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obkk

나뭇잎마을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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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이 섬짓하도록 고요한 밤이었다. 캄캄하게 내려앉은 밤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희끗한 별들이 마구잡이로 흩뿌린 소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손톱 모양의 초승달마저 서쪽 숲의 나무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려 있는 까닭에 발치를 따르는 그림자가 사라질 것처럼 희미하고, 바람에 사부작거리는 나뭇잎마저 숨죽인 듯한 새벽.

하지만 노련한 닌자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어두운 방 안의 가구들이나 다름없는 법이라. 하타케 카카시는 백색 호카게 의복의 긴 자락을 사락거리고, 한 손에는 그의 애독서를 든 채 여유로운 작태로 숲을 가로질렀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호카게 의복은 어둠 속에서 거의 빛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아랑곳않았다. 그를 둘러싼 숲의 그림자는 깊으나 동시에 그가 평생에 걸쳐 곁에 두고 살아온 것들이었다. 호카게로서 그 어둠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탓도 있었다. 위험하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들.

지금의 하타케 카카시에게는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 열흘 만의 퇴근이라는 사실이 조금 더 중요했다. 아니, 이 주던가? 어쨌든 이제는 전부 지나간 일이다. 한 시간 전, 일주일간 그의 책상 위를 점령했던 서류 더미의 마지막 문서를 검토하고 넘긴 그에겐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걸 기어코 일주일 만에 끝내는 거냐고 거뭇거뭇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보좌관 같은 걸 본 것도 같지만, 뭐. 무사히 끝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그렇게 쟁취해낸 열두 시간의 휴식 앞에서 하타케 카카시의 발걸음은 전에 없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마친 마을,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나날들. 그 시기에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맡게 된 자로서의 책임감과 의무감은 물론 알고 있으나… 사람으로서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 여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집 앞.

카카시가 인사하듯 한쪽 손을 들면서 의례적으로 뱉었다. 자택의 대문을 잡고 돌아선 호카게의 앞으로 두 그림자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카게 직속의 암살부대 대원이었다. 낡은 곰 가면과 반들반들한 토끼 가면의 두 사람.

곰 쪽은 그가 호카게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암부로서 근무해온 이었고, 토끼 쪽은 아직 낯선 인물이었다. 분명, 뭐라더라. 얼마 전에야 가면을 받은 신입이라던가. 또래에 비해 특출난 실력이었지만 곧바로 실전에 투입되는 암부치고는 미숙한 모습이 보였다. 따라오는 중간중간 나뭇잎을 떨어뜨린다던가, 반쯤 부러진 나뭇가지를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흘린다던가. ‘토끼’의 사수인 ‘곰’에게 눈짓하자 그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카카시는 중요한 건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어쨌든 지금은 전쟁이 끝나 가는 시기였으니 말이다. 암살 부대의 필요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앞으로는 점차 줄어드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적어도 7대가 즉위할 무렵까지는.

호카게가 해야 할 일은 거기까지였다. 한때 그 부대의 일각을 떠안았던 카카시인 만큼, 그는 자신이 관여해야 할 곳과 관여하지 말아야 할 곳을 잘 알고 있었다. ‘곰’은 고지식한 인물이지만 융통성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토끼’에 대해서는 적당히 타이르거나 좀 더 훈련을 하는 선에서 잘 갈무리하겠지. 그는 손을 뻗어 젊은 닌자의 어깨를 응원하듯 툭툭 두드렸다. 손 아래에서 아직 어린 신체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고, 다음 순간 호카게는 별다른 언질 없이 돌아섰다. 암부들 사이에서는 복귀 지시나 다름없는 동작으로.

등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요? 앳된 목소리다. 뒤이어 조금 더 낮은 목소리. 그래, 이 다음은 호카게께서 처리하실 거다. 그의 등 뒤를 흘끔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입을 열려는 ‘토끼’를 ‘곰’이 만류했다. 그만. 명령이다.

그리고는 정적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지도록 고요한 숲 속에 홀로 남은 카카시가 뒤를 한 차례 돌아봤다. 캄캄하게 내려앉아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밤하늘, 소금처럼 흩뿌려진 별과 모습을 감춘 초승달.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흰 호카게 예복. 사라질 듯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그림자. 숨죽인 채 사부작거리는 나뭇잎. 그는 크게 그 광경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느린 걸음을 옮겨 정원으로 발을 들였다.

이변은 그 순간에 일어난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거기 숨어 있었군. 카카시는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떴다.

발치에서 순식간에 자라난 나무줄기가, 호카게에게 날아들던 쿠나이 세 개를 한꺼번에 쳐냈다. 허공에서 불꽃이 튀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찔리는 소리였던가, 고함 소리였던가, 아니면 비명 소리였던가 하는 것도 들렸다. 카카시는 여전히 그 소리엔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채 그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내뻗은 손끝에 만개한 수국이 스쳤다. 걸음을 따라 흔들리는 예복 자락 끄트머리에는 노란 달리아, 조금 먼 곳의 울타리에는 새빨간 장미와 만데빌라. 머리 위 나무에는 다홍색 석류꽃, 부채 같은 자귀나무와— 찬찬히 정원을 둘러보던 카카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핏방울 한 줌이 튀어 흰 예복을 물들였다. 이런, 세탁해야겠는데.

