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심장과, 外 (2019.02.18)
이거 외전이라고 해도 됨?
*역시 노래를 참고했습니다
"너는,"
그 날의 사랑스러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둘이서 같이 하는 일상이 슬슬 익숙해지고, '우리'라는 표현이 점차 귀에 익을 무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지?"
무기질적인 얼굴이 창 밖을 직시하다 방향을 틀어 나를 향했다. 첫 만남 보다는 안에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게 된 새까만 흑요석이 고요히 반짝였다. 질책도, 힐난도 아닌 호기심만을 가득 담은 눈이 고요히 대답을 기다렸다. 검은자와 흰자가 구별되지 않는 시선이 안정감을 주어 피식, 웃음소리를 새어냈다. 작은 소리였건만, 용캐 감지해낸 난(難)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내게 물을 궁금증을 하나 더 얹어버린 듯 했다.
"이 질문이 너에게는 웃을 일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어째서?"
"네가 첫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라서 그렇지, 난(難)."
"첫인상?"
"그래. 인간들에게 첫인상이란 서로와 대면한 뒤 몇 초 내에 결정된다. 이건 알고 있지?"
"네가 지난번에 밀어준 서적에서 본 기억이 나는군. 그게 왜?"
"첫인상이라는 건 의외로 바뀌지 않는 법이라서 그렇지. 너는 그런 면에서 아주 의외야?"
말끝이 올라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난은 얌전히 있던 태세를 약간 전환하고는 언짢은 분위기를 몸에 둘렀다. 휴식하던 바닥에서 고개를 주욱 늘여서는 옆자리의 내 옆구리에 머리를 슬쩍 들이받고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모양새가 딱 그랬다.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지 마라, 순(訓)."
아무래도 여기서 말을 잘못 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으니, 과장스럽게 옆구리를 부여잡고 최대한 정성스럽게 말을 골랐다. 난은 인간과 유사한 사고를 했지만, 결코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질문으로 받아친건 아니야. 그냥, 자문자답 같은 느낌?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말이지."
"그래서, 내 첫인상은 어땠나."
"내가 처음 본 너는, 수동적이었어. 심각할 정도로."
"......"
"처음 보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심각했었지. 그 좁아터지고 아무것도 없는 유리벽에 둘러싸여서, 눈은 훵-해서는. 아주,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지. 아, 혹시 찌푸려진게 보였어?"
"당연하지."
"대단하네. 그 놈은 죽기 전까지도 눈치 못 채던데. 아무튼, 찌푸린 이유는 별 거 없어. 난 수동적인게 싫어서 그랬을 뿐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네 첫인상은 최악이었지!"
"그걸 그렇게 해맑게 내밷는 것도 재능이네."
말을 내뱉는 흑요석의 눈이 차게 식은 것 같았다. 뭔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을 보았거나 들었을 때 나오는 그런 표정이 눈만으로 뚜렷하게 표현되다니, 역시 사랑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실실 웃었다. 더욱 짜게 식은 눈에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표시하며 살살 머리를 쓰다듬으니, 생명이 부재한 것을 만지는 듯한 냉기가 피부를 통해 전해져 왔다. 이것 역시 난의 특이한 모순점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놀렸다.
"첫인상은 첫인상일 뿐이니까, 너무 그렇게 차갑게 보지는 말아줘. 응? 지금은 그 놈이 널 데리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조금이나마 감형해줄 의향이 있다고."
다행이도 기분이 풀렸는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한 번 토라지면 한동안 대화는 커녕 상대도 해주지 않기 때문에, 토라질 기세가 보인다 싶으면 빨리 해결해야 했다. 제 몸 안에서 반짝이는 광물들이 만들어지는 조건 만큼이나 까다로운 이였으니.
"그런 놈에게 감형은 사치다. 이상한 핑계대지 말지."
"네, 네. 이미 감형 없는 실형을 먹였으니 철회할 생각도 없지만! 어쨌든, 네 첫인상은 그랬어. 수동적인 장식품, 정도? 이 참에 물어볼래. 왜 그냥 장식품인 척 했어?"
"귀찮았으니까."
너스레로 해결된 토라짐이 내뱉은 결과에 잠시 굳었다. 귀찮아? 귀찮았다고? 내가 아는 그 귀찮음 맞나? 의문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는지 난은 한심하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항상 옆에 두고, 감상하고, 관상하는데다가 뭣만 하면 아름답다고 난리치는 놈이 나를 제 옆에서 떼어놓았을 것 같았나? 유리벽 안쪽에 있게 된 것도 몇 달 되지 않는다. 그전에 도둑이 나를 장식품쯤으로 알고 쳐들어 왔을 때가 있어, 잃는다는 두려움에 나를 거기 넣었을 뿐이지. 온갖 방범장치를 달고서."
"하기사, 집착이 어마어마해보이긴 했지."
"제대로 봤네. 나가려고 해도 바깥의 지리도 잘 모르는 상태였으니, 그냥 웅크리고 있었지. 딱 봐도 적이 많을 것 같아서."
"대단한 통찰력인걸?"
