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아스루시] Each Other

8,778.

입술에서부터 나온 하얀 입김이 뿌옇게 모였다가 흩어졌다. 어제보다 더 추운 날이었다. 매년 동사자와 아사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아스타리온은 제 옆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루시안을 힐끔 보았다. 기온과 그의 어깨 넓이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 사이에는 허위변수가 하나 끼어있었다. 그래, 바로 저 하얀 털뭉치 하나, 아스타리온은 그의 품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고양이에게 시선을 던졌다. 몇 달 정도 빗질 한번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고양이는 아스타리온과 눈이 마주치자 가르릉 울었다. 아스타리온은 팔짱을 꼈다.

“그래서 그 고양이는?”

“내게 와서 안겼어.”

“아니지. 네가 들어올린 거지.”

그렇지만 내 다리에 먼저 몸을 비벼왔는걸. 루시안은 제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품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온기가 금방이라도 밑으로 녹아내려버릴 것만 같다. 순간 고양이가 정말로 밑으로 흘러내린 걸로 착각한 루시안은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고양이를 다시 한번 살폈다. 그의 착각은 꼬리 때문이었다.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꼬리는 몸이랑 색깔이 비슷해서 착각하기 쉬웠다.

“그래서 키우려고?”

아스타리온의 질문에 루시안은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는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이 고양이를 이대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길러본 적은 없다. 그에게는 고양이와의 인연이라고 해봤자 게일의 고양이-이렇게 말하면 분명 그는 단호한 어조로 고양이가 아니라 트레심이라고 정정하겠지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발더스에서 고양이 한두 마리를 더 만나보기야 했지만 그건 스쳐지나가는 가벼운 만남이었다. 책임감 따위는 한 톨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만남. 고민하던 루시안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은 아울베어나 스크래치를 키우는 것과 비슷한 거냐고 물었다. “아울베어를 기르는 것보다는 쉽겠지. 그녀석은 덩치가 크고 먹는 양도 어마어마하잖아.” 고양이는 가르릉거리며 루시안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녀석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스타리온은 혀를 차며 고양이의 머리를 검지로 긁었다, 이녀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데.

“기르자.”

“왜?”

“아울베어 기르는 것보다 쉽다며. 그리고 널 닮았고.”

“자기, 설마 내 머리카락을 이 털뭉치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조금은 비슷하지? 그는 고양이의 털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아니.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단칼에 그의 말을 부정했다. 왜, 아주 조금은 비슷하잖아. 루시안의 말에 아스타리온은 사나운 고양이처럼 행동했다. 자기는 눈이 없어? 내 머리카락을 고양이 털이랑 비교하다니, 으, 자존심 상해라.

낯선 털짐승과의 동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고양이한테 먹이를 주겠다고 생선을 사온 루시안에게 아스타리온은 펫 고양이에게는 사료로도 충분하다고 조언해주었다. 뭐, 고양이니까 생선을 좋아하긴 하겠지만. 지면에서 펄떡펄떡 뛰는 생선을 쳐다보던 고양이는 다듬어지지 않은 발톱으로 생선을 막 뒤져내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바닥에 인상을 찌푸리며 아스타리온은 “자기가 데려온 거니까 자기가 책임지고 청소할 거지?”라고 투덜거렸으나 결국에는 자기가 참지 못하고 바닥 청소를 했다. 청소를 끝낸 후 그는 뾰족한 목소리로 “다음부터는 사료로 사와.”라는 말을 덧붙였다. 루시안은 아직 씻기지 못한 고양이를 끌어안으며 순수한 살해였다고 말했다. 사적인 감정 하나 없던 순수한 살해, 그는 털뭉치의 기교가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분명 훌륭한 고양이 암살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스타리온의 눈썹이 꿈틀였다. “뭐라는 거야. 그래서 다음에도 사료 말고 그냥 생선 사오겠다고?”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루시안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바닥 또 더러워지기 전에 씻기기나 해.” “응.” 곰이 꿀단지라도 안고 있는 것처럼 고양이를 끌어안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우스워서 입꼬리가 움찔거린다. 제 더러워진 털 위로 떨어지는 물에 고양이는 짜증을 내며 야옹야옹 울어댔다. “가만히 있어.” 아스타리온은 소파에 앉아 그가 고양이를 달래는 소리를 듣는다. “난 미움받기 싫거든.” 참나, 아스타리온은 피식 웃었다. 그의 입술 위로 그려진 초승달은 진했다.

