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아스루시] 가족

9,791.

카사도어는 아스타리온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수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독기를 품고 있는 사냥꾼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카사도어는 그에게 희생양을 자신의 앞으로 데려올 것을 명했다. 홍안 위로 숨길 새도 없이 드러나는 적대감과 거부감, 카사도어는 그를 보는 게 즐거웠다. “네 몸을 써서라도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점점 꺾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는 게 즐거웠던 거지만. 카사도어의 말에 아스타리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붉어진 그의 얼굴은 꽤 볼만했다. 결국 카사도어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아스타리온의 얼굴엔 더 이상 붉은기가 없었다. 카사도어는 그의 창백한 피부를 쓰다듬으며 그의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웃으며 앞으로도 이 일을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대답은?” 대답이 없는 아스타리온의 어깨를 세게 잡으며 카사도어는 대답을 강요했다. 아스타리온은 그에게 어깨를 잡힌 채 허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핏기 하나 없이 짓눌린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긍정이었다. 카사도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그의 턱을 잡아 내쳤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그에게 카사도어는 앞으로는 물어보는 말엔 대답을 빨리빨리 하라고 윽박질렀다. 이번의 대답은 빨랐다. 입술은 웃고 있으면서도 눈은 웃고 있지 않은 그를 보며 카사도어는 오랜만의 재미를 느꼈다. 그는 그에게 가라고 손짓하지 않았다. 가라는 제스처 대신 점점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카사도어를 의식하며 아스타리온은 주먹을 쥐었다. 떨고 싶지 않다. 적어도 그의 앞에서만큼은 떨고 싶지 않다. 떨고 싶지…

카사도어가 아스타리온을 아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스폰들이 알고 있었다. 그가 장남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스폰들 중에 제일 아름다워서? 카사도어가 제일 좋아하는 비명 소리가 멈췄을 때, 스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아스타리온을 기다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스폰들이 묵는 방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옷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말끔했지만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몸의 상처는 엉망진창이었다. 눈치를 살피는 스폰들에게 아스타리온은 까칠한 목소리로 구경이라도 났냐고 물었다.

“괜찮아?”

“이 꼴이 괜찮아보여? 아~ 그래, 네 눈에는 괜찮아보이나 보네.”

아스타리온의 대꾸에 댈리어리아는 그에게 뻗었던 손을 내렸다. 그는 잠시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가도 다시 고개를 들어 아스타리온에게 상처를 치료해주겠다고 말했다. 다시 제게로 뻗어진 손에 아스타리온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고맙지만 나는 내 몸에 누군가가 손 대는 걸 싫어하거든.” 질색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상처가 한가득이었다. 그런 그가 걱정되어서 다시 한번 손을 뻗으려는 댈리어리아의 행동을 막아선 건 페트라스였다. 그는 댈리어리아에게 걱정을 해줘도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놈한테 왜 친절하게 대해주냐고 일갈했다. 그의 적대감에 아스타리온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아스타리온이 자신을 낮잡아보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그는 목소리를 더 높이며 다같이 힘든데 더 힘든 척을 하는 쪽이 등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아스타리온에게 멱살을 잡혔다. 멱살을 잡혀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주먹에 안면을 가격당했다. 으악!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댈리어리아가 아스타리온의 다른 쪽 팔을 붙잡았다. “그만해!” “하, 그만하라고? 내가 왜?” 아스타리온은 자신의 손에 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페트라스를 노려보며 웃음 소리를 뱉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

가족. 댈리어리아의 입에서 나온 끔찍한 단어에 아스타리온은 페트라스의 멱살을 놓쳤다. 가족? 가족이라고?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고 했던 카사도어의 목소리가 그의 머리에서 울린다. “그래, 우리는 가족이지.”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리고 있는 등신을 내려다보며 아스타리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좀 단란하게 좀 살자고, 응? 멍청한 소리를 하면 형으로서 네 입을 막을 수밖에 없으니까.” 반박을 하려는 페트라스의 앞을 댈리어리아가 막아섰다. “이제 그만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댈리어리아의 얼굴에 페트라스는 성을 내려다가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 “댈리어리아 때문에 산 줄 알아.” 뭐어? 아스타리온은 과장스럽게 놀란 척을 하며 그를 조롱했다. “댈리어리아 때문에 산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겠지.” 다행히 그 이상의 싸움은 없었다. 댈리어리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페트라스를 자신의 침대에 앉아 응시하고 있던 아스타리온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카사도어는 이 모든 소란을 들었다. 그는 스폰들 무리에도 섞이지 못하는 아스타리온에 낄낄 웃으며 잔을 비웠다. 진한 피비린내가 그의 입술에 묻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다, 사냥꾼이 사냥감의 무리에 낄 수는 없는 법이니. 그후로도 아스타리온은 같은 스폰이면서도 스폰들의 무리에 끼지 못했다. 무리에 끼지 못하는 아스타리온을 보며 스폰들은 그를 입만 살았다고 여겼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면서도 차츰 사냥감들이 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아스타리온을 구경하며 카사도어는 만족감을 느꼈다. “아스타리온.” 이름만 불려도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는 그의 턱을 잡고 카사도어는 말했다, 우리는 가족이라고.


