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연성

여름날의 미티어

멸망해요

두개골 안에서 종이 울린다. 철 재질과는 다르게 높고 빠르게 반복되는 소리다. 알람을 끄려 눈을 뜨면 이미 핸드폰으로 향하는 다른 팔이 보인다. 아루루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있던 모양이다.

“웬일로 일찍 일어났어?”

미소라가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걸자 아루루는 방긋한 웃음을 지으며 미소라의 품 위로 쏟아지듯 몸을 덮쳐왔다. 여름 이불이 한 겹 끼워져 있음에도 맞닿는 체온이 진하다.

“데이트하는 날이니까!”

라면서 마주친 금빛 눈동자에서는 별빛이 튀는 것만 같다. “네, 네”, 라며 설렁설렁 대답해준 미소라는 팔을 옆으로 꺼내 적당한 무게로 짓눌러오는 아루루의 등을 몇 번 토닥였다. 일어나라는 뜻이었는데 눌러오는 무게가 점점 무거워진다.

“아루루. 안 일어날 거야?”

“미소라가 너무 좋아서 이대로 잠들어버릴 거 같아.”

“일어나는 게 좋을걸.”

“으응-.”

목만을 울려 대답하는 것이 당장 일어날 기미는 없어 보인다. 어쩐지 먼저 일어나 있더라니 어제 소모한 체력이 덜 찼음에도 무리한 모양이다. 그러나 오늘 일정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미소라는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치고 몸을 일으켰다. 미소라를 침대 삼아 한껏 늘어져 있던 아루루는 눈을 번쩍 떴다가 그대로 떠밀려 침대의 빈 곳으로 굴러떨어진다.

“어라, 미소라. 언제 옷 입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미소라를 보고 아루루가 눈을 끔벅였다. 옷이라 해봤자 미소라가 걸치고 있는 건 얇은 나시 하나뿐이다.

“아루루가 기절하듯이 잠들고 난 다음에. 나도 이거 하나만 걸쳤을 뿐이야.”

미소라가 암막 커튼을 걷어내자 햇빛보다도 더 밝은 빛이 아루루의 몸을 환하게 비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울긋불긋한 반점과 잇자국이 목 아래부터 시작해 몸 곳곳을 뒤덮고 있다. 들어오는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린 미소라는 간밤에 자신이 만들어놓은 정사의 흔적들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아….”

미소라의 반응에 아루루도 따라 고개를 숙여봤다가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진다. 격렬했던 밤의 기억이 막을 새도 없이 아루루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아랫배로 흘러 들어갔다. 묵직하게 고이기 시작하는 열감이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전에 아루루는 침대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진 잠옷을 주워들었다.

“머, 먼저 씻어도 돼?”

“어? 아, 응.”

멍해졌던 미소라가 정신을 차리고 길을 비켜주자 아루루는 서둘러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는 하얀 등에도 옅은 색의 반점들이 찍혀있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나자 미소라는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고는 냉수를 들이켰다. 플라스틱 병 뒤로 보이는 창밖 풍경은 평화로우면서도 혼란하다.

 

 

 

아루루의 몸에 있던 키스 마크는 밖으로 나올 때쯤에는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은 세상이 망해도 남아있으면 좋겠다며 미소라가 온 힘을 다해 찍어놓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반팔 티셔츠는 입을 수 있었네.”

“미안, 아루루….”

“아냐. 팔은 깨끗한걸. 그리고… 좋았으니까….”

고백하던 아루루는 볼을 긁적이다가 눈만을 굴려 미소라를 보았다. 맞잡은 손에 약간 물기가 배인 것 같다.

“좋았다니 다행이네.”

미소라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몸을 섞은 게 수십 번이지만 둘은 정사 뒤를 떠올리는 것이 아직도 부끄러웠다. 눈을 감으면 크게 부풀었다 내려가는 흉곽이나 번들거리는 열기, 흐트러진 목소리가 또렷히 떠오르고, 어제는 특히 더 격렬하게-.

“도착했어, 미소라. 미소라…?”

“아, 벌써?”