깔끔 떠는 아스타리온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루시안은 그후로는 고양이를 위해 생선이 아니라 사료를 사왔다. 미움받기 싫었던 걸까. 사실 그가 고양이를 위해 생선을 사온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만, 바닥 청소가 귀찮긴 하겠지만 그만큼 투덜거리면 되는 일이니까, 자신의 말을 듣고 생선 대신 사료를 사오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즐거웠다. 얌전히 사료를 먹고 있는 고양이의 옆에서 그는 책을 읽었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있었던 아스타리온은 은근슬쩍 그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어깨 위로 느껴지는 친근감의 무게에 루시안은 가볍게 웃었다. 붙어앉은 두 사람은 평소보다 높은 온도를 유지했다. 달콤한 말을 오가게 할까, 아니면 손을 맞잡으며 이 온기를 느낄까, 두 사람 중에 먼저 움직인 사람은 루시안이었다. 그는 아스타리온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더니 손장난을 쳤다.

“야옹.”

“…눈치없는 고양이.”

…고양이 털이 제 손깍지에 끼기 전까지만. 루시안은 입술을 삐죽이며 둘만의 사이에 끼어든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는 더 가르릉거리며 그의 팔에 제 털을 비벼댔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앙큼한 걸지도 모르지.”

아스타리온은 낄낄 웃으며 혀를 찼다. 어느새 고양이는 두 사람의 마주잡은 손 위로 제 몸뚱아리를 올리고 고로롱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만지면 제멋대로 만졌다고 승질내면서, 아주 상전이네. 제 욕을 하는 것도 모르고 고양이는 골골거리며 눈을 감았다. 자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던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손가락을 한번이라도 까닥이면 이 상전 고양이가 성질을 부릴 거라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눈동자만 또륵또륵 굴러가는 틈 사이로 달콤한 시간이 흘러갔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숨소리를 듣는 걸 좋아했다. 깜박깜박,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그는 마음껏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겼다.

아. 결국 고양이의 성질을 돋우고 말았다. 날카로워진 고양이의 울음 소리 위로 두 사람의 웃음 소리가 깔렸다.

Each Other

루시안은 가끔 집에 예상 시간보다 더 늦게 들어올 때가 있었다. 고의는 당연히 아니고, 아스타리온과 그가 아무리 정체를 숨기고 살아도 기어코 그를 찾아내는 사람은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그에게 적의를 품었든 선의를 품었든 대부분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반듯하게 다렸다. 그가 늦는다고 해도 아스타리온은 그를 기다릴 수 있었다. 이유? 어차피 그는 자신에게 꼭 돌아올 것이고 자신은 기다리는 데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으니까. 옷걸이에 옷을 깔끔하게 걸어놓은 후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는 거 같다.

“털뭉치, 밥 시간이야.”

아스타리온은 고양이 사료를 그릇에 덜며 털뭉치를 불렀다. 흠, 생각해보니 하루이틀 볼 것도 아닌데 이제 슬슬 이름을 정해주는 게 나으려나? 밥그릇을 든 채 아스타리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에는 털뭉치나 고양이라고 불러도 부르기만 하면 바로 오던 고양이가 오늘은 몇 번을 불러도 오지 않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고양이가 있을 법한 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그 털뭉치가 발견된 곳은 현관문 앞이었다. 입 근처의 털에 하얀 거품이 묻어있는 걸 보아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모양이었다. 아스타리온은 멍하니 고양이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떠날 거란 걸 알고 있긴 했지만 그는 이별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루시안을 만난 이후로는 더더욱. 똑같은 상처를 받으면 무뎌진다고 들었는데 자신은 언제쯤 이별에 덤덤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밥그릇을 옆에다 내려놓은 후 고양이의 시체를 무표정으로 안아들었다. 품속에 안긴 털뭉치는 자신의 피부마냥 차가웠다. 마당을 돌아다니던 그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있는 옆자리의 흙을 삽으로 퍼내기 시작했다. 땅을 파내며 그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루시안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는 자신이 바알의 아이기 때문에 보통 드로우 하프 엘프보다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자부하고는 했다. 아스타리온의 머릿속에서 그는 늙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발이 된 그의 머리카락이 주름살 하나 없는 아스타리온의 손가락 사이로 엉킨다.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그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 그의 부름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밀려드는 먹먹함에 아스타리온은 삽을 옆으로 치웠다. 털뭉치를 위한 땅굴은 깊었다. 그는 깊은 굴을 들여다보며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털뭉치의 마지막 안식처는 그의 무덤과 닮아있었다. 창백한 손이 털뭉치를 땅에 묻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는 털뭉치 위로 흙을 다시 덮었다.