난의 머리를 조심히 토닥이며 칭찬을 건냈다. 말을 트기 시작했을 때 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지만, 난은 꽤 자기주장이 뚜렸했다. 상황을 보는 눈도 있었고, 통찰력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출신지도, 존재의 이름조차 모르는 수수께끼. 그러나 알면 알 수록 예전의 그 놈이 겉면만 보고 가치를 평가한 것이 아까울 정도로 유능했다. 제 행운에 웃음지으며, 난과 시야를 맞출 수 있도록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가끔은 네가 보는 세상이 궁금해."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슬쩍 틀어 세상에 더없을 가치를 가진 보석보다도 가치있는 이를 보았다. 너는 세상을 어찌 볼까. 그 보석이 박힌 눈으로 보는 세상은, 투박한 두뇌로 사고하는 세상은, 유리 심장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은 어떨까. 가치있는 이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답을 주었다.
"네가 평생가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네가 보는 세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듯이."
명답이었다.
속이 뒤틀릴만한 명답. 영문모를 이유로 속이 뒤틀려왔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 것 처럼, 평생 곁을 내줄 상대가 생길 일 없다고 다짐했던 그 날 처럼. 하나가 번복되었는데, 둘은 얼마나 쉬울까? 입꼬리를 끌어올려 짙은 미소를 지었다.
"것도 그렇네. 하지만 그러면 승부욕이 생기는걸, 난(難)? 이해하면 어떡할건데?"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네가 이해할 날이 올 것 같나?"
어이 없다는 듯, 고개를 획 틀어버린 난(難)의 관심을 어떻게든 끌어들이고 싶어졌다. 한 발짝 물러서서 방관하고, 두 발짝 물러서서 관조하는 입장을 어떻게던 틀어버리고 싶었다. 일처리와 취미를 병행하는 나를 따라나서서 흥미로운 눈으로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바꿔보고 싶었다.
"만약, 온다면? 내가 너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어쩔건데, 난?"
"그러니까, 헛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건만."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건조한 어조로 수수께끼는 난제를 풀어낼 수 없을 것이라 단정지었다. 그것이 기분을 더 저조하게 만들어,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려는 찰나 한숨이 들렸다.
"만약 이해한다면,"
하나가 결정된다면 직설적으로 말해버리는 성정과는 다르게 뜸을 들이는 모습에 찌푸리려던 인상이 펴졌다. 그래, 너는 항상 뜻밖의 결과를 도출해내곤 했고, 그것이 틀렸던 적은 없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너는 내 첫 집(first home)이 되겠지."
어느새 돌아본 새까만 진심이 예고 없이 폭탄을 떨궜다.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굳어 있는 나에게, 난이 툴툴거리며 책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들렸으나 그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 처럼 멍했다.
집, 집이라고 했다.
"...하여튼,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순?"
품 안에 가득 차오르는 서늘함을 힘껏 껴안았다. 예상하지 못한 듯, 조막만한 팔다리가 버둥거리고 보석들이 달그닥거리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저 그 서늘함에 얼굴을 묻었다.
"진심이지?"
"...그래."
"어떡하지... 난이 너무 사랑스러워..."
앓는 소리에 질색하며 발로 내 얼굴을 밀어내는 것 조차도 기꺼운 걸 보면, 단단히 홀렸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마 알고 있을,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문구를 입 속에서 찬찬히 굴려보았다.
있지, 난. 나는 내가 누군가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하는 일은 자기만족이고, 신임을 얻으나 그것은 잘 빠진 도구에 대한 신임일 뿐이고, 옆에 있을 것이라고 맹세한 사람들은 대부분 뒤를 치기 위해 쳐들어온 적이었으니까. 평생 그냥, 혼자서, 홀로, 옆을 내주지 않고, 벽 속에서 살아가리라고 생각했어. 너는 지금 나에게 빨리 나오라고 벽 한 켠을 무너트려 준 것과 같아. 알고 있어? 알고 있겠지.
알고 있겠지.
"너랑 만나서 다행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머저리 같지만서도."
꽉 찬 진심 뒤를 따르는 농지거리에 툴툴대며 얼굴을 부벼대자 질색하면서도 밀어내지는 않는 모습이 꿈에 그리던 것 같았다. 이제야 죽은 그 놈이 난에게 붙인 칭호가 올바른 것이었음을 어렴풋이 생각해본다. 입 밖으로 꺼내면, 너는 분명 질색하겠지만.
'나의 보물상자'라니. 그 놈이야 물건의 의미로 붙였겠지만 보물상자는 맞는 말이다. 겉이 화려하지만 열어보면 상자 안에는 유리와 투박한 덩어리가 있는 보물상자. 내용물을 버리고 상자를 취하는 것이 낫다고, 그 놈은 생각했겠지. 멍청하디 멍청한 생각을 했겠지.
피식피식 웃으며 난을 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혼자서 나뒹굴던 벽난로의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반짝임이 갈라내었다. 유리 심장을 가진 상대라니. 지칭이 잘못되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이 유리를 녹여서 다시 형태를 만들 날이 올 줄이야. 확실한 것은, 다시 만들어진 형태가 아주 소중하고 아름다운 상대의 모습을 본땃으리라는 것 뿐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