야한 상념에 잠겨있던 미소라를 끌고 아루루가 도착한 곳은 양식 전문점이었다. 내부를 앤틱한 분위기로 꾸민 이 식당은 생긴 날부터 꾸준히 인기가 많아 미소라가 번번히 방문에 실패했던 곳이었다. 오늘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니 둘이 한 번 가보자고 했었는데 다행히 몇 자리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뷰가 좋은 창가 자리가 비어있기에 그 곳에 앉기로 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사이로 조용한 음악이 부드럽게 흘렀다. 거리를 가득 메웠었던 자동차들과 종교인, 그 외 이상한 사람들은 거의 사라져 마치 일주일 전의 여름날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상황임을, 이것이 마지막 풍경임을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신을 믿지 않아 종말이 왔다고, 목이 터지도록 외치는 사람이 팻말을 흔들며 유리창 밖을 지나갔다.

“아직도 실감이 안 가네.”

돈가스 덮밥을 두 그릇째 비운 미소라가 사람이 지나간 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햇볕보다도 뜨거운 열에 데워진 아스팔트 위에서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흔들리는 중이다. 먼저 식사를 끝내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아루루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도 꿈같아.”

거대한 운석이 곧장 낙하하고 있다는 발표가 있은 지도 일주일. 그건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몇 년 주기로 꾸준히 존재해온, 지구 멸망에 관한 음모나 유명한 예언가의 예언조차 오늘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사람들은 재앙을 부정하며 일상을 영위하다가, 회피하며 도망치고, 분노하며 범죄행위를 일삼았다.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 커피의 얼음이 컵에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결국, 사람들은 하늘에 뜬 태양보다 거대해진 운석 앞에 드디어 체념했다. 그 결과가 이렇게 계속 운영되는 가게들과 조용해진 거리이다. 카운트다운까지 1시간 30분 정도가 남았다는 라디오 방송에 미소라가 몸을 일으키며 아루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극단들은 끝을 불태우려는 듯이 전보다도 더 격렬하고 화려하게 무대를 피워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무대를 세우고, 예산에 상관없이 온갖 것들을 설치했다. 세상의 마지막. 그들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완벽하고 환상적인 그들만의 무대를 앞다투어 세워댔다. 지금이 오히려 연극의 황금기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활발한 순간이었다.

미소라와 아루루는 그 중에서도 1년 전에 세워진 한 소극장을 골라 들어갔다. 이 곳이 마지막 일정을 보낼 장소. 다양한 극단이 자유롭게 설 수 있는 그 극장은 마치 프론티어 학교를 보는 듯해서 자주 관람하던 곳이었다.

“여기는 끝까지 사람이 없구나.”

텅 빈 관객석을 둘러보던 아루루와 미소라는 늘 앉던 좌석에 앉아 떨어졌던 서로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가 시작된다.

 

 

 

연극이 끝나고 나온 밖은 이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카운트다운까지 약 10분 남짓. 어제 심혈을 기울여 세웠던 데이트는 이로써 완벽하게 끝이 났다. 아루루가 입을 열었다.

“연극 즐거웠지! 오즈의 마법사는 언제 봐도 재밌다니까?”

“응. 여기서 마지막으로 해주는 연극이 오즈의 마법사라 좋았어.”

“그렇지! 끝날 때쯤에는 다들 엄청나게 열연해서 나까지 땀이 뻘뻘 흘렀지 뭐야.”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미소라는 구태여 말을 얹지 않았다. 지금은 이 시간을 그저 즐겁게 보내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런데도 절로 눈썹이 아래로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회와 아쉬움, 두려움,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마음, 함께 밤을 새워보는 것도 좋았을텐데, 하는 감정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서.

“미소라.”

아루루의 다정한 목소리에 내려간 시선을 다시 올린 미소라가 금빛 눈을 마주했다. 그 안에는 아침에 보았던 별과 함께 혜성이 담겨있다. 언제 보아도 올곧고 따스하다. 제 눈동자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지금에서야 몰아치는 후회가 담겨있을까. 미소라는 이제야 그것이 궁금해진다.

아루루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미소라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닿은 손의 열기는 공기를 달구는 저것 때문일까, 아니면 북받치는 감정 때문일까. 끝까지 잃지 않는 그 미소를 따라 미소라도 구겨졌었던 표정을 편다. 잡은 손이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깍지로 얽혀들었다. 나도 너와 함께라서 다행이라는 대답에 아루루가 더 환하게 미소짓는다.

“다음에도 나와 함께 해줄래?”

미소라는 또다시 고백한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끝난 다음까지도 우리는 함께였으면 좋겠다고. 도로시와 토토같이, 캡틴 트윈즈같이, 앨리스와 흰 토끼같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섰던 그 모든 무대같이. 우리는 가족이니까.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루루의 머리에서 별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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