“가족?”

애를 입양한다거나 뭐 그런 계획은 없어? 윌의 질문에 아스타리온과 루시안은 서로를 쳐다봤다. 윌 레이븐가드,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이자 레이븐가드 대공의 장자이자 후계자이기 때문일까, 그는 벌써부터 밀려 들어오는 결혼 제안에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도 슬슬 손자를 원하는 거 같다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결혼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라고 말하는 윌에게 섀도우하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긴 해. 결혼은 복잡하니까.” 그는 여전히 긴 만남보다는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너네는? 진짜 생각 없어?”

“사귄 지 얼마 안 됐기도 하고, 자식 생각은 아직 해본 적도 없을 뿐더러 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잊은 거 같은데 우리는 둘 다 남자니까.”

사귄 지 얼마 안 된 건 아니지 않냐는 섀도우하트의 포인트에 아스타리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200년 넘게 살아봐. 몇 년 정도는 아주 잠깐이지.” 그렇긴 하겠네, 웃음 소리가 섞인 담소가 두런두런 빛이 들지 않는 방에 퍼진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루시안이 드디어 입술을 뗐다. 그는 자신의 아이라면 바알의 피를 물려받을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물론 자헤이라는 바알스폰이라고 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가족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아이라니? 너네 둘 다 남자잖아?”

“바알스폰은 번식의 도구로도 쓰이거든. 난 아마 임신이 가능할 거야. 아마도.”

루시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 사이에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섀도우하트와 윌의 눈동자도 커져있긴 했지만 셋 중 가장 놀란 사람은 아스타리온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루시안을 쳐다보다가 설마 지금 임신이 가능한데 피임도 안 하고 계속 한 거냐고 물었다. 루시안은 그 말에 눈도 깜박이지 않고 언데드는 생식 능력이 없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섀도우하트는 그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200년 전에 죽었다면 이런 소리를 듣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스타리온은 짜증을 내며 잔에 담긴 피를 마셨다. “물론 언데드랑 번식할 방법도 아버지께선 알고 계시겠지.” “뭐?!” 그대로 뱉어버린 피가 루시안의 얼굴에 묻었다. 으, 루시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윌에게 건네받은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번식을 하려면 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잖아. 그리고 나도 방법을 찾지 않는 한 임신에서는 자유로울 테고.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피임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뜻이야. 피임할 필요가 없어서 피임을 안 한거지.” 이 녀석은 사람을 식겁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 아스타리온은 루시안의 덧붙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기, 이런 중요한 얘기는 좀 미리 해줄래? 날 없는 피까지 말려서 죽일 생각이야?” “자식 생각은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어서.”

“네가 원한다면 방법을 찾아볼게.”