이렇게 둘러보니 참 화려한 정원이었다. 부러 시간을 들여 가꾼 건 아니고, 바쁜 업무 사이사이에 간간히 관리를 해준 것 뿐인데도 하나같이 잘 자란 모양새다. 사이사이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조금 신경 쓰이나 집주인이 보름 만에 돌아온 참이었으니 어쩔 수야 없는 일이다. 내일 해 뜰 무렵에 잠깐 정리하고 가면 조금 더 보기 좋을 성 싶었다. 머릿속으로 내일의 일정을 정리하면서 그가 옆으로 한발짝 옮겨 섰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피 묻은 수리검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손을 뻗어 그걸 붙잡으려니 한 발 앞서 뻗어 나온 나무 줄기가 그걸 잡아챘다. 카카시가 고개를 돌렸다. 등도 켜지지 않은 현관 그림자 속에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정원석에 피 묻으면 안 진다니까— 맞지?”

한 발 앞으로 나오면서 남자가 중얼거렸다. 카카시는 눈을 깜빡이다가, 곧 웃음을 터뜨리면서 웃었다. 목이 꺾이고 심장이 꿰뚫려 죽은 자들이 머리 위에 매달린 상황에서는 영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으나 그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습격자 중 한명이 저 자는, 하고 무어라 중얼거리려다가 카카시가 던진 수리검에 절명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진 남자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쪽을 외면하고 돌아선 카카시가 현관의 계단 두 칸을 한 번에 올랐다. 다녀왔어. 나름 고심한 인사였는데도 동거인은 와락 인상을 찌푸린 채 가타부타 말이 없다. 카카시는 그의 표정을 잠시 살피다가, 들어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변함없이 형형한 눈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뭔가 변명이라도 늘어놓자니,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양심으로도 찔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지난 보름 간에 대해 회상하다가 결국 남자의 이름만 한 번 불렀다. 오비토.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또한 예상한 일이었다.

보름 전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설거지조차 하지 않은 채 집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고(그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두 시간 뒤에 식신을 보내 자신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창문을 열거나 정원으로 나오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이 또한 그의 의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연락을 끊었고, 보름 만에 집에 돌아와서 한다는 게 집 지키는 번견 취급이었다. 화가 날 만도 했다. 카카시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즈음 되니 오비토의 얼굴이 한층 더 찡그려지고 있는 참이라, 카카시는 더 뻗대지 않고 사과부터 했다.

“그래, 내가 미안.”

“…성격 나쁜 자식.”

카카시는 더 대답하는 대신 멋쩍게 웃었다. 오비토는 그 얼굴 앞에서 깊이 한숨을 한번 쉬고, 손을 휘저어 술식을 움직였다. 수국이며 석류나무, 장미 덩굴 사이로 자라난 나무 줄기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고 있던 습격자들을 대문 밖의 풀밭 위로 차례차례 내버리고, 피가 말라붙은 수리검까지 어두컴컴한 숲 속으로 던져 버리고는 이내 땅 속으로 스며들어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숲은 다시 정적에 잠긴다.

다만 이전과 같은 서늘한 정적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 현관의 전등이 노르스름한 빛을 쏟아냈고, 불길한 초승달마저 모습을 감춘 하늘에는 희끄무레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덕분에 별이 참 잘 보였다. 두 사람의 발치에 매달려 계단 위로 드리운 그림자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곧 빈틈없이 가까이 붙었다. 숲의 나무 사이로 청량한 바람이 불었고, 여름의 나뭇잎이 바람에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카시가 참 좋아하는 소리였다. 그 잔잔한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으니 카카시의 어깨를 짚은 오비토가 그를 살짝 떼어내면서 투덜거렸다.

“집중 좀 해.”

“미안, 아무래도 피곤해서…”

재차 한숨과 함께 오비토가 카카시의 볼을 감쌌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둠 속에선 잘 보이지 않던 흰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연일 철야 끝에 신입 암부와 외부의 습격자들까지 주렁주렁 매단 채 돌아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오비토가 혀를 찼다.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

“보좌관이란 놈은 뭐 한대냐? 상사 밥도 안 사먹이고.”

“날 얼마나 악덕 상사로 만드려는 거야, 오비토…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걸.”

문을 열고 오비토의 등을 떠밀면서 카카시가 덧붙였다. 게다가 오랜만이잖아. 같이 먹자. 오비토는 뭐라 몇 마디를 덧붙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 한 발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열심히 하는 일에 뭐라 할 생각은 없는데 적당히 생각하면서 해. 네에, 네에. 건성으로 듣지 말고. 호카게 관모를 벗는 카카시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놓으면서 오비토가 고개를 저었다. 대강 발을 끼워 넣은 슬리퍼를 가지런히 모아 두고 성큼 마루 위로 올라섰다. 익숙한 손길이 어두운 집안에 불을 밝힌다. 그 상태로 두 걸음 더 나아간 오비토가 돌아섰다. 어색한 얼굴로 목덜미를 긁적이다, 간신히 한 마디를 뱉는다. 어서 와. 신발을 벗어 두던 카카시가 눈을 접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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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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