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수수경단 (2019.07.16)

물(水)짐승(獸)이 경이를 만나 단이가 될때까지

 아주 먼 옛적, 여즉 인간과 짐승이 소통 가능하던 시절, 한 물짐승이 살았단다. 물짐승은 물 속에 살며, 투명한 수정의 몸을 가지고 세상 모든 물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부 알 수 있었지.

 짐승은 항상 외로움을 탔지만, 누구 하나 오래토록 물에 몸을 담그고 짐승과 어울려주지 않았어. 그 때 인간들은 어디서든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물 속 만큼은 예외였거든! 그 사실을 알던 물짐승은 매일같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지. 자신이 아끼는 인간더러 목숨을 걸고 만나라 달라 얘기할 성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아해가 멋모르고 냇가에서 뛰놀다 물에 빠지고 말았지. 하필이면 마을 근처의 냇가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강한 곳이라 아무로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냇가에서 발만 동동 굴렀단다. 아해의 양친은 거의 실신 직전이었어. 아해의 머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멈춘 그 때, 기다란 반달모양의 수정에 얹혀 아해가 물 밖으로 나왔네. 그래, 물짐승이 도와준거지.

 아해를 조심스레 눈물 흘리는 양친에게 안겨준 뒤 반달모양의 수정은 다시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단다. 물짐승은 아해가 눈을 떠 부모에게 안겨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를 기껍게 들었겠지. 그런 성정이니까 말이다. 

 인사를 받으러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만도 하건만, 물짐승은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단다. 아주 먼 옛날, 자신이 처음으로 구해준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 인간은 인사는 커녕 그 위압에 눌려 도망쳤거든. 물짐승은 이에 생각했지, 자신의 모습을 인간은 두려워함에 틀림없다고. 그 이후 물짐승은 인간을 구해주기만 할 뿐,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단다. 가끔 자신의 가장 작은 발톱에조차 겁을 먹고 도망가는 인간들을 보며, 자신의 선택이 잘 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껄껄, 답답하지 않느냐? 이토록 착한 짐승인데 어찌하여 저렇게 욕심이 없는지. 주기만 하고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테지. 그러나 그 물짐승에게도 선물이 찾아왔지. 아까 물짐승이 구해주었던 그 아해를 기억하느냐?

 오냐, 그 아이가 말이다, 자신을 구해준 수정 발톱의 주인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매일같이 물가로 나가서 발톱이 모습을 그러내기만을 기다렸단다. 물짐승은 당연히 아해가 오며 내는 발소리도, 소리높여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들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 아해가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도망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래, 얼마나 답답한 물짐승이니. 아해가 애타게 찾아도, 찾아도, 꼬박 일곱 밤이 지나도록 아해는 자신을 구해준 수정발톱을 보지 못했어.

 자, 여기서 아해는 아주 아주 좋은 꾀를 낸단다. 아홉 번째 날에, 냇가로 나온 아해는 물짐승을 협박했단다. 아해다운 귀여운 협박이기도 했지. 나오지 않는다면 전 다시 물에 빠지겠어요! 하는, 그런 협박이었단다.

 아해가 나름 머리를 굴린 결과물이기도 했지. 지난 번에 자신을 구해준 것을 보아, 발톱의 주인은 상냥한 존재임에 틀림없었어. 게다가 양친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속에서 설핏 사람들을 보살펴주는 상냥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아해는 알고 있었지. 그렇다면 발톱의 주인이 자신이 빠져죽는 것을 그저 보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계산이었어.

 그럼에도 물짐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아해가 타박타박 걸어오는 소리에, 아해가 외치는 소리를 전부 듣고 있었음에도 그랬지. 설마 그러겠어- 하는 생각이었을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렇게 애타게 자신을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탓일 수도 있지. 하지만 아해는 결국, 해가 슬쩍 위치를 바꿀 때 까지 수정 발톱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볼을 부룽퉁히 부풀린채 냇가의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단다.

 아해가 냇가로 걸어들어오는 것을 느낀 물짐승은 기겁했지. 당연하지 않느냐, 몇 발자국 앞의 냇가의 수심 깊은 곳은 아해가 순식간에 휩쓸릴 수 있는 곳이었으니. 결국 물짐승이 졌단다. 아해가 한 발자국 더 내딛기 전에, 소용돌이로 말려들어가기 전에, 아해의 하의가 전부 물에 젖었을 무렵 아해는 노력의 결실을 맺었단다. 수정 발톱이 모습을 드러내서 아해를 살포시 물가로 밀쳤던 것이었지.

