별 거 없었어. 그냥 하는 거지.”

“이혼을 그냥?”

“할 수도 있지. 그냥.”

“할 수는 있는데, 형이 그럴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

거기에는 명호도 그 말이 맞다는 듯 웃었다. 그런가?

“같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별로 안 행복했어. 그 사람도 그랬대. 같이 있을 때 행복했으니까 우리가 같이 결혼도 하고 그러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별로 안 행복했다고. 그래서 이혼했어.”

아직 사이 좋아. 가끔씩 한국에 있을 때는 현이 보러 오기도 해. 그 말에는 술에 젖어 인내심이 줄어든 속이 괜히 뒤틀렸다. 같이 있으면 행복하지 않은 게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아니긴 하지.”

“... 저 지금 입으로 말했나?”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응. 말했어.”

“아....”

이렇게 된다니까.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한솔이 본 명호는 괜히 다른 사람 감정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걸 싫어할 것 같아서. 그러나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명호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물론 그 뒤뜻을 한솔이 모두 알 수는 없었겠지만.

“그런데 같이 있어서 행복하지 않으면 사랑하기도 어렵지. 그 전에는 같이 있을 때 많이 행복했으니까.”

“...지금은?”

“지금은 같이 없잖아.”

이상할 정도로 명료한 답변이었다. 아닌가. 술 먹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명호가 이상하게 단호해 보여서 한솔도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납득했다. 그렇구나. 지금은 어차피 같이 없어서 사랑하지 않는, 아니, 반대인가? 그런데 그러면 같이 있으면 다르다는 건가? 생각이 뻗어나가는 걸 멈추는 게 힘들어진다.

“요즘은 어떤데요?”

“요즘?”

“그냥, 요즘.”

현이랑 같이 지내고, 나랑도 반쯤은... 같이 지내는 거. 이건 실수로라도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고 입술울 꾹 다물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최한솔. 다 망치면 진짜 죽을 줄 알아. 이런 한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명호는 술이 들어가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대답을 한다.

“행복하지, 요즘은.”

아, 이러면 오해한다니까. 방금 전까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그렇게 말해 놓고... 한솔은 열기가 오른 눈을 꾹 감았다. 몸이 기우뚱, 하는 듯 하더니 베개라기엔 딱딱한 감촉이 관자놀이에 느껴진다. 눈을 떠 보니 명호가 몸을 기울여 한솔이 제 어깨에 기대기 좋게 해준 채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다정하다.

“그만 마셔야겠다, 너.”

이래서는 현이가 깨워도 택시 어떻게 부르려고. 태연하게 하는 말에 한솔도 토를 달지 않았다. 술병을 치우려고 명호가 허리를 약간 떼는 사이, 한솔이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말한다면 모르겠지만, 일단은 일어날 생각이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킬 생각이었는데, 간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중심이 순간 취청해서 명호의 위로 넘어졌다. 다행히 뒤에 있는 소파를 재빠르게 짚어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아직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 양 옆으로 손을 짚고 반쯤은 무릎을 세운 체 엎어지게 된 게,

이거, 약간, 그림이.

“...싫으면 거절해요.”

술 때문이라기에는, 그건 핑계니까. 사실 늘 이러고 싶었다는 걸 한솔도 잘 알고 있었다. 급히 몸을 일으켜서 피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건 제 아래에서 똑바로 눈을 마주쳐오는 장본인도 마찬가지인걸. 피할 수 있는데.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는, 그리고 뭔가 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는 채로 일 초, 이 초, 삼 초가 지나고...

이어지는 침묵은 명호가 깼다.

“...그러면 어떡하게?”

“뭘 어떡해요, 싫으면 싫은 거지.”

형이 싫다고 하면 저는 집 가는 거고. 그러고서는... 모르는 척 하고 싶으면 모르는 척 하는 거고, 없던 일 삼고 싶으면... 그렇게라도 해 볼 수 있고요. 마음에도 없는 말이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태연한 척 했지만 사실 심장이 잔뜩 벌렁거리기는 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쿨해지지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 아, 싫을 수는 있지만 앞으로 보기 싫다고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 생각이 무색하게,

“읍-”

“쉿.”

제 뒷목을 감아오는 명호의 손길에 그 고민이 죄다 무색해진다. 닿아오는 입술에서는 비싼 술의 맛이 났다.

눈이 매울 정도로 쎈 냄새가 쓰게 느껴지다가도 뒷맛이 깨끗한 게 이 사람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눈 깜짝할 새도 없이 혀가 진득하게 얽혔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명호의 위에 엎어진 한솔의 숨이 부족해질 때가 되어서야 풀려났다. 멀쩡한 소파를 두고 거실 바닥에 앉아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올라가자고 제안해보려던 참에, 한솔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집 가기는, 오늘 밤은 여기 있기로 했잖아.”

