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mare
바스마르
Cyphers
바스마르
마르티나의 꿈
날조 有
마르티나가 바스티안의 정체를 알기 전
지붕을 뚫을 듯이 매섭게 몰아치는 폭우에 다급히 열려있던 창문을 닫으려고 할 때 문득 이 모든 게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투명한 벽이라도 세워져 있는 것처럼 조금의 빗방울도 들이치지 않는 게 너무나도 현실감 없었으니.
'꼭 네모난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 같네.'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실내. 어둠에 파묻힌 손을 창밖으로 내밀면 시리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차가운 비가 투박한 손바닥에 고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장 같은 빗물의 온도를 따라 체온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송장이 되어가는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아무튼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모든 감각이 거짓으로 된 꿈속이지만…… 뭐든 죽음과 관련된 건 찝찝하기 마련이니까. 물론 숨이 턱 막힐 만큼 답답하게 느껴지는 실내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뻗은 손을 쉽게 거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감기 걸려, 마르티나.'
저 멀리서 들려오는 그레타의 잔소리 하나에 겨우 창문을 닫을 수 있었다. 그럼 요란하던 빗소리가 싹둑 잘리기라도 한 듯이 사방이 고요해졌다. 기이한 정적이 흐르는 방안. 그 옆으로 소리 없이 번쩍이는 번개가 지나가면 짧은 순간 실내가 새하얗게 빛났고,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여긴 그의 방이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저 멀리서 철벅, 철벅, 물에 젖은 무언가의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두운 분위기를 따라서 물귀신이라도 나타나는 건 아닐까. 우스운 생각이 들었지만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그 소리가 한발, 한발 다가올 때마다 몸속 어딘가에서 불안함이 울컥 새어 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지만 기어이 문 앞에 멈춰 선 낯선 이는 방문을 열지 않고, 한참 동안 방안에 있는 ‘나’ 음침하게 염탐이라도 하려는 듯이 멈춰있어서. 그렇게 인기척을 죽인 채 숨 막히는 대치를 유지했다.
서로를 파악하기 위해 죽인 시간. 이대로라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이 상황이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그건 싫은데. 그러니까, 꿈은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하니까, 어쩌면 나도 모르고 있던 내 불안의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생각으로 크게 숨을 내뱉고 오래된 문고리를 잡아 벌컥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시야를 채운 검은 우비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을 가볍게 흔들어 무음의 인사를 건넸다.
"……바스티안?"
방의 주인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분명 조금 전까지 내가 느낀 건 좋지 않은 것들이었는데. 내가, 바스티안에게서 불안을 느끼나? 아니. 그럴 리가. 꿈은 꿈일 뿐이다. 그는 물방울이 튀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우비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놓고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정한 눈동자로 나를 살피던 그는 익숙하게 방구석에 놓인 소파에 늘어지듯이 앉아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왜 거기에 서 있던 거야? 이리 와서 앉아."
"그래."
어딜 다녀왔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남쪽의 농가에 다녀왔다며 줄줄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와서 밭이 엉망이 됐다던가,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서 한바탕 소동이 났다던가, 덕분에 올해 농사는 그대로 망한 것 같다던가. 그렇게 꿈이 아닌 현실에서 일어난 일처럼 세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더니, 별안간 무언가 생각난 듯이 크게 손뼉을 치고 시선을 맞춰왔다.
"아. 오늘 아주 재미있는 걸 듣고 왔어."
"그래? 무슨 얘기인데?"
"아주 먼 곳의 신화 얘기야."
영원한 안식에 빠졌음에도 뱃삯이 없어 죽음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망자에 대한 이야기. 죽음의 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입을 연 죄로 뱃삯을 잃은 망자에 대한 이야기. 그것들은 결국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누군가가 입을 벌려 뱃삯을 떨구길 바라는 추한 악귀가 된다는. 어두운 곳에서 듣기엔 제법 섬뜩한 것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그는 입꼬리를 죽 올려 웃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들을 필요 없는 얘기 아니야?"
"이런. 사랑스러운 마르티나.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는 거야."
"그만해. 하나도 재미없어."
"글쎄. 네게 필요한 지식이 될지 누가 알아?"
"바스티안 소브차크."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부른 이름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참을 웃던 그는 다정히,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불쾌함을 일으키는 손길로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기억해, 마르티나."
"……."
"내 진짜 이름은 바스티안, r̸̡̼̫̓!̶̖͓͆#̴̬̒̇̍͘͘ 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목의 한 가운데가 끈적한 무언가로 막힌 듯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질문을 쏟아내기 위해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동안 그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을 수 없는 짙푸른 눈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곧 흉진 손이 내 턱을 쥐어 소리 없는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뭘 하는 거냐고 뿌리치기도 전에 입안으로 무언가를 쏙 집어넣은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굳이 입 안에 있는 것을 뱉어서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입 안에 들어온 것은 주화 한 개가 분명했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표정을 지은 그의 눈은 날이 선 듯이 빛나고 있어서. 아, 그래.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로 인해 죽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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