 발톱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똘똘한 아해는 제 조막만한 손으로 그 발톱을 꼭 잡았단다. 물짐승은 몹시 당황했지. 아까 밀친 것도 미안한데 아해가 자신의 발톱을 잡아오자 차마 힘을 써서 뺄 수 없었던 탓이었지. 결국 물짐승은 제 가장 작은 수정 발톱을 아해에게 잡힌 채로 안절부절 할 수 밖에 없었지. 그 사이 아해는 당돌하게 말을 꺼냈네.

 "있지, 나랑 친구할래?"

 모습조차 모르는 물짐승에게 할 말로는 꽤 특이하지 않느냐? 어이쿠, 웃는 모습을 보아하니 너도 특이하다 생각했나 보구나. 그 다음에 어찌 되었느냐고? 쩔쩔매던 물짐승은 결국 수락했지. 물론 그 사이에 굳어버린 발톱으로 상황을 파악한 아해가 재빨리 수락하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물속으로 빠질거라는 당돌한 협박을 한 점이 가장 크긴 했지. 대단한 아해이지 않느냐? 그래, 너만큼이나 대단한 아해였지. 결국 물짐승은 발톱을 아래위로 까닥여 동의를 표했단다. 저를 무서워하지 않는 아해에게 약간의 기대감을 품으면서 말이지. 

 그 까닥임에 아해는 세상을 얻은 듯 환히 웃었단다. 그 웃음이 보이지 않았을지언정 자신을 경이라 소개하는 행복함이 가득한 아해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던 물짐승은, 그날 조금 울었단다.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신과 친구했다는 사실만으로 저리도 행복해하는 아해의 존재에, 그것이 감사해서. 대답이 없는 자신이 무심하지도 않은지, 아해는 수정 발톱을 붙잡고 조잘조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지. 자신의 이름인 '경'은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할머니가 지어주셨다는 이야기부터 지금 마을에 제 또래의 친구들이 없어 심심하다는 이야기, 자신의 양친이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인지, 마을의 막내 취급 받는 것이 좋지만 가끔은 싫다는 이야기. 물짐승은 수면 아래에서 그 조잘거림을 전부 들었다네. 마을 모두의 이름과, 다들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역시 제 이름이 최고라고 자랑하는 아해의 얘기까지도. 그러다 아해는 물었다네, 네 이름은 무엇이냐고.

 "있지, 네 이름은 뭐야? 경이만큼 멋진 이름이야?"

 물짐승은 얼떨떨했다지. 왜냐하면, 지금까지 중 어느 누구도 제 이름을 물어본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지. 음? 물 밑에 사는 온갖 물고기들과 게들과 소라들은 어쩌고 아무도 없다고 하느냐고? 허허, 똘똘하구나. 하지만 물짐승은 그들이 다가와 이름을 물어볼 만한 존재가 아니었단다. 세상 모든 물의 근원이니, 물고기들도 게들도 소라들도 자신들의 위대한 어버이 되시는 분께 존함을 여쭐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아해는 그럼 어떻게 그게 가능했느냐고? 몰랐기 때문이란다.

 어렵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세상에는 알지 못하여 다가갈 수 있는 것들도 충분히 많단다. 그래, 그래. 이야기로 돌아오자꾸나. 어디까지 했지, 아해가 물짐승에게 이름을 묻는 부분까지 했던가? 그래. 이름이 없던 물짐승은, 그래서 당황했단다. 가르쳐줄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지.

 수정 발톱이 갈 곳을 잃고 여태껏 열심히 반응해주었던 것과 달리 허공에 가만히 멈추어 있자, 아해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단다. 작은 머리로 열심히 생각했던 아해는 답에 닿을 수 있었단다. 오늘 새로 생긴 친구에게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아해는 알게 된 것이지. 그 사실을 깨달은 아해는 조심스레 물었단다, 혹 이름이 없느냐고. 물짐승은 잠시 망설이다 수정 발톱을 위아래로 까닥였지. 단호하게 아해를 위협으로부터 밀쳐낸 것과는 달리, 풀죽은 수긍이었단다. 아해에게 가르쳐 줄 이름이 없어 속이 상한 물짐승을 눈치챈 아해는 오늘 사귄 친구가 삐져버리기 전에- 그럼, 안 삐졌겠지. 하지만 아가도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느냐? 꼭 뭐가 해야될 것 같은, 그런 때 말이다- 재빨리 선수를 쳤지.

