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연성

기숙사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퇴고x

기숙사에 호랑이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기숙사 앞뜰에.

바구니를 든 쥰나가 빨래를 널기 위해 옆문으로 나왔을 때 호랑이는 늘어지게 누워 따뜻한 햇볕을 쬐며 꼬리를 살랑대고 있었다. 쥰나가 수건을 팡 털어냈다. 소리에 맞춰 꼬리가 바닥을 가볍게 쳤다. 쥰나는 또 수건을 꺼내 팡 털었다. 꼬리가 살랑거리고, 빨랫감 사이에 끼어있던 양말이 팡하는 소리와 함께 한 곳으로 날아갔다. 쥰나의 고개가 그 방향으로 돌아간다.

주황빛 털에 검은 줄무늬가 새겨진 두꺼운 밧줄이 흔들리고 있었다. 쥰나는 봄방학 동안 기숙사에 맡겨질 무대장치인가 싶어 다가갔다. 짐을 맡길 거라면 연락이라도 하고 갔어야지.

묘하게 사실적인 동물의 발이 보인다. 발바닥은 까맣고, 발가락은 두껍다. B반이 이렇게까지 수준이 높은 무대장치를 만들 수 있었던가? 큰 몸이며 눈에 보이는 질감은 마치 책에서나 봐왔던 호랑이 같다.

쥰나는 떨어진 양말을 줍고, 어딘가에 붙어있을 쪽지를 찾기 위해 무대장치의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자박대던 발걸음이 튀어나온 돌부리를 밟으며 살짝 삐끗했다.

“아.”

끝에 하얀 점이 찍힌 귀가 팔락대며 움직이고, 거대한 머리가 부드럽게 고개를 든다.

깨끗이 세탁한 하얀 양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떡하지...?’

사람을 10명도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거실은 호랑이 한 마리 때문에 꽉 들어찬 상태였다. 실내에 들어오기 전에 몸과 네 발을 모두 털어낸 그것은 소파에 엉덩이를 걸친 채 쥰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부엌 테이블 뒤에 숨은 쥰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핸드폰만을 부술 듯이 양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앞뜰에 누워있는 그것이 진짜 호랑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쥰나는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나왔던 곳을 향해 내달렸다. 다행히 문을 열어놓았던 터라 금방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호랑이가 그를 따라 실내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매너 좋게 발과 몸에 붙은 흙까지 털어가면서.

쥰나는 이럴 때 곁에 없는 나나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방학을 맞아 다른 친구들은 바로 어제 기숙사를 떠났다. 남은 것은 언제나처럼 쥰나와 나나 뿐이다. 나나는 어제 옆 침대에서 잠들었다.

“일어나니까 없었긴 했지만 나는 어디 잠깐 나간 줄 알았단 말이야….”

쥰나는 나나에게 세 번째 전화를 걸었다.

“왜 안 받아…!”

익숙한 벨소리가 밖에서 나긴 하는데 맹수의 시선을 피해 움직일 자신이 없다. 호랑이가 들어온 문도 닫지 못해 엉망으로 내팽개쳐진 빨랫감들이 보였다. 나나도 설마 호랑이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는 걸까? 혹은 이미 호랑이에게 당했다던가…. 좋지 않은 생각이 쥰나의 머리를 순식간에 잠식해나간다.

네 번째 전화를 끊으며 쥰나는 나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뜰로 나가는 옆문은 호랑이에게 막혀 있으니 남은 문은 현관뿐이다.

‘호랑이가 달리는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빠르게 달려서 문을 열고, 닫으면… 현관문의 너비가 호랑이가 못 나올 정도가 되던가?’

쥰나가 양말을 벗다 말고 계산에 잠겨있자 갑작스러운 침묵에 호랑이가 몸을 일으켜 쥰나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단단히 굳은살이 배긴 육중한 발이 바닥을 디디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으아아악-!”

공포에 사로잡힌 쥰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숨어있던 곳에서 튀어나올 때 바로 옆까지 호랑이가 다가와 있던 것 같다. 손잡이를 거칠게 밀어 문을 열고 거의 온몸을 써서 다시 닫았다.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의 양이 엄청나다. 탁 트인 거리가 보이자 쥰나는 공포가 아주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포식자 앞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뒤로하고, 쥰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바로 앞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나나…!”

