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루시] 당신이 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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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신경써주다가 갔다. 그는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후 아스타리온의 팔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죽음을 조금 후에 알렸다. 그의 시체를 안쿠닌이라 써져있는 비석의 빈 무덤 옆에 옮긴 후에 그는 그의 죽음을 그의 동료들에게 알렸다. 세상에 아직 남아있는 동료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남지 않은 사람은 아스타리온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스타리온에게 사람들은 너만은 여전해서 좋다고 말했다. 그들은 네 얼굴을 보면 그 시절로 돌아간 거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 시절로? 흙먼지와 함께 취침했던 그 시절 말이야?” 아스타리온도 그들을 따라 웃었다. “아, 그래. 아주 조금 그립긴 하네.” 몇몇 뱀파이어 스폰들도 그의 장례식에 찾아왔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다가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댈리어리아는 말없이 꽃 한 송이를 그의 사진 앞에 바쳤다. 그는 아스타리온에게 자신은 스폰들과 함께 언더다크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죽은 스폰들도 있지만 남은 스폰들끼리는 가족처럼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진짜 가족처럼 말이야.”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만약 우리에게 오고 싶다면 언제든 와도 된다고 말하는 댈리어리아의 말에 아스타리온은 조금 놀라긴 했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댈리어리아는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요새 패트라스와 함께 글자를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스타리온은 코웃음을 치며 그 멍청한 패트라스라면 글자를 배우는 데에 수십 년은 걸릴 거라고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우리에게 시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댈리어리아는 많은 스폰들이 루시안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싶어했다고 말해주었다. 아스타리온은 그 말에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거르 족의 자식들도 그의 장례식에 왔다. 간드리엘의 자식들은 루시안과 당신을 여전히 원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마운 마음도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 아버지는 왜 죽였어?’ 따위의 질문은 다행히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늦은 장례식이 끝난 후 아스타리온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자취를 말해주는 건 세간에 도는 소문뿐이었다. 작은 별은 사람들에게 구원이라고 불리는 일들을 계속했다. 물론 윌처럼 순수 대의나 도덕을 추구해서 한 일은 아니고. 아스타리온은 죽이는 걸 잘하고, 사회에서 나쁜 사람들을 죽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물질적인 이익 겸사겸사 감사 인사를 받는 것도 생각보다 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그후로도 세월이 꽤 흘렀다. 아스타리온은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줄 수 있었다. 그는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고-물론 사소한 것에 짜증을 느낄 때가 더 잦긴 했지만- 때때로는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그가 없는 일상에 녹아들었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그저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을 때때로 흔들고 갈 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없이도 잘 살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자신을 바보같은 눈으로 응시하는 사람을 보았다. 수도 없이 본 사랑에 빠진 표정, 그는 문득 루시안도 자신의 바보같은 표정을 본 적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길 바라.
…그의 그 바람은 아직 이루어주지 못했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을 뚫어질 정도로 바라보고 있는 뜨거운 시선을 무시했다. 아마 그 바람은 영원히 이루어줄 수 없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전히 그의 세상에서 루시안은 유일무이한 특별한 사람이었고, 그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를 신경써주었던 단 한 명의 사람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루시안은 그건 아닐 거라고 말하고는 했지만 아스타리온은 그것만큼은 그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어두운 거리를 걸어갔다. 몇 세기가 흘러 변해버린 거리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을 들게 했다. 아스타리온은 달아오른 인어 주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점의 주인은 몇 번이고 바뀌었고 아스타리온은 발더스에 들를 때마다 주점에서 싸구려 맥주를 마시고는 했다. 주인이 또 바뀌었을까? 그는 망설임없이 주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익숙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아스타리온의 발걸음이 멈췄다. 심장이 울렁거리며 그의 시야마저 뒤집는다. 구름이라도 밟고 있는 것마냥 발을 내딛을 때마다 몸의 균형이 휘청휘청… 아스타리온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에게 접근했다. 주점 주인은 무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루시안?”