 "그럼, 그럼 내가 지어줄께! 이름! 경이만큼 잘나고 멋진 이름으로, 경이만큼 사랑을 담아서!"

 저 어두운 바다에서 큰 몸집을 숨기고 있던 물짐승이 퍼득 머리를 들 만큼 힘있는 외침이었지.  힘있고, 뭐든 해줄 것만 같이 다정한, 그런 외침이 물짐승에게 닿았단다.

 물짐승은 그때 처음 알았단다, 세상에는 이렇게 자신을 위해줄 인간 역시 있다는 것을. 아해는 아직 아해였으니 한참 자랄 것이고, 자라면서 여타 인간들과 같이 자신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물짐승은 숙지하고 있었단다.

 숙지가 무슨 뜻이냐고? 아직 어리구나, 아가. 숙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아해가 자라면서 어른이 될 수록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걸어 준 것을 후회할 수도 있고, 자신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소리지. 아가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허허, 그래. 아가라면 그렇지 않겠지. 알고 있단다. 어쨌든, 그러한 현실을 직시한 물짐승은 그럼에도 조금 욕심을 내보기로 했단다.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아해의 외침에 천천히 수정 발톱을 위아래로 움직인 것이었지.

 그렇게 물짐승에게서 허락을 받은 아해는 뛸듯이 기뻐하며- 실제로도 뛰었단다. 그래, 아가가 지금 뛰는 만큼 방방 뛰었지- 짐승에게 작별인사와 내일 또 보자는 기약을 남기고, 마을로 달음박질 쳤단다. 내일 올때는 이름 후보를 잔뜩 뽑아서 가지고 올께! 하고 장담하고서 말이지. 아해가 저 멀리로 달음박질 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은 물짐승은 그제서야 제 발톱을 갈무리해 가져왔단다. 내일 아해가 오지 않더라도, 오늘 이만큼 행복했으니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지. 

 응? 물짐승이 너무 착해빠졌다고? 허, 어디서 그런 단어를 배워왔느냐, 아가?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네 입에서 나오는 모습이 영... 늙은 심장에 좋지는 않구나. 그래, 이야기를 이어볼까. 아가의 말대로 착해빠진 물짐승은 다음날 아해가 물가로 뛰어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제 귀를 의심했단다.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던 물짐승은 아해가 자꾸 그러면 나 물에 들어간다?! 라고 하는 외침을 듣고 화들짝 놀라 가장 작은 발톱을 수면 위로 올려보냈지. 아해는 어제만큼 밝은 목소리로 물짐승에게 말을 걸었어. 그 목소리에 두려움 한 점 없음을 알아챈 물짐승은 수면의 높이가 슬쩍 찰랑이며 올라갈 정도로 울었지. 기뻤기 때문에. 어제 왔던 아해가 어제와 같은 목소리와 같은 정감으로 찾아 왔다는 사실이 못내 기뻐서. 그래서 울었단다. 그래, 아가. 다행이지.

 아해는 씩씩하게 자기가 어제 양친과 마을 사람들을 전부 닦달해 가면서 알아온 이름이라고 여러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단다. 예쁜 꽃의 이름부터 산과 들을 달리는 동물들의 이름, 예전에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는 이름까지 아주 많은 이름들이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지. 하지만 어째서인가, 물짐승은 그 중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게 없냐는 아해의 시무룩한 물음에 그저 덩달아 시무룩해졌을 뿐이었지. 시무룩해진 아이가 우물쭈물, 그러면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고 내뱉은 한 단어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있지, 그럼... 단이는 어때? 단."

 음? 오냐, 단정하다 할 때의 그 단이란다. 하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지. 아해는 가만히 있는 물짐승의 발톱에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하고 시무룩해졌단다. 그 이름은 마을 사람도, 아해의 양친도 아닌 아해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거든.

 반면 물짐승은 시무룩해진 아해의 목소리를 듣고 퍼득 정신을 차렸단다. 아해가 들려준 이름이 여태껏 다른 이름들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 그래, 알겠느냐, 아가? 그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든 것이었단다. 다급하게 발톱을 휘적휘적 흔들어 시무룩한 아해의 시선을 돌린 물짐승은, 고개를 든 아이에게 발톱 하나를 가지고 필사적으로 그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표현하기 시작했단다.