Farewell, 작별 인사를 마무리하고 아스타리온은 다시 시계를 보았다. 오늘따라 그가 늦는다.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진 망상에 그는 습기 하나 없는 입술을 씹었다. 그의 망상 속에서 루시안은 피로 범벅이었다. 바닥 위로 뚝뚝 피웅덩이를 만들며 그는 아스타리온에게 걸어왔다. 끔찍한 망상이다.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장면을 털어냈다. 설사 정말로 싸움이 났다고 해도 루시안이 질 리가 없잖아. 그는 오린과 일대일로 싸우던 루시안을 기억한다. 동료들의 다같이 싸우자는 말에도 고집스럽게 일대일 데쓰매치 링에 올랐던 루시안은 피칠갑이 되어 자랑스럽게 승리를 외쳤었다. 뭐, 승리를 만끽할 틈도 없이 바로 죽어버리긴 했지만.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타살을 선택했을 때 아스타리온은 신체 절반이 뚝 떨어져버린 기분을 느꼈었다. 서있는데도 서있지 않은 기분, 발은 제멋대로 감각을 잃고 어딘가의 위에 우뚝 서있었다. 생기 하나 없는 그의 뺨에 그는 그저 멍했던 거 같기도 하다.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가슴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언젠가 그를 잃게 된다면 나는 평생 그 기분을 지고 살아야 하는 걸까. 물론, 그의 손을 맞잡았을 때부터 아스타리온은 그 ‘언젠가’를 가정하고 있긴 했었다. 그는 스스로의 미래에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100살도 되지 않은 젊은 엘프도 아니고, 그는 사랑에 눈이 멀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어딘가의 젊은 연인들처럼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거라고 믿기엔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순간은 어차피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는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불행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해왔던 것처럼. 하지만 다른 불행들과는 다르게 몇 번을 대비해봐도 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의 시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스타리온?”

그는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든, 그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버텨낼 수 있었다. 그래, 그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아스타리온은 루시안을 꽈악 끌어안았다. 피냄새가 진하다. 갑작스러운 허그에 당황했는지 그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곧 부자연스럽게 아스타리온을 마주 안아주었다. 부자연스러움은 곧 자연스러움이 된다. 루시안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털뭉치가 죽었어.”

“아.”

고양이의 죽음 소식을 전해들은 루시안의 반응은 단조로웠다. 그는 슬픔에 잠기는 대신 아스타리온의 등을 쓰다듬으며 괜찮냐고 물었다. “내가 그 약삭빠른 털뭉치 때문에 안 괜찮을 리가 있겠어.” 톡 쏘는 목소리의 마지막은 울음으로 어그러졌다. 역시 보기보다 약하다니까. 그의 뭉개진 발음을 모르는 척해주며 루시안은 그의 슬픔을 달랠 방법을 생각했다. 평소처럼 와인을 마실까, 아니면 그의 슬픔이 가실 때까지 그를 계속 안아줄까. 그가 알면 날뛰겠지만, 루시안은 여전히 그를 약한 존재로 생각했다. 약한 만큼 질기긴 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존재.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끌어안긴 채로 소파에 앉았다. 키고 덩치고 나이고 아스타리온이 그를 훨씬 앞서긴 했지만 루시안은 자신의 옆구리로 파고드는 그가 불편하지 않았다.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루시안은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그는 불편한 게 아니라 좋았다.

“자기는 슬프지 않아?”

“죽음은 생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거니까.”