일 리가 없지. 가까이에서 본 그 사람은 루시안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사람이었다. 물론 흑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하고 있긴 했지만 생긴 게 이렇게 다른데. 아스타리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아 싸구려 와인을 하나 시켰다. 묽은 적색의 액체가 잔 안에서 찰랑인다. 그는 와인 한 모금을 혀 위로 머금었다. 익숙한 쓴맛이 그의 입을 잠식했다. 루시안은 싸구려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허락도 없이 와인을 가로채서 마신 후 지었던 그 무례한 표정, 그 표정을 짓는 그가 어딘가의 잘 사는 도련님처럼 보여서 아스타리온은 그가 재수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마시다 만 와인을 마저 마시며 그를 유혹했었다. 그래서, 오늘 밤도 서로에게 취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입맛이 꽤 까다로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시다보니까 나름 괜찮더라고.”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건배하듯 잔을 올려보이던 네가 여전히 눈에 선하다. 아스타리온은 와인 한모금을 더 마셨다. 별로 마신 거 같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잔 밑바닥이 보인다. 물가가 비싸진 거 같다는 시덥지 않은 얘기를 하며 아스타리온은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바텐더는 어깨를 으쓱이며 요즈음 물가는 계속 이랬다고 말했다.
“예전만 해도….”
루시안과 아스타리온은 주점에 골드 몇 개를 달랑 던진 후 잔에 싸구려 맥주를 가득 채워서 마신 적도 있었다. “역시 나는 맥주보다는 와인이 더 좋은 거 같아.”라고 그는 마지막 잔을 비우며 말했었다. 아스타리온은 잔을 선반에 내려놓았다.
“이 정도 돈이라면 잔에 가득 채워서 마셨었는데 말이야.”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요?”
바텐더는 퉁명스럽게 그의 말에 대꾸했다. “글쎄.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름 나이 부심을 가지고 있던 바텐더가 반박하기도 전에 아스타리온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발더스게이트의 무덤으로 향했다. 영원히 남아있을 글자 ‘아스타리온 안쿠닌’과 ‘루시안 안쿠닌’. 루시안은 안쿠닌이라는 성을 꽤 마음에 들어했었다. 그는 어쨌든 바알이라는 성보다는 낫지 않나고 물었었고 아스타리온도 그에 동의했었다. 그래. 자르를 제외하면 바알보다 못한 성은 없었다.
“안녕, 자기.”
아스타리온은 무덤의 비석을 손끝으로 훑었다.
“난 잘 지내고 있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덧없다는 생각과 바보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바보같으면 뭐 어때? 그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거야. 무엇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해본 적 없었던 아스타리온에게 선택은 어려웠었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 말고 오로지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 그는 빛보다는 어둠에 익숙했고 안정보다는 불안정에 익숙했었다. 물론 어쩌면 그건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보다는 안정감을 즐기는 법을 더 잘 알고 있고 빛은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 때문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직접 구해줬던 목걸이를 자기도 모르게 만지작거렸다.
“자기는 뭐, 잘 지내고 있어? 이미 죽은 사람에게 이런 질문 던지는 건 이상하긴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래서, 죽음은 생각했던 것만큼 평화로워?”
영생을 축복으로 여긴 적도 단 한 번도 없긴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죽음이 끔찍히도 싫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절이 있기야 하지만 죽음을 긍정적으로 본 건 그 시절뿐, 카사도어에게서 벗어난 후부터 아스타리온은 필사적으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루시안은 달랐다. 그는 타인의 죽음은 물론이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했다. ‘네가 죽는 건 싫어’라고 말함으로서 아스타리온이 그에게도 특별하다는 걸 알려줄 정도로 그는 죽음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죽었을 때 그 죽음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했었다. 그는 위더스에게 평화롭다고 말했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평화라고…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마지막까지 그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자신의 옆에 있을 때는 평화롭지 않냐는 질문은 어떠한 답변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허공을 맴돌고 있다. 한번쯤은 물어볼 걸 그랬다. 아니다. 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씁쓸한 맛을 혀에 머금은 채 아스타리온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죽음은 네가 생각했던 것만큼 평화로워?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아스타리온의 팔 안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죽은 후의 세상 하늘이 이상한 녹색이어도 좋고 아니면 아예 깜깜해도 좋으니 붉은색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는 네 머리카락을 닮은 은색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내게 두려운 거라면 홀로 남은 너야.
아스타리온은 뻑뻑한 두 눈을 깜박였다. “자기, 나는 내 죽음을 사랑할 일은 없을 거야.”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남은 술을 그의 무덤에 부으며 이어말했다. “너의 죽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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