가족. 아스타리온은 그 단어에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 그는 루시안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입술이 짜증을 내며 이런 사적인 얘기는 단둘이서 하자고 툴툴거렸다. “그래, 그래, 그런 얘기는 둘이서 해야지.” 섀도우하트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구부렸다 피며 눈을 반짝였다. 이야기는 다시 윌이 받은 구혼 편지로 이어졌다. 그는 갓 성인이 된 여자의 아버지에게서도 결혼 제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무리 정치적인 결합이라고 해도 나이 차이가 너무 나잖아.” “정치적 결합이라는 게 그런 거지. 역시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라니까.” “하지만 난 싫어.” “네 위치에서 로맨틱한 만남을 추구했다가는 평생 홀아비로 살 걸. 뭐, 그것도 꽤 볼 만하겠지만, 특히 네 아버지의 표정이.” 그의 고집을 비꼬면서도 아스타리온은 그가 꾸준히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평생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살겠지. 아스타리온은 은근히 그에게 그가 원하는 가족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윌은 자신이 원하는 가족상을 뚜렷하게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저 평범하게 행복한 가정을 원한다고 말했다. 존경할 만한 아버지, 존경할 만한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뜻을 이어받는 자식, 그는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자랑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언제든 기댈 수 있고 친근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려면 노력해야겠지만.” 웃음과 함께 끝맺은 말에 아스타리온은 착잡해졌다. 아마 윌의 가족상은 그의 가족에게서 나온 걸 것이다. 아스타리온에게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그의 가족상은 그가 가족에게 받았던 것,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 더 원했던 것들이 섞여서 나온 결과물일 테다. 아스타리온은 200년도 넘게 지난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가족의 일원으로 영광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거 같긴 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떤 아버지였는지, 어머니는 자신에게 어떤 어머니였는지, 그리고 자신은 그들에게 어떤 자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왔구나! 빌어먹을, 머릿속에서 울리는 카사도어의 외침에 아스타리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야기의 턴은 섀도우하트에게 넘어갔다. 그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가족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냥 지금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처럼 서로 아침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 내가 원하는 건 그정도야.” 멋쩍어졌는지 섀도우하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 수많은 동물들과 함께하니까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윌은 그에게 그 평범한 삶은 네가 당연히 누려야할 것이었고 네가 네 힘으로 얻어낸 것이라고 대꾸했다.

“너네는?”

아스타리온의 말문이 막혔다. 가족? 그는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걸 남에게서 어떻게 빼앗았는지도. 세바스찬은 아스타리온의 입에서 세월의 흐름을 들었을 때 무너져 내렸었다. 입술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스타리온을 지켜보던 루시안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은 가족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말했다. “내게 가족은 경쟁 상대였으니까. 서로 죽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아스타리온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서로에게 돌아갈 곳이 되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해.” 서로에게 돌아갈 곳, 카사도어는 아스타리온에게 너는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어쩌면 그의 말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루시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루시안이 없었다면 아스타리온은 결국 그에게 돌아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온기 어린 시선이 두 사람 사이로 달콤하게 맴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섀도우하트는 여전히 사이가 좋아보여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둘 다 성격이 나빠서 그런가?” “저기요?” 아스타리온의 반발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기쁘다는 뜻이야. 진심으로 기뻐.”

“우리에겐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우리에겐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그렇긴 했지, 모두가 폭탄 덩어리였으니까, 물론 문자 그대로 진짜 폭탄이었던 사람도 있긴 했다만. 하지만 모두 폭탄이었기 때문에 서로 안심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뭐, 덕분에 적들이 넘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신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적으로 돌려보고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참 많은 일을 겪었구나 싶다. 아스타리온은 책을 읽고 있는 루시안을 곁눈질했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와 함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라나? 아니면 그냥 이대로 넘기기를 바라나? 둘 중에 그가 원하는 것이 뭐든 ‘가족’이라는 단어는 그의 머리를 떠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아스타리온을 눈치챘는지 루시안은 미소와 함께 그를 돌아보았다.

“왜?”

“표지가 아주 환상적인데 그게 대체 무슨 책인지 궁금해서.”

“뱀파이어 스폰들로 한 실험에 대해 적혀있는 책이야. 희생에 비해 얻어낸 건 별로 없는 거 같지만.”

아아, 그래, 아스타리온은 눈동자를 굴렸다. 책으로 다시 시선을 던지려고 했던 루시안은 책 대신 아스타리온에게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기울였다. 결국 아스타리온은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아니, 사실 그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찬성이긴 해.” “뭐가?” “가족 더 늘리는 거.” 예상치도 못한 그의 대꾸에 아스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진심이냐고 물었다. “지금 늘리자는 건 아니고, 나중에라도 만들어주고 싶어서.” “만들어주고 싶다고?” “그래. 네게 만들어주고 싶어.” 그리고 우리의 자식은 널 닮아서 너와 함께 영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라고 그가 덧붙였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차려버렸다. 그는 차라리 이대로 모르는 척을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의 비겁함을 눈치챘는지 루시안은 먼저 선수를 쳐 형태를 끌어올렸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네가 있을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

“…자기, 재수없게 벌써부터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 난 좀 더 지금을 즐기고 싶은데.”

루시안과 나를 닮은 아이라, 아스타리온은 자기도 모르게 검은색 머리에 초록색 눈을 가진 아이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스타리온과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 아이는, 루시안과 똑닮아있는 그 아이는, 아스타리온에게 제 작은 손을 내밀며 안아달라고 말했다. 자신은 그를 안아줄 수 있을까? 아스타리온은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는 자신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두려웠다. 그는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이가 생긴다면, 아스타리온은 그 아이가 자신이 아니라 루시안을 닮길 원했다. 루시안은 그의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 그는 아이가 그처럼 자신의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아스타리온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으며 루시안은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 그는 부성이든 모성이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본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같이 지내면서 생기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씩 웃었다. “내가 널 애정하게 된 것처럼 말이야.”