 필사적인 휘적임에 아해는 설마설마 하면서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이름을 입에 올리겠지. 그 이름을 발음하자마자 격하게 위아래로- 걱정 마렴, 아가야. 아해는 다치치 않았단다.- 흔들리는 발톱에 아해는 얼굴이 환해졌단다. 자신이 지어온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 행복해서 이름을 생각한 경위를 조잘조잘 떠들었지. 사실은 다른 이름으로 하고 싶었는데 단이라고 하길 잘했다고, 아버지가 볏짚을 가지런히 쌓아올리는 것을 보고 '단정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단'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너무 좋아서 결정했는데 마음에 드느냐고 조잘조잘 얘기했지. 물짐승, 아니, 이제는 단이지. 단은 아해의 조잘거림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겨들었단다. 그만큼 자신을 생각했다는 반증인 것 같아 행복해하며 말이지.

 거기서 끝났냐면, 그렇지 않았단다. 아해는 단이에게 마을사람들과 제 양친이 그러한 이름을 생각해 낸 경위를 전부 말해주었단다. 윗집의 사냥꾼 아저씨는 산의 노루귀가 가장 좋아서 노루귀라는 이름을 추천했고, 옆집의 새색시는 자신의 정혼자가 선물로 준 머리장식이 어여뻐 아름이라는 이름을 추천했고, 앞집 아이는 둥그런 물건을 차며 노는 것이 제일 좋아서 이름을 둥글이라고 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다는 얘기를, 전부. 그 이야기들을 전부 들으면서 단이는 행복해했지. 아해가 제게 가져다준 다정함이었으니, 아해가 없었으면 알 수 없었던 자부심이었으니. 그래서 단은 물에 빠져 곤혹을 치르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단다. 자신에게 선물한 그 많은 이름들이 고마워서라도 물 속에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도록.

 그렇게 여러 달과 여러 해가 뜨고 지는 날들이 흘러가고, 점점 사람들이 물가에 다가오는걸 꺼리지 않게 될 때 즈음, 발걸음에서부터 신이 났다는걸 알린 아해가 냅다 단이에게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단다.

 "있지, 나 단이의 모습이 보고 싶어!"

 이름을 준 이후 경이와 단이는 전보다 더 가까워졌단다. 아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갔고, 어느 덧 제 양친의 어깨 즈음에 올 정도로 자랐을 무렵이었지.

 아해는 문득, 단의 모습을 보고 싶어했단다. 수정 같은 발톱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제 친구 역시 가지고 있을 테니 그것을 꼭 제 눈으로 보고 싶다는, 여즉 아해였던 경의 바램이었단다. 음? 그래, 그런 친우가 있더라면 누구든 그렇겠지. 이 늙은이도 한때는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단다. 지금? 지금은 별 생각 없구나, 우리 아가도 이 늙은이와 잘 놀아주지 않느냐.

 경이의 바람은 어느 의미 타당했지만, 실제로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을 가능성은 적었지. 인간들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경이가 너무 불쌍하다고? 그럼, 그래서 단이는 열심히 생각을 짜냈단다. 그러다 생각해 냈지! 먼 옛날, 제가 물 속으로 내려오기 전에 혹여 친우가 생긴다면 나눠주거라- 하고, 상제님이 주신 약이 있었다고.

 황급히 물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튀어나온 단이의 발톱 끝에는, 작은 주머니가 하나 매달려 있었단다.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약과, 그 약을 만드는 방법이 담긴 복주머니였지. 이제 막 글을 배운 경이는 약에 대한 설명을 더듬더듬 읽어내리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단다. 그럼 이제 보러갈 수 있는거네! 하고. 그러나 단이가 그 약의 존재에 대해 기억해 낸 것은 저녁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내일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단다. 주머니를 소중히 꼭 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이의 발소리가 익숙한 양친의 목소리와 만날 때 까지, 단이는 그 자리를 지켰지. 내일은 얼굴을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에 둘 모두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단다. 