...내가 그랬지, 금욕적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화끈한 면이 있다니까. 한솔은 제 목덜미를 다시 잡아 오는 손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의 관계는,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은은하게 바뀌었다.

명호는 더 이상 한솔에게 찾아와 달라고 할 때 미안해하지 않았고, 한솔은 명호가 부탁하지 않을 때도 알아서 그의 집에 눌러앉아 있곤 했다. 셋이 보내는 시간도, 현이와 둘이 보내는 시간도 늘어났다. 가끔은 아이를 재우고 명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고, 입을 맞춘다거나 하는 일들도 생기고. 서로가 있는 게 이미 자연스러웠지만, 없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붙어다녔다. 아이 하나 데리고 살기에 딱 좋았던 명호의 아파트는 객식구가 반 명쯤 더 생기면서 조금 좁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쁘지는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를 구경하는 것도 새로운 재미가 되었다.

한 번은 현이를 데리고 으레 그렇듯 공원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훈을 마주치는 바람에 한바탕 해명해야 하기도 했다. 무슨 사고를 쳤냐는 의구심 가득한 눈빛과 애 보느라 작업실 못 오는 거면 말을 하지 그랬냐며 타박을 주는 말이 섞였다. 엄밀히 말해 한솔이 키우는 아이는 아니니 애 보느라 바빠 작업실에 못 간다는 건 핑계였지만, 한솔은 구태여 그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냥. 싫지 않아서.

그렇지만 이게 일이 복잡해질 줄 알았으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텐데.

“아저씨도 아빠야?”

“어?”

“아, 그건....”

평온한 저녁식사 중에 갑자기 긴장이 감돌았다. 원래 요리 당번은 명호였지만, 아이 밥이라도 해 보고 싶다고 한솔이 도전해 본 다 터진 스크램블 에그를 얌전히 먹던 현이가 던진 폭탄 발언에 명호의 눈썹이 치솟았다.

“오늘 아저씨 친구 만났는데, 아저씨 보고 나 아빠라고 했어. 아빠는 아빤데.”

아, 상황 파악이 지나치게 빠른 어린아이의 단점이라면 말하지 않은 부분도 알아서 알아들어버린다는 점이다. 한솔은 수저까지 내려놓고 손사래를 쳤다. 그런 얘기 한 거 아니야.

“오해예요, 오해. 아빠라고 한 적 없어요. 그런 말은 안 했잖아, 현아.”

다급하게 해명을 했지만, 명호의 눈에는 이미 고민이 자리를 잡았다. 한솔이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에는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뭔가 어색한 침묵을 채우기 위해 대화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도 하나도 안 나고. 식사가 끝나고 정리하는 중에도 괜히 눈치가 보여 설거지를 하는 명호 뒤에서 안절부절하며 서성거리고 있자 명호는 한숨을 푹 쉬고 말을 꺼냈다.

“네가 현이 아빠를 할 필요는 없어.”

“아무래도 그렇지. 현이 아빠는 형이잖아.”

“그러니까. 너가 해 줄 필요 없다고.”

“애 봐 준다고 다 아빠 노릇 하는 건가? 그러면 유치원 선생님도 다 부모님이게.”

부러 토라지게 말이 나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잘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명호는 한솔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 줄 사람은 아니었다.

“싫은 거 아냐. 너가 부담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너는 나랑 연애하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아빠가 되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고 싶으면 그래도 되지만. 현이는 나로도 충분해.”

사람이 꼭 엄마든 아빠든 둘씩이나 있어야 하나. 라는 명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솔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었고. 현이에게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것은 부족한 것 없이 키워 준 명호의 역할이 제일 컸겠지만. 그걸 알아서 굳이 토를 달지 않고 넘겼다.

그런데도 복잡한 마음이 드는 건.

남은 집안일을 다 끝내고, 아이를 재우고, 오늘은 자고 가기로 한지라 잠옷으로 갈아입고 명호의 방 침대에 누우려다가, 어딘가에 시선을 뺏기면서 그 이유를 찾았다. 명호의 전 부인의 사진이 아직도 침대 옆 협탁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사진 때문은 아니고. 별 의미가 없는 거라고 했으니까. 그보다는 조금 다른 거였는데. 한솔의 시선이 닿은 곳을 가만 바라보던 명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치울까?”

“아니, 뭐...”

