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연성

후타바에게 감사를.

   과도한 연습량에 파묻혔던 나의 어린 시절, 함께 해주었던 이스루기 후타바에게 감사를ㅡ.

   명가 당주의 후계자는 기억이 시작되는 나이부터 제 인생이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 인사를 제대로 못한다며 맞은 기억, 춤을 추다 부채를 떨어뜨려 쏟아지는 한숨을 받은 기억, 평가의 눈빛, 텅 비어있는 칭찬, 필사적으로 외워야만 했던 수많은 이름들. 그 모든 것들이 일평생 하나야기 카오루코와 함께 했다.

   오늘은 당주님에게 혼나고, 어제는 서예 선생님에게 혼났다. 내일은 무용 선생님께 무슨 말을 들을까. 빈 방에서 홀로 씩씩대던 카오루코는 울음을 억누르며 그나마 덜 혼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발을 하나 앞으로 내딛고 부채를 팡, 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괴롭고 쓸쓸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친구가 생겼다. 이스루기 후타바. 이스루기 가문과 한 집에서 함께 지냈음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른 곳에서 지냈었어."

   후타바는 금방 사실을 말해주었다. 알고보니 이스루기 가문의 어린 아이들은 정해진 교육 장소에서 시간을 세고 적절한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야기 가문으로 온다는 모양이었다. 뭐, 그런건 이 하나야기 카오루코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어요. 그에겐 제 마음을 함께 나눠줄 친구가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그 이후로 후타바와 카오루코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카오루코는 아직 누군가와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아 홀로 놀러다녔지만 그때마다 후타바가 어떻게 알고 찾아와주었다. 둘은 가까워졌다. 눈을 뜨고 다시 잠에 들때까지 붙어다녔다. 카오루코만이 아는 장소를 소개해주고, 후타바만이 아는 막과자집을 소개해주는 그런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졌다.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카오루코는 천성적으로 장난기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 넓은 집 안에서 말도 없이 숨바꼭질을 시작하거나 갑자기 가위바위보를 해 승패에 관계 없이 후타바의 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가끔은 쌩뚱맞은 질문으로 후타바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오늘도 그럴 요량으로 말을 올렸다.

   "후타바항이 우는 걸 보고 싶어요."

   자신도 보여준 적이 없으면서 대뜸 요구를 해오기에 후타바는 예상대로 크게 당황해 볼을 긁적이다 뒷머리를 쓸었다.

   "나, 난 안 울거든."

   갑작스레 시작된 대화는 그렇게 뚝 끊겨버렸다. 그 이후로 후타바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다.

   천화류를 이어야하는 후계자는 성인이 감당하기도 버거운 연습량을 소화해내야만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면 곧장 체력 단련에 달려들어 이어서는 우아하게 걷는 연습을, 그 다음엔 고상하게 말하는 법을, 점심을 먹고 나면 먹 찍은 붓으로 글을 쓰고 온갖 춤을 다 춰야만 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하나야기 카오루코는 구석의 빈 방에 들어가 뻗어버렸다. 전이라면 홀로 보내야할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후타바가 함께 했다. 카오루코와는 다른 훈련을 한 후타바는 샤워를 하고 난 후 그 방에 찾아가 카오루코의 머리를 들어 무릎에 올려주었다. 그러면 카오루코는 왁왁 소리를 지르며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다. 울지는 않았다. 대신 울어줄 사람이 있었으니까. 후타바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가끔 털며 말없이 들어주곤 종종 눈물을 흘렸다. 홀로 억누르던 괴로움을 후타바가 전부 가져가버린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생긴, 일방적인 부작용이었다.

   후타바도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 종종 장지문 사이를 슬쩍 들여다보면 무릎을 꿇은 채 호통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카오루코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저녁마다 그를 힘들게 했다. 나와 동갑인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이. 그럼에도 울지 않는 것이. 그리고 그 부탁이.

   그렇게 후타바는 카오루코의 눈물을 고스란히 받아 제 안에 축적했다. 카오루코가 무릎을 꿇거나 손등을 맞을 때마다 막대를 휘두르는 중에도 눈믈이 났다. 그들만의 방 안에선 제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카오루코를 내려다보며 눈 앞이 흐려졌다. 카오루코는 그럴 때마다 왜 우냐며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줬는데 붉게 부은 손등이 보였다하면 후타바는 더 울었다. 카오루코의 서글픔을 쏟아내었다. 그럴 때마다 카오루코는 왠지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후타바는 타인 대신 울어주느라 자신은 돌아보지 않았다. 어느덧 후타바의 안에는 두 개의 눈물 탱크가 생겨 카오루코의 것은 매일 비워내고 자신의 것은 넘쳐 흐를 때가 되어서야 비워내었다. 아주 가끔, 카오루코도 찾지 못하는 구석의 방에서 소리조차 내지 않고 한참을 조용히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후타바는 두 사람의 슬픔을 안고 있었다.