바알의 지배력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는 결국 제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카사도어의 심장에 단검을 꽂아넣었지만 그의 시선과 버릇만큼은 버리지 못한 아스타리온처럼. 몇 초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아스타리온은 가벼운 목소리로-연기겠지만- 그에게 내 죽음도 네겐 아름답냐고 물었다. “아, 질문을 정정해야겠네. 내 시체가 여전히 네게 아름다울까, 자기야?” 루시안은 웃었다. 아스타리온은 언데드이면서도 가끔씩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는 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게 맞춰져야겠지. 그는 망설임없이 네 시체는 여전히 내게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의 손이 아스타리온의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를 쓰다듬는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별개로 네가 죽는 건 싫어.” 아, 루시안은 아스타리온만이 아니라 자신도 그가 언데드가 아닌 것처럼 굴 때가 있다는 걸 인지했다… 그를 죽었다고 말할 수 있기는 한가? ‘살아있는’은 대체 무엇인가. 아스타리온의 적안과 루시안의 녹안이 서로를 품는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아스타리온은 그가 방금도 자신의 시체를 머릿속에 그렸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시체를 상상해보았다. 200년 전부터 죽어있었기 때문일까, 그에게는 제 애인의 시체를 상상하는 것보다 자신의 시체를 상상하는 게 훨씬 쉬웠다. 아마 말수가 없어진 걸 제외하면 똑같겠지, 그는 속으로 자조했다. 붉은색에 녹색이 떨어지고 녹색에 붉은색이 섞인다. 덜 익은 사과가 두 사람 사이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잇자국은 어느 색깔 위에 났을까? 두 사람 중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왜냐면 너는 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존재거든.”

“…로맨틱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빵점 대답이야.”

“그래? 정말로 로맨틱하지 않았어?”

“미쳤어, 자기? 그런 말을 누가 로맨틱하다고 생각해?”

받아주는 사람이 나여서 다행인 줄 알아. 한숨을 쉬는 아스타리온에 루시안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는 아스타리온의 손가락이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그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채 그의 손길을 받다가 너와 나의 죽음에는 아름다움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죽음은 언제라도 자신을 맞이하러 온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죽음은 당연하게도 그의 곁으로 찾아오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고는 했던 털뭉치를 떠올렸다, 어쨌든 그 시절의 루시안에게는 자신의 죽음에도 아름다움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름답게 죽을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바알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자신의 아들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루시안은 더 이상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붉은 하늘 대신 그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네가 바란다면 나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칠 거라고, 그는 그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내 피부 밑으로 흐르고 있는 저주받은 피를 이용해서라도- 살점을, 피를, 끔찍하고 두려운 아버지의 창조물을- 당신의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루시안은 그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편안한 정적이 흐른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었던 아스타리온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오늘은 또 누구였냐고 물었다. 루시안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곁눈질로 아스타리온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았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존재, 삶과 죽음보다도 아름다워서 자신의 세계를 온통 뒤흔들어버리는 존재, 그는 자신의 세상을 위해 정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바알의 살인자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몇 백년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을 거 같다고 말했다. 아스타리온, 네게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없어질 테지만 말이야. 스폰이 아닌 피해자들은 몇 백년이 흐르면 생을 떠날 테고, 세바스찬과 다르게 스폰들 중에서는 여전히 아스타리온을 원망하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루시안의 손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자헤이라는 싫어하겠지만, 아스타리온이 이걸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루시안은 그… 아니, 그를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서 그의 피해자들을 죽일 것이다. 동정심? 그런 감정을 그들에게 느낄 리가. 아스타리온은 그들을 죽이는 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냐고 물었다. “귀가 시간을 어길 정도로?” “그들을 다 죽이고 싶었거든.” 네게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그는 그들의 모든 것을 없앴다. 일부러 놓아준 사냥감이 근거지에 도착하자마자 제 뒤에 나타난 자신을 보고 지었던 표정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루시안의 입꼬리가 작게 꿈틀였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만큼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었다.

“자기, 악당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아스타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와 똑같이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매력적이라니까.” 그의 속삭임은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달콤했다. 털뭉치의 행방에 대해 물으려던 루시안은 행방 대신 와인이라도 마시겠냐고 물었다. 안 보이는 걸 보면 이미 묻었겠지. 지금 또 그 이야기를 꺼내봤자 아스타리온의 기분만 상할 테니까. 다행히도 옳은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루시안의 제안에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의 허리를 더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다가.”

제 허리를 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루시안은 그의 탄탄한 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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