그러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상대방에게는 이미 별 의미가 없다는 것에 제가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좀 이상하다면 차라리 내 사진이라도 하나 갖다놓던지 해야지. 사진을 즐겨 찍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사랑했어?”

“사랑했지.”

“….”

“싫어?”

“아니, 그냥….”

질문도, 대답도 아닌 말이 질질 이어지다가 툭 끊어졌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으면서 최한솔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화의 턴을 서명호에게 넘겼다. 어디 말 해보라는 듯이 턱을 슬쩍 들어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본다면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라고 한 소리 할 만한 그런 행동.

그러나 명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부러 더 찔러 보려고 드는 한솔 앞에서 명호는 그대로 응수하지 않고 말을 골랐다. 더욱 조심스럽게, 그리고 더욱 신중하게. 최한솔이 사랑해 마지않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잖아.”

명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불안해진 한솔은 묻지도 않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그러니까, 아, 전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거나, 사진이나 이런 것 때문에가 아니라. 그냥. 내가 대신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잖아. 그게 무슨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이한테는 다를 수도 있는 거고. 형한테도 그렇고. 그래서 그냥.”

형이 뭘 잘못했다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생각이 난다고. 여기서 나는 뭐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말이 이어질수록 구차해지는 것 같기는 했는데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아, 차라리 이걸 직접 물어보는 게 아니라 메신저 같은 걸로 물어봤으면 좋았을 걸. 그럼 대답을 하지 않는 시간이 그냥 바빠서인지, 아니면 메시지를 못 봐서인지, 타이핑이 느려서인지, 뭐 그런 것 때문이라고 착각할 수라도 있잖아. 뭔지 모르는 상태였으면 차라리 더 좋았을 텐데. 물론 달리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중요한 대화는 면대면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겠지만, 

“그럴 수는 있지.”

“그래.”

“사랑했잖아. 그걸 바꿀 순 없지.”

“그걸 모르는 건 아니야. 그냥 신경쓰이는 걸 알아달라는 거지.”

“지금은 더 이상 사랑 안 할 순 있어도...”

“아니, 굳이 더 얘기 안 해도 되는데,”

“아니, 아니야. 일단 들어봐.”

헉. 어떡하지. 화났나? 말을 끊고 들어오는 명호의 눈치를 봤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자기 전이라 푹신한 네이비색 파자마를 입고 있으면서 한껏 진지한 고민을 하는 듯 찌푸려진 미간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싶기도 하고. 

“그때는 사랑했던 것 같아. 많이. 아니, 사랑했어. 그건 맞고 어쩔 수 없지. 근데 너랑 하는 사랑하고는 달라.”

뭐가 다른데?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질문을 꾹 참았다. 다르겠지. 한솔도 안다. 당연히 다르다. 질문하는 의미가 없다. 나랑 그 사람이 다른 만큼 나를 사랑하는 방식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도 당연히 다르겠지. 지금까지 최한솔이 사랑한 모든 사람들과 서명호는 다른 것처럼. 최한솔과 서명호가 다른 것처럼.

원래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건 그런 거다. 그래서 한솔은 여기에 같잖은 우월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그럼 의식하는 사람 같잖아. 괜히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같고. 명호도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닐 테니까 애처럼 굴고 싶지는 않은 걸.

“…그리울, 때도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은 튀어나온다. 자신이 사랑하고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에게서, 자신 또한 특별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한솔은 자신의 고집에 변명을 대 가며 합리화를 시켰다.

“음…. 그건 잘 모르겠어.”

그러나 서명호는 그렇게 한솔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방 기분 좋으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사람이라면 안 좋아했을 거고.

"좋았거든. 좋았고, 좋은 시절이었지. 나는 그때 행복했는데,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내가 많이 바뀌었고 그 바뀌는 과정에는 그때의 관계나, 경험... 이런 게 영향이 있었겠지? 아무튼 그때 그렇게 변했으니까, 이제는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만큼 행복하진 않을 것 같아."

"좋기는 했다는 거네."

이게 결론이 아닌 걸 알면서 하하. 명호는 웃으며 한솔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그렇지만 현이가 없다고 생각하면 싫지 않아?”

“….걔가 왜 없어.”

“내가 그 사람을 안 만났으면 현이도 세상에 없잖아.”

“그건….”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건넛방에서 잠든 어린아이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라도 아이가 깨서 둘의 이야기를 엿들을까 걱정되었다. 당연하게도 아이는 깊게 잠들어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는 게 다였고, 조심조심 말하는 둘의 목소리에 깰 일도 없었다. 진심도 아니고 지나가는 말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아이가 그걸 듣고 상처받을까 해서. 