나나의 핸드폰은 갈기갈기 찢긴 옷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쥰나는 허겁지겁 무릎을 꿇고 옷가지를 헤쳤다.

“나나가 입던 잠옷….”

하얀 나시와 하늘색의 바지, 노란색의 얇은 재킷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 자리는 아까 호랑이가 누워있던 자리였다. 쥰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떡해. 나나가….”

이럴 때는 어디로 연락해야 하지? 눈물을 그렁하게 매단 쥰나의 눈동자가 핸드폰 위를 하염없이 헤맸다. 119? 112? 야생동물구조대? 동물원? 어디, 어디로.

그때 둔중한 것이 잔디를 밟았다. 쥰나의 머릿속에 옆문을 열린 그대로 방치해 놓았다는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호랑이가 나온 것이다. 쥰나는 나나의 핸드폰과 찢어진 옷가지들을 품에 끌어안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원초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며 이가 딱딱 부딪혔다. 벽을 따라 느릿하게 걸어오는 거대한 맹수가 보인다.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워지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던 쥰나는 끝내 질끈 눈을 감았다. 몇 번 더 이어지던 발걸음이 이내 끊겼다. 눈앞에 지나가는 이것이 주마등이라는 걸까. 나나, 미안해. 지켜주지 못했어……….

머리에 거대한 이빨이 박힐 기미가 없자 쥰나는 실눈을 떠 위를 흘겨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던 눈꺼풀은 이내 활짝 열리며 이 상황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꼼짝없이 자신을 먹을 줄 알았던 호랑이가 ‘사고 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그 호랑이가… 나나, 라고?”

“응…. 미안해, 쥰나쨩. 깜짝 놀랐지.”

“깜짝 수준이 아니었어! 얼마나 놀랐는데! 이게 대체 무슨….”

새 잠옷을 입은 나나는 소파에 앉아 쥰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까 호랑이가 앉았던 자리와 정반대의 곳이다. 쥰나와 나나가 애용했던 그 자리는 거대한 무게에 눌려 푹 꺼져 있었다.

나나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끔 기분 좋으면 그렇게 돼…. 언젠가 쥰나쨩에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아까는 햇볕이 너무 좋아서….”

“내가 그렇게 벌벌 떨었는데도 몰랐단 말이야?”

“변한 줄도 몰랐었어! 미안해, 쥰나쨩.”

쥰나가 난생처음 동물의 ‘사고 쳤다’ 표정을 본 순간 호랑이는 쏜살같이 왔던 곳으로 도망쳤다. 그가 앞뜰에 널린 잔해를 전부 주워 기숙사 안으로 들어오자 채 털지 못한 흙이 계단 위까지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자 쥰나는 핸드폰에 119를 찍어 놓은 채 조심스레 2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들의 방 문틀에 붙은 주황빛 털을 떼어내고 있는 나나가 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나에게 더 화낼 기력도 없어진 쥰나는 한숨을 푹 쉬고 구급상자를 가져와 열었다.

“그만 사과하고 옷 걷어. 방에 급하게 들어가느라 옆구리 다 쓸렸을 거 아냐.”

“으, 응….”

쥰나는 연고가 발린 면봉을 발갛게 오른 피부에 가져다 대었다. 미안함에 훌쩍이던 나나가 따끔한 통각에 헛숨을 들이켰다.

“방에 들어갈 때는 사람으로 들어가지 그랬어.”

“그럴 생각도 못 했어.”

“뇌까지 호랑이야?”

쥰나의 농담에 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해줘야 해.”

“응.”

나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아 올렸던 상의를 다시 내렸다. 쓰라린 고통은 아직도 조금 남아있었다. 구급상자를 정리한 쥰나가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청소하자! 소파는 내일 수리해달라고 전화하고. 그리고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이든 편하게 있어도 돼.”

“…응! 쥰나쨩!”

나나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진다. 그 얼굴을 본 쥰나의 직감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경고했으나 그는 그것이 무슨 일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청소기의 손잡이만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나의 침대가 와지끈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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