 음? 이래놓고 또 못 만나는거냐고? 그런 악질적인 반전은 없단다, 아가. 애초에 주인공이 아해이지 않느냐? 아해가 꿈꾸는건 대부분 꿈이 아닐지도 모른단다. 게다가 아해에게 악질적인 일이라니, 천벌받을 소리를 하고 그러느냐. 큰 반전 없이 경이는 다음 날 약을 하나 먹고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단이를 만났단다. 정확히는 단이의 손을 보았지. 작은 개울에 단이가 얼굴을 내비추기에는 단이가 너무 컸으니까 말이다. 작은 발톱 하나, 큰 발톱 셋을 가진 손은 수정으로 만들어져 물 속으로 내려온 빛을 반사해 아름답게 빛났단다. 그 자태는 물 밖에서 보았을 때 보다 배는 신비로워, 경이는 눈을 빼앗기고 말았지.

 아니, 정말로 눈이 쑥 나와서 빼앗기진 않았단다. 아가, 대체 어디서 그런걸 봐 오는 게냐. 이 늙은이 심장이 벌렁벌렁하니 아파오는구나... 시야에 온통 단이의 손 하나만 들어왔다고 하는게 낫겠구나.

 흠흠, 어쨌든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소리였단다. 자신과 물 밖에서 놀아줄 때 햇빛에 반사되는 작은 발톱도 아름다웠지만, 물 속에서 조금씩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빛나는 손이 정말로 아름다웠지. 응? 그래. 손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손, 이라는건 지극히 경이의 입장에서의 묘사였으니까 말이다. 앞에 있다고 손이라는 법은 없고, 단이는 그 부분을 앞의 발톱들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지. 단이의 발톱들은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했지만 그것마저도 경이의 눈에는 아름다워서, 경이는 꽤 오랫동안 손만으로도 이런데 대체 단이는 얼마나 아름다우려고! 하는 극찬을 들었단다.

 어찌되었건 경이와 단이는 경이가 깨어있는 시간의 반절 이상은 물속에서 그들만의 시간을 보냈단다. 서로가 겪은 일들, 만나기 전에 보았던 일들을 이야기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지. 종종 단이가 물속이 익숙치 않을 경이를 걱정해 일찍 돌아가라고 부탁하는 날들이 그렇지 않은 날들보다 훨씬 많았지만, 어쨌든 둘은 좋은 친구로 오래 지냈단다. 얼마나 오래 지냈냐고?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경이의 집만큼 쌓일 동안 경이가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오래오래 지냈단다. 결혼한 상대는 경이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사람으로, 단이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어주던 사람이기도 했지. 둘의 결혼식은 단이가 잘 들을 수 있게끔 물가에서 이루어졌단다. 식의 마지막에 둘은 물속에서 숨쉴 수 있게 하는 약을 반씩 나누어먹고 단이를 만났지. 웃으며 인사하는 또 하나의 인간을 보며 단이는 경이가 자신에게 가져온 것이 너무 많아서 저 깊은 물속에서 조금 울었단다. 아니, 아가. 기뻐서 그랬단다.

 그리고는 단이에게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단다. 대화해주는 친구가 늘었고, 건져준 인간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들으면 화내주는 상대가 생겼지. 정말 무엇을 대가로도 바꾸지 않을 날들이라고 단이는 매일 물속에서 눈을 뜨고 생각했단다. 몇 년째 도움을 주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 것도 경이와의 만남이 이유라면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멍청하다니, 아가! 맞는 말이어도 그러면 안되지. 미련하다고 하자꾸나.

 하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지. 인간들이 점차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들을 멋대로 대하는 일이 늘어나자, 노한 상제는 그들을 전부 불러들이고 인간과의 연결을 끊으라고 명했단다. 그야 당연하지. 어느 어버이가 핍박받는 자식들을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어찌되었던, 이런 이유로 인해 모든 존재들이 땅 위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단다. 단이도 예외는 아니었지. 가장 늦게 올라가려 늦장부리던 단이를 찾아온 사자들은 단이의 상황에 난감해했단다. 이토록 깊게 특정한 인간과 관계를 맺은 이를 억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사자들이 전한 단이의 이야기를 들은 상제도 난감해했단다. 자고로 아이의 친구관계에 어버이의 개입은 적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게다가 상대는 인간이다 보니 함께 올라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머리를 싸맨 상제를 도와준 것은 두통의 당사자인 인간이었단다.

 "내 친구 누가 괴롭히는 꼴은 못 보겠으니까 데려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밑에서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 뭐라고 시비거는 것 보다는 쉬는게 더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연락수단은 주시는거죠?"