현이가 없으면? 한솔이 사랑하는 아이. 명호가 사랑하는 아이. 둘이 만난 이유가 되었고 둘이 함께 보살피는, 말하지 않으면 서명호와는 영 딴판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아이. 아마도 자신을 낳은 사람을 닮았겠지. 이 아이는 한솔이 알고 있으면서도 온전히 알 수 없는 서명호의 과거였다. 현이가 없는 상태에서 명호를 만났어도 한솔은 그를 사랑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싫은데.”

“싫어?”

“현이가 없다는 생각을 어떻게 해. 현이는 이미 우리랑 있는데.”

“나도 그래.”

명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한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한솔은 자기도 모르게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말투만큼이나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나도 현이가 세상에 없는 건 생각하기 싫고... 그래서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 같은데. 그이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현이를 세상에 데려오고. 어떤 사랑은 영원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면 현이를 통해서 너를 만나고.”

그래서 나는 좋은데. 너랑 만나서. 그렇게 말하는 제 연인의 목소리는 동요 하나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옛 인연을 가지고 따지고 드는 제가 너무 어리게 구나 싶어 억울할 정도로. 괜한 마음에 부루퉁한 소리를 하게 됐다.

“...현이 없었어도 우리는 만났을 거야.”

“그랬을 수도 있지.”

“다른 애인 사귀고 있었어도 형을 만났으면 바로 갈아탔을 걸.”

“마음에도 없는 말 하는 거 아냐?”

“아닌데, 나는.”

진짜 모른다니까. 형은 내 천년의 취향이라고. 처음 봤을 때 바로 알았어. 물론 그때는 한 십 년의 취향인 줄만 알았고 천년의 취향인 줄은 만나고 나서 알았지만. 그럼, 그럼, 하며 한솔을 달래던 명호는 그 말에는 픽 웃었다. 웃기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 진심인데. 그치만 여전히 명호를 웃게 할 수 있다는 데에서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이 찾아온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한솔도 확인해야 할 게 있다.

“형은?”

“나?”

“만약에… 나를 그때 알았으면?”

“너를 그때?”

“응. 결혼하기 전에.”

명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이 통해서 만난 건데 너를 그때 어떻게, 라는 질문이 눈에 빤히 드러났지만 한솔은 부러 그걸 무시했다. 소소한 반항이었다. 해명을 덧붙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명호는 한솔의 고집을 눈치챘는지 고민하는 흉을 낸다.

“뭘 그런 걸 생각해, 있었던 일도 아닌데."

“아, 그냥 한 번 생각해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세상만사를 다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나?”

“너 좀 버르장머리가 없어. 현이가 배운다.”

“내가 원래 좀 그래.”

명호가 자길 어른스럽게 생각하는 걸 그렇게도 바라 왔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예외였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너를 선택했으리라는 대답을 내심 듣고 싶었다. 당연히 너를 만났지, 같은 입에 발린 말.

“그런데 그때 너는 미성년자 아냐?”

“와, 형 미성년자랑 사귀었을 거라고? 진짜 끔찍한 발언!”

“너가 먼저 했잖아!”

서명호가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알면서도 한솔은 바란다. 그리고 어김없이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찾아오는 반응에 웃으면서 명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냥 생각해 봐. 이게 의미가 왜 없어.”

품에 파묻힌 채라 목소리가 웅얼거리게 들리더라도, 대답을 종용하는 걸 잊지는 않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의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사랑했잖아. 그랬던 것처럼. 뭐, 굳이 따지자면 너를 그때도 사랑할 수 있었겠지만, 음.”

사실 한솔도 알고 있다. 명호는 둘이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과거의 분기점에서 실제로 그런 상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한솔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그때는 그 사람을 사랑했으니까. 그 마음을 바꿀 수는 없겠지. 지금도 한솔이 듣고 싶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다른 상황, 다른 세계에서는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도 그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치만 그 시간을 다시 돌아 다시 그 공원에서 너를 만나면 너를 사랑할 거야.”

그럼 한솔은 사실 자기가 듣고 싶었던 게 그냥 그저 그런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명호의 진심이었음을 알게 된다. 

“진짜?”

“진짜.”

돌고 돌아 원하는 걸 얻게 되는 거지. 감동적인 말을 해 달라고 땡깡부린 건 자신이었으면서 막상 명호의 진심을 듣고 나니 괜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형, 은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형 열심히 꼬신 건데.”

“아니, 알았는데?”