   이 부작용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유지되었다. 카오루코의 내면이 단단해졌기에 고쳐야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자신의 것을 쌓아뒀다 비우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아서 아주 가끔 후타바는 대욕탕을 홀로 쓸 때에 오랫동안 잠수를 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당사자들을 제외한 아무도 이 관계를 몰랐다. 드러나게 된 것은 어느 밤에 진행된 99기 동창회 때였다. 며칠 전 카오루코는 오랫동안 준비했던 배역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후타바는 액션 영화의 조연으로 캐스팅되는 애경사가 있었다. 그것이 술을 들이키며 모두에게 전해지게 됐는데 카오루코가 “날 떨어뜨리다니 그 연극은 망할 거여요!” 라고 외치는 그 순간에 후타바의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후타바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고 옆에 앉은 마히루가 티슈를 건네왔다. 카오루코는 그를 달랠 생각도 않고 맥주만을 연거푸 들이켰다. 카렌이 무슨 일이냐며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가 되어서야 카오루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타바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카오루코는 한숨을 폭폭 내쉬고 후타바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카오루코는 저것이 자신의 슬픔인 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이 없을 때마다 가끔 한참을 이렇게 운다는 것도 알았다.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이 편리함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카오루코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만 울어요."

   "네가 괴로워하지 않으면 돼."

   "그러게 왜 그런 걸 받아가가지고."

   "네가 우는 걸 보고 싶다고 했잖아."

   타의로 나오는 것이라 후타바는 평온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코를 훌쩍이지도 않았다. 남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인형 같았다. 둘은 직감적으로 이 관계가 조만간 끊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만 타지로 여행을 가 있으세요. 아니다. 난 아직 백수니 내가 가 있을게요."

   카오루코가 후타바의 얼굴과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눈물은 언제 났냐는 듯 붉어진 눈가만 남긴 채로 사라져 있었다. 후타바의 핸드폰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괜찮냐고 묻는 클로딘의 문자였다. 후타바는 카오루코의 손길을 받으며 답장을 전송했다.

   [괜찮아! 오늘은 우리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보자!]

   자신의 맘을 쏙 담은 활자 뭉치가 화면에 박히는 것이 만족스러워 카오루코는 입가에 미소를 피워냈다. 그 전에 주고받은 문자들도 같이 보이는 것은 이제 성인이니 무시하기로 했고.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밤산책이 술기운을 깨웠다. 카오루코는 아까 끊겼던 대화를 이었다.

   "아까 말했던 여행이요."

   "응."

   "우리는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싸늘한 밤공기에 절로 코가 흘렀다. 두 사람이 훌쩍이는 소리가 조용한 주택가에서 개구리처럼 울었다.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우리는 이제 사소한 행동까지 비슷해졌다. 하품도 동시에 했고, 배꼽시계도 같이 울렸으며, 잠드는 시간도 같았다. 다른 것은 일어나는 시간과, 카오루코가 후타바에게 넘겨버린 눈물 탱크 뿐이었다.

   밤거리를 걷다 문득 멈춘 후타바가 훌쩍이며 또 다시 울었다. 떨어지는 게 슬퍼 찰랑이던 탱크가 넘쳐버린 듯 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것들이 고개를 숙이자 바닥으로 추락해 내렸다. 카오루코는, 옷자락의 소매를 당겨 수습하려는 후타바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내 걸 전부 맡겨버려서 미안해요."

   붉어진 후타바의 귓가에 카오루코가 중얼거리며 달래듯 나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철없던 시절에 한 소리를 그대로 들어줄 줄은 몰랐다, 적당히 갖고 있다 줘버리지 왜 지금까지 끌어안고 있냐, 다 큰 사람이 이렇게 울어서야 쓰냐. 그 때마다 소리내어 울지 않는 후타바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며 이따금 숨을 히끅였다. 이렇게 눈물이 많을 줄은 몰랐다는 말에는 카오루코를 닮은 거라며 헤헤 웃기도 했다. 둘은 가로등이 비추는 노란 원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서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울음을 멈춘 후타바가 바닥을 드러낸 탱크의 무게에 가벼움을 느끼며 들이쉬었던 숨을 후, 내쉬며 카오루코의 품에서 떨어졌다. 물러나다 코트에 남은 둥그런 흔적들에 머쓱해하니 카오루코가, 옷에 온통 물자국이잖아요! 하며 장난스런 핀잔을 주며 웃었다.

   "장소나 정해줘요. 난 잘 모르니까."

   후타바는 카오루코가 내밀어온 손을 살며시 맞잡으며 코 믿을 검지로 슥 쓸었다. 조금 싸늘한 공기가 서로의 체온 앞에 물러났다. 후타바가 말했다.

   "언제 돌아올 거야?"

   "글쎄요, 일단 최소 일주일 생각중이어요."

   "너, 내가 없어도 혼자 잘 살 수 있어?"

   "그러려고 가는 거잖아요?"

   카오루코는 발끝을 통통 튀기는 걸음으로 바닥을 디뎠다. 맞잡은 손이 풀어졌다가 얽히길 반복했다. 어느새 두 사람이 사는 집이 보였다.

   "에어컨도, 난방도 빵빵 터지는 호텔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말아요. 조식도 고급스럽게 나오는 곳에 있을 거여요."

   "거기까지 가는 건?"

   "비행기 타고, 택시 타고 알아서 가겠죠? 이번엔 후타바항에게 택시비 외상도 안 할거라구요. 그러니까 후타바항은 영화 준비나 잘 하면서 기다려요. 나 없는 동안 밥 굶지 말구요."

   "내가 너냐."

   웃는 사이 둘은 집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면 함께 뜨끈한 물에 몸을 적시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엔 서로의 머리를 말려줘야지. 그 다음엔 침대에 누워 카오루코가 갈만한 여행지와 숙소를 고민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다녀왔습니다, 부터 할까요?"

   카오루코가 집 안으로 얼른 들어가 반 바퀴 몸을 돌려 후타바를 마주 보고 양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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