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룬드(@Meh29920193)님 조각 글

게일파이오스

*백업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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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지막으로 속삭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필멸자의 감각이 불완전한 탓이다. 약간 차갑지만 망자의 신치고는 따뜻한 손이 다가와 게일의 입과 코를 덮어버렸을 때 신의 의지가 확실해졌다. 게일이 반사적으로 손등을 붙잡아 떼어내려 했지만 파이오스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신의 불간섭 원칙을 내다 버리려고? 파이오스, 어디까지 떨어질 거지?'

게일이 상대를 도발하려고 입밖으로 소리를 내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입모양으로 그의 의지를 전달할수도 없었다. 파이오스의 두 가지 빛깔 눈동자가 죽음만큼 무거운 애정을 품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게일을 품으려고 닥쳐오는 한밤의 어둠 같았다. 떨어진 게일을 따라 내려오는 신이라.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지만, 용납할 수는 없다. 필멸자로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추락한 신과 함께 승천하겠느냐는 제안으로 게일은 많은 추종자를 모았다. 한 번 떨어진 신이 다시 올라가는 기적이 성공할 경우 다시 태어남을 겪은 신은 완전히 같지 않았다. 야망의 신은 조금은 다른 속성을 갖게 될 것이다. 이미 선례로 미스트라부터가 다시 태어나기를 거듭하며 이름과 인격마저 변하지 않았던가. 게일은 그 전망이 마음에 들었다. 과거의 자신과 조금 더 멀어지는 것이다.

'이런 말을 파이오스에게 전달하면 설득을 시도해볼 수 있을 텐데.'

파이오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게다가 의식이 흐려지면서 생각이란걸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행동으로 보여줘야겠지.'

게일이 다짐했다.

'곧 망자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되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야.'

 

불의 꽃이 가득 피어있는 길 한복판에서 게일이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무거웠다. 죽음의 피로와 뒤섞인, 파이오스가 내리누른 애정의 무게가 게일의 영혼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나는..."

게일이 각오를 빠르게 다졌다.

"파이오스, 네가 필요 없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말이었다. 불의 꽃들이 떨면서 그를 지켜봤다.

"필멸자로서 죽음을 맞이한 날 네 영역에 잡아둘 생각이겠지. 아니, 나는 환생의 길을 갈 거야. 지켜보라고."

그리고 게일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옆을 스치는 영혼들은 가볍고 경쾌한 걸음으로 주홍빛 불의 꽃들이 밝히고 있는 길을 올랐다. 그러나 게일은 한 걸음을 딛는데도 있는 힘을 다해야 했다. 환생으로 향하는 길이 점점 경사지는 것을 게일은 알아차렸다. 언덕 위를 힘겹게 등반하다시피 하던 게일은 결국 두 손까지 써서 불의 벽을 기어올랐다. 모순적인 의지가 게일의 영혼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의지를 발휘하면 버틸 수 있었다...

'한 가지만 생각해.'

땀이 비오듯 흘렀다. 그에게 이제 불의 꽃들은 주변을 너무 덥게 만드는 성가신 존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게일은 낑낑거리며 꾸준히 길을 나아갔다. 이대로 가면 분명히 환생의 문턱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파이오스가 망자의 영역을 완전히 뒤바꿔버리지 않는다면 게일의 환생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또다른 가능성이 게일의 지도 위에 떠올랐다. 만약 파이오스가 그의 신성을 조금이라도 포기한다면...

 

"자네에겐 내가 필요해."

파이오스가 말했다. 어느새 손이 떨어져 게일의 입과 코가 자유롭게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온몸이 뜨겁고 땀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게 느껴졌다. 그들의 다리가 무겁게 얽혀 있었다.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파이오스의 두 눈을 올려다보던 게일이 이윽고 손을 뻗어 굽은 손가락으로 파이오스의 얼굴을 조금 쓸다가 내렸다. 문득 파이오스에 대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애정이 느껴졌는데, 열병에 걸린 듯한 상태가 빚어낸 착각인지도 몰랐다.

"네가 내게 필요하다라...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게일이 물었다. 그리고 신에게 믿음을 운운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뭘 하면 되겠나?" 파이오스가 물었다.

"신이 필멸자를 위해 하는 일이지. 가장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줘."

"늘 지독하군. 자네는."

"내가 신의 힘을 되찾도록 도와줘."

갈 수밖에 없는 위험한 길을 게일은 제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연인으로서인지, 추락한 야망의 신으로서인지 파이오스는 구분할 수 없었다.

파이오스의 그늘 아래 머무르겠다는 제안. 게일을 머무르게 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도록 만든다면, 게일이 죽은 다음에도 게일의 미련을 영영 망자의 영역에 잡아둘수 있을 만큼 무겁게 키울 수만 있다면... 그러지 않더라도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점만으로 가치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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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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