“뭐?”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는 걸 제 어깨 위의 팔이 꾹 누른다. 왜, 하고 버둥거리려고 했더니 제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는 입술에 멈칫했다. 혹시라도 부딪혀서 다치거나 그러면 안되니까. 명호도 한솔이 그런 걸 신경쓰는 걸 알아서 지금 일부러 그러는 게 빤했다. 얼굴 보고 싶은데, 아니 안 보고 있는 게 낫나? 민망해져서 얼굴이 후끈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명호도 한솔을 품 속에 단단히 안은 채 말을 이었다.

“너... 맨날 찾아오고, 현이 봐 주고, 처음에는 애들 좋아해서 그런 건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며. 나중에는 술 먹고 들이대고.”

“그건...”

“누가 꼬시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그렇게 챙겨. 아니었으면 혼낼 뻔 했어.”

“그말인즉슨 꼬신 게 통하긴 했다?”

말 안 할래. 그제야 한솔은 깨달았다. 이 형도 지금 민망하구나. 그의 품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 머리통을 단단히 잡고 있는 손끝이 살짝 뜨거워진 게 느껴진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착실하게 반응해 주는 제 연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반응이 지나치게 착실해서 계속 찌르고 싶어진다는 거다. 치밀어오르는 장난기를 애써 참았다. 

“너는 나를 좋아할 거라며.”

“... 그걸 이렇게 써먹는다고?”

“그럼 또 나를 꼬시겠지. 그럼 나는 또 넘어갈 거고.”

“이 형 되게 웃기는 사람이네.”

“왜, 나 좋아한다며.”

아, 진짜 웃기는 사람이야. 토라진 듯 말하는 목소리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둘이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벌개진 얼굴이 민망해져 한솔은 베개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킥킥거리는 웃음이 침구 안팎으로 울렸다. 뻔뻔한 것도 솔직히 싫지만은 않지. 그런데 사실 이 사람의 취향만 문제는 아닌데.

“...현이는 그때도 날 좋아하려나.”

“그건... 모르지.”

“헐.”

“애들은 변덕이 심하잖아.”

“너무하다, 진짜. 한 마디를 안 져 주네.”

“져 주면 좋아할 거야?”

“...아니.”

하지만 최한솔은 그렇기 때문에 서명호를 사랑한다. 제 애인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알면서도 기어이 고집을 부리는 모습에 코웃음을 치면서도, 결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쉬이 움직여주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랬다. 그것이 서명호니까.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몰라.”

“어어, 너무한데.”

“원래 그런 거야. 애들은 변덕이 심하다며.”

불퉁하게 말했지만 그 뒤에 담긴 마음은 모르지 않았다. 그저, 서명호는 그걸 낯간지러울 정도로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최한솔은 그걸 대놓고 말하더라도 절대 무게를 잡지는 않을 사람이니까. 최한솔도 그걸 알고 서명호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공동의 이해 속에서 둘의 사이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든다. 침대 안에서 서로 꼭 끌어안고 나누고 있는 체온에 긴장도 풀리고, 곧 졸음이 찾아온다. 숨소리가 느려지고, 사랑에 빠진 연인은 곧 평온한 잠에 든다.

아니, 둘 중에 한 사람은 잠에 들었다. 고르게 뛰는 명호의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이며, 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풀린 걸 눈치챈 한솔은 다시 슬쩍 고개를 들었다. 살짝 미소를 띤 채 잠들어 있는 명호의 모습은 처음 본 그날만큼이나 한솔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래, 다른 삶에, 똑같은 상황이 다시 온들 다른 결정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치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지금 여기에 함께 있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니까.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골랐으니까.

그래도.

“...나는 언제, 어디에서 또 만나더라도 형을 다시 사랑할 거야.”

말에는 힘이 있으니까. 한솔은 제 연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반쯤 잠에 든 명호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래. 들리는구나.

“형이 어떤 사람이건, 어떤 세계에 있건 간에. 나는 형을 사랑할게.”

그럼 형은 그런 나를 보고 다시 나를 좋아하게 되는 거야.


합작 올라온 지 6개월이 지나서 백업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있는 포타도 지워지는 알페스 생태계에서 이미 올라와 있는 글을 재백업하는 이 모습에 대해 어쩌구...

퇴고하면서 보니까 여기저기 엉망진창인 부분이 한 둘이 아닌데, 친구들의 무한한 지지와 연대에 힘입어 결국 백업에 성공했습니다. 다들 고마워요 🥲 그리고 다시 읽으니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요... 아무튼

잇솔 화이팅. 잇솔 많이 넣어야지. 앞으로도 힘내보겠습니다.

합작 링크: 지금, 여기 : 포스타입 포스트

포스타입 2023.11.10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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