“아스타리온, 천천히 생각해도 돼.”

우리에게 아직 남은 시간은 많을 거야, 아마도. 루시안의 말에 아스타리온은 코끝을 찡그리며 ‘아마도’라는 말을 꼭 붙였어야 하냐고 물었다. 루시안은 그에 장난스러운 어조로 “넌 뭐든지 의심한다고 하지 않았었어?”라고 말했다. 두 이마가 마주친다. 아스타리온은 그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놀리듯이 웃고 있는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계속 보고 싶다. “맞아, 그러니 의심은 자기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 “와, 욕심쟁이.” “내가 욕심 많은 걸 이제 알았어?” 시선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백발인 아이랑 손을 잡고… 시내를 도는 거지.”

“진짜 뜬금없네.”

“어차피 상상이니까.”

아스타리온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표정엔 싫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랑 주로 뭐하지? 루시안은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던 오린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오린과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싸웠던 것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런 건 아니겠지. 그는 자신의 다른 형제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시내를 돌다가 예쁜 게 있으면 사주고, 흠, 딸이라면 팔찌같은 게 좋겠네.”

말이 없어진 루시안 대신 아스타리온이 그의 말을 이었다. 그는 처음 상상을 풀어낼 때는 조심스러웠지만 서로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점점 가볍게 말을 이었다. 루시안은 그의 말을 들으며 팔찌를 받고 좋아하고 있는 백발의 어린 소녀를 상상했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고맙습니다, 아빠.”라고 말했다. 아스타리온은 그에 웃으며 아이의 손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루시안과 아스타리온의 팔을 한쪽씩 잡은 아이는 신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폴짝폴짝 뛰었다. 폴짝폴짝 뛰는 아이까지 말했을 때 아스타리온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아이는 우아할 거라고 말했다. “아무리 신나도 폴짝폴짝 뛰지는 않을 거야.” “그래?” “그럼. 어디서든 품위를 잃지 말아야지. 너랑 내가 부모인데.” “그래도 폴짝폴짝 뛰면?” 자기, 은근 집요하다? 아스타리온은 킥킥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뛰는 거지, 뭐.” 아스타리온은 폴짝폴짝 뛰던 흑발의 소녀가 맛있는 냄새를 맡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걸 상상했다. 어디에서 나는 냄새인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아스타리온은 냄새의 설명을 듣고 위치를 정확히 짚어주었다. 그 음식점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스타리온과 루시안도 단둘이 먹은 적 있던 레스토랑이었다. 아이는 음식의 맛은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루시안은 아이와 시선을 맞추며 “궁금하면 먹으러 가볼까?”라고 말했다. 아이는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끼리 식사를 한다. 아스타리온은 미리 준비해둔 피를 마시며 아이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구경했다. “잠깐만,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피를 마실 수 있나?” 루시안의 질문에 아스타리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자신의 아이는 피를 마실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언젠가 죽을 텐데.”

“영생이 축복은 아니야, 자기.”

쓴 미소를 짓는 아스타리온에 루시안은 영생이라고 다 축복이 아닌 건 알고 있다고 대꾸했다. “하지만 난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잖아. 이런 영생은 축복 아닐까? 음, 넌 어때? 넌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냐고? 뻔한 대답을 요구하다니 그가 짓궂다고 생각하며 아스타리온은 그를 끌어안았다. “당연하지, 자기야.” 품안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스타리온은 그를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잠자코 그에게 안겨있던 루시안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을 토닥이며 어쨌든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낮게 웃었다. “진짜 뜬금없네….” “아까도 들었던 말인 거 같은데?” “맞아.”

“어쨌든 괜찮을 거야. 우리에겐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가족이 더 생기든, 가족이 더 생기지 않든간에. 아스타리온은 가족을 다 까먹었다. 루시안은 가족을 잘 모른다. 하지만 그 불안감 속에서도 어쩐지 그의 말처럼 결국에는 다 잘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시도도 해보지 못하는 자신과 다르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그가 아스타리온의 눈에는 반짝반짝 빛나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반짝반짝, 그는 항상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칭송해주지만 아스타리온의 생각은 달랐다. 뭐, 끝까지 말 안 해줄 거지만. 그는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 이미 말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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