 단이에게서 자초지총을 전해들은 경이와 그 가족들이 상제의 사자에게 쪽지를 보냈거든. 좀 컸다고 어릴 적과 달리 정갈해진 글귀들을 읽고 상제는 웃었단다. 당돌한 인간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지. 상제는 결단을 내렸단다. 일단 단이를 데려와서, 재우기로. 제 아이도 오랫동안 자지 못할 잠을 자야 할테고, 한 아이 오가는 정도야 그리 큰 힘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큰 물 속에 단이가 오갈 통로만을 남겨놓고, 경이와 경이의 가족들이 들어왔을 때 알릴 종을 물 속 곳곳에 달아놓고 단이를 불렀단다. 경이는 이제 좀 쉬어! 하고 경쾌하게 잠시간의 이별을 맞아들였지.

 그리하여 물짐승은 단이라는 이름도, 이름을 지어준 친구도 얻고서 기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단다. 자기 전 나중에 봐요! 하고 손을 흔들어주던 경이의 아이들도, 또 뵙자고 웃어주는 경이의 배우자도, 잘 자라고 웃어주는 경이도 전부 하나하나 기억에 새겨놓고서. 나중에 또 경이가, 경이의 아이들이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그들이 들고 올 이야기를 고대하면서, 말이지.

 아이들은 약속대로 꾸준히 단이를 찾아왔단다. 아주 어릴 적 어버이의 손을 잡고, 커서 친구 혹은 인생의 동반자를 데리고, 또 다시 그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단이를 찾았단다. 그 사이 약의 이름도 지었지. 경이가 세상을 뜬 직후에 벌건 눈가로 단이를 찾아온 경이의 아이는 약의 이름을 '수수경단'이라 했다고 알려주었단다. 물짐승(水獸)이 경이를 만나 단이가 되었으니까, 그렇게 지었다고. 울먹거리다 결국 우는 아이의 앞에서 단이도 울었단다. 큰 물이 출렁이도록 울었지.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 단이는 경이도, 경이의 아이들도 언젠가 떠나가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을 잊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위안을 얻었단다. 자신은 오래오래 사니 떠나간 이들도 여즉 남아있는 이들도 전부 기억해줄 것이라고 잠들때마다 되뇌이며, 그렇게 시간이 또 흘렀단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지. 경이가 단이를 만날 때처럼 인간들이 그들을 돕는 존재에 대해 믿는 것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해 경이와 단이의 아이들은 점점 만나기 어려워졌단다. 사람들의 상상력이 다한 그 날, 단이의 아이가 와서 서글프게 경이에게 전했단다.

 "미안해. 앞으로는 이렇게 자주 오지 못할 것 같아..."

 물 속으로 사라져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는 그들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이익을 쫒는 눈동자도 사람들 속에서 보이기 시작한 탓이었단다.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빈도수가 점점 더 많아졌지.

 "하지만 단이를 잊진 않을께. 아주 오래 전에 경이로부터 시작된 우정이라지만, 우리에게도 소중해졌으니까. 걱정 마, 늦어도 올 수 있도록 방법을 남겨놓을테니까, 기다려줘."

 마음 같아서는 그저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실을 단이가 알게 된다면 자신이 경이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말벗들에게 폐가 되었다며 슬퍼할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단다. 가장 넓은 물의 바다에서 마지막으로 경이의 모습을 눈에 담은 아이들은 아쉬운 인사를 나누었지.

 그래서 경이의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단다.

 아이들에게 침대 머리맡에서, 어느 한가한 날에, 아이들의 궁금증이 유독 많은 날에, 많은 날들에 들려줄 수 있도록.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둘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노래해서 잊혀지지 않도록 했지. 그와 함께 그들은 항상 수수경단을 먹었단다. 경이의 아이가 이름붙인 둘의 인연의 흔적을. 만드는 방법은 커갈수록 알게 되는 어릴 적의 간식을 아이들이 오래도록 기억과 간직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지. 경이의 아이들이 언제까지 단이를 만나러 갔는지, 어디서 만나러 가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는 제대로 전해졌으니 말이다. 이 늙은이가 알 정도로, 오래오래, 말이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좋은 간식만한게 없단다. 일단 맛있고 말이지!

 자, 이제 수수경단을 먹으러 갈까? 허허, 이게 이야기 속에 나온 수수경단이냐고? 글쎄다, 아가. 다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지. 요 앞에 냇가가 있으니 이 늙은이와 함께 산책이라도 나가련?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